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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67) 꿈에도 못 잊을 북한 신자들과 메리놀외방선교회
평양교구와 운명 같이한 선교사와 양떼가 꿈엔들 잊힐리야
- 1948년 10월 10일 평양 관후리 주교좌성당 사제관 앞에서 최항준ㆍ서항석 신부의 사제 서품식을 마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제6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와 사제단.
2007년은 정진석 추기경이 교구장 서리로 있는 평양교구의 교구 설정 80주년이었다. 정 추기경은 평양교구의 사목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정작 평양을 갈 수 없는 분단의 현실이 가슴 아팠다. 그는 교구장 서리를 맡은 이후 아직도 북녘 어딘가에 남아 있을 평양교구 신자들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북한과 평양교구에 대해서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욱 관심이 높았다.
바티칸에서 열린 추기경 서임식에 참석했을 때, 외국 추기경들과 외신들이 가장 관심을 표명한 부분은 북한 교회 문제였다. 교황도 정 추기경이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다는 것을 반기면서 북한 교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럴 때마다 정 추기경은 교류가 막혀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생사를 알 수조차 없는 오늘날 한반도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평안도 지역은 지리적으로도 우리나라 복음화의 대표적인 길목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전 평안도 지역의 복음화율은 그렇게 만족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본격적인 복음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반면 개신교는 일찍부터 평양 지역에 진출해 수많은 신도와 교회를 갖고, 교육과 아동 교육, 사회복지 사업 등에 정진함으로써 선교를 거의 독점했다. 개신교에서는 당시 평양을 아시아의 예루살렘이라 부를 정도였다.
- 북녘 본당에 있던 성전들의 모형도.
천주교는 1927년 3월 17일 서울대목구에서 평양지목구가 분리될 때, 1923년부터 이곳에 진출해 선교 중이던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들에게 평안도 지방 선교 사업을 위임했다. 평안도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늦게 선교가 이뤄졌지만, 꾸준히 교세가 늘어나 1927년에는 지목구로 설정됐다. 초대 지목구장에는 번(Byrne, 方) 신부가 취임했고, 2대는 모리스(Morris, 睦) 신부가, 그다음으로 부드(Booth, 夫) 신부가 교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부드 신부가 재임 중이던 1939년 7월 1일 교황청은 평양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시켰다. 이에 따라 오세아(O’Shea, 吳) 주교가 그 해 10월 29일 정식으로 교구장에 임명됐다.
그동안 평양교구는 선교는 물론 출판, 문화 사업과 각종 사회복지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적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국적의 성직자를 감금하고 끝내 국외로 추방했다. 그래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잠시 평양교구장 서리를 맡았다가 1944년 4월 17일 홍용호 주교가 평양교구장에 임명됐다. 홍 주교는 해방 뒤인 1949년 공산당에 납치돼 행방불명됐다. 1950년 유엔 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한 후, 교황청은 캐롤(George Carroll, 安) 신부를 평양교구장 서리로 임명해 교회 복구 작업에 착수토록 했으나 1ㆍ4 후퇴로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북한은 다시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됐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평양교구장 서리를 이어받은 정 추기경이었다. 역사를 되짚어 볼 때마다 그는 늘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양 지역에 정착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다. 1920년대에는 이미 베네딕도회가 함경도 선교를 맡고 있었고, 평안도 지역은 미국 개신교가 크게 성공한 상황이었다.
본래 교황청은 메리놀외방선교회를 중국에서 선교하도록 준비하고 있었는데, 중국에 들어가는 것이 시기적으로 이르다고 판단해 1923년 중국의 이웃인 북한의 평양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메리놀외방선교회 선발대가 평양에 도착해서 보니 개신교가 거의 독점적으로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메리놀외방선교회는 북쪽인 신의주로 가기로 결정했다. 신의주에서 선교를 시작해 점차 안정이 되면 남쪽 평양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겠다는 계획이었다. 다행히도 이 전략이 성공해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양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은 미국 국적의 메리놀회 선교사와 수녀들을 추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독일 베네딕도회는 독일이 일본과 동맹국이어서 추방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추방된 미국 선교사들은 해방 후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6ㆍ25 전쟁 때 군종 신부로 자원해 몇 달간만 북한 땅에 돌아올 수 있을 뿐이었다.
- 2007년 3월 18일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기념 행사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메리놀외방선교회 사제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이처럼 2007년에 설립 80년을 맞는 평양교구의 역사는 메리놀외방선교회 역사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리놀외방선교회는 정 추기경과도 인연이 깊은 수도회다. 그동안 메리놀회는 평양ㆍ청주ㆍ인천교구의 설립을 통해 한국 교회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 줬기 때문이다. 정 추기경은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한국 교회의 자립을 위해 무엇보다 한국인 사제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던 점을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메리놀외방선교회는 평양 지역의 실질적인 문화 중심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일본 식민 통치하의 암흑 시기에도 우리 민족의 민족적 자존심과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도록 많은 이들에게 빛을 줬다.
평양교구는 1945년 해방 당시 관후리(館後里)본당을 비롯한 본당 19곳, 공소 106곳, 교육기관 22개, 복지기관 17곳을 운영했으며, 신자 수는 1만 6400여 명이었다. 그러나 공산 정권의 납치로 많은 한국인 사제가 행방불명됐으며, 다행스럽게 살아남은 이들은 월남했다. 특히 6ㆍ25 전쟁 중 죽음의 행진 끝에 순교한 번 주교는 메리놀외방선교회의 첫 선교사이자 초대 평양교구장으로서 순교의 모범을 보여 줬다.
정 추기경은 이처럼 우리 민족과 동고동락했던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희생과 노력이 점차 잊혀 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현재 북한 교회는 모두 폐쇄됐고, 단 한 명의 성직자나 수도자도 없는 상태다. 정 추기경은 평양 지역과 가까운 경기도 파주에 민족화해센터와 참회와 속죄의 성당을 건립하려 했다. 이는 선교사들의 노고와 희생, 그리고 평양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신자들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였다.
정 추기경은 남북한의 화해는 남북이 서로 참회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인 용서와 관용의 길로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성당 건립의 아이디어를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예수성심대성당’에서 가져왔다. 이 성당은 100여 년 전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건립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서로의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프랑스 전 국민의 헌금으로 건립된 성당이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도 파리 몽마르트르의 예수성심대성당과 같은 목적을 가진 성전이 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정 추기경은 또 분단의 현장을 찾는 많은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이 이 성전에 찾아와 남북한의 화해와 일치, 세계 평화를 기도하고 돌아가길 기대했다.
[추기경 정진석] (68)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 기념 ‘바오로의 해’ 성지순례
바오로 사도의 숨결을 느끼다 신자들과 함께여서 의미 더해
- 정진석 추기경이 야외 미사 중 강론하고 있다.
정진석 추기경은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 기념 ‘바오로의 해’를 맞아 2008년 11월 서울대교구 홍보국과 가톨릭평화방송ㆍ평화신문이 공동 주최한 크루즈 성지순례에 참여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그리스, 터키 일대를 둘러보는 성지순례였다.
오랜만의 성지순례였다. 그리스, 터키 지역은 그가 신학생 때부터 성지순례를 꿈꿨던 곳이지만 시간과 기회가 없었다. 특별히 그는 바오로 사도 탄생 2000년을 기념하는 ‘바오로의 해’에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성지순례를 떠나게 되어 무척 기뻤다. 정 추기경이 성지순례를 간다는 소식에 300여 명의 신자들이 함께하기 위해 성지순례를 신청했다. 보통 성지순례를 하면 30명 남짓 떠나는데, 그 10배가 넘는 인원이 몰리는 바람에 인솔을 담당한 홍보국과 가톨릭평화방송측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례자들은 10박 11일간 바오로 사도의 복음 선포지를 걸으며 믿음 안에서 새로 태어난 바오로 사도를 따라 오늘날의 사회 환경에서 세상 모든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사도가 될 것을 다짐했다. 정 추기경을 중심으로 307명 순례자들은 부서진 돌멩이와 풀 포기마다 서려 있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발자취를 좇아 진지한 순례 여정을 걸었다.
300여 명 순례단과 사제 10여 명
성지순례는 바오로 사도 선교 여정의 일부인 코린토와 아테네, 테살로니카, 필리피, 에페소 등지와 사도 요한과 관련된 파트모스 섬, 요한 묵시록의 7대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300여 명의 순례단을 지도하는 사제단도 10여 명에 이르렀다. 지도 신부단은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통해 순례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도록 인도했다.
- 정진석 추기경(왼쪽)이 미사 중 사제들과 손바닥을 마주 치며 평화의 인사를 하고 있다.
정 추기경은 첫 기착지에 도착하자 순례단과 똑같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신자들 속에서 함께하려고 노력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신자들과 식사하고 강의를 들었고, 일과 중간중간에 있는 레크리에이션도 함께했다. 순례에 참가한 신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 추기경에게 친근감을 표현했다. 신자들 사이에 함께하는 정 추기경도 마치 소풍 온 학생처럼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신자들은 정 추기경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같이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 추기경도 순례단 신자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이름도 불러주면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식사나 이동 때 매번 다른 조에 들어가 한 사람이라도 더 알려고 애를 썼다.
틈만 나면 마이크 들고 열강을
예정에는 없었지만 정 추기경은 곳곳에서 마이크를 잡고 수차례의 열강을 이어갔다. 정 추기경은 보통 원고를 철저히 준비해서 강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순례지에서는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을 전해 주는 즉흥 강의를 펼쳤다. 오랜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끼고 체험한 내용이어서 오히려 신자들은 더 몰두해서 강의를 들었다. 어떤 신자들은 정 추기경에게 듣고 싶은 주제를 먼저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정 추기경은 틈만 나면 마이크를 들고 열강을 했다. 이 강의를 중심으로 나중에 책 한 권을 엮기도 했다.
- 정진석(왼쪽에서 세 번째) 추기경이 신자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 있다.
정 추기경이 강의에서 강조한 내용은 한결같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생의 진리에 눈 뜨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진 바오로 사도를 따를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다음으로 가정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강의했다. 그는 현대의 가정 문제를 지적하며 부모가 자녀에게서 존경받을 수 있도록 올바른 부부 관계와 부모 역할을 정립해 줄 것도 당부했다.
“부모는 가정에서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온전히 움직일 수 없다. 진정한 권위는 무력ㆍ금력과 전혀 다른 것이다. 권위는 상대가 존경하는 마음이 있을 때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존경하는 마음은 그럼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있을 때 비로소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고, 상대를 존경할 때 그 사람은 권위가 있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때리기만 하고 미워한다면 자녀는 부모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권위도 서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위대한 여정을 따라 순례를 하고 있다. 그럼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해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있는가. 2000년 전에 태어난 이가 오늘날까지도 우리를 이끌고 있는가. 무슨 힘으로…. 그 힘은 바로 권위다. 권위는 존경에서 나오고, 존경은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럼 사랑은 어떻게 해야 생겨나는가. 사랑은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청소년들이 인기 스타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모가 자녀에게 기쁨을 주고 그들을 인정할 때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다.”
정 추기경은 이번 순례를 ‘정화’와 ‘조명’의 영적 순례의 길로 승화시켜 참된 신앙 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했다. 정 추기경의 진정성 있는 강의는 듣는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순례 여정 중 정 추기경은 에페소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성모님의 집에서 미사를 시작하는 정 추기경은 시작부터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 정진석 추기경(왼쪽)이 에페소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에서 사제, 수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 추기경은 미사 강론에서 “이곳에서 자연히 우리 신앙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그분들을 만난 것은 기적이다. 그리고 기적은 우리 삶 곳곳에 있으며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기적이란 믿음의 결과가 아닌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주십사 간절한 기도를 드리자”고 했다. 정 추기경은 미사 후 야외 제대 옆 성모님의 집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한참을 기도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정 추기경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순례하는 동안 정말 오랜만에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새로운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마치 새로운 시선을 갖고 새로운 것에 눈을 뜨는 느낌이었다. 그에게는 많은 신자들과의 성지순례가 아주 특별한 체험이 됐다. 작별의 시간이 되자 신자들은 정 추기경에게 다가와 아쉬워했다.
“추기경님! 일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체험했습니다. 함께해주셔서 모든 게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성지순례 동안 하루하루가 지나보면 은총이 아닌 순간이 없었습니다. 건강하세요.”
정 추기경도 일일이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인사를 나눴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은 그동안 정이 들어서인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매일을 순례 떠나는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나의 삶 자리를 성스러운 땅, 성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께 청합니다.”
[추기경 정진석] (69) 가톨릭 상담의 열매
영성 상담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을 풀어주다
- 2009년 12월 16일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지도교수단의 예방을 받고 환담하는 정진석 추기경.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2008년 12월 2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정 추기경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다. 자신이 설립한 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의 제1기 졸업 미사였기 때문이다. 졸업 미사에서는 영성심리상담봉사자 제1기 92명이 배출됐다. 이들에게는 교구장 명의 ‘영성상담봉사자 자격증’이 수여됐다. 정 추기경은 미사에서 현대 사목에서 상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기 교육생을 모집할 때 지원자가 너무 많이 몰려 많은 이들이 아쉬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가 영성 상담에 얼마나 목말라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교육을 이수한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 마음에 평화를 일구라는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은 오히려 너무 각박해져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가 정신의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영성적인 심리 상담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건강하게 바르게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당에서 사제나 수도자가 영성 상담을 해야 하지만 그분들만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같은 헌신적인 상담 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미래의 사목은 상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교육원을 통해 훌륭하고 능력 있는 가톨릭 상담가들이 많이 배출돼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치유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청합니다.”
그의 말처럼 2008년 초 제1기 입학생을 모집할 때 80명 정원에 250여 명이 몰리는 등 뜨거운 관심이 집중됐다. 탈락한 신자들이 교육원에 전화로 항의하는 통에 직원들은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입학생들은 3월부터 2학기에 걸쳐 상담 실습을 포함해 사목 상담과 통교의 기본, 가톨릭 영성과 상담, 긍정심리 상담, 상담과 성서 등 모두 39개 강좌 160시간을 수강했다. 막 사제품을 받은 새 사제들도 한 달간 교육원에서 집중 교육도 받기도 했다.
- 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은 2007년 11월 14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교육원 사무실에서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첫발을 내디뎠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영성심리상담교육원은 아주 우연한 기회로 출발했다. 2007년 10월 말 몇몇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정 추기경을 방문했다. 한국가톨릭상담심리학회 발족을 위한 목적이었다. 정 추기경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교구청 신부들에게 서울대교구의 상담사목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했다. 평소대로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무척 단호하고, 내용은 분명했다.
“상담은 현대 사목에 꼭 필요한 부분인데, 서울대교구처럼 인적 자원이 많은 교구가 왜 앞장서지 않는가?”
어떤 신부들에게는 꾸지람처럼 들리기도 했다. 사제들은 회의를 통해 허영엽 신부가 다음날 가톨릭대학교로 가도록 했다. 그는 가톨릭대 심리학과를 찾아갔다. 이곳에서 한 교수를 만나 정 추기경의 의사를 전달하자 교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신부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일하는 가톨릭 신자 동료 교수들도 힘을 보탤 것입니다.”
실제로 그 교수는 이후 영성상담교육원이 뿌리를 내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교구로 돌아온 허 신부가 이 모든 상항을 보고하자 정 추기경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럼 빨리 조직을 구성하고 사무실을 내도록 하세요. 내년부터는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요.”
교구장의 지시인만큼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됐다. 며칠 뒤 11월 14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2층 207호에서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축복식이 열렸다. 정 추기경은 축복식에서 담담하게 소회를 밝혔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마련하신 역사라고 믿습니다.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대목에 ‘야훼 이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의 산에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저도 영성심리상담교육원을 볼 때 ‘야훼 이레’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다고 믿는데 여러분도 그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 정진석 추기경이 2008년 12월 2일 명동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봉헌된 영성상담봉사자교육 제1기 졸업 미사에서 졸업생에게 자격증을 수여하는 모습.
그리고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가 가톨릭 영성에 바탕을 둔 상담 전문가를 본격적으로 양성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또 영성심리상담교육원을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사 양성에 필요한 교육과 실습을 통해 자격증을 수여하는 사무처 산하 공식 기관으로 승인한다는 내용을 담은 ‘교회 단체 설립 승인서’에 서명했다.
이어 교육원 원장 안병철(당시 교구 사무처장) 신부와 사무국장 허영엽(당시 교구 문화홍보국장) 신부에게 위촉장을 전달했다. 정 추기경이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설립을 지시한 후 문을 열기까지 보름 남짓 걸렸다. 그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안은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신부들도 많이 고려하지만, 일단 결정을 하면 좌우를 살피지 않고 실행한다.
영성심리상담교육원 설립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정 추기경은 상담은 배우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자기의 내면을 돌아보도록 도울 뿐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큰 힘을 준다며 사제들 또한 꼭 관심을 갖고 사목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분야라고 생각했다.
교육원 설립은 이후 2016년 서울대교구 ‘서울가톨릭상담심리학회’ 창립으로까지 이어졌다. 학회 창립으로 2008년에 설립한 기존 영성심리상담교육원은 확대 개편됐고, 교구 내에서 산발적으로 운영되던 상담 관련 단체를 체계적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영성심리상담교육원은 매년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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