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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학] 참다운 예배(아모스서)
아모스는 남유다에서 태어났지만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아모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대략 기원전 76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의 아들 예로보암 시대에, 지진이 일어나기 이태 전 그는 … 환시를 보았다.”(아모 1,1)라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로 기원전 760년경 팔레스타인 땅에 큰 지진이 발생했던 흔적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한 시기가 기원전 772년경이지요. 그러니까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비극을 고스란히 겪었던 예언자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저자들은 북이스라엘 멸망의 이유를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잘못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열왕기와 같은 역사서도, 예언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두 종류의 책들 사이에는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는데, 열왕기는 주로 왕의 잘못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예언서는 왕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삶을 향해서도 비판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예언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느님을 언짢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잘못들이 여러 번 언급됩니다. 그중에서 반복되는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벌금으로 사들인 포도주를 저희 하느님의 집에서 마셔 댄다.”(2,8), “너희는 베텔(‘베텔’-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던 장소)로 오너라. 그리고 죄를 지어라. … 아침에 너희의 희생 제물을 바치고 … 큰 소리로 자원 예물을 공포하여라. …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4,4-5),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5,21-23)
이러한 내용을 보면, 아모스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앞에서 잘못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전에 모여 모임을 하기는 하는데, 포도주만 마셔대고, 많은 제물을 드리는 것을 자랑하고, 시끄러운 노래나 부르면서 마음은 담지 않았던 것. 그것이 바로 아모스가 비판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이 과연 20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저지르던 잘못일까요? 오늘날 우리 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기우일까요?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각자가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믿나이다] (32) 바오로 사도
세 차례 선교 여행 떠났던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바오로 사도는 서기 8년 로마 제국 속주인 킬리키아(튀르키예 남부) 수도 타르수스의 벤야민 지파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사도 21,39; 필리 3,5. 가톨릭교회는 2008년에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을 기념했다.) 그는 유다인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습니다.(사도 22,28) 곧 부모에게 로마 시민권이 있었다는 뜻이지요.
그는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 랍비의 문하에 들어가 율법에 충실한 바리사이로 성장했습니다.(사도 22,3) 골수 바리사이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는 첫 그리스도인 순교자 스테파노가 처형되는 것을 지켜봤고,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이기 위해 특별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사도 9,1-2)
그는 다마스쿠스 인근에서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주님 음성을 들었지요. 그는 너무 놀라 사흘 간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지내다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게 되고 세례를 받습니다. 바로 ‘바오로 회심 사건’입니다.(사도 9,1-19; 22,4-21; 26,9-19)
바오로는 회심 3년 뒤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베드로 사도와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만나고 이후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선포합니다.(갈라 1,16-18)
바오로 사도는 바르나바와 함께 만 1년 동안 안티오키아 교회 신자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합니다.(사도 11,19-26)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다 땅에 큰 기근이 들어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구호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로 갑니다. 회심 후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었습니다.(사도 11,27-30)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45~49년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키프로스 섬 살라미스와 파포스를 거쳐 소아시아 남부 팜필리아의 페르게-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이코니온-리스트라-데르베까지 갔다가 안티오키아로 되돌아오는 여정이었습니다.(사도 13,3─14,27)
1차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의 할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사도 회의가 소집되고 베드로 사도와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유다인이 아닌 이민족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 하지 않아도 되고, 율법 준수에 대한 과도한 부담을 지우지 않기로 합니다.(사도 15,1-35)
바오로 사도는 이 결정으로 이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힘을 더욱더 얻게 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서 2차 선교 여행을 떠나지요. 50~52년까지 약 3년 동안 이뤄집니다. 바오로는 바르나바가 아닌 실라스와 함께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두루 다니며 그곳 교회들을 굳건하게 만든 후 데르베-리스트라-갈라티아 북부-프리기아-미시아-트로아스를 거쳐 사모트라케 섬을 통해 유럽 본토인 필리피로 갑니다.
바오로는 필리피에서 티아티라 출신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간수와 그 가족을 개종시키고, 행정관들의 요청으로 필리피를 떠나(사도 16,11-40) 암피폴리스-아폴로니아-테살로니카-베로이아를 거쳐 아테네로 갑니다.(사도 17,1-15) 그는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시민들을 대상으로 열띤 선교를 한 후 코린토로 향하지요.
그는 코린토에서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를 만납니다. 50~51년쯤에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을 씁니다. 그는 코린토 교회에서 1년 6개월 동안 지낸 후 에페소로 갑니다. 그런 후 카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갔다가 안티오키아로 복귀합니다.(사도 18,5-22)바오로는 얼마 후 3차 선교 여행길에 오릅니다. 53~58년 사이에 이루어집니다. 바오로는 두 차례의 선교 여행 때에 세운 교회들을 찾아 신자들을 격려하고는 에페소에서 27개월간 선교 활동을 펼쳐 콜로새와 히에라폴리스,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세우는 등 큰 성공을 거둡니다. 또 이곳에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들과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씁니다. 바오로는 갈라티아서를 쓴 후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코린토에 갑니다. 이곳에서 3개월간 머물면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씁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얼마 있지 않아 유다인들의 선동으로 성전에서 체포돼 카이사리아로 호송된 후 그곳에서 2년을 지냅니다. 바오로는 황제에게 상소, 재판을 받기 위해 61년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로마에서 2년 동안 셋집을 얻어 지내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후 순교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석방된 후 스페인까지 선교한 후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바오로 사도는 네로 황제 시절 63~67년 사이 로마 성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순교할 때 목이 떨어지면서 세 번 튀었는데 그 자리에 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그곳에 바오로 사도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당이 세워졌는데 로마 성 밖 ‘트레 폰타네’(세 분수) 성당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시신은 로마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 중앙 제대 아래에 모셔져 있습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본래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목적 배려로 주일로 옮겨 지냅니다. 오늘은 성체성사에서 중요한 개념인 ‘실체 변화’에 대해 알아봅니다.
미사 중에 바쳐진 빵과 포도주는 ‘축성 기원 기도’와 ‘성찬 제정 축성문’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합니다. 먼저, 사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빵과 포도주에 성령을 보내 주시기를 청합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성찬 제정 축성문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재현합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이는 …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이로써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사적으로’ 현존하게 됩니다.
빵과 포도주가 축성된 후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된다는 뜻으로 ‘실체 변화’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훗날 알렉산데르 3세 교황(1159~1181 재위)이 되는 롤란도 반디넬리(R. Bandinelli)입니다. 그는 1140~1142년에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상징주의와 사실주의 간의 첨예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상징주의란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표지로 보려는 입장이고, 사실주의는 빵과 포도주의 물질적 요소조차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실체 변화’는 이 두 입장의 극단을 배제하면서 성체성사의 신비를 밝힌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빵과 포도주의 외적 형상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실체
곧 빵과 포도주의 본성은 그리스도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적인 권능에 의해 빵이 몸으로, 포도주가 피로 실체 변화될 때, 그분의 몸과 피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제대의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신다”(DS 802).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신다는 신비는 트렌토 공의회(1545~1563)에서도 확인됩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성사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신성과 더불어 그분의 몸과 피가, 곧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제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계심을 부인하고, 오히려 그분께서 성체성사 안에 표지나 외형으로, 또는 효력으로만 계신다고 주장하는 자는 파문될 것이다”(DS 1651). 여기서 “참으로, 실제로 그리고 실체적으로”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체와 성혈 안에 온전히 현존하신다는 것을 확고히 선언한 표현입니다. 트렌토 공의회가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열린 공의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가톨릭과 개신교가 성찬례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는 개별 종파마다 성찬례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른데, 공통적인 건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실체 변화’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두 종교의 큰 차이 중 하나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하기에, 미사가 끝난 후에도 남은 성체를 감실에 모셔둡니다. 그리고 미사 밖의 영성체와 성체 현시, 성체강복, 성체조배 같은 성체 흠숭 예식을 거행합니다.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아 실체 변화의 신비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고, 정성스럽게 자주 영성체할 것을 다짐해 보면 좋겠습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18)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헌장」 제2장
「교회헌장」 제2장은 “하느님의 백성”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 교회 안에는 성경과 교부학의 연구에 새로운 방법론이 제시되었고, 전례 개혁과 교회 일치 운동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교의신학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개신교와 정교회에서도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 교회론 분야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체’ 개념과 ‘하느님의 백성’ 개념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로 관련 서적이 많이 출간되었고, 그런 흐름의 영향으로 비오 12세 교황은 1943년 회칙 「그리스도 신비체」(Mystici Corporis Christi)를 반포하였습니다. 교황은 회칙을 통해서 전통적인 교회론과 20세기의 새로운 교회론을 모두 수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교회론이 처음으로 교도권에 받아들여졌지만, 여전히 반종교개혁 시기 벨라르미노(1542~1621)의 가시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론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회칙의 편집자인 트롬프는 20년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의 로마 초안을 작성하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또 하나의 숙고는 ‘하느님의 백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독일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체’보다 ‘하느님의 백성’이 교회론의 핵심 개념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교계적 질서 안에서 살고 있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교회론의 중심 개념으로 교회의 다양한 특성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공의회가 개최될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비해서 아직 낯선 개념이었습니다.
「교회헌장」의 제2장 ‘하느님의 백성’은 초안에 없었던 장이었으나, 공의회의 교부들은 제2회기에서 ‘교계 제도’에 대해 언급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백성’을 다루는 것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가르침에서 교계 제도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 존재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이 교계 제도보다 우선입니다. 교계 제도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졌고 교회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이지만, 그 직무는 봉사 차원에 속한 것으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전망 안에서 유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다루는 제2장에서 눈여겨 볼 것은, 제1장 ‘교회의 신비’에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행위의 유일한 주체로 등장하지만, 제2장에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 구원 역사 안에서 교회도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신자들의 공동체로 표현되고 하느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수행합니다.
[교회의 언어] Pontifex(폰티펙스)
우리 교회는 큰 기쁨 속에서 레오 14세라는 새로운 교황님을 맞이했습니다. 교황님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는 “Pontifex”입니다. “다리(pons) + 만들다(facere)”라는 의미가 합쳐진 “Pontifex”는 ‘다리를 놓는 자’, 즉 중재자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자로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따라서 “Pontifex”는 단순한 직함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존재라는 깊은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교황님만의 사명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2코린 5,20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즉, 우리가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을 도울 때, 우리도 세상과 하느님을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Simon and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rter(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다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행복(진복팔단)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행복을 우리 삶의 목표로 삼기도 하지요. 그리고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 만끽하려 애씁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한 정겨운 시간, 목표를 이루었을 때의 만족감은 우리 삶을 풍요롭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어떨까요? “내가 그리스도인이어서 행복하다.”라고 자각해 본 분들은 그 행복이 일상의 기쁨을 넘어서는 더 깊고 특별한 차원의 행복이라는 것을 공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이 행복은 진복팔단이 전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아름다운 증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진복팔단에 대한 여덟 편의 강론〉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는 말씀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볼 수 있을까요? 교부는 이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지혜를 통해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예술 작품을 보며 그 안에 담긴 예술가의 의도를 느끼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마음이 깨끗해져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육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내면에서 느끼고 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가능한 일이며, 이 은총은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 시작되어, 하느님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에 새겨 놓으신 신적 형상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진복팔단에서 하느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입문 성사인 세례를 통해 주어지는 열매와 같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내면에 담을 수 있으니, 그분의 본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유한한 우리 인간의 삶은 무한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여정에 있기 때문에, 진복팔단은 바로 그런 여정에 있는 이들의 삶의 모습과 방향을 보여주는 이정표가 됩니다.
내 안에 새겨진 하느님을 발견하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어떤 고난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쁨이 차오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뚜벅뚜벅 시나이산을 오른 모세처럼, 하늘로 이어지는 사다리를 보며 갈망을 멈추지 않은 야곱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향해 묵묵히 걷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담담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어서 행복합니다.”
[저는 믿나이다] (31) 유다 이스카리옷과 마티아 사도
배신자 유다와 그의 빈자리 채운 마티아
유다 이스카리옷
유다 이스카리옷에 관해 신약 성경은 그가 열두 사도 중 한 명이었으나 예수님을 배신했고, 스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 외엔 어떠한 내용도 전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 복음서는 그를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6,17; 13,26)이라고 밝힙니다.
히브리말 ‘이스카리옷’은 ‘카리옷 사람’이란 입니다. 카리옷은 구약 시대 유다 지파 땅 헤브론 인근에 위치한 ‘크리욧 헤츠론’(여호 15,25; 아모 2,2)을 일컫습니다. 이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갈릴래아 출신인 다른 사도들과 달리 유다 출신임을 알려줍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스카리옷(Ισκαριώτης)을 헬라어 ‘시카리오스(σικαριοs)’의 변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를 따르면 유다 이스카리옷은 우리말로 ‘단검으로 무장한 자객 유다’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말하던 이스카리옷은 열혈당 가운데에서도 가장 과격주의 분파였습니다. 그래서 유다 이스카리옷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로마 제국에 맞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력 항쟁을 하던 열혈당원의 일원으로 자객 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스카리옷’을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요한 6,71; 12,4)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배신한 이유가 뭘까요? 복음서는 그가 예수님을 배신한 계기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사건(마태 26,6-13; 마르 14,3-9; 요한 12,1-8)과 관련 있음을 말해줍니다. 공관 복음에서는 이 광경을 본 제자 몇몇이 “왜 저렇게 허투루 쓰는가?”라며 여인을 나무랍니다.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주는 게 더 좋지 않으냐며 불평을 하지요.
그런데 요한 복음서에서는 오직 유다 이스카리옷만이 불평을 터뜨리죠.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면서요. 요한 복음서 저자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이렇게 불만을 표시한 것은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루살렘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그렇다면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가 단지 돈 때문이었을까요? 그가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산헤드린으로 찾아가 받은 돈 전부를 내던지고 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아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다수 신학자는 그가 예수님을 배신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 삶이 그가 기대한 메시아 상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세우실 하느님 나라가 지상의 왕국이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가 정말 열혈당원 자객 출신이었다면 당연한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죽음과 관련해 마태오 복음서는 목매달아 죽었다(27,3-10)고 하는 반면, 사도행전은 예수님 몸값으로 받은 돈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져서 죽었다(1,15-20)고 합니다.
마티아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사도가 아닙니다. 그는 사도들이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뽑은 사도입니다. 헬라어 ‘마티아’는 히브리어 ‘마티티아’에서 나왔는데 우리말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티아 사도는 사도행전에서 딱 두 번 나옵니다.(사도 1,13.26) 사도행전이 전하는 마티아 사도 선발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사도 1,15-26)
어느 날 120명가량 되는 형제가 모여 있을 때 베드로 사도가 일어나 유다 이스카리옷의 직책을 대신할 사도를 뽑자고 제안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사도를 뽑아야 한다”고 단서를 붙이지요.(사도 1,21-22) 이 제안에 따라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로도 불린 요셉과 마티아가 후보로 선발돼 기도한 후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합니다.
사도행전은 마티아 사도가 비록 처음부터 열두 사도에 속하진 않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주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사도들과 줄곧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지켜본 인물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티아 사도는 유다 지파 출신으로 베들레헴의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사도로 뽑힌 후 그는 유다와 콜키스(지금의 그루지아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다 세바스토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승은 그가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고, 그에게 돌을 던진 유다인들은 죽은 마티아 사도의 목을 도끼로 내려쳤다고 합니다. 그의 유해는 헬레나 성녀에 의해 로마로 옮겨졌고, 이후 독일 트리어 베네딕도회 성 마티아스 수도원에 안장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