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내와 남편 그리고 행복 2004. 9. 19
본문 : 에베소서 5장 21-33절
우리가 아직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종종 듣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얘들아 결혼은 정말 할 게 못된단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는 날로 바로 후회하게 되어 있거든....."
그 때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어른이 정반대의 얘기를 합니다.
"얘들아 절대 혼자 살지 말아라. 나이 먹고 보니까 정말 외롭더라. 결혼 안해도 역시 남는 건 후회 뿐이야. 그러니 너희는 결혼을 꼭 하도록 해라. 알겠니?"
이 때까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꼬마가 "에이! 결혼을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면 난 결혼을 해보고 나서 후회할래요. 그럼 결혼한 만큼 이익이잖아요?"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 때 그렇게 말했던 꼬마가 바로 접니다. 그리고 결혼한 것을 아직까지 후회해본 적이 없지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결혼 해보고 나서 후회할거야" 하는 맘으로 결혼 하셨습니까? 아니면 "결혼해도 난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래서 결혼을 하신 겁니까?
마침 오늘이 주일인데 오늘 하루동안에도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안고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며 새출발을 하는 젊은 부부가 877쌍이나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370쌍의 부부들은 새출발하는 부부와는 달리 헤어지는 아픔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년 통계입니다.
당연히 기쁨과 행복이 있어야 할 우리들의 가정에서 누가 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갔을까요? 그것은 요즘들어 자주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앗아갔던 태풍 '차바, 송다, 하이마'가 아닙니다. 최근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 '아이반'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최고요, 나만이 전부라고 하는 잘못된 이기주의적 사고를 심어준 우리들의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행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해결해야 할 과제들입니다. 이제는 좀더 깊이 생각을 해야합니다. 나만이 아닌 너의 마음도, 우리가 아닌 이웃의 아픔도 함께 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행복한 부부가 행복한 가정을, 행복한 가정이 행복한 사회를, 행복한 사회가 행복한 국가를 만듭니다.
여러분! 행복은 발견하고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행복이라는 완제품은 없지만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씨앗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씨앗을 뿌리고 그 싹을 틔워 자라도록 가꾸는 화초처럼 이 씨앗을 정성껏 키우고 가꾸어서 참된 행복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씨앗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들입니다. 교회의 가장 기초 단위로 보시는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주님은 아내와 남편에 대하여, 그리고 자녀에 대한 말씀들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한 보석상이 수석 전시회에 들렸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10달러 짜리 가격이 붙어있는 돌맹이가 사파이어 원석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석상은 그 원석을 사다가 반지, 목걸이 등을 만들어서 228만불을 벌었습니다. 22만 8천배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당신 곁에 있는 보석인 아내나 남편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그저 조금 귀한 돌덩이 정도로 안다면, 당신은 불행한 남자나 여자입니다. 화초처럼 정성껏 가꾸십시오. 내버려두면 쓸모 없는 돌부리에 불과합니다. 오다가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말입니다.
그 가꾸고 다듬는 방법으로서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부부간에는 그리스도를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하듯이 그렇게 서로간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간 생각해볼 것은 가능하면 순종하라는 말이 좀더 부드러운 말이요 차원 높은 말인데 순종이라는 단어를 안쓰고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부부간에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어렵다고 본 모양입니다. 그래서 때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억지로나마 따르라는 복종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군대용어입니다. 부하가 상관에게 싫어도 위계질서상 따라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남편과 아내 각자가 누릴 권리가 아닌, 부부간에 이행해야 할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부간에는 배우자에게 요구하고 명령할 권리는 없습니다. 오로지 배우자를 향한 의무와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쌍방 동등책임의 원칙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의존 그리고 복종이라는 깊은 영적 관계에서 추출해낸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처럼 나와 그리스도 사이에 성립된 관계가 나와 동반자, 나와 가정, 나와 이웃, 나와 사회에 확대 적용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아내와 남편 각자가 따라야 될 사항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아내의 남편에 대한 태도로서 22-24절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함으로써, 남편의 권위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을 사실상 원합니다.
이와 병행구절인 골로새서 3장 18절에서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고 표현합니다. 이 같은 아내의 복종은 주님께 대한 성도의 순종과 그리스도를 향한 교회의 신뢰와 복종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주께 하듯 하라" 했다고 해서 남편의 권위나 의사가 곧 주의 명령이나 뜻과 동등하므로 아내의 개인적인 의견이 전적으로 무시되거나 묵살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의 이유는 23절에서 보듯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상 여자의 지위를 남자의 권위 아래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정의 Headship에 대한 문제입니다. 고전 11:3절에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상승적인 관계를 설정하여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통솔의 권위에 순복하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내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가르침은 '여자의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그러나 순종이 안되면 적어도 억지로라도 따라가는 복종이라도 하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남편의 아내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 25-3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전형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셨듯이 남편도 아내에 대하여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이기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생명까지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을 하라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리고 언제나 계속적으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1차적으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듯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하되 거기에서 그치지 말고 생명까지도 내건 사랑을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기에 계신 남편들은 큰일이 났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서 남편들은 자기의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데, 앞으로 몇 번을 죽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여러 개 여분으로 가지고 있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사실상 오늘날의 많은 남편들이 아내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경영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그것을 느끼고 있지 못할 뿐이지 우리네 남편들은 생명을 걸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IMF 경제 이후에는 그것이 더합니다.
여러분 생명을 걸고 일하시는 분들 한번 꼽아보시겠어요?
경찰관, 소방관, 직업군인, 선원, 중장비나 트럭 버스 택시기사, 냉동창고 기사, 해외 건설현장의 근로자들... 정말 그들은 생명을 걸고 그러한 직종에 종사합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요. 물론 그러한 직종에 종사하는 여자 분들도 있긴 하지만...
그 뿐입니까? 아내와 자식을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말로 정신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면 뭐 합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굶거나 입을 옷이 없어서 헐벗고 있다면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이 말씀을 드리는 저 자신은 이 면에서 아직까지 떳떳하지를 못합니다. 제가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 제 아내가 고된 직장생활을 해서 저와 자식들을 양육하고 있으니까요.
특별히 그리스도인 남편들은 아내에 대하여 한 가지 사명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사랑하는 아내를 점 없고, 흠 없고, 주름살이 없이 (여기서 주름살이 없다는 것은 피부가 팽팽하여 젊어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로 인한 깊은 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깨끗하게 단장해서 거룩한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세워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성품적)을 닮는 것은 남편의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모습으로 바로 서야 아내가 바로 서고, 아내가 바로 서야 자녀들도 바로 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 같이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나 지금이나 자기 몸을 미워하는 자는 없었고, 오히려 아끼고 돌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교회에 대하여 하신 일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니라"
하였는데, 이 말은 물론 남녀의 연합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예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하심으로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듯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한 몸이 된 이상 아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아내 역시 남편을 주님 대하듯 두려움과 존경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장성한 아들을 두신 부부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결혼하면 아들을 떠나 보내십시오. 누구에게요? 며느리에게로... 어떻게요? 완전히... 마치 새 장의 새를 공중에 훨훨 날려보내듯이.... 그것이 행복한 아들 며느리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날 많은 남녀들이 이기적이고 계약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결혼 때문에 이혼율이 급증하여 가정파괴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회 속에서 성경적인 결혼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에 대한 실천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남자와 여자가 행복을 위하여 서로 만나 결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만남을 결혼한 후 어떻게 누리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만남을 누리기 위해서는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받들며,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아내가 즐겁고 기쁘면 남편도 즐겁고 기쁘고, 아내가 슬프면 남편도 슬프고, 아내가 아프면 남편도 고통스러운 것이 한 몸입니다. 반대로 남편이 일에 성취감을 느끼면 아내도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남편이 괴로우면 아내 역시 잠 못이루는 것, 즉 범사에 하나되는 것 이것이 온전한 한 몸이요 행복한 부부의 시작입니다.
이 행복한 부부의 시작을 위해서 남편은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