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과 노래
최도은
이 글에서는 1945년 해방이후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에서부터 오늘
의 민주노총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노동운동 발전과 이와 상응하면서 혹은 영향
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한 노동가요를 노동운동의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글 전반의 내용이 나의 활동 경험 속에서 채집하고 정리한 노래를
중심으로 기록하다보니 해방이후 노래운동사 전체를 총괄하기에는 한계를 안
고 출발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1. 해방 이후
1945년 2차대전이 종결됨과 동시에 해방된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이 폭발적으
로 발생하였다. 노동운동가들은 '45년 9월 26일 전평 준비위를 결성하고 11
월 5일∼6일 전국 13개도 17개 산업별단일노조(금속·철도·교통운수·광산·
토건·화학·통신·식료·전기·섬유·출판·일반봉급자·목재·어업·조선·
해운항만·합동), 1,194개 노조분회, 21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조선노동조합전
국평의회'를 결성한다. 전평은 해방을 맞이하여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조국에
서 토지 및 중요기간 산업의 국유화를 천명하였다. 8시간 노동제와 언론·집회
·출판·결사·파업·시위의 자유 보장 등을 주요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전평
은 교양강습 및 연예활동(연극·음악·체육)을 통하여 조합원들간의 연대를 강
화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려 했다. '47년 5월 1일 전평이 개최한 세계노동절행
사장인 서울 남산공원에는 50만 노동자들이 결집하여 민족해방의 노동자 계급
적 과제를 대중적 역량으로써 제시한다.
남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한 미군은 민중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하였다. 실
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였으며 고용의 기회는 극히 제약되었다. 임금수준도 낮
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전평은 철도 노동자들의 쌀 배급과 처우개선을 요구로 시작한 '46년 9월 총파
업, '47년 전평노조간부의 석방을 요구로 한 3월 총파업, 남쪽만의 단독선거
를 반대한 '48년 2·7 총파업, 5·8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미군정에 맞서 3년
동안 전국적 총파업을 조직하고 투쟁하였다.
민족해방과 민중운동 전개의 분위기에 맞추어 예술운동을 주도한 '프롤레타리
아 예술동맹'은 반제반봉건 혁명 이념을 음악에 부여하기 시작하여 우선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청소하는데 창작활동을 집중하였다. 동시에 민중운동을 고취하
는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해방의 노래' '청년 총동맹가' '민전 행진
곡' '건국 행진곡'과 '48년 제주 '4·3봉기의 노래' '47년 '여순 봉기의 노
래' 등이 있다. 이 노래들은 투쟁 현장에서 하나의 중요한 힘으로 작용하였
다. 특히 '46년 10월 인민항쟁을 기록한 노래 '인민 항쟁가'는 투쟁과 저항을
조직한 대표적인 노래로 꼽힌다.
'해방의 노래' 김순남 곡 - 악보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야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 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추도가' - 악보
동무여 장하다 삼천만 대중의 묶였던 철쇄를 끊고 용감히 쓰러진 혁명의 투사
여.
'인민 항쟁가('46년)' - 악보
1.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무리의 죽음을 슬퍼 말어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2. 더운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속 울려온다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
3.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서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항쟁가.
'인민 유격대의 노래('47년)' - 악보
오대산 봉우리에서 제주도까지 숲 사이 바위사이 너와 내 사이
조국의 자유 지켜 피로 무장한 우리는 유격대 조선의 자식
침략의 적들을 때려부수는 인민의 총검.
빨치산 활동을 표현한 '인민유격대의 노래'는 1948년 2·7투쟁 이후 남쪽의
많은 지역에서 투쟁의 거점이 산악지역으로 이동한 뒤 불려진 노래다.
2. 50년대∼60년대
1950∼53년간의 한국전쟁은 남북의 대다수 민중을 살상하고 파괴시켰으며 그
나마 미약했던 산업기반을 더욱 황폐화시켜 미국의 전시원조에 기대게 하였
다.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은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운동이나 계급운
동과 중도적 민족운동마저 탄압 받고 근거를 상실해 갔다. 한국전쟁 기간 중
의 노동자 투쟁에 대한 역사가 연구된 기록은 찾기가 어려워 해방 후 활발했
던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활동과 50년대의 노동가요에 대한 기록은 확인 할
길이 없으나, 부산지역의 조선방직노동자들의 투쟁과 부두노동자 3만명의 미군
수품 하역 거부 파업 투쟁이 전쟁기간 노동자 투쟁으로 전해져 온다.
전쟁기 부산에는 피난민의 유입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49년 47만명
이던 인구가 52년에는 85만명이 되었다. 이처럼 인구가 증가하자 부산의 모든
지역은 판자집으로 뒤덮혀 화재가 끊임없이 발생하였으며 도시기능이 마비되
어 교통난, 주택난, 식량난 식수난 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 한국전
쟁 중 부산지역의 경제생활은 시중으로 유출된 군수물자, 구호물자, 밀수품 등
을 거래하는 유통업이 위주였으며, 제조업 부문의 경우는 원조물자를 가공하
는 섬유, 식품위주의 경공업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이러한 경
제활동의 중심지는 국제시장 이었다.
전쟁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방직쟁의, 광산 및 부두노동자들의 파업투쟁
에 직면하게된 지배체제 일각(국회-전진한 발의)에서는 노동운동에 대해 무력
탄압으로 일관하는 이승만 정권의 노동정책에 반대하며 노동자 투쟁에 대
한 '방어입법'을 서두른다. 그리하여 노동조합법(1953년 1월 23일), 노동위원
회법(1월 27일), 노동쟁의 조정법(1월 30일), 근로기준법(4월 13일)등 노동관
계 4법이 제정된다. 이 법들의 제정의 핵심적 계기는 '조선방직 여성노동자들
의 투쟁' 때문이었다. 또 노동관계법이 갖는 보호적 성격을 감안할 때 이는 남
한 단독정부수립, 한국전쟁기에도 멈추지 않는 노동자들의 투쟁결과로 얻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왜 하필이면 전쟁 중에 노동관계법이 제정되었는가. 더 세밀하게는 왜 집단
적 노사관계법(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이 근로기준법 보다 먼저 제정·공
포 되었을까에 대한 답변에 몇 가지 점을 들어 한 일본연구자는 조선방직쟁의
를 한국 현대 노사관계의 출발선이라고 까지 지적한다.(나까오 미찌꼬)
그러나 입법과정에서 당시 노동운동에서 의미가 컸던 노동자의 '이익분배균점
권'은 구체적인 법률로 제정되지 못하였으며(이 조항은 5·16이후 제3공화국
헌법에서 완전 삭제됨) 전시하의 급박한 대응 필요에 따라 법제정기술상 요구
되는 충분한 기초연구·조사를 거치지 못한 채 맥아더 군정 하에 제정된 일본
노동관계법을 모방하여 제정했기 때문에 이후 법 해석과 법 집행 상에 많은 혼
란을 초래하는 근거가 되었다.(신인령)
한국정부수립이후 12년 간의 장기 독재를 자행한 이승만 독재정권은 '60년 3
·15부정 선거에 의해 촉발된 전국적인 민중의 저항에 직면하여 붕괴되었다.
4.19혁명은 12년의 장기독재정권을 물리치고 해방된 민족과제를 다시 제시하면
서 민중의 생존권 확보와 민족통일의 대의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4.19 당시는
운동가요가 준비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위대중이 불렀던 노래는 국경일
에 주로 부르던 '3·1절의 노래'와 '애국가'였고, 노래보다 구호가 주로 외쳐
졌다. 4·19를 기리는 노래로는 70년대 중반 `크리스천 아카데미 노래모음
집'을 통해 한태근이 작곡한 '진달래'가 있고, 1990년 4.19혁명 30주년을 맞이
하여 사월혁명연구소에서 의뢰하여 만든 '4월에 바침'(김규동 시, 이건용 곡)
이 있다.
'진달래'
1.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 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2.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에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산하
1961년 4월 혁명을 뒤엎으며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2
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공업중심으
로 개발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농촌은 도시 저임금지대의 노동력을 제공하였
고, 농촌을 떠난 노동자는 도시와 산업단지의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한강의
기적' 이라 부르던 60년대 고도성장의 뒤안길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하루 16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하고도 먹고살기 힘든 게 노동자의 현실이
었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외치며 죽음으로 항거한 전태
일 열사의 분신으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은 세상에 알려졌고, 이를 계기로 사
회 운동의 중심이 노동자 생존권에 집중하게 되었다.
3. 70년대
60년대에 이어 70년대는 중화학공업위주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였다. 노동
자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고된 희생을 치르고 있었다. '72년의 유신헌
법 자체가 기본권을 말살하는 것이지만 노동자들은 노동 3권이 극도로 제약받
았다. 노동자의 숨통을 조이는 법적·제도적(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 유신헌
법,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법, 외국인 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
에 관한 임시특례법) 통제에 의해 '단결권' 자체가 무의미했다. 이에 힘입은
개별 자본가들은 노골적으로 노동자를 탄압함으로서 노동자는 여러 겹의 고통
을 당해야만 하였다.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은 개별 사업장을 중심으로 노동기
본권 쟁취와 경제적 처우 개선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였다.
·종교단체 및 외곽단체의 역할
70년대 노조운동은 종교계의 지원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독일산업선교
회의 지원으로 전국 각지에 설립되었던 도시산업선교회는 10여 년의 활동을 통
해 한국 노동자의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목회의 방향을 '노동기본권 쟁
취를 위한 활동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70년대 중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는 중간간부교육사업(1974∼79년)을 전
개하였다. 이 교육과정에서 노동운동사나 노동3권에 대한 교육이 체계적으로
수행됨으로서 '자주적 조합 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 단체의 '소모임
체계의 공개적인 교육방법'은 그 효과로서 '중간간부'의 활동을 통해 유신독재
의 무제한 억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눈부신 단위노
조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경인지역의 경우 민주노조운동의 활동이 활발했
고 그 결과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상적인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의 발단인 `노가바'(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
70년대 노동자 투쟁의 공간에 함께 한 노래들은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통해
나온 '노가바'들이다. 구전된 가요에 가사를 바꾸거나, 알려진 대중가요에 노
동현장의 현실을 담은 가사를 넣어서 바꿔 부르는 형태가 만들어져 불려진 것
이다.
'아! 미운 사람' - 악보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 아∼살 수 있나요
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렸는데 아∼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친 눈에 빛이 보여요 내일에 찬란한 빛이.
구전가요: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 가요 아∼미운 사람
장가를 가∼도 아들을 못 나요 아∼미운 사람
아들을 나아도 ×자를 나아요 아∼미운 사람.
이 노래는 중간간부 교육 중 집단 창작시간에 만들어 졌다. 노래의 폭발적인
인기로 그 후로도 계속해서 잘 불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1979년 4월 박정희 군
사정권에 의해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4월7일)'이 발생하였다. 자생적인 반
국가활동으로 조작된 조직사건이었다. 당시 수사당국은 이 '노가바'의 가사 중
에서 '착취'라는 단어를 지목하며 반국가단체 구성과 활동으로 규정하였다.
노동가요사에서 '크리스천 아카데미 활동'이 갖는 의미는
첫째, '노가바' 창작
'아! 미운 사람' '작살조' 등.
둘째,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갖고 결합하는 지식인 문예일꾼들의 활동이 대두
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외국곡 번안 작업과 창작 활동이 이뤄진다.
·외국곡 번안 작업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노래로는 '큰 힘 주는 조합' '이 세
계 절반은 나' '흔들리지 않게' '가라 모세' '우리 승리하리라' 등 이 있다.
·창작곡으로는 '언덕에 서서(김문환)' '진달래(한태근)' '자유로운 노동자(신
인령 글, 김영동 곡)',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 '어찌 갈거나' 등이 있다.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불려진 '노가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72년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고 정권
의 탄압에 저항하며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76년 중앙정
보부 기관원들에 의해 노조간부들이 연행되자 석방을 요구하며 벌인 투쟁은 경
찰의 임박한 진압에 맞서 '나체시위'로 전화되었다. 당시 동일방직 여성 노동
자들의 '나체시위'는 사회 전반에 충격을 던졌다. 그러나 박정희군사정권과 결
탁한 어용한국노총 섬유노조 간부들의 동일방직 민주노조 파괴책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78년 민주파지부장 당선을 저지하려 벌인 선거 방해를 목적으
로 한 '똥물사건'에 이르기까지 끝을 모르고 탄압의 고삐는 조여들었다. 탄압
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하였으나 '78년 128명이 해고되면서 동일방직 민주노조
는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투쟁을 했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기억
하는 노래는 '진짜 노동자'와 '올드랭 사인'이다. 이 두 노래는 공교롭게도
노가바인데 '진짜 노동자'의 경우 1886년 미국 남북전쟁 때 부르던 남군의 군
가 '양키 두들'에 가사를 바꿔 넣은 것이다.
'진짜 노동자'
우리들은 노동자다 좋다좋다 우리들은 노동자다 좋다좋다
무릎을 끓고 살기보단 서서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노동자다.
*(당시 동일방직지부장 이총각 구술)
'올드랭 사인'
억눌림서 헤어나려 발버둥쳤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을 하였다
오 하느님 주신 권리 어디 있나요
세상아 너는 아느냐 억압자의 호소를.
·70년대 노동자투쟁의 상징인 YH노조, 원풍모방노조 노동자들도 정권의 폭압
적인 탄압 속에서 민주노조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을 하면서 많은 '노가바'를
만들어 불렀다. 이 글에 소개하는 '노가바'의 노랫말들을 살펴보면 당시 투쟁
의 상황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조개껍질 묶어'
1. 장용호 회장님은 탈법으로 돈 빼내어
미국에다 공장 짓고 백화점도 차렸다네
면목동 공장에는 빈털터리 끌어안고
은행 빚이 자산보다 두 배 정도 된답니다
3. 뼈빠지게 돈벌어주니 미국으로 가져가고
노동자는 내몰라라 팽개치고 오지 않네
5백 명 노동자는 어디서 먹고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살 방법이 막연하네.
'뛰뛰빵빵'
새장차 타고 새까맣게 몰려든 기동대들
그 속에서 우리들은 축구 볼이 되었었지
정신차려 계단이다 그러면서 집어던졌지.
'투사의 노래'
1. 나 태어나 원풍모방 노동자 되어
민주노조 세운지 어언 십 여 년
내 젊을 다 바쳐서 땀흘려 일했건만
9월의 마지막 밤에 매맞고 끌려났네
아- 억울하다 짓밟힌 생존권
민주노조 어디 갔나 감옥 속에 갇혀있네
2. 나 끌려나 거리에서 방황했지만
한 맺힌 이 울분을 참고는 살 수 없다
무엇을 배웠는가 무엇을 느꼈는가
어둠이 깊어지면 새벽이 밝아온다
아- 노동자여 잠깨어 일어나서
단결과 투쟁으로 민주화 이룩하자
·노래극 '공장의 불빛'
'공장의 불빛'은 동일방직노동자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노
래극으로 구성 한 것이다. 노동자의 기본권마저 무참히 짓밟는 유신독재의 폭
정 속에서 억압과 통제의 벽을 넘어 서기를 기원하며 노래매체를 통해 구성한
상징적 작업이었다. 학출 활동가들에 의해 구성된 이 작품의 의미는 당시 대학
문화역량과 사회문화운동 전반의 모든 역량이 처음으로 총화, 결집했다는 점이
다. 70년대 후반 비판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노동문화운동은 문화적 억압과
사상통제의 벽을 넘어 문화를 매개로 고통받는 노동자의 삶에 함께 하면서 노
동자의 권리 찾기에 함께 했다.
"「공장의 불빛」은 노래모음이지만 연극이기도 하고 오페라이기도 합니다. 정
말 현대적인 오페라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노래굿'입니다.."
". . . 1978년 제작된 「공장의 불빛」은 서울대 탈춤반 출신들의 모임이었
던 '한두레'의 작업의 한 부분으로 기획된 것으로 애초부터 공연물로 구상되었
고 그 구성에 있어 상당부분 공동창작이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나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카세트 테이프로 제작, 보급되고 그후 79년 2월 제
일교회에서 채희완의 안무로 무대에 올려져 "공장의 불빛"은 공연물로서보다
는 카세트테이프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70년대 후반의 공연작품들이 대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알레고리
적인 상황설정으로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에 비해, 동일방직사건이라는 70년
대 후반 노동운동에 있어서의 중요한 사례에 입각하여 본격적인 노동문제를 다
루고 있다. 또한 이것은 민중현실로 접근하려는 김민기의 70년대 후반 작품 경
향의 정절을 이루고 있다. 특히 카세트 테이프라는 대중확산력이 강한 매체를
이용하고 뒷면에 반주음악을 실음으로써 대중적 확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공장의 불빛"은 매우 전형적인 사건 전개를 가지고 노동문제
에 접근하였다는 점, 악곡과 가사의 강렬함, 그리고 카세트테이프가 가진 놀랄
만한 대중적 확산력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고 그후의 여러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 ."
'공장의 불빛' - 악보
예쁘게 빛나는 불빛 공장에 불빛 온데 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이대론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야근'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개에 오만원씩 이십만원을 술 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털이래
야 야 야 야 울고 짜고 해봐야 소용 있나요 막 노동판에라도 나가봐야죠
불쌍한 언니는 어떡하나요 오늘도 철야 명단 올렸겠지요
*(30년대 일본군군대에서 부르던 가락에 가사를 바꿔 만든 노래가 '야근'인
데, 이 군가 가락은 지금도 군대의 뒷골목에서 불려지고 있다.)
그 외에 70년대 노동자들이 기억하는 노래로는 '전태일 추모가'와 '불나
비'가 있다.
'불나비' - 악보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 섞인 미소로 지워 버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 마음은 곧 터져 버릴 것 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 버릴 것 같아
친구야 가자! 가자! 자유 찾으러 다행이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 갈 테야 푸른 하늘 넓은 들을 찾아 갈 테야
노래 불나비의 창작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노래
가 불려진 진원지는 '70년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노조 싸움을 치
열하게 전개한 청계피복 선배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이다. 누가 만든 노래인지
는 확인되지 않지만 '75∼76년부터 불렀다 한다. *(당시 청피노조 지부장 양승
조 구술, 2002년)
'70년 11월13일 전태일 동지의 분신은 사회 운동의 중심이 노동자 생존권에
집중하는 큰 계기가 된다. 당시 노동청장인 이승택은 영세노동자들의 노조결
성 지원 및 8개 조항을 열사의 빈소에서 약속했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
아 탄압의 본색을 드러낸다. 그 해 12월 사업주들의 탄압에 맞서 이소선 어머
니와 지부임원들은 '집단분신 불사투쟁' 노동교실 폐쇄에 맞선 사수 투쟁 등
유신 박정희 군사정권 집권기간 내내 폭압의 한 가운데에서 투쟁하였다. 그러
나 새로이 권좌를 꿰찬 전두환 정권에 의해 '81년 1월 청피노조는 해산되었
고, 이후 청피노동자들은 비합법적인 방식을 통해서 노조운동을 전개하였고,
재취업 운동을 통해 노동현장으로 들어간 청피 출신 노동자들은 '85년 구로 연
대투쟁의 중심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84년부터는 청피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을 통해 노동자·학생 연대투쟁의 전형을 만들어 가면서 전두환 신군
부 정권 자체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투쟁하
여 '88년 5월 마침내 청피노조는 18년 간의 오랜 투쟁을 통해 합법노조를 쟁취
하게 된다. '평등·평화·자유' 세상을 위해 맞서 싸우는 에너지로서 노동자
의 노래 '불나비'는 전태일 열사 정신을 이어 받아 현재까지도 노동자들에게
불려지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4. 80년대
18년 동안의 박정희 군사정권의 폭압을 뚫고 맞이한 '80년 민주화운동의 열기
는 물가고에 신음하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에 적극성을 보였다. 평균25∼
50%에 이르는 높은 임금인상을 요구함으로써 70년대와는 달리 노동자들의 투쟁
이 밑받침되었음이 확인된다('80년 1월부터 5월까지 노동청에 조정신청을 낸
사업장이 511건에 이른다). 그러나 전두환을 위시 한 정치군인들이 광주민중
학살을 재물로 야만적으로 권력을 획득하면서 비극의 서막은 다시 시작한다.
정권을 강탈한 전두환정권은 노동계 정화를 내세워 70년대 후반 민주노조의 선
봉인 원풍노조 해산을 시작으로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해태제과 등 민주노
조를 해산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조간부들은 삼청교육대에 보내져 소위 '정
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면적 탄압을 받게된다.
·80년 오월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글 - 악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묏 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中에서..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82년 10월 광주지역 연행패에 의해서 '80년 당시 도청
에서 산화해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학생출신 노동운동가로 아깝게 젊은 삶
을 마감한 박기순 열사의 영혼 결혼식(빛의 결혼식)인 넋풀이 굿을 준비하면
서 발표되었다. 노랫말은 백기완의 기록시 모음집인 '젊은 날'에서 따온 것이
다. 백기완은 '79년 겨울부터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현장에서 살아 남은 자로서의 몫을 해야 한다는 저항의 울부짖음으
로 시들을 기록했다 한다. 그리고 이 시들은 고문에 의해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을 때마다 담당 의사에게 부탁하여 맡겨 두었던 것들이 '80년 12월 시집 '젊
은 날' 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시집을 읽다보면 '가신 님' '우리들의
합창' '묏 비나리' 등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을 찾아 볼 수 있다.
·민중교회
80년대는 공단주변에 민중교회 내 노동상담소를 통해 노동자 소모임 교육활동
과 야학 활동이 활발히 이뤄진다. 이 공간을 통해 노동가요들이 만들어졌고,
대학 내 저항 써클인 노래패에서 창작한 민중가요들이 전달 확산된다. 서울의
동월교회, 성남의 주민교회와 산자교회, 인천의 백마교회와 사랑방교회, 안산
의 노동교회, 안양의 돌샘교회 등이 있다. 전두환 신군사정권의 야만적 탄압
속에서도 '84∼6년경에는 성당이나 민중교회를 중심으로 노동현장에서 벌어지
는 투쟁사례를 발표하는 소규모 집회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이 집회를 통
해 저항의 노래 민중가요가 전해지는 데 다수의 노래가 '80년 5월 광주를 내용
으로 한 것이었다. '광주 출정가' '오월의 노래1' '오월의 노래2' '꽃도 십자
가도 없는 무덤' '전진하는 오월' '찢어진 기폭' '광주천' '혁명광주' 등이 있
다.
·'85년 '구로동맹파업'과 4·15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
정권의 폭력적 탄압에 의해 70년대 말 80년 초의 노동운동은 새로운 활동을 모
색해야했다. 한편 대학에서 70년대 유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투쟁하였던
대학운동권들은 1980년 봄 민주화시기를 신군사정권에 의해 차단된 이후 변화
를 겪게된다. 그들은 5.18광주학살에 충격을 받고 대거 노동현장으로 이전하였
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들은 1980∼85년경까지 1,000명 이상이 노동현장
에 투신해 수도권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또, 70년대 민주노조를 통해 배출
된 선진노동자들도 비공개적으로 사업장 모임을 조직하고 새로이 활동을 시도
했다. 이러한 양 주체의 움직임은 구로지역에서 1984년 '구로지역 민주노조운
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면서 대중과 결합해 갔다. 1985년 구로동
맹파업은 이러한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 및 선진노동자들의 활동이 민주노조운
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발전시켜 갔던 성과를 기반으로 발생되었
다.
5·18 이후 침체와 모색의 시기를 벗어나 '84년부터 잠재된 역량이 서서히 표
출되기 시작한다. 현장으로 재취업운동과 80년 이후 해고된 노조지도부와 열
성 해고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노동복지협의회('84년)'가 창립하여 개별사
업장을 넘어 현장 노동자들과의 연대운동 및 민주세력들과 연대의 구심 역할
을 한다. '85년 4·15 대우자동차 파업을 시작으로 6월 '구로동맹파업'은 전두
환 정권의 폭압을 뚫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쟁취해 나가는 투쟁을 전개한다.
'85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4·15투쟁에 함께 한 노래는 '늙은 노동자의 노
래' '임금 인상가' 와 노가바 '아! 대한민국'이다.
'아! 대한민국'
물가는 하늘위로 치솟고 임금은 바닥에서 빌빌빌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우리완 거리가 먼곳
잔업에 곱빼기에 특근에 데이트 나들이도 못하고
우리의 조그마한 꿈조차 산산이 부서지는 곳
원하는 것은 돈이없어 살수가 없고 뜻하는 것은 시간 없어 할 수가 없네
이렇게 우린 언제까지 살수가 있나 이제는 일어나 소리높이 외쳐부르네
아!아! 임금 인상하라 시간 단축하라 우리 함께 뭉쳐 싸워나가리.
구로동맹파업의 중심 대우어패럴 동지들의 투쟁의 공간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
래는 '선봉에 서서'이다.
'선봉에 서서' -악보
선봉에 서서 하늘을 본다 고향집 하늘 위로 굴뚝 연기가
투사가 되어 조국의 내일 이 몸과 이 혼으로 싸워 나가리
오 어머니 당신의 아들 딸! 자랑스런 민주의 투사
영광의 전적 뿌려진 피 땀 어머니의 눈물이런가
파도가 되어 피 끓는 함성 민주아 내 사랑아 싸워 나가리.
5. '87년 대투쟁
'87년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있어서 혁명적 전환의 시기였
다.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찾아 볼 수 없
었던 노동자의 폭발적인 파업투쟁과 자주적 민주노조 결성의 역사적인 계기였
다.
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87년 들어 발생한 노동쟁의는 3,749 건으로 80년대
들어 가장 많은 쟁의가 일어났던, 80년 407 건의 무려 9배에 달하는 폭발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1987년 3,749 건의 쟁의 중 3,341건이 6.29이후
7,8,9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는 하루 평균 44건의 쟁의가 발생한 것으
로 86 년 0.76건에 비해 무려 58배가 증가한 것이다.
시가행진을 `아리랑 목동'으로
노동자 대투쟁의 첫걸음을 내딛고 전국에 노동운동을 촉발시켰던 진원지는 울
산 현대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1987년 8월 17∼8일 현대그룹 노동자 6∼7만
이 "민주노조 인정하라!"를 외치며 총파업을 전개하면서 시내로 진출하여 시
위를 할 때 노동자들은 대중가요 `아리랑 목동'과 `훌라 송'을 불렀다. 노동
자 대투쟁에 대중가요와 군가 및 구전가요가 불려진 것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8월 12일 서울에선 지하철노동자가 노조를 결성하고 동시에 기지
순회 투쟁을 하였는데, 그 현장에서는 `삼삼칠 박수'가 분위기를 엮어 갔다.
1987년 폭발된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에 대중가요와 군가가 주로 불려진 것은
대학가와 민중교회 및 야학을 중심으로 불려지고 소통되는 저항가요가 대중적
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기간에
는 일반적으로 익숙한 대중가요가 투쟁의 공간에서 해방의 장을 만들어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 김형균 구술, 1991년; 지하철 노동자 박정규 구술, 1994
년)
·80년대 노가바
'노동자 청춘(대중가요 '아빠의 청춘')' - 악보
이 세상의 노동자는 다 같은 마음 한 푼 두 푼 돈벌어서 행복하자고
마음으로 믿어주는 동지들인데 힘없는 노동자라 얕보지 마라
모든 것을 만드는 건 노동자이다
얼씨구 절씨구 노동자 청춘 단결 투쟁 노동자 만만세
'아빠가 농성하면(대중가요 '한 많은 미아리 고개')'
1.아빠가 농성하면 가족들은 걱정인데
적자타령 사장놈은 오늘밤도 요정으로
당신은 저임금에 졸린 눈을 부릅뜨고
삼 년이 가도 오 년이 가도
끝없는 잔업철야 형편없는 작업조건 한 많은 노동자 신세
2.아빠가 동료들과 노동조합 결성해서
보다 나은 내일 위해 임금인상 투쟁할 때
당신은 누구보다 멋진 남편 노동자예요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당신을 사랑해요 제가 여기 있을께요
열심히 싸워 주세요.
'단결로 뭉쳐진 동지(짚시 여인)' - 악보
우린 단결로 뭉쳐진 동지 끝이 없는 투쟁을 하네
낮에는 싸우랴 밤에는 학교가 힘겨운 투쟁이었네
때론 짜증도 부려 봤다네 하염없는 눈물 흐르네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노동해방 반드시 이룩된다네
내 마음에도 갈등은 있어
우린 서로 얘기 나눠 동지애로 뭉쳐진 우리 위장폐업 분쇄하네
단결 투쟁 승리 깡순이야 끝이 없는 투쟁을 하네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노동해방 반드시 이룩된다네
위에 기록한 '노가바'는 80년대 후반 현장 문화활동의 경험 중에서 불려지고
만들어진 '노가바'들 중 대표적인 것이다.
· 노동가요 전문 창작자 출현
'87년 투쟁의 현장 그 중심에서 '행진곡풍 노동가요'가 만들어진다. 주로 현
장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구로와 마산·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행진곡풍
노동가요'가 만들어져 불려졌다. '행진곡풍 노동가요'의 특징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가락의 특성과 투쟁을 통해서 획득한 생생한 감동이 담긴 가사에 있다.
행진곡풍 노동가요의 탄생으로 대학노래패를 통해 내려오던 민중가요의 전통
적 양식을 넘어 투쟁을 통해 승리감에 젖은 노동대중과 호흡을 같이 하는 부르
기 좋고, 투쟁의 하루를 반성하게 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노동자의 노래가 탄생
한 것이다.
·'행진곡풍 노동가요'의 탄생의 배경에는 노동시의 발전이 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노동시의 발전은 노동자 노
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88년)' 박
노해의 '노동의새벽('84)' '머리띠를 묶으며('88)' 그 외 김남주의 시집을 통
해 발표되는 시구가 노동가요 작곡가들에 의해 노랫말로 만들어져 발표된다.
시어를 통해 형성된 노랫말들은 시어가 함축하고 있는 감동과 가락의 고조에
서 증폭되는 감정 이입을 통해 노래의 표현양식을 확장시키고 한 번 들으면 정
수리에 딱하고 박히게 하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이 시인들은 '87년 노동자 대
투쟁에 직·간접적으로 결합해, 조직가이며 선전활동가, 선동가, 시인으로서
운동가의 모범을 보였다.
·'행진곡풍 노동가요'의 탄생기 대표적인 창작자로는 '김호철' '고승하' '김
봉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공단의 노동단체를 통해 활동을 하면서 노동가
요를 만들고, 투쟁의 공간에 전파시키는 역할을 통해 노동운동의 고양에 함께
했다.
'파업가(김호철 곡)' - 악보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 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 쪽 나도 지킨다
노조깃발아래 뭉친 우리 구사대 폭력 물리친 우리
파업투쟁으로 뭉친 우리 해방깃발아래 나선다
'단결 투쟁가(백무산 글)' - 악보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백골단 구사대 몰아쳐도 꺾어버리고 하나되어 나간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실천하는 진짜 노동자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아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 뿐이다
이 노래들은 '88년 여름과 가을을 거처 마치 들판에 들불이 번지듯이 삽시간
에 전국 노동자의 가슴과 가슴에 울려 퍼져 나갔다. '88년부터 90년대 초반까
지 엄청난 파급력을 갖고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어 "노동운동 입문의 시작은 노
래로부터"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당시 노동가요를 부르는 것은 노동자의 처
지와 입장을 하나로 묶어 내는 힘이었으며, 그동안 억눌리고 빼앗겼던 삶의 분
노를 노래에 실어 승화하는 시간이었다. '87년 이후 민주노조 건설과 투쟁의
과정에서 민중가요는 농성장을 중심으로 입에서 입으로 노동자의 노래와 노동
자의 의식이 교육되고 전달되는 핵심요소였으며 민주노조를 지켜내는 힘의 원
천이기도 하였다.
· 노동문화단체의 형성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충격은 대학 내 진보적 문예활동가들에게도 활동의 방
향을 노동운동으로 전환시켰다. 대학 내 노래패 출신의 활동가들은 전국 각지
에 노동문화단체를 만들어 노동예술가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전국
적으로 많은 현장문화소모임(노래패) 구성의 구심이 되었고, 노조의 문화운동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자체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투쟁 속에서 결성된 문화패
노동가요는 새로운 방식의 노동자 조직을 만들었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지
하철노조 등 대기업 노조에서는 일상적인 문화 소모임인 노래패를 구성하였
다. 중소기업의 경우 민주노조 건설을 막기 위해서 자본측은 직장폐쇄, 위장폐
업, 자본철수를 자행하였고,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생존권을 사수하고 농성대
오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선전대를 결성하여 투쟁의 동력을 형성하였으며, 더
나아가 이들은 연대투쟁의 '선봉문선대'로 활동을 넓혀갔다. 이것이 더욱 발전
하여 지역마다 단일 문선대를 구성하기도 하였고, 이 조직은 경우에 따라 민주
노조 지도부 배출의 창구 역할도 하였다.
6. 90년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조합은 지역마다 '협의회'
결성을 거쳐 90년 민주노조의 전국 단일조직 결성으로 발전했다. '90년 1월 22
일 마침내 직종과 지역을 넘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결
성하였다. 559개 노조 18만 5천 조합원이 결집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전국노
동자의 조직, '전노협'은 전노협으로 결집한 민주노조 조합원의 이해만을 위
해 투쟁하는 조직이 아니라 4,000만 민중의 삶과 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조
직임을 선언한다. 특히 '89년 창작된 '전노협 진군가'는 전국 방방곡곡 노동자
가 있는 곳곳에서 힘차게 불려졌고, 전국노동자의 단결의 구심인 `전노협' 건
설에 대중적 참여와 확산을 가져오는 상징적 역할을 하였다.
'전노협 진군가' - 악보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전노협 원년인 1990년 5월 1일 '세계노동절'은 한국 사회에 노동운동의 역사
를 대중적으로 세워 가는 역동성을 보였다. 운동의 열기는 젊은 영화운동가들
에도 영향을 미쳐 s전노협 원년 세계노동절 기념 영화 '파업전야'가 제작된
다. 이 영화 주제가인 '철의 노동자'는 이후 노동자 투쟁의 선두 곡으로 우뚝
선다.
'철의 노동자' - 악보
민주노조 깃발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으세
강철같은 해방의지 와서 모여 지키세
투쟁속에 살아 있음을 온 몸으로 느껴보세
단결만이 살길이요 노동자가 살길이요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
단결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철의 노동자.
'90년 이후의 작업장 안에서는 `신경영 전략'이라는 노동유연화 공세를 통해
노동통제가 더욱 강화되었고, '기업문화운동'의 전개로 노동자의 일상 생활 깊
숙이 까지 자본의 논리가 거칠게 파고 들어왔다. '93년 한국노총과 경총의 노
경총 사회적 합의에 대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의 사회적합의 반대 투쟁, 현
총련의 공동임투, 전노대를 거쳐 '95년 11월 11일 50만 노동자를 포괄하는 민
주노동조합총연맹이 출범한다. '96년 노사관계 개혁위원회를 둘러싼 노동법 개
정 투쟁, 12월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총파업투쟁이 이어졌다.
90년대 후반은 90년대 초반과는 다른 현장의 변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는 여전이 왕성하게 노동가요가 노동자들의 단
결을 고취시키는 무기로 작용하였다. 정부와 자본의 전면적인 구조조정을 단행
하게 되어 전개한 '96, 97년 총파업 투쟁에서 노동자는 영하의 추위를 녹이며
날치기 노동법 반대를 외치며 `또다시 앞으로' '철의 노동자' `바위처럼' '파
업가' '노동악법 철폐가' '단결투쟁가' 그리고 빠른 템포로 개조된 `불나비'
그리고 폴란드영화음악 번안곡인 `가자 노동해방' 등이 노동자들과 함께 한 노
래들이다.
·현장노동자들의 창작활동.
90년대 후반의 새로운 양상은 7∼80년대를 관통하면서 현장에서 만들어 부르
던 '노가바' 양식을 뛰어 넘어 현장 노동자들이 노동가요를 직접 만들어 부르
는 것이다. '87년 대투쟁 이후 작업장 소모임 조직으로 정착한 노래패를 통해
서 성장한 선진문예활동가들이 이제 직접 창작을 하는 것이다. 창작곡이 발표
된 작업장의 배경을 보면 대체로 대공장 노래패 활동가들에 의해서인데, 이들
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과 문화적 자질이 지속적으로 훈련되고 축적되어
현장에서 벌어지는 활동들을 노래로 표현하고자하는 의욕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체로 창작의 직접적 계기는 구조조정이 광풍처럼 몰아치는 투쟁의 현장에서
일반적인 현상을 노래한 노동가요가 아니라 자신의 작업장을 배경으로 직접 선
동의 의미를 담는 노랫말을 담는 특성을 보인다.
아래의 노래는 현대자동차 노동자 김봉윤이 '98년 현대자동차 구조조정과정에
서 정리해고 된 후 자본의 해고통지서를 거부하며, 36일 간의 파업투쟁을 통
해 정리해고 분쇄 사수대 활동을 하면서 만든 것이다. 노랫말 중 "녹색의 물결
이 양정 벌 내 일터에 넘쳐나니"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녹색의
물결은 사수대의 상의인 녹색 티셔츠를 말한다. 이 노래는 '98년 여름 36일간
현장 노동자들에게 애창되어 투쟁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자노조 사수가'
이 한 몸 바쳐서 지킨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일천만의 노동해방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녹색의 물결이 양정 벌 내일 터에 넘쳐나니
그 어떤 적들의 침탈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동지여 내 비록 힘들고 괴롭더라도
자랑스런 노동자로서 끝까지 투쟁하겠다
동지여 떨쳐 일어나 지켜라 노동현장을
총파업의 선봉이다 녹색 사수대 현자노조 사수대.
'당당하게 돌아가리라'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2001년 2월 정리해고 통지서
를 받고 전개한 파업농성 3일 째 폭력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밀려나와 산곡성당
에 비상노조사무실을 설치하고 전개한 복직투쟁 과정에서 노래패 출신으로 노
조 쟁의부장을 하던 김창곤에 의해 노랫말이 만들어져 불려진 노래이다.
'당당하게 돌아가리라'
당당하게 돌아가리라 내가 있어야할 현장으로
당당하게 돌아가리라 빼앗긴 우리 자존심까지
거리에서 흘렸던 피눈물 모아 가족들의 애타는 그 마음 모아
당당하게 돌아가자 대자 동지야 당당하게 돌아가자 대자 동지야
조립 사거리에 승리의 함성 오를 때까지.
7. 맺는 말
'87년 이후 노동가요는 노동운동의 폭발적 발전 속에서 노동대중과의 관계를
형성했고, 노동자문예주체의 형성과 운동가요를 통해 노동대중과 문화적 동일
화를 가능하게 실현하는 실천운동이었다. '89년부터 '94년까지 기획되었던 판
굿 '꽃다지' 공연처럼 지역 및 연맹에 노동운동의 바람을 일으키는 기능을 수
행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 노래를 통해서 정치적 선동과 계급적 각성을
일으켰던 노동가요의 영향력은 떨어져있다. 60만 민주노동자의 구심인 민주노
총의 주도 아래 문화기획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현장에 전달되고 있으며, 대공
장을 중심으로 규모 있는 사업장에는 노동자노래패가 전국적으로 형성되어있
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구도는 생동감을 잃은 지 오래이며, 전국에 흩어져 있
는 전문 연행집단과 전문예술활동가들이 창작 발표하는 노동가요의 대중적 영
향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한 예로 전문노래패 꽃다지의 경우 '93년까지
는 음반을 제작했을 때 판매량이 3만장 정도로 막강한 파급력을 갖고 노래를
통해 현장을 조직하는 영향력을 갖고있었다. 그러나 '99년 이후 최근에 제작
한 노래 테잎의 경우 3,000장이 나가기도 힘든 상황이라 한다. 노동가요가 대
중적 영향력을 많이 소진한 현재에도 여전히 '87년 대투쟁 이후 대중의 호응
이 좋았던 영향으로 공연과 노래테잎, CD 보급을 위주로 창작활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나는 이를 넘어야 한다고 본다. 최근 노래운동 발전과정에서 네티즌
에 중심을 맞춰 인터넷 음악 방송을 이용하는 움직임 등이 적극적인 방식으로
판단된다.
끝으로 노동가요발전을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데 집중해야할 방향은 전
체 노동자의 57%에 이르는 계약직·용역직 비정규직 노동자조직화에 노래운동
진영이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전문창작자들의 경험을 확장하고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는 방법을 적극 모색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