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소금으로 빛으로 》
마 5:13~16
〈 가정예배 풍경 〉
두 손주 데리고 가정 예배를 했습니다.
어떤 본문으로 할까 하다가 주님이 “소금과 빛”으로 비유한 대목이 떠 올랐습니다.
‘옳거니, 오늘은 이 본문으로 가정 예배 설교를 하자’ 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앉혔습니다.
일곱 살 바울이는 깔깔깔 웃어댔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소금이 돼요?”
제 혼자 웃어댑니다.
‘아, 일곱 살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이 이렇게 다가가는구나~’
바울이의 ‘해석’에 따라 할아버지도 물음표를 던져봅니다.
‘맞아, 사람이 어떻게 소금이지?’
주님은 “너희는 소금이니”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아, 맞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어야 한다’
아직 일곱 살 바울이에게 ‘소금’과 ‘세상의 소금’ 차이를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일흔줄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이 차이에 잠시 집중을 합니다.
‘세상의 소금’ - 음식에 치는 소금이 아닌, “세상에 치는 소금”입니다.
열 살 유채는 바울이와 세 살 차이만큼 의젓했습니다.
“바보야 사람이 소금이라는 뜻이 아니야!”
참 재미있는 ‘가정 예배’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는 김에 즉석에서 한 구절을 외우자고 제안했습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유채는 할아버지를 닮아 지적 호기심이 상당했습니다.
“할아버지 외우는 시간을 주세요!”
외워서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 멋지게 암송하고 싶어합니다.
처음에는 2분, 다음에 5분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외웁니다.
유명한 구절이어서 외운 적이 있지만, 다시 외우려니 만만치 않습니다.
〈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
마 5:13을 암송하면서 ‘세상의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를 계속 생각합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방법을 첫째, 둘째, 셋째로 압축하면 어떻게 될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세상의 소금’인데,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땅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유채는 13절을 외우다가 짧은 시간에 잘 안 외워지니 14절에 눈길을 돌립니다.
14절이 13절에 비하여 절반 쯤으로 짧습니다.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4절이 짧기는 한데, 의미의 연결에서 이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에 연결되는 의미가 범상하지 않습니다.
~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3절은 암기할 때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습니다.
14절은 길이는 짧으나 내용의 연결이 사람들의 의식흐름을 뛰어넘습니다.
유채는 13절을 암기하다 접어두고 14절을 외웁니다.
“도전!” 아마 학교에서 배웠나 봅니다.
“좋아! 유채가 암송해 봐! 다들 조용히 하고~”
의미 연결이 매끄럽지 않으니 14절은 짧지만 자꾸 틀립니다.
할머니가 옆에서 한 글자를 은근히 가르쳐 주면, 그것이 싫다고 다시하겠다 합니다.
일곱 살 바울이에게는 13절이나 14절이나 암송하기에는 무리인 듯 합니다.
제멋대로 깔깔 거리고, “사람이 어떻게 소금이야? 어떻게 빛이야?” 합니다.
무릇 암송한다는 것은 앵무새처럼 읊는 것이 아닙니다.
암송하려면 뜻을 이해하고, 뜻의 흐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저도 그 자리에서 “도전!” 하고 13절을 가까스로 외웠습니다.
암송한다는 것은 의미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날, 가정예배 이후 본문 말씀에 제가 딱, 꽂혔습니다.
☞ 그래서 오늘 수요예배 본문으로 정했습니다.
〈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삶의 모습 〉
예수님의 산상수훈, 소금과 빛의 비유 참뜻은 16절에 있습니다.
(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아직 안 믿는 이들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실 예수 믿은 우리가 어떻게 “착한 행실”을 할 수 있을까?
여기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착한 행실”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 무엇이 착한 행실입니까?
☞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자세가 착한 행실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생각,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
이 말의 반대를 떠올려 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생각, 하나님을 부인하는 마음”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생각없이 한 시간도 지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생각에 치우쳐 지내니까, ‘멍때리기’ 대회가 생겼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가?
참으로 우리는 생각없이 잠시도 견디지 못합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잠자리에 들때까지 계속되는 우리의 생각!
그 생각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사는 것이 바쁘다보니, 생각 속에 하나님을 찾아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루를 살고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내 생각 속에 하나님이 계셨는가?’하고 질문해봅니다.
대부분 하나님 생각 전혀 안 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할 때,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착한 행실”
온종일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악한 행실”로 살았노라고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자세 = 착한 행실 〉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14절) 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사는 모습을 “착한 행실”이라 하셨습니다.
“착한 행실”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생각,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과 마음, 그 다음에 행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자세가 착한 행실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생각과 마음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면, 마음에 하나님 아니 계시다면 어찌 “착한 행실”이 나오겠습니까?
생각 속에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생각,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
그래야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실”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실이 곧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는 “착한 행실”입니다.
☞ 세상 사람들도 흔히 말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착한 행실”과 오늘 본문의 “착한 행실”은 상당히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착한 행실”은 이른바 “선행”입니다.
남에게 악을 행하지않고 불우이웃을 돕는다든지, 불교에서 말하는 선행을 쌓는 ‘적선’입니다.
일반적으로 선행은 선행을 하는 그 사람의 심중은 문제삼지않습니다.
마음의 중심이야 어떠하든 겉으로 드러나는 “착한 행실”이면 선행으로 칭송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착한 행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의 이면을 중요하게 봅니다.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생각,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세상이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겉으로보기에는 다같은 “착한 행실”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입니다.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이것입니다.
16절 말씀 다시 봅니다.
(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소금으로, 빛으로 〉
오늘 설교 제목을 《 소금으로, 빛으로 》로 정했습니다.
소금은 음식에 치는 소금이 아니라, “세상에 치는 소금”입니다.
세상에도 소금을 쳐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맛이 제대로 납니다.
세상에도 소금을 쳐야 썩지 않습니다.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도 소금을 쳐야 합니다.
세상에 치는 소금, 그래야, 세상의 맛을 내고, 세상의 부패를 막아줍니다.
설교 제목에서 “소금으로”는 세상을 이끌어가는 나침반입니다.
다음에 “빛으로”입니다. 14절 다시 봅니다.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한국은 안 그렇지만, 외국에 나가보면, 산위에 동네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산꼭대기가 아닌 골짜기나 분지에 취락을 형성합니다.
외국은 산꼭대기에서 마을을 이룹니다.
필리핀에 가보니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 하니, 날씨가 더워서랍니다.
이스라엘에 가봐도 그렇습니다. 거기도 산꼭대기에 마을이 있습니다.
중동지역은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산꼭대기에 마을을 이룹니다.
미국의 서부에도 보면 산 꼭대기에 마을이 많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혹은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산 꼭대기에 마을을 이뤘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이 동네를 밝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빛”입니다.
그러나 마을의 실체를 드러내는 빛은 그 빛이 아닙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의 진실, 그 동네의 옳고 그름,
그 동네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빛이 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역사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떤 동네냐?
이것을 밝혀 주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밝혀 주느냐?
바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 주님의 제자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
그들로 하여금 산 위에 있는 동네의 진실, 실체가 드러납니다.
소금으로 세상의 맛을 냅니다.
빛으로 세상의 도덕과 윤리, 역사적 실체를 비춥니다.
☞ 소금과 빛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나침반이며, 세상이 나아갈 바를 밝히는 푯대입니다.
〈 세상의 지향점 〉
길거리에 나가보면, 오늘도 변함없이 자동차들이 씽씽 달려갑니다.
달리는 모든 자동차들 각자의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곳을 향해 속도를 냅니다. 열심히 달려갑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상” 이 “세상”은 지금 어디로 달려갑니까?
☞ 세상의 목적지는 어디입니다.
☞ 세상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 누가 세상의 지향점과 세상의 목적지를 가리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너희가 세상의 지향점과 세상의 목적지를 가리켜야 한다!”
수많은 사상가, 철학자,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세상의 지표를 제시했습니다.
“세상은 이리 가야 한다, 저리 가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지향점, 목적지를 정확하게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디를 향하도록 푯대를 세워야 합니까? ~ 16절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세상의 지향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소금과 빛!
누구입니까?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인 줄 믿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우리가 제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