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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벧엘
(창세기 35:1~7)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벧엘이라는 지명을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또 주위를 보면 벧엘이란 상호를 가진 가게나 회사들이 많습니다. 벧엘의 의미가 좋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벧’은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벧이라는 말이 들어간 지명이 많이 나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의미입니다. 베데스다는 벧과 헷세드가 합쳐진 말로 헷세드는 ‘은혜, 지비’를 뜻하기에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엘’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은 이와 같이 신앙적이고 안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고 은혜로운 장소입니다.
신자들이 벧엘이라고 하면 대부분 떠오르는 장면이 창세기 28장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은 사건으로 야곱은 더 이상 집에 살 수 없어 집을 나가게 됩니다. 결국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 땅으로 향합니다. 야곱은 날이 저물어 어느 한 곳에서 잠을 잡니다. 야곱이 이곳에서 꿈을 꿉니다. 꿈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 즉 ‘벧엘’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엘벧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 창세기 35장 7절에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데 엘벧엘은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엘벧엘이 오늘날 우리 신자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또 벧엘과 엘벧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벧엘에 나타나셨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벧엘이라는 땅에 자주 나타나시는데 세 가지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벧엘이라는 지명이 사용됩니다.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처음으로 벧엘을 명명한 것으로 보이지만 창세기를 보면 이미 벧엘이라는 말은 나옵니다. 창세기 12:7~8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벧엘이란 지명이 나옵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거주하는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8절에 아브라함은 벧엘과 아이 중간쯤에 제단을 쌓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도 아니고 제단을 쌓은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장소에 하나님께서 임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제단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태동하려는 곳에 하나님께서 먼저 임재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태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먼저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불과 몇십 년 전에는 일반적인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거룩한 곳이 되어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학자인 머치아 엘리아데라는 이것을 거룩한 것(성)이 세속적인 것(속)에 현현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성도가 드리는 예배가 늘 신령한 예배, 참된 예배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이런 참된 예배를 드릴 있을까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삶에 모습을 나타내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나셔야 우리는 거기에 제단을 쌓는 것이고 그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깊이 임재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럴 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둘째, 야곱이 고향집을 떠나 광야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벧엘이라 칭했습니다. 창세기 28:16~19에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비로소 야곱이 벧엘이라고 칭합니다. 이 상황은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집을 떠나 홀로 광야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것을 신학적으로 계시라고 합니다. 폴 틸리히는 말하기를 “계시에는 객관적인 요소와 주관적인 요소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애에 나타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인간이 조작할 수 없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만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하면 주관적인 요소로 인식할 수 있는데 황홀경과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면 괴로운 인생이 기쁨이 충만한 인생이 됩니다. 야곱이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자 밝아진다는 것을 ‘일루미네이션’(조명)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미래도 보이고 하나님도 보이고 진리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계시이고 하나님이 나타나심입니다.
창세기 16장을 보면 하갈이라는 여인이 사라에게 쫓겨나는데 갈 곳이 없어 헤매는 하갈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나타나십니다. 창세기 16:13~15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브엘라헤로이’는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광야길 같은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피십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어려운 때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께 은혜의 약속을 받은 곳입니다. 하나님께 돌로 제단을 쌓고 이곳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서원했던 곳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돌보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야곱의 가정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정에 다시 나타나셔서 야곱의 가족 이름을 새롭게 하실 때 야곱은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이 창세기 28장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섬기기로 약속합니다. 이후로 야곱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가장 큰 문제인 에서와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이제 야곱의 생애는 축복과 풍성만이 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는 말처럼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새롭게 안 좋은 일이 시작됩니다. 야곱에게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디나입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겜의 추장이 이 디나를 성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세겜의 아버지가 나서서 세겜이 디나를 사랑하여 벌어진 일이기에 서로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족속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면 결혼할 수 있다고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에 세겜 족속의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았는데 그들이 할례를 받은 제 삼일, 즉 할례의 고통이 가장 극심할 때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의 모든 남자를 다 죽입니다. 할례는 거룩한 종교 의식입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거룩한 종교의식을 사적인 목적을 위해 악용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타락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이 일 후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5:1~3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소환하시는 말씀으로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제단을 쌓고 이방 신상을 버리고 의복을 갈아입고 일어나 벧엘로 가라고 하십니다. 처음 믿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환난 날은 창세기 28장의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에서에게 쫓기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 벧엘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처음 만난 그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 다시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창세기 35장 7절에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벧엘과 엘벧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그곳이 벧엘이 됩니다. 벧엘이 벧엘되는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그러면 엘벧엘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기독교인들, 하나님과 멀어진 기독교인들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엘벧엘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왜 다시 벧엘로 돌아가야 할까요? 왜 다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켜주셔야 합니까? 왜 과거의 은혜의 체험을 기억하게 하실까요? 왜 이방신을 버리고 의복을 갈아 입게 할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뒤틀린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키시고 교정시켜주시는 역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벧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기독교인들을 다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그 뜻을 다시 각인시켜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다시 그 능력을 믿게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엘벧엘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엘벧엘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 합니다. 환난 날에 만난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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