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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택 목사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은 옛날 시골 마을의 동네 공동 우물터에 대한 추억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꼭지만 틀면 24시간 언제라도 쏟아지는 수도 덕분에 주방과 화장실에서 마음껏 물을 사용하지만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어머니들이 물지개를 지고 나가 동네 우물터에서 물 길어 오시고 빨래 광주리에 세탁물과 빨래 방망이 담아 머리에 이고 나가 빨래하시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엌 한 켠에는 커다란 항아리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부어 담아놓고 식수로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그만큼 물이 귀한 때라 어머니들은 물 한 바가지라도 허투루 쓰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부엌에서 설거지 할 때도 음식 찌꺼기는 구정물 통에 모아 집안에서 기르는 가축들 먹이로 사용하였고, 설거지 그릇을 한데 모아 같은 물로 씻은 다음에 새 물로 헹구었으며 그 물을 그냥 버리지 않고 텃밭에 뿌려 채소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어느새 40여 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들이 하루에 한 차례 꼭 나가시던 동네 우물가는 빨래터이기도 했고 동네 아낙들의 모임 장소이며 쉼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빨래 방망이 두드리며 힘든 시집살이 하소연도 늘어놓고 시어머니 스트레스, 시누이 스트레스, 미운 서방 흉을 보며 한바탕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장소였습니다. 우물가에 둘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식 자랑도 나오고 시집간 딸네 이야기며 간밤에 옆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 마을의 새 소식을 듣는 정보교환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물가에서 소근거리다 보니 확인되지 않은 온갖 소문이 만들어지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은 옛날 어머니들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빨래 방망이 두드리며 마음껏 스트레스를 풀던 장소가 없어 여성들이 가슴 속에 담긴 그 충만한 에너지를 발산할 곳을 찾느라 방방을 헤매고 다닙니다. 안방, 건너 방이 아니라 우물가 대신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방, 찜질방, 머리방을 부지런히 다니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느라 한국의 여성분들이 상당히 바빠 보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그렇게 방방을 헤매고 다니지 않아도 그 쌓인 스트레스를 건전하고 생산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가정과 일터에서 그리고 교회와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으로 풀어갈 수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우물가 이야기 하다가 여성들의 스트레스 해소까지 나왔는데 아무튼 옛날 우물가는 그런대로 낭만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잘 사는 집은 앞 마당에 우물을 파놓고 편안하게 사용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동네 우물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집 마당에 우물을 파 놓으면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물이 흔한 우리나라에서도 이처럼 우물이 소중한 시설인데 물이 귀한 광야나 사막지역에서는 얼마나 더 소중한 시설이겠습니까?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 중에는 오염된 웅덩이 물을 마시다가 각종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을에 우물을 파주어 동네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주 사역으로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연평균 강수량이 약 200-500mm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비하면 1/4 밖에 안되고 그나마 땅에 습기가 거의 없어 비가 오면 대부분 땅 속으로 스며들고 또 증발률이 높아 여름의 습도가 35%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신명기 11장에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 땅을 가리켜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하셨나 봅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이처럼 물이 너무 귀하였고 더구나 목축을 주로 하는 사회라 우물의 가치가 더 소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생명과도 같고 삶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물에 대한 이런 중요성 때문에 성경에는 우물에 얽힌 낭만과 다툼의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목축업을 하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살림이 늘어나자 당장 조카 롯의 식구들과 물 경쟁을 피할 수 없어 종들이 물 때문에 다툼을 벌이자 할 수 없이 분가를 하게 됩니다. 이삭은 블레셋의 그랄 골짜기에 살면서 여러 번 우물을 팠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빼앗으려고 시비를 걸어올 때 그들과 다투기보다는 평화를 위해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우물을 양보를 하며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여러 차례 우물을 팠던 적이 있습니다.
애굽을 도망쳐 나온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여 우물가에 앉았다가 마침 양떼에게 물을 먹이러 나온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다른 남자 목자들의 힘에 밀려 쫓겨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혼내주고 십보라와 그 여형제들이 먼저 물을 먹이도록 도와주었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옛날의 우물가는 결혼을 앞둔 처녀총각들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낭만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으러 갔다가 리브가를 만난 곳이 우물이었고, 모세가 아내가 될 십보라를 처음 만난 곳도 우물가였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 외삼촌 집으로 가던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도 바로 삼촌의 동네 우물가에서였습니다.
그리고 우물은 상속 재산 가운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받은 우물을 사용하였고, 신약의 기록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 성에 살던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할 때 예수께서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물을 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사마리아 여인은 허름하게 보이는 유대 남자를 보고 자랑스러운 태도로 ‘이 우물은 우리 조상 야곱의 우물이며 야곱과 그 자녀들이 여기서 이 물을 마셨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대대로 이 물을 마시고 사는데 당신은 야곱보다 더 큰 사람입니까?’ 라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의 하나님을 가리켜 ‘구원의 우물’ 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우물이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눠주시는 구원의 샘이라고 찬양합니다.
이사야가 노래한 오늘의 본문 12장은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건져내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찬양시입니다.
‘그날에’ 즉 그 구원의 날, 해방의 날에 그들이 말하기를 전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진노하셨지만 이제는 그 노가 그쳤고 또 나를 위로하시니 내가 주께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그를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라” 하며 감사로 노래하였습니다.
목이 타는 사막의 여행 중에 기적적으로 우물을 발견한 사람들이 기쁨으로 그 우물에서 물을 마심 같이, 도무지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고 멸망의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구원의 손길을 베푸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구원을 체험하고 기쁨과 감격으로 이 노래를 부를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전에는 우리에게 진노하셨으나 이제는 그 노를 그치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생수를 풍족히 얻어 마시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어떤 점에서 구원의 우물로 비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목마른 심령을 시원하게 채우시는 샘물과 같으십니다. 오늘날 분주한 세상살이 속에서 육신의 일에 너무 몰두하다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은 채 그 구원의 기쁨과 감사를 잃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는 ‘주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이 우울하거나 냉담한 표정을 가지고 사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기쁨이 입술로 고백되어질 뿐 아니라 그 얼굴로도 자연스럽게 표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방에 들어갈 때 불을 켜서 방을 밝혀 주듯이 내 안에 계신 생명의 빛,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기쁨의 사람으로 삽시다.
마치 광야를 끝없이 여행하는 지친 나그네처럼 사람들이 그 영혼과 육신이 함께 지치고 목말라 살아갑니다. 끝없는 내면의 갈증을 느끼며 나를 시원하게 해줄 생수를 찾아 고통스런 여행을 하고 있는 지친 나그네들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을 채우려고 밤낮으로 뛰어다니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허무하고 갈증은 계속됩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만족스럽고 보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세상이 주는 음료는 망망대해에서 마시는 소금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큰 갈증을 가져다 줄 뿐이라고 탄식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자기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이 나타난다고 경고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상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씀입니까? 자신과 돈 그리고 쾌락을 더 사랑하라고 크게 떠들어대는 이 세상의 소리에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묻히고 있습니다. 바쁨이라는 세속문화가 교회에까지 들어와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주일예배조차 행사처럼 급하게 치르고 바쁘게 헤어지게 만듭니다. 주 안에서 교제하며 서로를 축복하고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고 있는 바쁜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끝없이 추구하는 자기 사랑, 돈 사랑 그리고 쾌락 사랑으로 이웃을 돌아볼 겨를이 없고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여유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얻어서 만족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목마르고 허전함은 더해갑니다. 많이 가지고 누린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세상의 것들이고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걸어가면 말 타고 가면 좋겠다 하다가 말을 탈만한 여유가 생기면 이제 말을 끌고 가줄 하인이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 끝 없이 욕심을 부리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처럼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울 수 없는 목마름 속에 살아갈까요? 이런 욕심 때문에 인류의 문명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문명이 파괴되고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져 가는지요. 성경은 그 원인을 사람의 죄성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정말 있어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공허함이 인생 최대 갈증입니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육신을 가진 물질적 존재이기에 육체의 만족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즐거움을 얻고 만족을 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신이 전부가 아닌 영적인 존재입니다. 짐승들은 먹고 배설하고 종족을 번식하는 본능적인 삶을 살면 그뿐이지만, 사람은 그 이상의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행복을 추구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준비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독특하게 지으셨습니다. 지난 주일 야외예배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돌아갈 집을 준비하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람들은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만족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내일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며 아무리 육체적으로 많은 재물과 권력과 쾌락과 고매한 학문의 경지에 이를지라도 여전히 불안하고 목마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어디서 이 목마름을 해소하시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고난의 세월을 통과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로 나아오라고 초청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더 이상 두려움이 없을 것이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을 것이다’고 찬양합니다.
이사야 55:1-3에서, ‘너희 목 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우유를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진정한 음식이 되지 못할 것을 위하여 허비하느냐? 어찌하여 참으로 만족시켜주지 못할 것들을 위하여 애쓰고 있느냐? 나의 말을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나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셨을 때 그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귀가 솔깃하고 눈이 번쩍 뜨여 ‘정말 그런 물이 있다면 그 물을 나에게 주세요. 애가 그 물을 먹고 다시 목마르지 않고 또 여기 날마다 물 길러 나오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간청합니다. 참으로 그런 물이 있습니까?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다시 마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샘물 말입니다.
물을 달라는 요청에 주님은‘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하십니다.
영원한 샘물을 얻는 것과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 있는 고통과 허무함과 죄책감을 드러내도록 질문하십니다. 다섯 남자를 만나 살 정도로 결혼관계가 문란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 여인은 주님의 질문에 ‘나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고 하는 말이 옳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지만 지금 있는 사람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옳다’ 하십니다.
처음 보는 유대인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추어진 비밀을 소상히 알고 말하는 이 말에 여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음을 안 여인은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육신을 채워주는 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진정한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주님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여인은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비로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주님을 만난 이 여인은 물동이를 우물가에 버려둔 채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와 보라,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잠시 갈증 난 목을 채우는 물에 비할 수 없이 더 소중한 생수를 발견한 여인의 기쁨이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육신의 목마름이야 물을 마시면 그런대로 해소될 수 있지만 영혼의 목마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차에 진정한 샘물을 발견한 이 여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 바랍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에서 한 여인이 평생 해결하고 싶었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도록 만나주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초청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사야가 오늘 본문에서 예고한 구원의 우물들은 아무리 많이 퍼 올려도 그 근원이 마르지 않는 영원한 샘물을 의미합니다.
목마름으로 고민하고 있습니까?
값 없이 와서 마시라고 부르시는 주님 앞으로 그저 나아가 손을 내밀어보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설교자였던 스폴존 목사님은 ‘길 모퉁이에 있는 공중 음료수용 분수기 곁을 지나가는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그 물을 거저 마실 수 있는데 혹시 누군가 자신의 신분 때문에 또는 돈이 없어서 마실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냐’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그 물을 마실 자격이 있는지 그런 것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이 그저 그 음료수 분수기 앞으로 가서 입을 가까이 대고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혹시 목이 마름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아마도 멋지게 차려 입고 마차를 타고 가는 신사 숙녀들뿐 일거라고 하였습니다. 갈증은 몹시 나는데 길거리에 있는 그런 물을 마시는 사람은 상스러운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에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타면서도 점잔을 빼느라 마차에서 내려 마시지 못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들은 아무나 마시는 공용 분수기의 물을 마시는 것이 자기들의 체면을 깎는 행동이라 여기고 마차에서 끝내 나오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나누어주시는 구원의 샘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들의 체면이나 지위나 자존심 때문에 그냥 지나쳐버리고 있습니다. 길거리의 여인들이나 거지들 그리고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것처럼 그렇게 똑 같은 방식으로 천국을 가라고 한다면 죽어도 싫다고 끝까지 버티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곁에 함께 달렸던 강도가 죽음 앞에서 주님께 간청했던 그런 식으로 고백하는 길 외에 구원의 길, 영광의 길이 없다면 나는 절대로 그 강도처럼 그리고 그 강도가 간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결코 구원의 샘물을 영원히 마시지 않을 겁니다. 뭔가 자신이 내놓을 만한 일을 하고서 그 대가로 당당히 얻었다고 자랑하고픈 나의 자존심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주님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값 없이 이 물을 마실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값없이 주시는 이 은혜의 선물을 마다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기쁨으로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