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證言) - [48] 홍종복 (洪鍾福) - 나의 증언 10. 충남 지구장으로 시무 - 1 군 복무 중에 축복을 받은 다음 제대를 했다. 당시 서울 낙원동에 원리강의소가 있었다. 제대 후 매일 저녁 낙원동 원리강의소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다가 충남지구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부임할 당시 충남교구는 대전시 대흥동에 자리한 작은 2층 건물이었다. 시멘트 바닥에다 종이를 한 번 바르고 다다미 두 쪽을 깔아 놓은 것이 전부였다. 다다미 한 쪽에는 난로가 있었다. 난로가 없는 쪽이 사무실 겸 숙소였다. 추운 겨울이면 더운물 한 번 쓰는 것은 고사하고 잠자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를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참아버님께서 충남으로 순회를 오셨다. 나는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참아버님을 모시게 되어 정말 송구스러웠다. 참아버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시며 “고생은 높을 고(高)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자신 있게 나가면 생활이 점점 높아진다.”라고 희망찬 말씀을 해주셨다. 그 말씀은 지금까지도 내 귓가에 생생히 남아 있다. 충남지구장 시절 36가정 한인수씨와 ‘복지학원’을 만들어 가난한 농촌학생 교육을 시작했다. 중학생 수준의 강의록을 만들어 농촌을 다니며 청년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와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많은 청년들을 합격시켰다. 그들 대부분은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운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간 뒤 우리의 도움으로 여러 기업체에 취직할 수 있었고 월급을 받으며 야간 대학을 다니기도 했다. 그때 복지학원 출신 중에 원리수련을 받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 여럿 있었다. 허양 교구장도 당시 우리 교회와 인연 된 사람으로 지금까지 뜻길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복지학원’과 더불어 ‘농민의 집’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식구들이 농촌 구석구석을 방문하며 기금을 모았다. 참부모님께서 이 소식과 관련한 충남의 활동 보고를 받으신 뒤 ‘농민의 집’ 건립을 위한 하사금을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성화학생 8회 출신으로 뜻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헌신하고 있는 엘리트 청년들을 보내 주셨다. 참아버님께서 직접 면접을 보고 뽑은 청년들이었다. 그때 부여 세도복지학원 원장으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사람이 430가정 조만웅 전 교구장이다. 농민의 집을 지어 준공식을 할 때는 사회의 많은 VIP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통일교 협회의 주요 간부와 교구장들도 참석하였다. 우리가 주도하는 농촌 활동이 크게 활성화되자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복지학원과 농민의 집 사업 내용이 보고됐다. 1966년 2월 26일 충남 대전 복지농도원이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대통령상 제1회 한국농업상 단체상을 수상했다. 그러자 우리의 기반을 대단하게 본 정치인들이 교회에 접근해 왔다.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였지 정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던 우리 간부들 중에는 찾아온 정치인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참아버님께 보고를 올려 일을 시작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 차츰 정치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