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국 시인의 시조집 『그래도 너를 믿는 그래서 너를 참는』
약력
1958년 경기도 양주군 덕정 출생.
국립 철도고 졸업. 서울예대 문창과, 경기대 국문학과 졸업.
2001년 시조 전문지 《시조세계》로 등단.
시조집 『내 마음 속 게릴라』, 『명왕성은 있다』,
『난 네가 참 좋다』, 『동두천 아카펠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공모에 평론 시조의
『아킬레스건과 맞서다』 선정,
평양 기행문 『평양에서 길을 찾다』
제6회 노산시조문학상 수상.
(사)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yong5801@hanmail.net
시인의 말
세상에 반가운 일 사방에 널렸는데
인생에 고마운 일 천지에 숨었는데
받들고 믿어야 할 일 모르면서 살았네
2024년 뙤약볕 그늘에서
정용국
눈물
동지 볕이 묻어나는 박오가리 속살에는
세상 근심 댓 말가웃 오종종 모여 산다
그 누가 돌보지 않아도 의젓하고 착하게
서둘러 지고 마는 겨울 해가 아쉬워도
발길이 끊어져서 마음이 허둥대도
비대면 불신의 시간도 다독여서 가야지
세모의 간절함이 상처로 뒹굴지만
그래도 너를 믿는
그래서 너를 참는
간절한 등불 하나씩 가슴속에 품고 산다
소파를 보내며
취한 몸도 받아주고 게으름도 참아주며
살벌한 전시에는 안방이 되어주던
말귀도 훤할 듯하다 솔기 터진 저 화상
살갑던 웃음소리 날이 섰던 말다툼에
풀 없이 주저앉던 실망의 무게까지
모른 척 버티던 다리도 힘에 겨워 울었다
얼룩진 팔걸이에 모처럼 코를 묻고
마지막 네 품에다 몸을 맡겨보는 밤
옹색한 변명이 길다 너그럽던 꿈자리
걱정 인형*
-시조시인 박권숙
1.
조붓한 골목길을
그래도 잘 걸어왔다
둥글던 수상 소감엔
만정이 가득했지
그늘꽃
육십 년 세월
울컥하고 스몄다
2.
마음에 걸리던 것
백비로 눌러두고
아삭한 시조밭에
꽃바람도 불러보자
새까만
오만 걱정들
인형에게 맡기고
*과테말라 속담에 나오는 걱정을 대신 해준다는 인형.
쌍화점䉶花店, GS25
질펀한 앞가슴을 민망하게 펼쳐놓고
직원은 나른해도 고객은 편리하게
스물넷 긴 하루도 모자라 별 하나 더 밝혔네
밥때 없는 학생에겐 시간도 쪼개 팔고
막걸리 러브젤에 고양이 간식까지
쌍화점 냉동만두는 몇십 초면 화끈해
짬이 없는 초딩들도 할 일 없는 할머니도
동전부터 카드까지 뒷골목 구석까지
주머니 주리를 튼다 온 동네가 훤하다
소녀상
아직 여자가 되기도 전에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소녀야
주근깨 까뭇한 얼굴 갈래머리 아가야
봉물로 넘쳐나는 야스쿠니 신사에는
인색한 팔십 년이 시들어 날아가고
말쑥한 선진국 장관들 빈말들이 넘친다
아흔넷 애기가 된 흐린 눈을 가눈 채
엄마 품 열네 살이 어제 같던 소녀야
먼 이국 허튼 꿈 으깨던 저 하늘만 푸르다
해설
뿔 꺾인 현실과 거인의 꿈
임채성 시인
시대마다, 사회마다 당대의 주된 흐름과 불화하는 존재가 있다. 그 아웃사이더의 대표자가 시인이다. 자의식이 강한 시인 일수록 세계와의 불화는 필연이 되며, 시인은 이 불화를 생생한 사건으로써 온몸으로 감각하고 온 정신으로 사유한다. 모든 시편의 행과 연은 시인의 분투 현장이므로, 시인의 진술은 비판적이며 이상을 지향하게 된다. 현실과의 부조화를 통해 '심리적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는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며 영혼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자의식은 지리적 공간이나 물리적 현실과 상관없이 절대적인 공정과 평등에 눈높이를 맞출 때 더욱 또렷해진다. 세상과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이 명확해지며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분연히 떨쳐 일어설 힘이 생기는 것이다.
정용국 시인은 '여전히' 깨어 있다. 춥고 배고프고 아프지만 그것을 반전시킬 힘이 없는 변두리의 삶을 환기하는 현실 탐색 의지가 시대와의 불화, 사회와의 불화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그렇다. 그는 현실과의 불화가 빚어놓은 결핍의 한가운데를 파고들며 닫힌 현실이 아닌 이상적인 열린 미래를 지향한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쓸 수 없다며 불가능한 표상에 도전하는 시인은, 기층민의 일상을 다독여 주어야 한다고 때로는 웅변하듯, 때로는 귀띔하듯 알려주며 현상학이 보여줄 수 없는 길을 탐색해 간다. 열렬한 혁명 전사나 투사가 되기보다는 돈키호테의 용기에 기대 표상 자체의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결기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눈앞에 펼쳐진 비정한 현실에서 막연하게 희망을 거론한다는 것은 몽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보다 이상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희망은 절망의 부재나 극복이 아니라, 절망을 같이 짊어지고 견디는 것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 같다. 이처럼 시인은 존재 사건의 주체로서 존재자의 고통을 환기하며 그 고통이 사라진 시대를 염원하며 희망을 북돋우고 있다.
이번 시조집을 통하여 정용국 시인은 고통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 근원을 캐고, 모순된 제도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비판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문학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사회적 현실과 조건들, 예를 들면 고통, 아픔, 비애, 설움 등 삶의 구체를 직시한다. 그러한 태도는 내재적 초월에 대한 애착과 열망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강인하면서도 유연한 정신의 힘에서 비롯된 삶과 세계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경험적 이해 너머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 현실과는 다른 세계, 다른 삶, 다른 질서를 상상하게 만들고 그에 기초해 변화된 현실을 열망하는 시인의 바람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