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마다 러시아 전역을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던 대규모 '반 푸틴' 시위가 멈춰섰다. 2주 연속 주말마다 모스크바 등 100여개 도시에서 열렸던, '반 푸틴' 인사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대는 6, 7일 만날 수 없게 됐다. 아니, 당분간 시위는 없을 전망이다.
신종 코로나(COVID 19) 확산 우려로 대규모 집회는 금지됐으나, 나발니 지지세력은 2주 연속으로 시위를 밀어붙였다. 진압경찰과 충돌은 불가피했고, 1만1천여명이 연행돼 수천명이 형사 사건과 즉결 심판 등 재판을 앞두고 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집회를 불허하고 시위대를 강력하게 진압한 러시아 당국 측이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몇차례 목격했던, 방역 대책과 (대규모) 집회가 충돌할 경우, 어느 편이 유리했는지 보여준 그대로다. 나발니 측으로서는 '타이밍'이 나빴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나발니 정국'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분야별로 살펴본다.
◆ 향후 시위는?
나발니 측이 당분간 시위를 중단할 것이라는 발표는 해외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의외다. 당국의 강력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발니 측은 전열을 재정비해 (방역 제한과) 날씨가 풀리는 봄에 다시 시위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으나, 뜨거웠던 열기를 쉽게 되살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푸틴 대통령(당시 총리)의 크렘린 복귀를 앞두고 있던 지난 2011년 말~2012년 초 활활 타올랐던 총선 부정선거 규탄 시위의 재판이 될 것 같은 느낌도 있다. 당시 푸틴 등 집권세력이 내놓은 정치개혁 약속에 반정부 인사들이 일단 시위를 중단했는데,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크게 바뀐 것도 없이 10년 세월이 흘렀다.
시위를 취재했던 미 뉴욕타임스 기자는 1년 뒤 모스크바 방문기에서 "달라진 모스크바 분위기에 너무 놀랐다"고 했다.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반정부 시위는 늘 이랬던가? 이념으로 똘똘 뭉친 10월 혁명을 제외하고.
나발니 지지세력, 6, 7일 시위 계획 없다/얀덱스 캡처
나발니 공식 유튜브 채널 나발니Live를 통해 시위 중단을 발표하는 레오니드 볼코프/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나발니 지역 네트워크' 책임자인 레오니드 볼코프는 4일 유튜브 나발니 공식 채널(나발니 Live)을 통해 '봄'까지 새로운 시위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볼코프는 시위 중단 이유를 주말마다 진행되는 정기적인 시위가 오히려 국민들을 실망시킬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시위를 계속하면 참가자들이 줄어들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거꾸로 시위에 대한 실망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건도 나발니 측에게 유리하지 만은 않다. 시위를 진압하는 러시아 당국은 코로나 감염 확산 방지라는 확실한(?) 명분을 갖고 있다. 1만1천명 이상을 연행했지만, 단순히 시위 참가 때문에 모두 연행한 것은 아니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불허된 집회를 주도하거나 현장에서 과격한 행위를 하거나, 진압 경찰들을 폭행했다는 이유에서다. 모스크바시 방역 당국도 방역 앱 추척 결과, 코로나 확진자가 집회에 참석했다며 감염 확산을 우려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등지에는 이번 주말에 불어닥친 강추위도 집회를 강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나발니의 주요 측근들도 대부분 연행되거나 가택연금 상태에 처해졌다. 언론비서 키라 야르미쉬, 동생 올레그 나발니, 반부패재단 류보프 소볼 변호사, 나발니 모스크바 본사 책임자 올레그 스테파노프, 나발니 주치의 아나스타샤 바실리예바 등 측근들이 구금되거나 3월 23 일까지 가택연금 상태다. 현장에서 시위를 주도한 지휘부가 사라진 것이다.
시위 중단을 발표한 볼고프 자신도 수배령이 내려지자 해외로 도피했다. 이웃 벨라루스 대선 불복 시위에서도 지휘부가 해외로 탈출하거나 체포되자 집회의 조직도와 결속력이 급속히 떨어진 바 있다.
나발니 지지자들은 지난달 23일과 31일, 나발니 재판이 열렸던 지난 2일 3회 연속 시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1만2천여명이 체포됐다. 볼코프는 "시위 때마다 수천명이 연행되고 당국의 폭력과 협박으로 일부 도시에서 참가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며 "나발니 지역 네트워크의 업무가 마비되고, 가을 총선에 대한 준비가 어려워지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대도시급 시위는 23곳에서 31곳으로 늘어났지만, 집회 참가자는 줄었다는 게 나발니 측의 판단이다.
하지만 볼코프는 "시위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며 "봄과 여름에 (방역으로 인한 집회 금지가 풀리면) 더 크게 진행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모스크바 등 일부 지역에서는 백신 접종 등으로 인해 확진자 수가 (2차 파동이 오기전 지난해 9월 수준으로) 크게 줄어들었지만, 세르게이 소뱌닌 모스크바 시장은 집회 제한을 풀 계획이 없다고 했다. 일러야 5월쯤 집회 금지 해제가 풀릴 것으로 알려졌다.
◆ 나발니 측의 향후 전략은?
독일에서 귀국하는 공항에서 체포된 나발니는 집행유예 판결이 실형으로 바뀌면서 앞으로 2년 8개월을 더 복역해야 한다. 그의 석방을 위한 시위도 중단됐으니, 나발니의 석방 여부는 오로지 당국(크렘린)의 처분에 달렸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진영이 크렘린을 향해 나발니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쉽사리 그를 풀어줄 것 같지는 않다. 나발니로 인한 위험 요소가 사라지면, 항소심에서 그를 가택연금형으로 바꿔 석방한 가능성은 남아 있다.
나발니, 감옥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올렸다/얀덱스 캡처
수감된 나발니는 굳건한 심경을 드러냈다. 실형 판결 이후 동료에 의해 처음으로 올린 SNS 글에서 그는 "내 뒤에서 닫히는 철문의 쇳소리가 귀를 멀게 할 정도지만, 나는 자유를 느낀다"며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의 자유를 빼앗을 순 없다'는 경구를 떠올리면서 실제로 그럴까? 자문을 자주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다'고 확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나발니 재판에 참석한 부인 율리야/사진출처:모스크바 시 법원 동영상 캡처
나발니, 퇴역군인 명예훼손 소송에서 무죄를 주장
나발니는 5일 다시 법정에 섰다. 지난해 6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퇴역 군인을 중상·비방한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첫 공판에 출석해 8시간을 보냈다. 나발니는 2차대전 참전 예비역 대령 이그나트 아르테멘코(93)가 푸틴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지지하자, 그를 '매수된 하인', '반역자' 등으로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SNS에 올려 참전군인연맹으로부터 고발됐다. 그는 참전용사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입건됐다.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나발니는 최대 100만 루블(1천500만 원)의 벌금 혹은 240시간의 의무 노역 처벌을 받게 된다.
나발니가 없는 '나발니 지역 네트워크'는 당분간 시위 조직 대신 가을 총선 준비에 집중할 전망이다. 나발니는 SNS 글에서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권력을 잡은 한 줌의 도둑들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다"며 "그 일을 하자, 해야만 한다"고 했다. 그 일이 바로 '가을 총선' 대비가 아닐까 추정된다.
볼고프도 시위 중단을 발표하면서 "총선 이전에 나발니 지역 네트워크가 전자투표의 기반을 확장하는 것을 '주요 정치 사업'이라고 지적했다.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통합러시아당' 의원들을 낙선시키고, 친 나발니 인사를 당선시키는 게 목적으로 보인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나발니 지지 후보를 여럿 지방 의회에 진출시킨 바 있다.
◆ 러시아와 서방간 충돌의 끝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위시해 주요 서방 국가들은 나발니의 즉각 석방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유럽연합(EU)를 대표하는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는 5일 모스크바를 찾아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EU 고위 대표가 러시아를 방문한 건 지난 2017년 이후 처음이다.
두 사람은 회담이 끝난 뒤 가진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발니 석방을 둘러싼 양측의 이견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평가다.
보렐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EU의 이름으로 러시아 정부가 나발니를 석방하고 그에 대한 독살 시도 사건을 완전하고 투명하게 진행할 것을 촉구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솔직히 말해 우리(EU)가 같은 요구를 계속 반복하더라도,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했다. 협상은 벽에 부닥쳤다는 뜻으로 들린다.
실제로 라브로프 장관은 "EU가 나발니 사건에 대한 단일 입장을 도출했지만, 내정 간섭적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EU의 대러시아 제재 여부는 (EU) 내부의 문제"라며 "우리는 이미 일방적인 제재에 익숙해져 있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독일 외무부, 외교관 추방뒤 러시아 대사 초치/얀덱스 캡처
러시아 외무부는 한발 더 나갔다. 러시아 주재 스웨덴, 폴란드, 독일 외교관들을 외교적 기피인물로 지정해 추방 명령을 내린 것. 외무부는 언론보도문을 통해 지난달 23일의 불법 집회에 참석한 주상트페테르부르크 스웨덴, 폴란드 총영사관 소속 외교관과 주모스크바 독일 대사관 소속 외교관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적 기피인물)로 지정, 추방한다고 밝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즉각 "우리는 이번 (외교관) 추방을 부당하다고 본다"며 EU의 대러 제재 확대에 동참할 뜻을 분명히했다. 스웨덴과 폴란드 등 EU 회원국들은 러시아의 외교관 추방을 규탄하며 대응조치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외교 분쟁을 겪더라도 나발니에 관한 한 서방측에 한치도 물러설 뜻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어 러-EU간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해저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가 이번 사태로 영향을 받지 않을지, 예정대로 진행될지 여부가 가장 큰 관심거리다. 메르켈 총리는 지금까지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물론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해저 가스관 건설 중단 요구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변수는 없나?
나발니가 지난해 8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비상착륙해 응급치료를 받았던 러시아 옴스크 응급 병원의 의사가 4일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마취통증·응급환자 담당 차석의사인 세르게이 막시미쉰 박사는 혼수 상태에 빠진 나발니 소생을 위해 헌신한 것으로 전해졌다.
돌연사한 옴스크 응급병원의 막시미쉰/사진출처:옴스크 주 보건부
옴스크 응급병원의 차석의사 막시미쉰 사망
CNN 등 외신들은 5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의 죽음에 '타살 의혹'을 제기했다. 나발니 측의 볼코프도 CNN에 "막시미쉰은 나발니의 혼수상태에 대한 치료 책임을 맡고 있었다"며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던 그가 자연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에서는) 그같은 연령대의 의사들이 돌연사할 수 있다"고도 했다.
옴스크 지역 매체 등 현지 언론은 "막시미쉰은 얼마 전 부모님을 떠나보내 심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근무 중 심장마비가 와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신종 코로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타살 의혹을 제기하는 외신과 근무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현지 언론 사이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그는 6일 발인한다. 진실은 화장으로 영원히 묻힐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나발니가 베를린 샤리테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고, 독일측과 '노비촉 중독' 여부를 놓고 공방을 벌였던 옴스크 응급병원내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발니 치료를 책임진 옴스크 응급병원의 주치의 알렉산드르 무라호프스키는 옴스크 주 보건책임자로 영전됐다. 의료진의 일원으로 언론 발표를 담당한 아나톨리 칼리니첸코는 병원을 그만두고, 사립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에서 계속 근무한 막시미쉰은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니 뭔가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는 듯하다.
한때 동료였다가 보건 책임자가 된 무라호프스키는 성명을 통해 "막시미쉰이 28년간 병원에 몸담으면서 수천 명의 생명을 살렸다"며 "그는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으며, 그를 잃은 고통은 더욱 쓰라리다"고 애도했다.
◆ 푸틴 대통령의 입지
나발니 석방 시위가 2주 연속 벌어지자, 일부 외신은 푸틴 대통령이 흔들릴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푸틴 체제를 잘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생각을 했을 터. 그것은 나발니 사태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의 신뢰도 29%로 낮아져/얀덱스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 센터가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2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푸틴 대통령의 신뢰도(지지율)이 64%로 나타났다. 지난해 11월 조사 때와 비교하면 1% 포인트 하락한 것.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은 34%로 지난번 조사와 같았다.
응답자가 '자신이 신뢰하는 정치인'을 스스로 꼽는 설문에서도 푸틴 대통령은 33%에서 29%로 떨어졌으나, 여전히 1위를 고수했다. 이 조사에서 나발니는 5%를 기록, 처음으로 제1 야당인 러시아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 당수를 제쳤다.
그러나 18~24세의 젊은 층에선 푸틴 대통령의 신뢰도는 51%로, 지난 2년동안 29% 포인트 빠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여론조사는 러시아 연방 50개 지역 18세 이상 성인 1천616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레바다 센터의 레프 구드코프 소장은 "대다수 국민이 나발니 사태에 여전히 둔한 반응을 보인다"며 "젊은 층에선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낮아지긴 했지만, 국민 대다수에서는 실질적인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집권세력은 나발니 석방 시위가 조만간 잦아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상황"(드미트리 오레슈킨 정치분석가)이라는 전망은 '푸틴 체제'가 앞으로도 당분간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가을 총선에서 집권 통합러시아당이 의외로 고전하지 않는 한, 그가 옐친 전대통령처럼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우리는 차기 대선에서도 '푸틴 후보'를 만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