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개조' 전환점 된 제주 여행...
여객선 갑판에서 만난 獨대학생,
혼자 다니는 자신감에 큰 충격…
대화 나누면서 '적극적' 변신
동아리 친구들과도 부대끼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동아리 부회장·동문회장도 맡아
지금은 무대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프레젠테이션도 하는 통신사 사장이지만,
나는 대학 입학 전까지만 해도
매우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다.
그런 성격은 성장 배경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유년 시절 가족과 떨어져
전국을 전전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1958년 나는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3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가정 형편 탓에 부모님과 떨어져
청주 할머니 댁에서 2년을 살다가,
다시 서울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친할머니와 달리 외할머니는 엄했다.
어릴 때부터 익숙했다면 모를까
낯선 환경, 낯선 어른들 밑에서 자라다 보니
어리광조차 마음대로 부리지 못했다.
표현명 KT 사장은 “어릴 때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 단점이었지만,
누가 제 장점을 물으면 사교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KT 제공
하루는 외할머니한테
했다가 혼찌검이 난 적이 있다.
외출했다 돌아온 둘째 외삼촌은
나를 뒷산으로 데려가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냈다.
방에서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대화가 들렸다.
계속 자는 척하고 들었다.
"그래도 현명이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겠어요.
어머니가 좀 잘해주세요."
조금 전까지 나를 불같이 혼냈던
외삼촌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때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보았다. 한편으론
어린 나이에 어른들의 세계를
눈치를 통해 알아채고 그에 맞춰서
생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환경은 내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기보다는 어른들과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 맞추는 쪽으로
내 성격이 굳어지도록 했다.
아홉 살이 돼서야 나는 부모님과 함께
부산에서 살게 됐지만 그것도 잠시,
중학생이 되면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
학교를 다녔다.
자주 바뀌는 낯선 환경 속에서
나는 점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뜻하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 별문제가
안 됐지만 대학교는 달랐다.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친구들을 사귀는 게 쉽지 않았다.
1학년 시절을 거의 혼자 지냈다.
공부에도 지장이 생겼다.
전자공학과는 함께 모여서 토론하고
문제 해결법을 찾는 스터디 그룹이
활성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그런 상태로 있다간
엉망이 될 것 같았다.
'자기 개조'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교내 '여행 동아리'였다.
원래 영화나 여행처럼
풍류에 대한 동경(憧憬)도 있었다.
'단양 8경' 같은 대한민국 곳곳의
멋진 여행지를 유람하며
동아리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조금씩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큰 전환점이 된 것은
제주도 여행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던 1978년 7월,
수중에 단돈 1만6000원을 들고
9박 10일간의 제주도 여행에 나섰다.
동아리 친구들과 서울에서
통일호 밤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갔다.
오전 10시에 목포항에서 제주로 떠나는
정기 여객선 '안성호'가 있기 때문이다.
3등칸 표를 끊고 배에 올랐다.
화장실 옆자리라 냄새도 솔솔 났다.
장장 9시간이 걸리는 뱃길에
지쳐갈 무렵, 나는 갑판에 나와있는
한 외국인 청년을 만났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여행을 온
내 또래 대학생이었다. 이름은 '볼프강'.
당시 독일로서는 거의 오지
국가나 다름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작은 항구도시
목포에서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하는
볼프강이 내겐 충격이었다.
그 무모한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존경스러웠다.
나는 짧은 영어 실력이었지만,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 자체가 나에겐 엄청난 용기였다.
신기하게도 몇 마디 안 되는
영어 단어로도 대화가 가능했다.
"두 유 노우(Do you know) 와장창
태권도?" 하고 물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볼프강과 어울리면서
스스로가 참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사람에게 먼저 다가서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그것도 외국인에게 먼저 다가가
이렇게 대화까지 나누다니….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9박 10일간 제주도에서
동아리 사람들과 먹고 자고 부대꼈다.
그들에게 나를 보여주고,
나 역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여행 마지막 날 밤, 우리는
남은 돈으로 소라와 막걸리를 사다 놓고
함덕해수욕장에 둘러앉아
이번 여행과 서로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동아리 친구들은 "조용한 줄만 알았는데
참 인간적이고 친근하다"며, 나에게
'인간 표현명'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또래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공개적으로 알게 된 첫 경험이었다.
그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소심하고 소극적이기만 했던 내게
이 일은 매우 고무적인 경험이었다.
그 여행 이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소심한 신입생이었던 내가 나중에
동아리 부회장까지 하고,
고등학교 동문회 회장까지 맡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는 자원해서
석사 장교로 입대했다.
비록 6개월의 짧은 군 생활이었지만,
입대할 때부터 마치 6년을 복무하는
사람처럼 열심히 하겠다고 작정을 했다.
입소 첫날, 중대장 후보생을
뽑는다고 하길래 손을 번쩍 들었다.
구령을 해보라고 해
, "열중쉬어, 부대 차려, 뒤로 돌아"를
외치는데 입대 전날 과음한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구령에서 낙제점이어서
그날은 망신을 당했지만,
훈련 끝날 때까지 결국 부중대장,
중대장 후보생까지 다 하고 나왔다.
아이디어도 많이 냈다.
갓 들어온 소위가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해보려고
이런저런 제안을 많이 하니,
사단장님은 "표 소위는 군대에
말뚝 박아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지금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손을 내밀고 "표현이 명확한,
표 안 나게 현명한 표현명입니다"
라고 재미있는 인사를 건넬 만큼
적극적인 사람이 됐다.
내성적인 나를 바꿔보고자 올랐던
그때 그날의 '안성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인간 표현명'은 없었을지 모른다.
벌써 30여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의 안성호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첫댓글 인생의 전환점이 있습니까?
지금의 나로 발전시켜준 그때를 한번
회생해 봅니다~
맞습니다.
내가 나의 단점과 장점을 파악하여
변화를 주면서 새롭게 인생을 창조해야지요...
오늘도 깨달음이 있어 참 좋습니다.
내 자신이 먼저 좋은 변화를 이루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