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공손연이 서진 사마의에게 공격당하여 잡혀죽었다는 곳이 양평(襄平)으로 이곳이 후한의 양평이라고 하였다. 중국기록으로 보면 공손씨와 모용이 활동하던 양평은 통설 처럼 요녕성 요양이 아닌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保定) 일대였다.
따라서 공손연과 모용씨의 활동 본거지였던 이곳과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나라 양평성이 동일한 지역인지 여러사료를 이용한 교차검증이 필요해보인다.
2세기말부터 3세기중반 까지 공손씨 3대가 양평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공손연때 서진에게 망하자 이지역을 모용씨가 차지하자 미천왕도 후한 낙랑을 없애고 요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통설과 달리 당시 요동은 지금의 하북성 일대이다.
진서는 양평을 하북 중부 문안 안시,서안평 역성(제남)을 관할하는 지역으로 기록하고,그곳에서 공손씨와 모용씨가 활동했다는 뜻이된다.
[晉書], [北魏書]
襄平東夷校尉所居. 汶,居就,樂就,安市,西安平,新昌,力城
양평은 동이교위가 거했다.문,거취,락취,안시,서안평,신창,력성 등이다.
[구당서] 지리지
營州-營州古柳城舜築地,乃殷之孤竹國漢唐遼西地.(靖康稗史箋證),望都縣六十里至營州(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영주는 옛유성으로 한.당의 요서땅으로 하북 망도에서 60리에 있다.

현재에도 하북 보정시 서남에 望都와 의심스러운 지명 陽城이 있다.
[通典]
邊防十序略: 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造陽,在今媯川郡之北.襄平即遼東所理,今安東府.置上谷,今上谷,范陽,文安,河閒,媯川等郡.漁陽,今漁陽,密雲郡.右北平,今北平郡.遼西,遼東郡以距胡.
8세기에 쓰여진 통전은 양평을 요동을 다스리던 곳으로 하북서부와 북경 남부를 포함한 일대로 기록하고있다.
[독사방여기요]
襄平城,在營州東南.後魏正光中,僑置遼東郡於此,領襄平.新昌二縣.高齊郡縣俱廢.
양평성은 영주 동남에 있다. 후위 정광중(520-525)에 요동군을 이곳으로 교치하였다.양평,신창2군을 다스린다. 고씨 북제군현을 전부 없앴다.
「地志云 易州遂城 戰國時武遂城也. 隋志云 上谷郡遂城舊曰武遂 今云慕容氏本都 燕國蓋謂 燕武遂城 與韓為異也 戰國時 燕為秦所滅故云武遂秦分」
괄지지에서 역주의 수성은 전국시대에 무수성이다. 수서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상곡군 수성현은 옛날에는 무수라 했고 지금은 모용씨의 도읍이다. 연국은 연 무수성(武遂城)이라 했다. 한나라 무수와 다르다.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진나라에 멸망하여 무수는 진나라가 가졌다.」 -庾子山集巻十四
공손씨 세력이 망한후 그 자리를 노리던 고구려와 모용이 쟁패하였는데 그 시발점이 요동으로,고구려가 세력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미천왕(美川王)이었다. 그의 아들 고국원왕이 북동부에서 조선군공인 전연의 모용씨를 치고 모용씨는 하북성 서남부에서 고구려와 쟁패를 벌였다. 고국원왕이 모용황과 싸우다 대패하여 모후와 백성 5만을 인질로 뺏기고 잠시 칭신했다.
[梁書] 卷57 諸夷 高句麗
晉永嘉亂,鮮卑慕容廆據昌黎大棘城,元帝授平州刺史.句驪王乙弗利頻寇遼東,廆不能制.弗利死,子釗代立.康帝建元元年,慕容廆子晃率兵伐之,釗與戰,大敗,單馬奔走.晃乘勝追至丸都,焚其宮室,掠男子五萬餘口以歸.孝武太元十年(385),句驪攻遼東,玄菟郡,後燕慕容垂遣弟農伐句驪,復二郡.垂死,子寶立,以句驪王安爲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安始置長史,司馬,參軍官,後略有遼東郡.至孫高璉,晉安帝義熙中,始奉表通貢職,歷宋,齊並授爵位,年百餘歲死.子雲,齊隆昌中,以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진 영가난때 선비 모용외가 창려 대극성(하북 서수현)에 거처 할 때, 원제가 평주자사를 주었다. 고구려 을불리(미천왕)가 요동을 빈번히 처들어 오자 모용외가 감당을 하지 못했다. 을불리가 죽자 아들인 쇠(고국원왕)가 자리에 올랐다. 모용황이 병사를 이끌고 정벌하러가서 쇠(고국원왕)와 전쟁을 치루었는데 대패해서 단마로 달아났다. 환도성에 이르러 궁실을 불사르고 남자5만을 납치해서 돌아왔다.
서진이 망하면서 동진(東晋)으로 남아 양자강 넘어 건강(南京)으로 옮기자 하남유역까지 차지하고 있던 모용의 공격을 우려하여 동진은 백제의 세력을 끌어들이는데 그들이 하남으로 옮긴 공손연의 백제세력이다. 이들이 강좌(강소성)에 머무르게 된 것을 두고 백제가 후위때 강좌에 거하였다고 [북사]에 기록을 남겼다.
5세기말 산서 평성(대동)에서 하남 개봉으로 내려온 북위와 백제의 도읍(제남)이 서로 가까와지자 중원의 패권을 두고 4번의 대전쟁을 벌이게되는데 이때 북위가 백제에게 대패했다. (남제서)
고국원왕이 모용황에게 대참패한 이후 고구려는 세력을 키워서 광개토왕때에 후연을 공격하고 모용씨를 요동에서 쫒아낸다.
公元384年,慕容皝子慕容垂起兵復國,是為後燕.東晉末,高句麗族興起.東晉 元興三年(404)高句麗據有遼東之地,改襄平城為遼東城.襄平一名至此廢除.後燕地入高句麗.北燕又喬置遼東郡於今遼寧西部.
모용황 아들 모용수가 병사를 일으켜 나라를 회복하고 후연이라 하였다. 동진 말엽(광개토왕)고구려가 크게 일어나 404년 후연(모용수)땅을 고구려가 차지하고 양평성을 요동성으로 고쳤다. 북연(풍발,고운)이 또한 요동군을 현 요녕성 서부에 교치하였다.
[通鑑地理通釋]- 왕응린王應麟(1223-1296)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서진때 평주를 설치했던 지역으로 후위때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이 있었고 당나라때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
[독사방여기요]
宿軍城在營州東北.後燕所置城也.又為平州治.晉元興初,高句麗攻後燕宿軍城,平州刺史慕容歸棄城走.慕容熙改置營州,鎮宿軍.馮跋時,復為平州治.後魏廢.
숙군성은 영주 동북에 있다. 후연이 성을 설치한 곳이다. 또 평주를 다스렸다. 동진 원흥초(402) 고구려가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 했을때 평주자사 모용귀가 그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모용의가 다시 영주 숙군진을 설치하였다. 북연의 풍발(409~430)때 평주를 되찾고 다스렸는데 후위가 폐하였다.
주)后燕置,初治龙城,今河北省朝阳县治,后治平郭,在今辽宁盖平县南,慕容宝后侨置于宿军,在今河北省朝阳县东北.
처음에 용성에 설치,현 하북성 조양현.나중에 평곽을 다스렸다.모용보가 나중에 숙군에 교치하였는데 현재의 하북성 조양현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
사실이 이런데 중국사가들이 당나라이후 북경의 조양현을 요녕성 조양으로 바꾸어버렸다.위기록에서 보면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때에 북위의 팽창으로 인해 수도를 하북에서 지금의 요녕동부로 옮겨온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광개토왕이 차지한 양평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한서, 자치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資治通鑑]★
요동성은 옛 한나라 양평성(襄平城)으로 제수(濟水) 북쪽에서 저수(抵水)로 들어간다.
[風俗通義 四瀆][설문][한서 지리지]★
濟出常山房子贊皇山東入沮水(抵水).
제수는 상산방자현의 찬황산 동쪽 저수로 들어간다.
위에 기록된 제수와 저수를 찾아보면 저抵는 沮와 疷 등과 같다. 깊이가 얕은 물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저수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기위해서 고지도에서 찾아보면 하북성 형태(邢台)시 근방이며 그곳에 양평성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청) 황조일통지도 19c -저수가 찬황 인근에 있다.(지도상 서남쪽에 제수가 있다)
중국사이트에는 없어진 이지역 하간부(河間府)에 고려성이 있는데 이와 관련 있지 않는가 싶다. 또한 이지역에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이 제법 남아있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고성(固城),고성(高城) 및 고림촌(高林村)등이 대표적인 지명이다.
풍문통(풍발)을 죽인 장수왕 이후 풍발의 사위인 북위 탁발씨와 긴장을 유지하던 장수왕은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고 북위와 전쟁을 피해갔는데 북위는 하북성 평주를 이때에 지금의 노룡현으로 옮기게 되고 당나라때 와서 그 위치가 굳어지것으로 본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第6 長壽王
十五年, 移都平壤.
장수왕15년(427) 평양을 옮겼다.
이때 장수왕이 옮긴 평양을 요사 및 원사는 요녕성 요양으로 보고있는데 반해 우리학계는 당시 고구려 평양을 지금의 평양 안학궁터로 보고있다.
[通典] 주군전 고청주 안동부
安東大都護府,舜分靑州爲營州 置牧 宜遼水之東是也.春秋及戰國 竝屬燕秦二漢曰遼東郡東通樂浪晉因之. 兼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세웠는데 후위때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을 세웠다. 동쪽으로 낙랑군과 통하는곳이다.후위때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을 세웠다.
당나라 시대에는 고구려가 후위 평주인 하북 노룡현에 평양성을 세운것으로 보고있으나 후위가 하남으로 내려오기전 북경남쪽 평주에 평양성이 있었던것으로 본다.
[通鑑地理通釋]- 王應麟(1223-1296)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서진때 평주를 설치했던 지역으로 후위때 고구려가 그곳에 도읍이 있었고 당나라때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
[遼史] 第38卷 志第8 地理志2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중략)漢末爲公孫度所據,傳子康孫淵,自稱燕王,建元紹漢,魏滅之.晉陷高麗,後歸慕容垂子寶,以勾麗王安爲平州牧居之.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이후 [요사] 및 [원사]등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들이 과거 동아시아 최대강국이던 고구려의 후예인 것을 강조해서인지 고구려가 북위때 동쪽으로 이도했던 시기의 수도 요양성(遼陽城)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록해서 공손과 모용씨의 활동지 양평이 모두 요녕으로 이동되어 헷갈리게 만들었다.
미천왕 이후 하북에 터를 두었던 고구려는 장수왕때 요녕방향으로 축소되었다가 북위가 망한 남북조말기 어지러운 틈을 이용해 북경쪽으로 다시 팽창하였다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周書] 異域 高句麗
其地,東至新羅,西渡遼水二千里,南接百濟,北鄰靺鞨千餘里.
그 땅은 동으로 신라에 이르고, 요수의 서쪽을 건너 2천리이며, 남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으로 1천리를 가면 말갈이 있다.
[通典] 卷186 邊方傳 東夷下 고구려
東晉以後其王所居平壤城即漢樂浪郡王險城自為慕容皝來伐後徙國內城移都此城亦曰長安城隨山屈曲南臨浿水在遼東南千餘里城內唯積倉儲器械寇賊至方入同守王別為宅於其側其外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復有遼東𤣥莬等數十城皆置官司以相統攝焉其地後漢時方二千里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至隋漸大東西六千里.
동진(東晉317∼419) 이후부터 그 왕은 평양성에 거하였으니 즉 한낙랑군 왕검성이다. 고국원왕때 모용황이 정벌한뒤에 국내성(양서는 환도성)에서 이 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요동 남쪽 1천여 리에 있다. 그 땅은 후한때는 사방 2천 리였으며, 위ㆍ남북조에 이르러 점점 좁아져 겨우 1천여 리였다가 수에 이르러 점점 커져서 동서 6천리나 되었다.
[隋書]
北平舊置北平郡.後齊郡廢,又並望都,蒲陰二縣來入.開皇六年又置望都.大業初又廢.有都山,伊祁山.有濡水.唐舊縣,後齊廢,開皇十六年複有堯山,郎山,中山.
북평 옛치소는 북평군에 있다 북제가 군으로 했는데 망도를 겸한다. 보음 등 두개현이 들어갔다. 개황6년에 망도에 치소를 두고 대업초에 다시 만들었다. 도산,유수가 있고 개황16년에 회복했는데 중산(하북 평산)이 있다.
남북조시대를 끝낸 수나라초에 이르러 하북에 둥지를 틀던 고구려가 하북 중부지방을 빼앗기기 시작해서 동북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광개토왕이 차지한 한 양평이 하간 고려성 인듯하다.
그러나 수나라때에 하북에서 전쟁이 일어난후 이어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점점 동으로 후퇴하기 시작해서 요녕에서 끝을 맺게된다. 이후 하북지방에 있던 지명들이 대부분 요녕지방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지명이 양평과 영주등으로 이때문에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도 요양으로 옮겨진다.

중국의 탄치양도 이사실을 역사지도에 담아놓았으나 그도 중화사관에 사로잡혀 진실과 과장이 섞여있다 가려서 이해하면 된다.
20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