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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47) 부와 사치, 그리고 사람(묵시 18,9-24)
부와 사치는 하느님 뜻 거스르는 죄의 구조
울며 가슴을 치는 장면은, 예로부터 이어지는 인간의 한계를 폭로한다. 티로의 멸망 앞에서 바다의 임금들이 통곡하던 모습(에제 27,16–18 참조)이 그러했고, 오늘 세상에서도 화려함에 매달리던 욕망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그렇게 절망 앞에 무너져 내린다. 땅의 임금들이란 결국 부에 대한 집착이 무너질 때 폭로되는 인간의 실존적 공포를 대변하는 얼굴들일 것이다.
그런데, 로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요한 묵시록의 시대를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 결핍과 가난 속에 있었다. 세상의 화려한 부는 가난한 자에게 ‘넘사벽’처럼 보였지만, 요한 묵시록은 그 벽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심판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울어야 할 이는 가난한 이들이 아니라, 부와 사치를 붙잡던 이들이어야 했다. 그 울음은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삽시간에 닥칠 불가역적인 심판의 울음이었다.(여기서 ‘삽시간’이라는 그리스어 표현은 ‘단 하나의 시간’을 뜻한다.)
부와 소유를 향해 목을 매고 사는 우리 역시, 늘 급박한 울음을 가슴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더디 오지만, 결핍과 상실은 갑자기 그리고 무참하게 삶을 무너뜨리곤 한다. 본문은 이러한 부의 붕괴를 상품 목록이라는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12절부터 나열되는 물품들은 에제키엘 27장의 목록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로마 제국의 활발한 무역을 반영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장로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는 동방과의 교역에서 연간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얻었다고 한다.(1세스테르티우스는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고,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는 오늘날 가치로 거의 1조 원에 가까운 금액이다.)
금, 은, 보석과 진주는 바빌론의 불륜을 상징했던 사치의 언어이다. 고운 아마포와 자주색 옷감도 마찬가지다. 부와 사치를 하느님의 뜻과 대립하는 힘으로 바라보는 요한 묵시록의 시선은 보석의 화려함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관철된다. ‘비단’이라는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 묵시록에만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극치를 드러내는 표시였다.
향나무는 정교히 다듬어져 귀족의 탁자로 놓였고, 상아 공예품과 대리석 장식은 부유층의 집안을 가득 채웠다. 계피와 향료 역시 귀족적 취향의 일부였는데, 특히 계피는 인도에서 건너온 고급 향이었고, 귀족의 향수, 연회장의 공기 그리고 옷장과 침실의 향을 채우는 데 쓰였다. 한 리브라, 곧 300g의 계피는 2000데나리온에 해당했으니, 노동자가 5년 반 동안 일해 버는 임금과 맞먹는 가치였다.
올리브기름과 고운 밀가루는 당시 서민들이 심각하게 겪던 결핍을 떠올리게 한다. 물가가 치솟아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그 현실 속에서, 이 식품들은 단순한 재화를 넘어 굶주림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목록의 끝에 등장하는 단어 - 노예, 곧 σώμα, ‘몸’ - 는 가장 잔인한 진실을 드러낸다. 부와 사치의 정점은 결국 사람을 몸뚱이, 노동 기계, 객체화된 신체로 만든다. 로마 제국에서 노예는 물건이었고, 오락과 향락을 위해 소모되는 존재였다. 인간의 존엄은 값으로 환원되었다.
요한 묵시록은 말한다. 부와 사치는 인간을 ‘사람답지 않게’ 만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의 구조가 된다. 14절에서 ‘네 마음이 탐내던 열매’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물질과 권력이며, 그것은 이제 찾아볼 수 없으리라고 선언된다. 욕망의 방향을 바꾸라는 명령이 그 절정에 있다. 모든 선장, 선객, 선원, 바다에서 일하는 이들까지도 바빌론의 몰락을 보며 울부짖는다.(17-20절 참조) 그들은 바다 무역의 번영을 등에 업고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돈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지는 그들의 운명은 그 자체가 비극이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르다. 우리는 성도이며, 증언하는 사람들이다. 예언자들과 성도들 그리고 살해된 이들의 피(24절 참조)는 증언의 흔적이고, 그 증언은 바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고자 하는 갈망이다. 세상의 사치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만, 신앙은 인간을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존재로 회복시킨다.
부와 사치는 한때 달콤하지만, 지나고 나면 허무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생활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대우받는 것, 존재로서 존중받는 것, 우리의 존엄이 가격표가 아니라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99) 사도단에 치맛바람 일으킨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유다인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와 천재들이 많은 것은 그들의 특별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교육이 지식이나 암기, 연역적 방법을 중시하는 것에 비해, 유다인들은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감성이나 지혜에 초점을 두고 토론이나 귀납적 방법을 사용한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가장이며 제사장이며 교육자의 역할을 한다. 유다인들에게 식사 시간은 성경 공부 시간이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율법을 직접 받은 것 같은 감동으로 자녀들에게 토라를 가르친다. 논리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하며 자녀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한다.
그런데 과학계는 지능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주장한다. 유다인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어머니는 자녀 정서교육의 원천이며 최고의 심리치료사이며 교육의 상징이다. 어머니는 자녀의 거룩함, 올바른 행위, 좋은 성품을 계발해 주고 남편과 자녀들이 하느님 말씀을 배우게 도와준다.
자비로운 어머니는 동시에 능력이 있는 교사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교육열이 유별난 우리나라의 어머니들도 치맛바람(?)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이지만, 좀 더 지혜로울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식만 챙기다 보니 교권을 침해하는 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제베대오의 부인 살로메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아주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사도단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는데 어머니의 역할이 컸을 것이라 짐작된다.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 예수님께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여성 제자그룹의 가장 핵심 인물이었을 것 같다.
그녀는 왜 그렇게 예수님을 따랐을까? 유다 사회에서 여성은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사상과 활동에 매력을 느껴 전심전력으로 사도단을 도왔다. 살로메는 보통 유다인 가정처럼 아들들에게 많은 교육을 시켰을 것이다. 살로메는 인간적으로도 예수님께 큰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살로메는 예수님에게 청탁한다. 예수님의 나라가 서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하나씩 앉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분명히 예수님이 언젠가 큰 권력을 잡아 세상을 통치할 큰 인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도들 안에서는 당연히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물론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제자들은 드물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살로메의 치맛바람으로 사도단 내에 말썽이 난 셈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제자들이 모두 줄행랑을 친 후에도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밑에까지 함께했던 의리있는 여장부였다.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1장.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환대란,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환대는 주인이 손님이나 방문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기쁘게 해주는 손님 접대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환대를 의미하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환대는 현대 히브리어로 ‘하크나사트 오르힘’이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표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구약성경이 환대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환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바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며, 매우 중요한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환대의 본질과 실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절이나 입맞춤으로 인사하기(창세 18,2; 19,1); 손님을 안으로 맞아들임(창세 24,31); 휴식을 권함(창세 18,4; 판관 4,19); 씻을 기회 제공(창세 18,4; 19,2; 24,32); 음식과 음료의 제공(판관 4,19; 19,5); 안전 보장(창세 19,8); 숙소 제공(창세 19,2; 24,23; 판관 19,4-15); 손님의 여정을 위한 준비(창세 42,25; 44,1).
여기서 나타나는 환대와 관련된 두 가지 핵심 요소는 ‘제공’과 ‘보호’이며, 따라서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는, 손님이 마주한 수많은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제공하는 주인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손님을 위해 환대를 실천하는 가운데, 낯선 이는 손님이 되고, 그는 다시 친구로 변화됩니다.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의 모습은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세상의 참된 주인이라는 신앙의 눈으로 구약성경의 본문을 살펴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나그네의 여정 속에서 하느님께서 물과 양식,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신 환대의 모습을 지나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환대를 베풀어 주셨고, 그 모습을 닮아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환대를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환대와 관련하여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개념과 현대 문화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하는 환대의 개념은 부분적으로만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환대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친구나 친척 간에 교제하는 행위 속에서 숙소나 음식을 공유하는 여가 시간의 활용으로 이해합니다. 반면에, 고대 근동(古代近東, Ancient Near East)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구약성경에서 환대는 단순히 우정을 나누는 시간을 넘어, 낯선 이들 특히 나그네를 손님으로 삼거나 친구처럼 대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은 고대 근동에서는 숙박 시설이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와 기후 조건으로 나그네들은 현지 주민들의 보호와 함께 최소한의 물과 음식, 쉴 수 있는 공간의 제공이 없이는 일정 기간 생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관점에서 환대는 친교의 의미를 강조한다면, 고대 근동의 문화 속 환대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면서 ‘환대하는 공동체의 해’를 보내며, 환대의 개념을 친교의 장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의 이야기를 통해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낯선 이의 이웃이 되겠다는 결심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요? [2025년 12월 7일(가해)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인천주보 2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2장.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환대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의 드라마를 전해주는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환대를 하느님의 활동 안에서 풀어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그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든 활동을 우리는 하느님의 환대라는 주제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담고 있는 하느님의 환대에서 드러난 특징과 그분의 환대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
성경의 가장 첫 번째 장은 하느님의 창조 활동을 전해줍니다(창세 1,1-2,3 참조). 하느님의 창조 활동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황당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여기의 신학적 의도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참된 주인이라는 사실과 함께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지상 여정 속의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인간은, 주인과 나그네 /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그네인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양식과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과 땅, 살아가는 공간, 그 모든 것은 참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환대의 선물입니다.
2. 인간 생존을 위해 보호하시는 하느님
우리는 탈출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겪었던 고난과, 특히 이집트를 벗어나 광야에서 마주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40년의 광야 여정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마실 물을 마련하시고(탈출 15,22-27; 17,1-7 참조), 굶주림을 채워줄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십니다(탈출 16,1-36 참조). 인간의 능력만으로 생존할 수 없는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십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수천 년 전 광야에 머물던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보살핌과 그 활동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내 돈으로 내가 샀다’라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삶이 가능하도록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환대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3. 자비로우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환대와 인간이 보여주는 환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에서 드러납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인간의 죄와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악행에도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품어주는 하느님의 마음, 곧 하느님의 자비가 담긴 이야기도 전해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단지 죄의 용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마치 어머니가 태아를 품고 있는 것처럼, 인간을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이러한 마음 덕분에, 우리는 인간이 베풀 수 있는 환대와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 환대의 절정을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환대는 단순히 손님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풀면서 접대하는 것과 구별되는 행위입니다. 환대라는 주제로 한 해를 보내는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인간을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도 하느님 환대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되어, 하느님을 닮은 모습(창세 1,27 참조)으로 그분께서 보여주신 참된 환대를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25년 12월 14일(가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인천주보 2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3장. 환대의 모범
구약성경은 하느님의 환대와 함께, 인간이 베푼 환대의 모범적이면서 많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중에 가장 모범적이고 ‘구약성경의 환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세 명의 나그네에게 극진한 환대를 베푼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창세 18,1-8 참조). 성경 본문이 전해주는 아브라함의 환대하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우선, 만남의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 앞에 나타난 “세 사람”을 보자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며 땅에 엎드립니다(창세 18,2 참조). 아브라함은 자신 앞에 나타난 이들과는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들을 극진하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나그네가 신적 존재임을 알아보아서가 아닙니다. 그는 접대 이후에 사라에 관한 물음이 시작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창세 18,9 이후). 그런데도 그는 마치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을 맞이하는 것처럼, 낯선 그들을 만납니다.
아브라함은 이 만남을 초대로 전환합니다. 그는 “부디”라는 간곡한 표현으로 그들을 초대합니다. 이것은 형식이나 의무를 넘어서 배려하는 그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배려하는 마음은 나그네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여정으로 피곤한 발을 씻고, 주린 배를 채우며 원기를 회복하는 것-을 제공하겠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절정에 이릅니다(18,4-5 참조).
“그렇게 해 주십시오”(18,5)라는 응답으로 아브라함의 진심 어린 초대가 승낙되자, 아브라함은 분주하게 손님 대접을 시작합니다. 그의 분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는 모습, “빨리” 빵을 구우라는 명령, 소 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송아지 한 마리를 “서둘러” 잡아서 요리하는 모습에서 드러납니다(18,6-7 참조). 그는 손님 접대에 망설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그의 행동은 머릿속에 다음 행동이 준비된 것처럼, 빠르고 신속하며 망설임 없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아브라함의 환대가 유독 이 장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행해온 익숙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는 귀하고 좋은 음식-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을 가지고 직접 나그네들을 대접합니다(18,8 참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하인에게 시켜도 충분한 접대가 되는데도, 아브라함이 손수 음식을 나르고, 그들이 먹는 동안 그들을 시중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위선이나 사회적 명령과 관습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환대가 얼마나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환대는 우리에게 모범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단편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환대를 모범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귀하고 좋은 음식을 제공해서가 아닙니다. 만남에서 시작하여 초대와 접대로 이어지는 그의 환대는, 낯선 이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과 배려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낯선 누군가를 향해 환대를 베푸는 것만이 아니라, 낯선 이에게 제공받는 환대도 불편하게 여겨지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와 너, 우리와 너희라는 경계는, 넘어야 할 벽이 아니라, 점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고립과 분리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브라함이 보여준 환대의 모범은, 낯섦의 벽을 허물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일깨우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이제 우리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2025년 12월 21일(가해) 대림 제4주일 인천주보 2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 4장. 환대의 실천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환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환대를 베푸는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이것은 높은 이상적 가치를 바탕으로 전수되는 추상적 가르침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환대를 실천하라는 공동체를 향한 명령이었습니다. 그 명령은 오경의 법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 구절을 살펴보면서 환대의 실천을 향한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이스라엘 백성의 신원은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그들의 관계는 주인과 이방인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주인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환대를 베푸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환대로 생존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지상 여정 안에서 ‘이방인’이라는 신원 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이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환대의 수용을 넘어 환대를 실천하는 출발점을 제공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탈출 22,21-22)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탈출 23,9)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자기 인식은 이제 이방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갖도록 초대합니다. 주목할 것은 이방인을 향한 환대를 실천하라는 명령에 함께 등장하는 대상인데, 그들은 과부와 고아입니다. 구약성경의 법전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이방인과 함께, 사회·경제적으로 무력한 과부와 고아를 향한 환대를 강조합니다. 이방인, 과부, 고아는 당시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약한 이들로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이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길을 걷는 나그네의 생존을 위해 환대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면(창세 18장 참조), 구약의 법전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약자를 시야에서 잃지 않고,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환대의 실천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첫째, 약자를 향한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신명 10,18)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시편 146,9 참조). 하느님에게서 받은 환대를 다시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길은,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돌보는 이들을 향한 환대를 통해 완성됩니다.
둘째, 기억을 통한 공감의 마음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자신들이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들의 기억은 과거 사건의 회상에서 멈추지 않고 공감의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이방인, 과부, 고아로 지칭되는 약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의 높은 벽에 대한 이해와 그들을 헤아리는 태도, 곧 열린 마음은 환대 실천의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려줍니다.
구약성경이 전해주는 환대의 실천적 요구에서 그 출발점은 하느님의 환대입니다. 우리가 환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받은 환대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대는 어떤 이벤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여정 안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누구에게나 시간적, 공간적으로 열려 있는 삶의 태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다시 만난 신약 성경
‘다시’ 만난다는 제목이 부담스러울까요? 벌써 한 번은 읽어 보았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보에 싣는다는 것을 전제한 제목입니다. 주보를 읽는 분이라면 오늘도 주일미사에서 독서와 복음을 들었고, 강론도 들으셨겠지요. 어떤 식으로든 성경의 여러 본문을 알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처음인 것처럼 교과서식으로 설명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주보를 읽는 분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성경을 접하시겠지요. 몇 년 후에도 계속 강론을 듣고 주보를 읽으시겠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요약하려고 하지도 않겠습니다. 언젠가 제가 성경 읽는 것을 박물관 방문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박물관을 처음 가는 사람은 대충이라도 모든 것을 보려고 하지만, 이미 여러 번 간 사람은 다시 보고 싶은 어떤 부분을 주로 보거나 특별전을 보러 갑니다. 쉽게 말해서 ‘종주’보다는 ‘산책’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보를 모아두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글을 쓰겠습니다. 차곡차곡 모으면 책이 되는 글이 아니라, 한번 쓱 지나가는 글입니다.
그러면 이번 산책에서는 어디에 초점을 둘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왜 썼을까?”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을 때 던질 수 있는, 또는 던져야 하는 유일한 질문은 아닙니다. “왜 썼을까?”라는 질문은 저자에 눈길을 돌리게 하지만, 독자에 더 비중을 둘 수도 있고 다른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저자에 중점을 두는 것은 그보다는 더 고전적이고 기초가 되는 접근입니다. 대화에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또 대화가 하염없이 빗나가지 않게 하려면, 저 말을 왜 하는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본문에서 많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고 또 그 본문이 나에게 갖는 의미에 더 비중을 둘 수도 있지만, “왜 썼을까?”는 간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읽으려고 하는 책은 신약 성경입니다. 신약 성경을 왜 썼을까요?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신약 성경을 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려고 썼습니다. 예수님은 책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직접 다니며 신앙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교회들에 자주 직접 갈 수 없었기에, 서간을 쓰고 복음을 썼습니다. 직접 만날 수 없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알려주고 그들의 신앙을 길러주는 것, 이것이 신약 성경을 쓴 이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의정부에 있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루카가 이천 년 후의 신자들을 위해 복음을 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왜 썼을까요? 이렇게 멀리,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살고 있을 신자들에게도 그들이 알고 믿고 있는 예수님을 그대로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을 왜 썼을까?” 중대한 문제입니다. 신약 성경 저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성경은, 믿음을 간직하라는 그들의 유언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 다시 보기] 나는 믿나이다 1. 누구를?(로마 4,3) 2. 어떻게?(로마 1,17)
첫 번째로: “신앙고백”과 “사도신경”은 “나는 믿나이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동사는 타동사이므로 목적어를 가집니다. 그래서 자연히 “무엇을” 믿느냐? 또는 “누구를” 믿느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믿는다”라는 동사가 신약성경에는 자그마치 227번이나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도 요한의 문헌(요한복음서와 1요한)에서만도 98번이나 나옵니다. 요한에서는 주로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그분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믿으라 하는 말씀이 자주 나오고, 그 외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씀입니다(참조 로마 4,3).
“신앙고백”(니케아 - 콘스탄틴노폴리스 신경)에서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3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나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창조주 하느님을,
2. 그분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고, 동정 마리아를 통하여 오시어, 본시오 빌리도 통치 아래서 수난하고 죽고 묻히고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 오르시고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성자, 구세주 예수님을,
3. 주님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그분들과 더불어 같은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는 성화주 성령을. 그리고 “나는 고백합니다”라는 동사와 함께 덧붙이는 말씀은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희망합니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주동사는 3개:
1. 나는 믿나이다 창조주, 구세주 그리고 성화주를
2. 나는 고백합니다 유일한 세례를 그리고
3. 나는 희망합니다 육신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이것이 니케아(주후 325년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소아시아 북쪽의 한 도시>에서 소집한 공의회)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주후 381년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 폴리스<현. 이스탄불>에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이고, 이 신경보다 짧다는 이유로(?) 우리가 자주 읊는 “사도신경”은 “사도”라는 말 때문에 사도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 명칭은 주후 390년 밀라노 회의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입니다. 간단하긴 하지만 성령을 이해하기 위한 언급이 없어 아쉬움을 남습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을 어떻게 믿어야, 잘 믿는 것인가? 또는 바로 믿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이 믿음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6). 그리고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로마 1,17). 이 17절의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으려면, 하느님으로부터 “의로운 이”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갈라 3,11 그리고 히브 10,38에서도 또 언급될 만큼 중요한 말씀인데, 이 말씀은 구약의 하바꾹 2,4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히브리 원문은 이렇습니다: (짜디크 베에무나토 예흐히). 직역하면: 의로운 이는 그 성실함 안에서 삽니다. “성실함”이라고 하는 말은 “아멘 ”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성실함” 그리고 “진실함”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하느님을 믿는 믿음(신앙)은 일회적이거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오래도록 지속 가능한 것이라야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