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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시(金海市) ‘함허정(涵虛亭) 금강사(金剛社)‘ 한시(漢詩)편 9.> 총10편 中
김해읍성 內 위치했던 함허정(涵虛亭)을 살펴보자. <동국여지승람>에는 '함허정은 연자루(鷰子樓)의 북쪽에 있으며 부사 최윤신(崔潤身)이 건축한 것이다. 호계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그 복판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매우 조촐하고 시원하다'라고 하였다. 조선조 초기의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함허정을 처음 지었을 때의 기록인 <함허정기(涵虛亭記)>를 남겼다. 간략한 내용을 읽어보자. 부사 최윤신이 파사탑(婆娑塔) 남쪽에 네모난 못을 파고 호계(虎溪)의 물을 끌어들여 가두었다. 물속에 섬을 쌓아서 점대(漸臺·물이 차면 잠기는 언덕)를 만들고 그 위에 띠풀로 이엉을 이어 정자를 지었다. 물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고, 고기도 기르고 연도 심고 또 물새와 해오라기 등을 길러서 떴다 잠겼다 하게 하였다. 그 넓이는 반 이랑에 지나지 않지만 물이 멎고 어리어 하늘과 뒤섞였다. 최윤신이 좌의정 어세겸(魚世謙·1430~1500)에게 이름을 청했더니, 함허라고 지었다. 정자 이름인 함(涵)은 잠긴다는 뜻이고, 허(虛)는 비었다는 뜻이니, 비어 있으므로 모든 것을 잠기게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1800년대 초의 <김해읍지>에는 1547년 김해부사 김수문(金秀文·?~1568)이 무너진 것을 증축하였다고 하였다. 다음은 황준량(黃俊良·1517~1563)의 시이다.
47) 함허정, 조건중에 차운(涵虛亭 次曹建中) / 황준량(黃俊良·1517~1563)
水影離離映畵梁 물그림자 하늘하늘 아름다운 다리에 비치고
卦分丹柱體圓方 팔괘 나뉜 붉은 기둥 원과 모를 본떴네
雲天涵碧自今古 구름 뜬 하늘 푸른 빛 품고 예나 지금 한가지
松竹生寒留雪霜 솔과 대 찬 기운 일어 눈과 서리에 남았네
淸漢泒分石齒碎 맑은 은하수 갈래 돌 틈으로 부서지고
圓荷露瀉吟魂凉 둥근 연잎에 이슬 쏟아지니 시흥이 맑아지네
待看山吐四更月 산 위로 솟아나는 사경의 달 보니
吸得一亭虛白光 한 정자가 허공의 밝은 빛을 마시고 있네
황준량은 시에 주를 달아 '정자의 모양은 모나고 둥글어 팔괘(八卦)를 본떴다'고 하였으니, 팔각정이다. 황준량이 차운을 한 조식(曺植·1501~1572) 또한 '교룡의 집 신기루 오르니 제비는 들보가 없고, 허공에 무엇인가 잠겼으니 보이나니 곧고 모나네'라고 읊고 있다. 이러한 팔각정 주변으로는 호계의 물이 흘러들었다가 돌 틈을 맑게 장식하곤 흘러나가고, 연잎에 맺힌 이슬 또한 맑은 풍경을 보탠다. 더구나 달이 둥실 떠오른 새벽의 함허정은 그 풍취를 더하였다. 함허정은 정유재란(丁酉再亂·1597~1598) 때 무너졌던 것이 1801년 부사 심능필(沈能弼)에 의해 하월헌으로 거듭 났으나, 다시 퇴락하는 등 여러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800년대 <김해읍지>에 하월헌은 고을 원이 선비를 기르던 양사재(養士齋)로 소개되어 있는데, '경신(庚申·1800)년 초에 성내의 함허정 옛 터에 세웠다. 빼어난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신사(辛巳·1821)년에 북쪽 성 밖에 다시 세웠다'고 되어 있다.
48) 함허정, 김해에 있다[涵虛亭在金海] / 조식(曺植 1501∼1572)
蜃騰蛟屋燕無樑 신기루처럼 솟은 교룡의 집 들보엔 제비 없는데
虛箇涵來見直方 텅 빈 것 머금어야 곧고 바름을 볼 수 있다네
傑閣專南謾好大 남쪽에 이름난 크고 좋은 집이요
老虬分北剩風霜 늙은 솔이 북쪽 맡아 바람과 서리 많도다.
棠華館裏笙歌咽 우애 좋은 집엔 풍악소리도 그쳤고
王母池邊河漢凍 서왕모의 못가엔 은하수가 서늘하네.
殘落生涯寒落水 쓸쓸한 생애는 줄어든 차가운 물과 같기에
欲將埋恨引杯長 한을 묻어버리고자 잔 길게 끌어당긴다.
49) 김해 함허정[金海㴠虛亭] / 김중청(金中淸 1567∼1629)
新開小舘舊㴠虛 옛 함허정에 작은 객관을 새로이 열었는데
一鑑清光四靣如 거울 같은 연못에 맑은 빛이 사면을 비추네.
獨起中宵神境净 한밤중 신선의 깨끗한 경지에서 홀로 일어나보니
海天秋月入簾初 바다 위 하늘에 가을 달이 떠올라 주렴에 달빛을 드리운다.
● 금강곡은 본명이 금강사이다. 김해부성의 북쪽 5리에 있다. 고려 충려왕이 합포에 행차하였을 때 이곳에 머물렀는데 불훼교가 있다. 송악당은 금강사 서쪽 200걸음 떨어진 곳에 있다. 세상의 전하는 말에 고려 원종이 원조의 명을 받아 장군 김방경이 일본을 정벌을 할 때 이곳에 머물면서 송악당 안에 있는 송악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호계수는 금강사의 동쪽 몇리 떨어진 곳에서 부성으로 들어간다. 충렬왕이 다녀가고 김방경 장군이 머물던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학규가 김해에서 유배를 당했던 시절만 하여도 아직 불훼교라는 다리가 있어 불훼루의 옛 자치를 그 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같다.
50) 김해 금강사[金海金剛社]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歷盡名區信馬蹄 역대로 이름난 곳 모두 말발굽 달려서
盆城城北訪招提 분성 북쪽에서 날 불러서 찾아왔네
官故國乾坤老 금관가야 옛 나라 터는 하늘땅도 지쳤는가
輦曾遊歲月迷 임금님 수레는 이곳을 놀다갔어도 세월은 혼미
始祖陵深山寂寂 시조릉은 깊고 깊고 산은 적적하기만 한데
將軍樹老草萋萋 장군수는 늙어만 가고 풀만 무성하여 처량하고나
伽倻古物琴猶在 가야 옛 물건 가운데 가야금만 그대로 인데
要遣佳人唱更低 가인을 보내어 노래 소리도 낮추어야 하리
● 감로사(甘露寺)에 대해 송(宋) 이종(理宗) 가희(嘉熙·1237~1240) 연간에 승려 해안(海安)이 지은 것으로 동쪽 옥지(玉池:양산시 원동면과 김해시 상동면 사이의 황산강) 가에 있으며 최고 이름난 사찰이라고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현재 이 절은 모두 사라지고 터만 남았는데, 원래 절터에 남아 있던 삼층석탑재와 비석대좌, 연화대석 등은 1975년에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조선금석총람 (朝鮮金石總覽)>에 1731년에 이 절에 진남루(鎭南樓)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조 후기까지도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1) 김해 감로사[題甘露寺 金海] / 회헌(晦軒) 안향(安珦 1243∼1306)
一葉飛来鏡面平 일엽편주 거울 같은 물에 날아오니
輝空金碧梵王城 공중에 빛나는 금벽은 절이로구나
嶺頭蒼翠排風影 고갯 머리 푸르름은 산 그림자 아니요
石上潺湲帶雨聲 돌 위에 졸졸거리는 물 빗소리 같구나
日暖庭花粧淺錦 포근한 햇살에 뜰의 꽃은 얇은 푸르름 감추고
夜凉山月送微明 서늘한 밤 산 달빛은 희미한 빛을 보낸다
憂民未得湔塗炭 백성을 염려해도 도탄에서 건져내지 못하니
欲向蒲團寄半生 부들 자리에 앉아 여생을 보내려한다
비단 폭에다 적는다. 오죽유(吳竹牖, 오운)이 말하길, “어리석은 백성들이 근심스런 세상에서 착취가 너무 심하다고 말한다.”(錦一作綠 吳竹牖澐曰 憂民傷世之意 溢於咏物之餘)
<경남 김해시(金海市) ‘김해 여정(旅程) 유감(有感)‘ 한시(漢詩)편 10.>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는 동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 42리이고 남쪽으로 웅천현(熊川縣)경계까지 40리이며, 서쪽으로 창원부(昌原府) 경계까지 44리이고 북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4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4리이다.(東至梁山郡界四十二里南至熊川縣界四十里西至昌原府界十四里北至密陽府界四十四里距京都八百八十四里). 본래 가락국(駕洛國)이다. 혹 가야(伽倻)라 하기도 하였는데 뒤에 금관국(金官國)이라 고쳤다. 시조(始祖) 김수로왕(金首露王)으로부터 구해왕(仇亥王)까지 무릇 10세(10대), 4백 91년을<왕국으로 내려왔다> 구해왕이 신라에게 항복하니 법흥왕이 객으로 예대(禮待)하고 그 나라를 읍(邑)으로 만들어서 금관군이라 불렀다. 문무왕(文武王)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소경(小京)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는 부(府)로 강등시켰고 그 뒤에 또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서 군으로 승격시켰다. 성종(成宗)이 금주 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라 고쳤고 현종은 강등시켜서 방어사(防禦使)로 만들었다. 원종은 방어사 김훤(金晅)이 밀성(密城) 반란을 평정하고 또 삼별초(三別抄)를 거전(拒戰)한 공이 있다는 것으로써 금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하고 훤(晅)을 발탁하여 도호(都護)로 삼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2년에는 안렴사(安廉使) 유호(劉顥)를 죽였다는 것으로써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뒤에 다시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을 도태(淘汰)하면서, 다시 김해부(金海府)로 만들었던 것인데 본조(本朝;조선)에서도 그대로 하였다. 태종 조에 도호부라 고쳤고 세조조에서 진(鎭)을 설치하였다.
52) 월파정에서 매화를 찾다가 사렴(김극검)에게 부쳐 보내다[月波亭探梅 寄贈士廉]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竹輿日日繞東湖 수많은 대나무가 날마다 동쪽 호수를 가리니
不可梅花一日無 매화꽃을 하루 동안 볼 수가 없었네.
雪月輝然偏娬媚 달빛에 눈이 휘연하여 아양 뜸이 지나친데
江山勝處轉覊孤 강산 경치 좋은 곳에서 나그네 오히려 더 외로워라.
攀條未忍輕尤物 참을 수 없어, 첫째가는 물건인 매화 가지를 부여잡고
把筆何曾賦子都 붓을 들어, 어찌 자도(子都)에 대한 시가를 짓지 않으랴.
七點三叉春亦好 칠점산 삼차강에 봄철 또한 아름다우나
問君知己有林逋 묻노니 그대를 알아주던 임포(林逋)가 있지 않더냐.
사렴은 김해에 집이 있다. 칠점산, 삼차포, 모두 김해에 있다.(士廉家金海 七點山 三叉浦 皆在金海)
[주1] 김극검(金克儉 1439∼1499) : 본관 김해, 자 사렴(士廉), 호 괴애(乖崖) 조선전기 문신. 월파정은 그가 은퇴 후에 머문 곳으로 김해시 진영읍 김해대로 581-15에 위치하고 있다. 위 시편은 갑오년 1472년에 김종직이 월파정에서 지은 글이다.
[주2] 자도(子都) : 중국 고대의 잘생긴 남자의 이름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자도에 대해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가 잘생겼다는 것을 안다.〔至於子都 天下莫不知其姣也〕”라고 하였다.
[주3] 임포(林逋 967~1028) :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매화를 아내라 말하며 은거생활을 했다.
53) 김해 구지봉[龜旨峯在金海] / 안덕문(安德文 1747∼1811)
江草萋萋山日低 강가의 풀 무성하고 산의 해는 기우는데
二陵相對野東西 두 개의 능(陵)이 동서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구나.
可憐駕洛千年事 천년 전 가락국의 역사 가련하여
惟有東風鷓鴰啼 오직 봄바람에 자고새만 울고나.
54) 김해 구암사에서[題龜巖寺在金海] / 조식(曺植 1501∼1572)
冬嶺松爲木 동쪽 고개 위의 소나무로 지은
佛堂人拜之 불당에 사람들이 절을 하누나
南冥吾老矣 나 남명은 이미 늙었기에
聊以問山芝 애오라지 산속의 지초에게 묻노라.
55) 김해 북쪽 지소정 차운[次金海北池小亭韻] / 김안국(金安國 1478∼1543)
淨綠秋光動 맑고 푸른 가을빛이 움직이더니
空明夜氣涵 물에 비친 달그림자 밤기운에 잠기네.
一池風月興 연못에 바람불어와 달그림자 흥겨우니
賴有酒能堪 다행이도 술을 능히 참을 수 있겠네.
56) 영신루[迎神樓] 김해(金海) 수로왕릉 / 허유(許愈 1833∼1904)
會老堂前日欲曛 회로당(會老堂) 앞에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迎神樓下樹如雲 영신루(迎神樓) 아래 숲은 구름처럼 무성하네.
茫茫緋帆知何處 망망한 붉은 돛배 어드메로 가는고?
江北江南隱思君 강북강남 다니는 그대를 남몰래 그리워하누나.
[주] 수로왕릉의 전면에는 가락루(駕洛樓) ·연신루(延神樓) ·회로당(會老堂) 등의 건물이 있다. 허왕후릉(許王后陵)은 귀지산 동 쪽에 있다. 왕비는 아유타국(阿踰陀國) 왕녀라는 전설이 있고, 혹은 남천축국(南天竺國) 왕녀라 한다. 성은 허,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라 부른다. 고을 사람이 왕릉에 제사할 때에 함께 제사한다.(在龜旨山東 世傳王妃阿踰陀國王女或云南天竺國王女姓許名黃玉號普州太后邑人祭王陵時共祀)
57) 두보 운에 차운[次杜䪨] 귀양 사는 김도이에게(寄金道以謫居) / 이광덕(李匡德 1690∼1748)
秋風金海府 가을바람 부는 김해부(金海府),
客有楚歌哀 나그네는 초나라 노래가 애달프다.
過怪曾驚俗 일찍부터 괴이한 풍속에 놀라하며
佯狂竟誤才 미친척하여 도리어 재주를 숨겼다.
繄令猶密網 아아! 지나치게 엄격한 법을 들이대는데도
宛自不踈杯 스스로 술잔을 멀리하지도 못하네.
戰兢師門法 스승의 집 방문에도 전전긍긍하니
更宜細講來 마땅히 공부하려 오는 것도 드물게 되었구나.
[주1] 초가(楚歌) : 초나라 (사람들의) 노래. 아무에게도 도움이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귀양 사는 김도이의 처지를 비유한 말.
[주2] 밀강(密網) : 촘촘한 그물, 엄격한 법률을 비유. 유배인이 곤궁한 처지에 마을 학동들을 가르치는데 이마저도 못하게 막는 관원의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58) 김해 동헌 운[金海東軒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경상도관찰사.
淸唱中宵響落梅 한밤중 청아한 노랫소리가 울려 매화꽃이 떨어지니
一樽聊可好懷開 술 한통으로 지난 회포를 풀어 볼 수 있으려나
紅粧滿座潛相說 화려하게 꾸민 꽉 찬 자석에서 서로의 대화에 빠져드는데
前度皇華今又來 지난번의 중국 사신이 오늘 또 왔기에....
59) 김해 동헌운[金海東軒韻]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驅車盡日入荒城 온종일 말을 몰아 황폐한 성에 들어와
雲海前頭意未平 구름바다 앞쪽을 바라보니 마음이 설렌다.
篋裏詩書曾自信 상자 속의 시서(詩書)가 자신 있게 더해지니
鏡邊衰白不須驚 거울 같은 물가에서 쇠약해져 흰머리 늘어도 놀랄 일도 아니네.
汀蘭採罷餘香臭 물가의 난초를 캐고 나니 남은 향기가 감돌고
瑤瑟彈來剩舊情 옥 비파 연주 소리에 옛 정이 샘솟는다.
愧坐黃昏心更耿 황혼 속에 부끄럽게 앉아 있으니 마음 다시 밝아져
一眉新月向人明 눈썹 같은 초승달이 나를 향해 비추누나.
60) 3월 26일 해신(海神)에 제(祭)함. / 조경(趙絅 1586~1669), 인조 21년(1643년)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 시문을 엮어 만든 책이 동사록(東槎錄)이다. 다음은 분성(김해)에서 봄날 대기하다가 출발하기 하루 전에 지은 시(詩)이다.
留滯汾城送一春 분성에 묵으면서 한 봄을 보내며
山樓日日望滄津 산루에서 날마다 바다만 바라봤네
誰言風伯操權柄 풍백이 권력을 잡았다 누가 말했던고
自笑吾人求海神 우습다 우리들은 해신께 축원하네
閃日牙旗鯨動色 깃발이 해에 번쩍 고래도 감동한 듯
雷雲鼉鼓獺回嗔 우레 같은 북소리에 물개도 노염 돌리네
明朝掛席非難事 내일 아침 출범은 어려운 일 아닐 듯
約與麻姑酒入唇 마고와 약속하여 술잔 함께 들려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