인간(호모사피엔스)은 약 20만년 전에 출현했습니다. 삶의 방식은 채집 생활이었는데 1만년 전에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인간은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을 재배하는 데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채집 생활에서 농경사회가 되었지만, 농경 생활로 인해 인간은 더 폭력적으로 변모되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수렵 채집 생활은 강력한 경쟁자가 생기면 이동하면 되었지만, 농촌 마을은 습격을 받게 되면 모든것을 다 빼앗깁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식량을 지켜내야했기 때문에 더 폭력적으로 된 겁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를 '폭력의 역사', '전쟁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못난 세상을 돌보고 있는 인간들에게 예수님은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요한20,20)라고 하시며 두렵고 무서워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총과 칼이 아니라 상처 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에 난 못 자국을 보여주시면서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상처 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평화를 빌어 주셨는지 깊이 묵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비록 칼에 찔리고 못에 박혀 죽어갔지만, 평화는 무기와 힘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주님을 받아들이는 그 자세'로 이룩될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양손을 내밀어 못으로 구멍난 손바닥 안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창으로 구멍 난 옆구리 안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심오한 메시지를 주시려는 예수님의 뜻을 가장 잘 알아차린 사도가 토마스입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예수님 맞습니다. 예수님 옳은 말씀입니다.'라는 뜻으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9) 하면서 부활한 예수님의 뜻에 부합한 신앙고백을 사도들 중에 처음으로 하게 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때 우리가 원하는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늘 주님 사랑 안에서 주님의 말씀과 함께 살아갈 때 평화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화, 결코 이상이 아닙니다. 실제로 얻고 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 변하고, 믿음이 사라지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욕심부리고, 힘의 논리로만 살아가려고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스스로 만든 오해의 늪에 빠져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신앙인들만이라도 예수님의 평화를 찾고, 누리고, 유지하고 나아가 전하기 위한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또한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을 매일 외쳐야 하겠습니다. 각자 마음속에 액자 하나씩 만들어 매일 한 번씩 외치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하망동 본당 주임
김시영 베드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