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7월 31일 금요일
[(백)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에스파냐 북부 바스크 지방의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느끼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직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이 그를 시성하셨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유다의 온 백성에게, 주님께서 세우신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도성이 폐허가 되리라고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6,1-9
1 유다 임금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킴이 다스리기 시작할 무렵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내리셨다.
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집 뜰에 서서,
주님의 집에 예배하러 오는 유다의 모든 성읍 주민들에게,
내가 너더러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한 모든 말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여라.
3 그들이 그 말을 듣고서 저마다 제 악한 길에서 돌아설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도 그들의 악행 때문에 그들에게 내리려는 재앙을 거두겠다.
4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내가 너희 앞에 세워 둔 내 법대로 걷지 않는다면,
5 또 내가 너희에게 잇달아 보낸 나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 사실 너희는 듣지 않았다. ─
6 나는 이 집을 실로처럼 만들어 버리고,
이 도성을 세상의 모든 민족들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게 하겠다.′’”
7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은 주님의 집에서
예레미야가 이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8 그리고 예레미야가 주님께서 온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모두 마쳤을 때,
사제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이 그를 붙잡아 말하였다.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9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집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폐허가 되리라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집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몰려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0,31―11,1)와 복음(루카 14,25-33)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임철규 교수는 『눈의 역사 눈의 미학』에서 눈의 중요성만큼이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요소로 ‘눈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고 할 때, 그것은 항상 이 ‘안다’는 부분에 속하지 않는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배제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보고 알게 된 것을 전부로 여기며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힐 때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그분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 관계나 과거를 속속들이 기억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이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자신들이 눈으로 본 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일 뿐 도저히 알 수 없는 예수님의 신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태 13,57). 그 결과 그들은 기적을 누리지 못합니다. ‘앎’이라는 견고한 벽이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려 은총의 통로를 막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때때로 눈을 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경험적 지식이 주님의 은총을 가로막지 않도록 겸손히 눈을 감고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백재욱 스테파노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반지의 제왕’은 세 가지 큰 흐름으로 전개됩니다. ‘절대 반지’, ‘두 개의 탑’, ‘왕의 귀환’입니다. 절대 반지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욕망과 집착을 보여 줍니다. 두 개의 탑은 세상 안에 서로 다른 두 길, 두 깃발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왕의 귀환은 참된 왕이신 분께서 돌아오시고, 무너진 질서가 회복되는 희망을 보여 줍니다. 이 작품을 반드시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직접 연결할 수는 없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놀랍도록 깊은 울림이 있습니다. ‘영신수련’의 중심에는 ‘원리와 기초’, ‘두 개의 깃발’, ‘세 가지 유형의 사람’, ‘겸손의 세 단계’가 있습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영화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영적 싸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먼저 ‘절대 반지’는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섬기며, 그로써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한에서 사용해야 하고, 방해가 된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건강보다 병을,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명예보다 모욕을, 장수보다 단명을 무조건 피하거나 바라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더 도움이 되는 것을 선택하라고 가르칩니다. 절대 반지는 힘과 권력과 성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는 순간 사람은 자유를 잃고, 마음은 어두워집니다. 우리 삶에도 절대 반지가 있습니다. 돈, 명예, 권력, 인정, 자존심, 원망, 분노, 집착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한다면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나를 지배한다면 우상이 됩니다.
둘째, ‘두 개의 탑’은 이냐시오 성인이 말한 ‘두 개의 깃발’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악의 깃발입니다. 악의 깃발은 먼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그다음에는 헛된 명예로 이끌고, 마침내 교만에 빠지게 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깃발은 가난과 모욕과 겸손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것은 비참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평가에 묶이지 않는 자유,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믿음, 낮은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도 이 두 깃발 앞에 섭니다. 어떤 이는 반지를 통해 권력을 얻으려 하고, 어떤 이는 반지를 없애기 위해 자기 길을 걷습니다. 우리도 매일 두 깃발 앞에 섭니다. 편한 길과 옳은 길, 이익의 길과 사랑의 길, 나를 높이는 길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 앞에서 선택합니다.
셋째, ‘영신수련’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사람은 하느님께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습니다. 둘째 사람은 하느님께 가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가려고 합니다. 셋째 사람은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 길을 선택합니다. 영화 속에서도 반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설이는 사람이 있고, 반지를 이용해서 선을 이루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길은 반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지를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느님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도 나의 뜻, 나의 방식, 나의 자존심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냐시오 성인은 묻습니다. “나는 정말 하느님의 뜻을 원하는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내 뜻을 들어주시기를 원하는가?”
넷째, ‘왕의 귀환’은 겸손의 세 단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 겸손은 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겸손은 부유함과 가난함, 건강과 병, 명예와 모욕 사이에서 마음의 자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은 그리스도를 더 닮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하고 낮아지고 모욕받는 길까지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왕의 귀환은 힘으로 군림하는 왕의 귀환이 아니라, 고난을 지나 생명을 회복하는 왕의 귀환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참된 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방식으로 왕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낮아지셨고, 섬기셨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의 왕권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이고, 그분의 승리는 폭력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그분의 영광은 부활입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 마음 안의 절대 반지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느님보다 더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깃발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에게 거창한 신비를 말하기 전에 아주 분명한 식별을 가르칩니다.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되는가? 나를 더 자유롭게 하는가? 나를 더 겸손하게 하는가? 나를 더 사랑하게 하는가?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면, 우리는 우리 안의 절대 반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프로도 혼자서는 반지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샘이 함께했고, 공동체가 함께했으며, 보이지 않는 섭리의 손길이 함께했습니다. 우리도 혼자서는 욕망과 집착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가 필요하고, 말씀의 빛이 필요하고, 공동체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주님께서 함께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냐시오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우리도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붙잡고 있는 절대 반지를 보게 하소서. 주님, 세상의 깃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서게 하소서. 주님, 모든 선택에서 오직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찾게 하소서.”
<당신은 신비입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의 길에서 만난
당신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당신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보다도
바로
당신을
알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무엇을
알아갈 뿐
바로
당신을
오롯이 알 수 없는
까닭은
당신은
늘 그렇게
조금씩 열리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라면서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히 목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분 안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도 함께 식별해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족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큰일을 이루어 가심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른 형제자매가 봉사하는 것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평가와 판단을 내리면서 때로는 못마땅하게 여기며 시기와 질투와 무시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부족한 인간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그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을 때 우리 안에 어떤 기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길 바라며 함께 참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늘의 성인
성 이냐시오(Ignatius)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 로욜라(Loyola)
활동연도 : 1491-1556년
같은이름 :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이니고
성 이냐시오는 1491년에 에스파냐 기푸스코아(Guipuzcoa) 지방의 아스페이티아(Azpeitia) 읍 위쪽의 로욜라 성에서 아버지 벨트랑 아녜스 데 오네스 이 로욜라와 어머니 마리아 사엔스 데 리코나 이 발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이다. 그는 1506년에 당시 귀족 집안의 관습대로 에스파냐의 왕실 재무상인 후안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의 집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그는 후에 이때부터 자신이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명예를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머리와 옷 등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며 허영과 사치를 일삼았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한 후인 1517년에 성 이냐시오는 군에 입대하였다.
1521년 나바라(Navarra)의 팜플로나(Pamplona)에서 프랑스군과의 교전 중에 다리 부상을 입고 그의 생애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성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그를 치료해 주었고, 로욜라의 가족들에게 후송해 주었다. 부상으로 인한 치료를 마치고 회복기에 접어들자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는 평소 즐기던 낭만적인 기사 이야기를 실은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그러한 책은 없었고, 대신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책을 읽어 가면서 기사로서의 공상들이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반면,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 속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내면적인 체험을 할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 이 환시에서 그는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 전체, 특히 육을 따르던 행실에 대해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회심의 길로 들어섰다. 회심 후 로욜라를 떠난 성 이냐시오는 1522년 3월 25일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평화를 얻으려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하였다. 그의 저서로 유명한 “영성수련”(Exercitia Spiritualis)은 바로 이 시기에 기본 골격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기도와 보속을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523년 2월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예루살렘 순례 후 1524년 3월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되돌아왔다. 회심 이후 약 11년 간 그는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526년에는 알칼라 대학, 1527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가 1528년 여름에 파리(Paris)로 학교를 옮겼다. 그곳에서 1535년 3월 14일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1535년 봄 에스파냐로 돌아가 요양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연학 시기는 수많은
단련도 있었지만 동시에 동료들을 규합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을 파리에서 만났다. 즉 사부아 출신인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2일), 나바라(Navarra)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anciscus Xaverius, 12월 3일), 에스파냐 사람인 라이네스(J. Laynez)와 살메론(A. Salmeron)과 보바디야(N. Bobadilla), 포르투갈인 로드리게스(S. Rodriguez) 등이다. 이들은 성 이냐시오처럼 외적 고행, 구걸, 단식, 맨달로 다니기 등으로 단련하였다. 1534년 8월 15일 그들은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가난과 정결 그리고 공부가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세 가지 서약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로 고향으로 돌아온 성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1537년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9명의 동료들과 모였으나, 당시 터키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겨울 성 이냐시오는 동료 성 베드로 파브르와 라이네스와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Roma)로 갔다. 로마 근교의 라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의 경당에서 성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그는 성부께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자리에 있게 해주시는 환시를 보았는데,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예수의 동반자라는 뜻)라 불렀으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사실 그때까지 장상, 규칙, 전통 없이 열심히 생활하던 성 이냐시오와 그의 동료들은 1540년 9월 27일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의 교서를 통해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 4월 성 이냐시오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4월 22일에 그와 동료들은 로마의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서원을 하였다.
예수회는 즉시 선교 지역으로 나갔고, 수도원과 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전 유럽에 세웠으며, 교육과 지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에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세운 세 가지 목표는 교육과 자주 성사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개혁하고, 선교지에서 폭넓은 활동을 전개하며 이단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회 활동의 뿌리가 되었다. 성 이냐시오는 1555년 여름 로마에서 열병에 걸려 7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622년 3월 12일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에 있는 예수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성 유스티노 데 야코비스(Justin de Jacobis)
신분 : 선교사, 주교
활동지역 : 에티오피아(Ethiopia)
활동연도 :1800-1860년
같은이름 : 유스띠노, 유스띠누스, 유스티누스, 저스틴
유스티누스 데 야코비스(Justinus de Jacobis, 또는 유스티노)는 이탈리아 루치아나의 산 펠레(San Fele)에서 17명의 자녀 가운데 14번째 아들로 태어나 나폴리(Napoli)에서 성장하였다. 1818년 선교 수도회에 입회하였으며, 1824년 6월 12일 브린디시(Brindisi)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선교단(빈첸시오회)의 일원으로 1839년에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였다. 2명의 동료 사제와 함께 그는 서서히 그 지방의 문화를 익히며 주민들의 친구도 되고 종도 되면서 온갖 장애들을 극복하며 선교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선교활동은 주민들의 무지와 중상모략으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위하여 방인 사제 양성에 주력하여 3명의 방인 사제를 배출하고 자신은 명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주 대중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1853년경 에티오피아의 교세는 20명의 방인 사제와 5천명의 신자가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곤다르(Gondar)에서 체포되어 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추방되었다. 그 후 그는 재차 입국에 성공하였으나 또 다시 감옥에 갇혔고,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지만 1860년 7월 31일 열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에티오피아 교회의 재건자였던 그는 1939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5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제르마노 (Germanus)
활동년도 : 378?-448년
신분 : 주교
지역 : 오세르(Auxerre)
같은 이름 : 게르마노, 게르마누스, 제르마누스
성 게르마누스(또는 제르마노)는 378년경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 있는 오세르의 좋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갈리아(Gallia)에서 인문학을 공부한 후 로마(Roma)에 가서 법학을 공부하여 로마 시의 변호사가 되었다. 황제 호노리우스로부터 갈리아 지역을 다스리는 6명의 고위 관리 중 하나로 임명받아 지방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내적 회개를 체험한 성 게르마누스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제가 되었다.
오세르의 주교였던 성 아마토르(Amator, 5월 1일)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그가 사망하자 즉시 선출되어 418년 7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부인(로마에서 결혼한 에우스타키아)과 헤어져 엄격한 고행을 택하여 수도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투르(Tours)의 마르티누스(Martinus, 11월 11일)와 더불어 갈리아에 공동체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이 당시 영국에는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가 퍼져 교회가 동요하고 있었다. 영국 주교들의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4월 6일)는 429년 성 게르마누스에게 영국으로 가도록 지시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영국으로 가는 도중 후에 성녀가 된 어린 시절의 제노베파(Genovefa, 1월 3일)를 만나 신앙 성숙을 위해 노력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의 이단들을 평정하고, 영국 군대로 하여금 픽트족과 색슨족의 연합 공격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승리는 ‘알렐루야 승리’라고 기록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성 알바누스(Albanus) 무덤 앞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승리의 기쁨을 하느님께 돌렸다. 그는 448년 7월 31일 라벤나(Ravenna)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게르마누스는 여러 세기 동안 투르의 마르티누스 다음으로 가장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프랑스 성인이다. 말과 행동과 기적의 능력이 뛰어난 성인으로서,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은 그를 일컬어 ‘갈리아의 기적의 게르마누스’라고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