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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처해(梁 處海) 선조님께서 1790년경에 이주(移住)
1980년 경신년(庚申年) (음-10월 16일) 11월 23일 거남사(巨南祠) 준공식(竣工式)날 촬영
結論(결론)
1712년肅宗(숙종) 19년壬辰(임진)년에 長木(장목)에 陳(진)을 創設(창설)하였으나,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집을 지을수가 없어, 1717년 肅宗(숙종) 24년 丁酉(정유)년 乙卯(을묘)에 다시터를 잡았으나, 또다시 地理(지리)가 不吉(불길)하여, 지은집은 무너지고, 1785년正祖(정조) 9년乙巳(을사)년正月(정월) 20일, 申時(신시)에 巽坐乾向(손좌건향)으로 行別將(행별장) 禦侮將軍(어모장군) 正三品(정삼품)인 李珍國(이진국)이 長木鎭(장목진)을 創設(창설)하였다.
金海金氏(김해김씨) 할머님과 再婚(재혼)하셔서 낳은 孝龜(효구)선조님께서 1795乙卯年(을묘년정조19년)에 아드님 今春(금춘)공을 낳으셨으니, 20세에 결혼을 하셨다고 假定(가정)해보면 1775乙未年(을미년英祖(영조51년)경에 處海(처해) 선조님께서 金海金氏(김해김씨) 할머님과 再婚(재혼) 時期(시기)는 1775乙未年(을미년英祖(영조51년) 이전에 거제도로 오셨다는 結論(결론)이다. 김해김씨할머님과 再婚(재혼)하시어 孫子(손자)가 태어나던 때의 年歲(연세)는 42세이므로 40세경에 이곳으로 오셔서 定着(정착)하시게 된 時機(시기)는 1773년 英祖(영조) 49년 癸巳年(계사년) 경으로 推測(추측)된다.
22세조양처해(梁處海) - 順興安氏(순흥안씨)의 子女(자녀)
23世祖(세조) 장남- 양성구(梁聖龜) - 慶州鄭氏(경주정씨). 양성구 직업은 정병(正兵).
23世祖(세조) 차남- 양서구(梁瑞龜) - 也州卞氏(야주변씨).
23世祖(세조) 삼남- 양진구(梁震龜) - 興德張氏(흥덕장씨).
23世祖(세조) 사남- 양효구(梁孝龜) - 金海金氏(김해김씨).
23世孫(세손) 장녀- 이명즙(李命楫) - 출가(出嫁)하신 첫째따님.
23世孫(세손) 차녀- 곽진번(郭鎭蕃) - 출가(出嫁)하신 둘째따님.
梁處海(양처해) - 順興安氏(순흥안씨)의 子女(자녀)
23세조양성구(梁聖龜)의 子女(자녀)
24世祖(세조) 외동- 양인손(梁仁遜) - 晋州河氏(진주하씨) 하분순(河粉順)
23세조양서구(梁瑞龜)의자녀
24世祖(세조) 외아들- 양준일(梁俊一)*
梁處海(양처해) 선조님과 巨濟島(거제도)의 金海金氏(김해김씨) 할머님의 자손
23세조양효구(梁孝龜)의자녀
24世祖(세조) 장남- 양금춘(梁今春) - 密陽朴氏(밀양박씨) 양금춘의 직업은 진로군(鎭櫓軍)
24世祖(세조) 차남- 양기정(梁己正) *
梁處海(양처해)-순흥안씨 孫子(손자)
24세조 양인손(梁仁遜)의 子女(자녀)
25世孫(세손) 장녀- 소사(召史) -出嫁(출가).
25世孫(세손) 차녀- 소사(召史) -出嫁(출가).
25世孫(세손) 삼녀- 소사(召史) -1801년辛酉年(신유년) 생.
25世祖(세조) 장남- 양수경(梁守京) - 칠원윤씨(漆源尹氏)尹興順(윤흥순).
25世祖(세조) 차남-양용이(梁龍伊) -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순악(金順岳).
25世孫(세손) 사녀- 소사(召史) - 1814년甲戌年(갑술년) 생.
嘉慶二十四年三月日巨濟府
가경이십사년삼월일거제부- 1819년己卯年(기묘년:순조19) 嘉慶(가경) 24년3월일. 巨濟府(거제부)에서발행한호적. 참고: 處海(처해) 先祖(선조) 87세때의戶籍(호적)에記錄(기록)이다.
考己卯成籍戶口帳內河淸面這浦里第一統四戶
고기묘성적호구장내하청면저포리제일통사호- 1819년己卯年(기묘년:순조19년)에 이룬 호적안에서 참고하면. 주소는 하청면 저포리 제1통 4호(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관포리),
正兵梁仁遜年四十九辛卯本南原
정병양인손년사십구신묘본남원- 직업은 正兵(정병), 이름은 梁仁遜(양인손), 나이는 49세,
서기1771년 辛卯年(신묘년:영조47년)에 태어남. 本貫(본관)은 南原(남원)이다.
父業武所串支
부업무소관지- 아버님의 職業(직업)은 武官(무관)으로 이름은 所串支(소관지).이시다.
祖老職嘉善大夫處海曾祖通政大夫就連,
조노직가선대부처해증조통정대부취연- 할아버지의 職業(직업)은 老職(노직)으로 嘉善大夫(가선대부)를 지내신 이름은 處海(처해)이시고, 曾祖父(증조부)는 通政大夫(통정대부)를 지내신 이름은 就連(취연)이시다.
참고(參考) 호적(戶籍) (1)
道光八年月日戊子貳巨濟府河淸面這浦里
도광팔년월일무자이거제부하청면저포리- 서기1828년戊子年(무자년:순조28) 2월에 住所地(주소지)는 巨濟府(거제부) 河淸面(하청면) 這浦里(저포리 : 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관포리)
第二統五戶鎭櫓軍梁今春三十四乙卯本南原
제이통오호진로군양금춘삼십사을묘본남원- 제2통5호 鎭櫓軍(진노군)을 지내신 梁今春(양금춘춘)의 나이는 34세 乙卯年(을묘년:1795년정조19년)에 태어나시고, 本貫(본관)은 南原(남원)이다.
父正兵孝乭
부정병호돌~ 아버지의 職業(직업)은 正兵(정병)을 지내신 이름은 孝乭(효돌)이시다.
祖嘉善大夫處海
조가선대부처해~ 할아버지는 嘉善大夫(가선대부)를 지내신, 이름은 處海(처해)이시다.
同生第鎭召募軍己正年二十四乙丑
동생제진소모군기정년이십사을축~ 同生(동생)은 첫 鎭召募軍(진소모군)으로 가신 이름은 己正(기정)이시고, 나이는 24살인데, 乙丑年(을축년:1805순조5년)에 태어나셨다.
참고 : 1805년에 태어 나셔서 24살에 募兵(모병)에 가실때는 1829년에 거제(巨濟) 사등면(沙等面) 성포리(城浦里) 가조도(加助島)에 있는 鎭(진)에 募兵(모병)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돌아 가셔서 그 후손들의 산소가 있어 후손들이 석묘를 하러 다녔다. 그 後孫(후손)들이란 양처해 선조님의 둘째부인 김해김씨 후손들인, 양학노, 양정율이 아저씨 집안이다.
지금 관포 處海(처해)선조님 碑文(비문)을 쓰신 형님이 양명생 謹書(근서)라고 쓴다고 해서 謹書(근서)라고 하면 안되고, 謹撰(근찬)이 맞다고 하니, 내가 대학 교수인데, 감히 訓手(훈수)한다고 怒發大發(노발대발)하여 疏通(소통)이 안된다. 處海(처해)선조님 碑文(비문)에 기록한 내용이 몆자 틀려 지적을 했더니 이제는 글도 쓰지 말라고 경고가 왔다.
그런데 안타깝게 선대의 職業(직업)도 틀리게 쓰고, 處海(처해)선조님의 忌日(기일)도 모르는데 造作(조작)으로 記錄(기록)하였으니 너무나 한심하다. 마치 거제도 장목면지를 함안사람이 巨濟島(거제도)에서 거제군수 따라 다니면서 사진을 찍던 거제군 사진홍보과 직원으로 근무 하다가 거제군지를 거제군수가 써보라고 하였더니,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소설로, 또는 사설로, 說話(설화)로 전설의 고향으로 써서 [사등성]은 지혜로운 우리 조상들이 흙을 쌓아 돌을 올려 놓고 흙을 끓거 없앤 城(성)을 옛날 옛적에 中國(중국)의 마고 할매가 치마폭에 돌을 담아 오다가 닭이 울어 버리고 간 흔적이 남아있다는 어처구니 이야기를 역사에 올렸고, 그것을 역사라고 쓴 작가도 그렇고, 그 역사를 맞다고 관광객들이 마구 부불려 쓰는 황당무개한 우리네 역사가 현실이다.
자칭 지방사학가가 왜곡시켜 1억 2천 5백만원을 들여 장목면들이 만들어 놓고도 어디가 틀렸는지 지적을 못하고 있는 현실과 다를 바가 없다. 돈이 썩었지 형님도 100만원 거금을 내 놓을 정도이니, 모두들 나는 바보입니다.하는 장목 면민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내가 조목 조목 따져서 이승철 사학가에게 보냈는데 다음에 다시 편찬할때에 고칠때에 도와 달라는 것이다.
그 동안 고 김기태 선생님 생전에는 자료를 주시면 그대로 싣겠다고 하여 놓고도 제멋대로 집필하고 발간할 때 장목면주민단체장이나, 위원이나, 편집위원들 아무도 지적도 못하고 발간하였으니, 장목중학교 카페에다가 올려 철저히 알아 보라해도 후배들이 아무도 확답을 못하고, 엄청납니다. 머리가 어찔어찔합니다라는 댓글만 쓰고들 있다. 참 한심하다. 할배도 손자에게 배울것이 있다, 내 손녀가 나보다 영어로 더 말잘하고 더 표현을 더 잘하는데, 형님은 處海(처해) 先祖(선조)님 碑文(비문)을 써기 전에 나에게 諮問(자문)을 했더라면 이런 실수는 않했을 텐데... 엉터리 자칭 지방 사학가에게 자문을 하여, 그르쳤다.
존경하는형님~보내주신 메일 잘받아 보았습니다.
곳곳에 형님의 숨결이 묻어나네요우리양씨 문중에 처음부터 초지일관 족보에 관해 소신을 갖고 거의평생을 연구하며 발로뛰며 가까운 친척이나 먼친척이나 모두 형님의 전화를 받은걸로압니다.누가뭐래도 형님께선 양씨문중의 최고로 깨어있는사람이며 헌신과 봉사를 솔선수범 하시어양씨문중입장에선 훌륭한 보물임에 틀림이없습니다.만약,형님께서 문중족보에 관심이없거나 다른사람에게 미루었다면 지금의 우리족보는 발전도 못하고 함량미달의 족보로 남아외면을 당했을겁니다.제가'거제양씨문중 거남사'단체밴드를 2년전에 만들고 일년에 두번(문중벌초/시제) 행사를 사진에 담아 양씨문중 밴드에 올려같이 공감토록 하고있습니다.개인이나 집안,門中(문중), 동네, 더나아가 국가까지, 싫든좋든 歷史(역사)는 만들어지고 같이공유하며 후대에 평가까지 받아야한다는 소신입니다. 2년전 문중시제 끝나고 제가 여유시간에 방수형님을 거론하였습니다.
요지는''외국에살고 있지만 문중을 위해 자비를 쓰가며, 거의평생 문중족보를 고증하며 맞추고 보완하고 연구하는 이런인물은 前無後無(전무후무)하다. 따라서 이런분을 작게는 門中(문중)이름으로 感謝牌(감사패)를 보내야하며, 크게는 나중에 門中(문중)族譜(족보)에 헌신한 보상으로'거남사'경내에 功德碑(공덕비)를 세워야한다'' 라는게 저의 主張(주장) 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형식이내용을지배하는것' 이기도합니다. 아무리 내용물이 좋다한들 形式(형식)이라는프레임을 갖추지 못한다면 의미부여가 약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口傳(구전)으로 전해오다가 世代(세대)가 바뀌거나 滅(멸)하면 끊어지는이야기들,,,이건 아주 잘못된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래서 글로써 묘사되고 사진으로 묘사되어 후대에 가감없이 전해져야 歷史(역사)아니겠습니까? 만약에 李舜臣(이순신) 將軍(장군)이 日記(일기) 形式(형식)으로쓴 '亂中日記(난중일기)' 가없었다면 歷史(역사)가 들이 살아 숨쉬는 듯한 찰라의 심정을 記述(기술)해냈을까요?우리문중의 발자취 역사적인 사진도 형님께서 찍고 보관하고 계시고,,,암튼,형님께선먼후대를생각하시는선각자이십니다. 歲月(세월)이 흘러召天(소천)하게 되시더라도 기록물이 維持(유지) 發展(발전)되도록해야 합니다.
거제양씨문중도 세대교체를 2년전에했습니다. 문중회장:두원(용수부친)아저씨문중총무:정률아저씨에서문중회장:호수형님문중총무:성대그리고 작년에는거남사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을 뽑았는데, 제가추천해서 용수를시켰습니다. 세월이흐르고 자꾸 나이가듬에 따라 世代交替(세대교체)가 일어납니다.浩秀(호수)형님께서도 지난해 거남사에서 행사마치고난뒤' 나도 여기 몆년이나 더올지 장담못하겠다'라고 혼자말처럼하더군요. 세월앞에 장사없으니말입니다,,,(ㅠㅠ)형님께 여쭙는 말씀(회신부탁드립니다)
1)處海(처해) 입거제선조님께서 최초입거제할 때 아들둘을 데리고왔습니까?또,김해김씨할머니사이난 자식은 효구한분인가요?(성구/서구/진구/효구) 또효돌은 누구이신가요?
답변 : 巨濟島(거제도)에 入巨(입거)하신 22세손 處海(처해)선조님께서 거제 장목진 객사에 正兵(정병)으로 發令(발령)받아 내려오신 23세손 聖龜(성구)선조님 한분만이 있고, 다른 형제들은 와서 같이 살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1980년경에 전북 임실에 갔을 때 처해(處海) 둘째동생 처진(處晋)의 6대손인, 양봉기(梁奉基)씨 댁을 一家(일가)들과 방문하여 보니. 방안에는 6대조 處晋(처진) 선조님의 친필로 된 手筆本(수필본)이 있어 물어 보니, 배우지 않아 이애를 못해 내가 큰집 거제도에 후손 梁芳秀(양방수)라고 이야기하고, 그때 1986년 丙寅譜(병인보)를 發刊(발간)할 때 같이 했고, 다른 후손들은 서울에서 산다고 해서 성북동에 찾아가서 보니 20대 되는 처녀 아이가 있었지만, 그 여자 아이도 뿌리를 모르고 있어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 사는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 너희 후손들이랑 대화가 안될 것이다. 첫째는 言語(언어)이지만 둘째는 생소한 사람들이다. 처진(處晋:1738년무오년1월10일생) 선조(先祖) 수필본(手筆本) 소장자(所藏者) 梁奉基(양봉기)씨는 그후로 한번도 못 만났다. 서로 살기가 바쁘고, 거리가 멀다보니.....
소재지(所在地)는 全北(전북)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 우번촌이다.
22세(世) 양처해(梁處海) 둘째 동생
양처진(梁處晋)-義昌丁氏(의창정씨)
梁應奎(양응규) - 興德張氏(흥덕장씨)의 三男(삼남)
자(字) 신겸(信兼)
1738년 무오년(戊午年-영조14) 1월 10일생. - 1792년 임자년(壬子年-정조16) 3월 10일 졸(卒)
묘소(墓所) 말천목동(末川木洞) 건좌(乾坐). 배위(配位) 창원정씨(昌原丁氏) 우혁(遇赫)의 따님, 해천(海川) 부원군(府院君) 군건(君健)의 후손(後孫) 정사년(丁巳年)에 태어나 무신년(戊申年) 2월 11일에 돌아 가셨다. 묘소는 촌석(村石) 건좌(乾坐)에 모셨다.
우번촌(禹蕃村)에 거주(居住) 하시는 양봉기(梁奉基)씨 집에 보관된 7대조 친필(親筆) 족보(族譜) 수필본(手筆本)
이 자료는 1985년 4월 1일, 1986년 丙寅譜牒(병인보첩)를 편찬 할려고, 議論(의논)차 先山(선산)도 頂拜(정배)할 겸 방문할때에 發見(발견)하였는데, 안타깝게도 後孫(후손)들은 忌日(기일)를 쓴 遺品(유품)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잘 모르고 아직 까지 필묵(筆墨: pen and ink)함(函)에 넣어 방 한 가운데 담아 두고 있었는데, 짐작으로 미루어 보아 7대조 처진(處晉) 선조(先祖)님의 친필로 6대조 석구(錫龜)선대(先代)의 후손들이 참고용으로 쓰신 수필본(手筆本)임을 알수가 있서 아주 귀한 유품(遺品)임으로, 28세손(世孫) 봉기(奉基)할아버님께 말씀 드리고, 筆者(필자)가 서울로 가지고 와서 複寫(복사)를 하고, 양 한택씨 편으로 보내 주었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은데 연대는 고증이 잘못된 곳도 있고, 1799년 기미족보와 상이한 점도 있어 그대로 기록을 남긴다.
병부공中 군수공 후손 거제도 30세손 양방수 고증.
우번촌(禹蕃村)에 거주(居住) 하시는 양봉기(梁奉基)씨 집에 보관된 7대조 친필(親筆) 족보(族譜) 수필본(手筆本) 아래크릭
http://cafe.daum.net/gfamnamyang/ZjTb/749
http://blog.daum.net/bangyang/1019
사진 - 처진(處晋:1738년 무오년 1월10일생) 선조(先祖) 수필본(手筆本) 소장자(所藏者).
처해(處海) 둘째동생 처진(處晋)의 6대손인, 양 봉기(梁 奉基)씨의 모습.
소재지(所在地) - 전북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 우번촌 양봉기씨 자택에서
귀후제(歸厚齊)에서 소재지(所在地):전북(全北)임실군(任實郡)삼계면(三溪面 죽계리(竹溪里)대판(大板) 서당동(書堂洞)
좌(左)로 부터 梁漢鐸(양한탁), 梁仲基(양중기). 필자(筆者 梁 芳秀(양방수).
985년 4월 1일. 촬영 - 필자(筆者) 양방수(梁芳秀)
★그리고, 22세조 양처해(梁處海)의 子女(자녀)는 입거제(入巨濟)하신 거제(巨濟) 관포리(冠浦里) 후손편(後孫篇)에 기록을 해 두었다.
첫째가 23世(세) 양성구(梁聖龜) - 慶州鄭氏(경주정씨)
들째가 23世(세) 양서구(梁瑞龜) - 也州卞氏(야주변씨)
셋째가 23세(世) 양진구(梁震龜) - 興德張氏(흥덕장씨)
따님이 23세(世) 李命楫(이명즙)씨에게 出嫁(출가)를 가셨다.
따님이 23세(世) 郭鎭蕃(곽진번)씨에게 出嫁(출가)를 가셨다
그러면 이두분의 형제와 따님은 어디로가서 후손들이살고 있길래 1851년辛亥刊(신해간)에도 1939년에 간행한 己卯譜(기묘보)에도 기록이없으니 남원에 살지않했다고 볼 수 있고 巨濟島(거제도)에서사셨다는 기록이 전혀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족보를 하지 않아 그 기록이 없다. 그래서 역사가 필요하고 族譜(족보)가 있어야 한다는 理由(이유)다.
다음은 處海先祖(처해선조)께서 巨濟島(거제도)에 오셔서 再娶(재취)하신 金海金氏(김해김씨) 金讚瑀(김찬우)댁에서 出嫁(출가)오셨다는門中(문중)抄單(초단) 記錄證言(기록증언)에 의하면金岳伊(김악이:1738영조14년8월14일생)할머니의 후손들의 뿌리를 定立(정립)해서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 서구, 진구는 處海(처해) 선조님 아들이시고, 孝龜(효구)는 孝乭(효돌)이 선조님의 호적의 이름인데 1968년 族譜(족보)에 孝乭(효돌)이는 양반의 이름이 못된다하여 족보에 부친과 또정이 아저씨께서 孝乭(효돌)이를 孝龜(효구)라고, 7대 聖龜(성구)선조님의 동생으로 처음으로 族譜(족보)에 올렸다. 이런 내용을 아는 사람은 우리 집안에는 아무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고 모두들 I don't care이다.
다시 설명하면.
같은 후손들이 冠浦(관포)에서 같이살았지만, 우리 선대 어른들께서는 내가어릴때만 해도같은 一家(일가)가 아니고, 乭梁(돌양)가라고, 했는데 생각해보면 孝乭(호돌)자의 끝자를 따서 乭梁(돌양)가라고 불렀다. 간혹 잘모르는 사람들은 같은一家(일가)가! 맞다. 아니다! 하고 論難(논란)이있었다. 生前(생전)에 말씀이 없으시던 梁敬春(양경춘)할아버지께서 하신말씀이“"그래!? 戶籍(호적)에 같은一家(일가)라고 쓰여져있다는데 진작보고 말하지 않고, 여태까지 남남으로 알고살았지 않았느냐!?고 하신말씀이 기억이생생하다.
생전에 乭梁(돌양)가라고하신 것이 몹시도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였다. 前妻(전처) 後孫(후손)들과 後妻(후처) 後孫(후손)들 사이에는 無言(무언)의 거리가있다는 것은 歷史(역사)를 相考(상고)해봐도 잘나타난다. 특히나 李朝(이조)의 封建的(봉건적) 社會속에서는 더욱 뚜렸했었다. 李朝(이조)에서는 庶子(서자)는 族譜(족보)에 올리지 못했고, 庶出(서출)은 科擧(과거)에 응시 할 자격이 없었다. 서자(庶子)도 아니신데 왜? 그런지는 族譜(족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족보(族譜)가있어야하고, 후손들을 가르쳐야한다.
그대표적인 例(예)가 10세조 양우(梁祐)선조께서 삭녕군부인(朔寧郡夫人) 전의(典議) 광수(光粹)의따님에게 장가를 가셔서 양우룡(梁友龍) 선조를 낳으셔서 갈라져 나간후손들이 帶方郡(대방군) 派(파)를 만들어 또다른 종친회를 만들어오고있고. 후배(后配) 청주이씨(淸州李氏)에게 다시장가를 가셔서 양석륭(梁碩隆)을낳고, 梁碩隆(양석륭)은 양구주(梁九疇)를 낳고그후손 문양공(文襄公) 성지(誠之)는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길에 올랐지만, 서로 왕래도없었고,족보도 같이하지 않했다. 그러다가1799년己未年(기미년)에 23세조(世祖) 양보귀(梁寶龜) 선조께서 우리가문에서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어 전하여오고있지만 本妻(본처)와 後妻(후처) 자손간은 물과 기름처럼 잘融和(융화)를 이루지 못하고있는 현실을 대변해주고있다.
庶子(서자)의 경우에는 族譜(족보)에도 올라가지도 못했지만 벼슬길에도 나가지못했었던 것이 李朝(이조)의 政治(정치) 현실속에 잘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거제도 양씨들은 波(파)가 무슨 派(파)냐고 하면 文襄公派(문양공파)라고 우리 고모님께서 내가 어렸을 때 늘 말했고 교육을 시켜서 그런줄 알았다. 그것도 文襄公(문양공)의 뜻도 모르고, 문양공이 누군지 모르면서 [다만] 무슨파게? 하면 무양공파라고 말했고 답했다. 文襄公(문양공)은 우리 직계 선조님 峻(준) 선조님과는 배가 다른 8촌 형제지간으로 문양공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우리 선조님은 世祖(세조)가 登極(등극)할때에 그를 도와 원종공신으로 祿(록)을 받았다. 아래 참고하길 바란다.
13세(世) 양준(梁峻) - 상산김씨(商山金氏)
梁思貴(양사귀) - 晋陽姜氏(진양강씨)의아들
淑人(숙인) 商山金氏(상산김씨) - 直提學(직제학)을지내신金後(김후)의 따님이시고, 未雛王(미추왕)의 後孫(후손)이시다.
梁思貴(양사귀) - 晋陽姜氏(진양강씨)의 여섯아들중 막내(6남)으로 태어나셨다.
13세조(世祖) 梁峻(양준) 선조(先祖)께서는 思貴(사귀) 先祖(선조)의 여섯兄弟(형제) 중에 막내로태어 나셨으나, 병화(兵火)로 인하여 문헌(文獻)이 소실(燒失)되어 후손들이 生卒(생졸)을 모른다. 巨濟冠浦門中(거제관포문중)은 梁思貴(양사귀) 先祖(선조)님의 6子이신 梁峻(양준) 先祖(선조)님의 子孫(자손)이며 梁峻(양준)선조님은 內職(내직)으로 사헌부감찰/사헌부지평/정랑/사재감정을 지내시고 外職(외직)으로 진보현감/전주판관/靈光郡守(영광군수)를 지내셨기 때문에 그 子孫(자손)들은 郡守公派(군수공파)로 分派(분파)하여 世代(세대)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月谷書院鳩財通文(월곡서원구재통문)에 의하면 巨濟冠浦門中(거제관포문중)의 직계선조님이신 梁處海(양처해)선조님께서 默齋公(묵재공) 宗門(종문)의 일을 主管(주관)하고 있었고 己未(기미) 대동보의 跋文(발문)에 의하면 梁處海(양처해)선조님의 조카이신 梁寶龜(양보구)선조님께서 默齋公(묵재공) 宗門(종문)의 일을 主管(주관)하였습니다. 傳(전)해지는 史料(사료)는 두 종류이지만 하나의 歷史(역사)로 일맥상통합니다. 梁處海(양처해)선조님의 子孫(자손)이신 巨濟冠浦門中(거제관포문중)의 梁芳秀(양방수)님이 默齋公(묵재공)의 系譜(계보)를 바로 세우려고하는 것 또한 200여년전 南原梁氏兵部公後(남원양씨병부공후) 默齋公後(묵재공후) 司諫公後(사간공후) 郡守公派(군수공파)의 梁處海(양처해)선조님이 默齋公(묵재공) 宗門(종문)의 일을 主管(주관)하신것에서 일맥이 흘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양씨문중 양희출(천산)제공.
孝龜(효구)라는譜名(보명)은필자(筆者)가 족보(族譜)를編纂(편찬)할때에 龜字(구자) 行列(항렬)에 맞추어서 올렸고, 1969년己酉年(기유년) 5월에 만든 家牒(가첩)에는 孝惠(효혜)라고 기록한 이유는 장남의 이름이 初諱(초휘)가 仲惠(중혜)라, 해서 行列(행렬)에 맞추어 孝惠(효혜)라고 또정(又正)이 아저씨와 父親(부친: 양두조(梁斗祚)께서 항렬(行列)에 맞추어서 족보에 올렸다. 巨濟(거제)에 오셔서 後娶(후취)하여 낳은 선조님의 記錄(기록)은 戶籍(호적)이 거의 保存(보존)되어있어 再論(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산소나 다른 기록이 없어 안타깝다. 이 선조님의 諱(휘)는 褓名(보명)은 孝龜(호구)이시고, 初諱(초휘)는 孝乭(효돌)이요, 字(자)는 孝惠(효혜)이시다. 生前(생전)에 正兵(정병)을 지내셨다는 기록이 있다.
金海金氏(김해김씨) 金命枝(김명지)씨의 따님과 結婚(결혼)하셔서 1795년 乙卯年(을묘년:정조19년)에 鎭櫓軍(진로군)을 지내신 梁今春(양금춘)을 낳으셨고, 1805년乙丑年(을축년)에1831년辛酉年(신유년)에鎭所募軍(진소모군)으로 加助島(가조도)를 가신梁己正(양기정)을 낳으셨다. 生卒(생졸)은 후손들이 보존하지 않아알수없다,
1828년아들 梁今春(양금춘)의 호적에 아버지의 職業(직업)은 正兵(정병)으로 諱(휘:죽은사람이름휘)는 孝乭(효돌)이라고만 記錄(기록)이있고, 生卒(생졸)은 記錄(기록)이 없어 전혀알수가없다. 現世(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뒷날을 생각하지않고 戶籍(호적) 保存(보존)이나기록을 소홀히하고들 있다
2)26새손양관엽선조께서 아들이없자 27세손만필(우리의증조부)을 養子(양자)로 삼으셨나요?아니면, 저의 祖父(조부)님 (봉석)할아버지께서 養子(양자)로 가셨나요?
답변 :25세조양수경(梁守京)의자녀
26世祖(세조) 장남-양유관(梁有寬) - 의령여씨(宜寧余氏) - 여봉연(余奉連).
26世祖(세조) 차남-양재관(梁再寬) - 김해배씨(金海裵氏) - 배묘아( 裵妙兒).
26世祖(세조) 삼남-양관철(梁寬哲) - 제순남(諸順南) -초계정씨(草溪鄭氏) 정창악(鄭昌岳).
26世祖(세조) 사남-양관열(梁寬烈) - 해주오씨(海州吳氏) 오율금(吳律今).
26世祖(세조) 오남-양관업(梁寬業) - 초계정씨(草溪鄭氏) 정건아(鄭件兒).형제중에 유일하게 막내이신 양관업(梁寬業) - 초계정씨(草溪鄭氏) 정건아(鄭件兒). 5대조부님께서 絶孫(절손)이 되자 그때 아래 우리 曾祖父(증조부)님들의 형제 중에 河淸(하청)面長(면장)을 지내시던 梁萬弼(양만필) 曾祖父(증조부)님이 人物(인물)도 좋고, 똑똑하여 梁寬業(양관업) 5대조부님께서 養子(양자)로 삼으시고 財産(재산)을 모두 주었단다. 그 財産(재산)이 너에게 물려 주었을 것이다. 그 일부가 집과 또한 땅집밭떼기 일 것이다. 그 5대 조상님의 위해 祈禱(기도)하라!
26세조양유관(梁有寬)의자녀
27世祖(세손) 장녀- 양연악(梁連岳) - 윤씨(尹氏).
27世祖(세조) 장남- 양상필(梁尙弼) - 서선옥(徐善玉).
27世祖(세조) 차남- 양상준(梁尙俊) - 윤치아(尹致兒). - 趙有今(조유금)
26世祖(세조) 양재관(梁再寬)의자녀
27世祖(세조) 외동아들 - 양만필(梁萬弼) - 오순이(吳順伊).
26世祖(세조) 양관철(梁寬哲)의 자녀
27世孫(세손) 장녀- 양윤악(梁允岳) - 정씨(鄭氏).
27世孫(세손) 차녀- 양명순(梁命順) - 손성화(孫成和).
27世祖(세조) 장남- 양윤필(梁允弼) - 송종선(宋鍾先).
27世祖(세조) 차남- 양성필(梁性弼) - 서귀선(徐貴先)과임독득(林獨得).
27世祖(세조) 삼남- 양원필(梁元弼) - 김봉아(金奉兒)와이녹선(李菉先).
27世祖(세조) 사남- 양명필(梁命弼) - 김경옥(金敬玉).
26世祖(세조) 양관열(梁寬烈)의 자녀
27世孫(세손) 장녀- 양명아(梁命兒) - 김씨(金氏).
27世孫(세손) 차녀- 양영아(梁永兒) - 구세희(具世喜).
27世孫(세손) 삼녀- 양명선(梁命先) - 서씨(徐氏).
27世祖(세조) 장남- 양진필(梁振弼) - 김말악(金末岳).
26世祖(세조) 양관업(梁寬業)의 자녀
27世孫(세손) 따님- 양옥선(梁玉先) - 이줄이(李乼伊).
27世祖(세조) 계자- 양만필(梁萬弼) - 봉사손(奉祀孫).
26世祖(세조) 양도석(梁道石)의 자녀
27世祖(세조) 장남- 양덕준(梁德俊) - 岐城潘氏(기성반씨) - 徐德順(서덕순).
27世祖(세조) 차남- 양덕수(梁德守) - 魯成岳(노성악).
27世祖(세조) 삼남- 양또출(梁又出) - 裵一牙(배일아).
26世祖(세조) 양도철(梁道哲)의 자녀
27世祖(세조) 장남- 양덕찬(梁德贊) - 徐奉年(서봉년).
3)네이버검색하면,거제입향시조 양처해(병부공21세손)으로 나와 있고. 형님께서 보내주신 메일에는 22세손으로 記錄(기록) 되어있습니다. 處海(처해)선조님이 22세손 맞는거지요.
답변 : 네이버에 일가들이 거제양씨들의 뿌리를 잘 모르고 제멋데로 글을 올려 아니라고 해도 못 고치는 이유는 잘모르고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한문 번역을 못해서 그런 이유도 있다. 그래서 내가 꾸준히 홍보 한다. 양희출(춘산)이라는 손자가 내 [브로그]에 와서 너무 감동을 받아서 퍼 가고 선대의 글을 많이 올리는데 틀린곳을 바르게 지적하고 우리 거제 양씨카페에 틀린곳을 말하지 못하고 바르게 몇가지올렸다.
4)매년 관포 공동산에 벌초를 가면저의 祖父(조부) 墓地(묘지) 위쪽 2시방향에 '초계정씨' 墓(묘)가있고 碑石(비석) 뒷편에는'양자만필'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門中(문중)에서 벌초를 공동으로하지 않고, 每年(매년) 제가 四寸(사촌)들과 같이 벌초를 하고 있는데, 이 墓所(묘소)가 26세조 寬業(관업) 高祖父(고조부)의 配(배)이신가요 ?
답변 : 26세다섯째아들양관업(梁寬業) - 초계정씨(草溪鄭氏) 정건아(鄭件兒)
양수경(梁守京) - 윤흥순(尹興順)의 오남(五男). - 호적(戶籍) 참고(參考)
1841년신축년(辛丑年) 천보(天保) 12년2월23일생. - 호적(戶籍) 참고(參考)
호적에는 천보(天保) 12년, 이조(李朝) 개국(開國) 450년으로 기록하고있어 부정확하다.
1919년기미년(己未年) 12월8일 오후10시에 관포리4번지에서 사망으로 호적기록
1984년에 발행한 갑자보첩(甲子譜牒)에는 다음과같이 기록하고있다.
1842년임인년(壬寅年) 2월13일생- 1919년기미년(己未年) 10월16일졸.
문중초단(門中抄單)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이름은 尹今愛(윤금애)로 적고있다.
1843년계묘년(癸卯年) 2월13일生(생). 개국(開國) 452년
1918년戊午年(무오년) 10월16일卒(졸) 수(壽)75 歲(세)
墓所(묘소) 冠浦(관포) 共同山(공동산)에 庚坐甲向(경좌갑향)인,북동쪽인데 거의동쪽이다,
夫婦(부부) 나란히合葬(합장)하고 碑石(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鄭件兒(정건아) - 鄭根伊(정근이) - 鄭今伊(정금이)의 장녀(長女) - 호적기록참조
鄭弘岳(정홍악) - 長木面(장목면) 大錦里(대금리) 草溪鄭氏(초계정씨) 家門(가문)에서 出嫁(출가)오셨다고 문중초단은기록하고 이름은 정홍악(鄭弘岳)으로 기록하고있지만. 戶籍(호적)에는 정건아(鄭件兒)로 기록하고있다.
1846년병오년(丙午年) 10월17일생(生). - 호적참고(戶籍參考)
1847년丁未年(정미년) 3월7일生(생). - 문중초단(門中抄單)
1923년계해년(癸亥年) 3월8일수(壽) 77歲(세) 壽(수:77세사셨다는뜻)(문중초단자료)
호적에는 1862년8월20일 장목면 대금리鄭根伊(정근이)의 장녀와 혼인했다고 기록하고있다.
아들이 없어 양관업(梁寬業) 고조부(高祖父)님께서 고민하시다가 조카들중에 양만필(梁萬弼) 증조부(曾祖父)이 평소에 마음에들어, 양자(養子)로 입적(入籍)시켜 자연히 재산(財産)을 물려주었다고한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따님한분, 양옥선(梁玉先)은, 慶州(경주) 李氏(이씨) 李乼伊(이줄이)에게 出嫁(출가)가셔서, 아들에 興順(흥순)과, 따님은 順氏(순씨), 順奇(순기), 又順奇(또순기)를 두셨다. 寬業(관업) 고조부님께서 아들이없자 오형제(유관, 재관, 관철, 관열, 관업)의 자손들중에 가장 마음에드시는분을 골라서奉祀孫(봉사손)으로 삼았다고한다.
그래서 梁萬弼(양만필) 曾祖父(증조부)님을 養子(양자)로 삼아자연히 孫子(손자) 梁鳳石(양봉석) 할아버지께 財産(재산)을 물려주게되자 큰집 자손들이 반발하게 되었다고한다. 그래서 큰집 有寬(유관)의 후손들과 재산싸움이 일어나 3대로 서로가 원수가 되어살아왔다. 그러다 가孫子代(손자대)에와서 梁斗算(양두산) 백부님과 梁斗八(양두팔) 백부님께서 서로 和議(화의)를해서 우리대에 와서는 모든 것을잊고 형제간의 友誼(우의)를 다지고있으나 미흡한 점이 너무많다.
5)這浦里(저포리)를 冠浦里(관포리)로 萬(만)字(자)弼(필)字(자) 曾祖父(증조부)님께서 地名(지명)을 바꿨다고 하시는데, 어떤 理由(이유)로 冠浦里(관포리)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
◎▶長木里(장목-리) <장남포, 장목포, 장목진, 장목[리[ 本來(본래) 巨濟郡(거제군) 長木面(장목면)의地域(지역)으로서, 장남포, 또는長木浦(장목포), 또는長木鎭(장목진)이있었으므로, 長木鎭(장목진), 長木(장목)이라하였는데. 1914년日帝(일제)가行政區域(행정구역)을統廢合(통폐합)하여, 外浦(외포)를倂合(병합) 長木里(장목리)라해서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에編入(편입)시켰다. 1950년6.25動亂(동란)으로人口(인구)가增加(증가)함에따라1953년巨濟郡(거제군)이復舊(복구)되어巨濟郡(거제군) 長木面(장목면) 編入(편입)되었다. 長木面(장목면) 所在地(소재지)로서는警察官支署(경찰관지서), 學校(학교), 郵遞局(우체국)이있음.가는-개[개] 장목앞에 있는개.
◎▶冠浦里[(관포리,갓개,저포,관포] - 본래巨濟郡(거제군) 長木面(장목면) 지역으로서, 地形(지형)이 갓(這)처럼 생겼으므로, 갓개(這浦-저포)라고, 불렀다. 또는這浦里(저포리), 冠浦(관포), 하였는데, 1914년行政區域(행정구역) 廢合(폐합)에따라, 頭毛里(두모리)를 倂合(병합)하여 冠浦里(관포리)라해서 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에 編入(편입) 되었다가, 1953년 巨濟郡(거제군)이 復舊(복구)됨에따라, 巨濟郡(거제군)에編入(편입) 되었다가. 인구증가에따라 巨濟市(거제시)로 승격되어거 제시 장목면에 속한다.
◎▶冠浦里 마을의 歷史◀◎
1592년李舜臣(이순신)將軍(장군)의 亂中日記(난중일기)를 보면 李舜臣(이순신)將軍(장군)은지금의 舊永(구영)뒤 蘇秦浦(소진포)라고 表現(표현)하였고,
冠浦里[(관포리,갓개, 저포, 관포]는 本來(본래) 地形(지형)이 갓(這)처럼 생겼으므로, 갓개(這浦-저포)라고, 불렀다고 학글 學會(학회)가 밝혔다. 巨濟府邑誌(거제부읍지) 記錄(기록)에는 這浦(저포)라는 이름으로 河淸面(하청면) 坊里(방리)에 처음으로 이름이 올랐다.
朝鮮朝(조선조)에 巨濟郡(거제군) 河淸面(하청면) 面長(면장)을 歷任(역임)하신 筆者(필자)의 曾祖父(증조부)님을 찾아오신 전태흥[(全泰興:1868生~1918년卒(졸), 在職(재직:1911년11월1일~1914년2월거제도(巨濟島) 마지막군수(郡守), 1914년3월1일초대(初代) 통영군수(統營郡守), 창원군수(昌原郡守), 밀양군수(密陽郡守) 역임(歷任)]郡守(군수)]께서 1914년行政區域(행정구역) 廢合(폐합)에 따라, 杜毛(두모)를 頭毛(두모)로 하는데, 這浦(저포)의 同名(동명)을 어떻게하여야 할지 諮問(자문)을 하시자, 曾祖父(증조부)님 本來(본래) 這浦(포)는 韻(운) 즉 音(음)을 따서"갓개" 라고했으니, 갓冠字에 개浦字로 冠浦(관포)로 바꾸었다고 先代(선대)에서 말씀하신 것을 父親(부친)께서 늘 말씀하셨다.
이런 사실은 記錄(기록)을 하지 않아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믿지를 않는다. 冠浦里(관포리)를 頭毛里(두모리)와 倂合(병합)하여 冠浦里(관포리)를 1區(구)로 頭毛里(두모리)를 2區(구)로 고쳐서 統營郡(통영군) 長木面(장목면)에 編入(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 巨濟郡(거제군)이 復舊(복구)됨에 따라, 巨濟郡(거제군)에 編入(편입) 되었다가. 인구증가에 따라 巨濟市(거제시)로 승격되어 巨濟市(거제시) 長木面(장목면) 冠浦里(관포리)로 되었다. 此後(차후) 巨濟冠浦門中(거제관포문중) 會長(회장)은 너가 이어가길 바란다. 인물이 없다.
너가 태어 나기전에 해마다 봄이면 [시리성] 우리집에 모심기를 할때에 항상 너의 어머님께서 우리 사촌 6촌 형제간에 友愛(우애)를 敦篤(돈독)히 하셨고, 모심기 할때는 항상 座中(좌중)을 웃기는 소리며, 리드(lead)를 하셨다. 우리 5촌 당숙모님 중에 제일 똑똑하셨고, 자상 하셨다. 방수야~ 모가 모자란다. 빨리 가지고 오거래이 ~ 빨리~ 빨리 ~ 하거래이 ~ 소리 치시고, 흥겹게 노래도 부르시고 춤추시던 그 옛날이 생각 난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다.
1956년에는 내가 장목중학교를 포기 하고 仁祚(인조) 삼촌을 진해고등학교 졸업을 졸업시키고, 그 이듬해 형님이 하청고등학교 다닐때는 관포 어업조합을 찾아가서 사정사정해서 가까스로 급사로 취직을 하여, 형님을 하청고등학교를 졸업 시켜 주었는데 정작 내가 하청고등학교를 다닐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장승포 해성고등학교를 월반하여 다니다가 돈이 없어 鎭海(진해) 충무상고를 전학 갔다가 그것도 안되어 서울로 무작정 上京(상경)하여 서라벌 예고 연극영화과를 다닐때는 할수 없이 朝夕(조석)으로 신문을 돌렸다. 너의 엄마는 숙모님이 아니라 다정다감하신 엄마와 같았다.
그 자상하시고, 인자하시던 모습은 고모님들 못지 않았다. 돌아 가실 때 까지 전화하면 아이고 우리 방수야 ! 하시던 음성이 지금도 생생 하다. 부디 탁생아 ! 용기 잃지 말고 성공하길 기원하다. 그리고 엄마를 위해 祈禱(기도) 많이 하라! 그리고 시제때는 적어도 옷깃을 여미고, 선대에 대한 [쎄미나]를 개최하여라!
후손들이여 ! 아래 글체보다 ~ 처해 선조님의 친필로 바꾸어야 한다고 왜? 생각 못 하십니까?
말도 안되는 글. 뜻도 모르면서 이글을 모셔놓고 절하게 하는 문중 형제들이여 ! 빨리 떼어 버렸으면 한다.
꼴통같은 사고로 선조와 자손들을 위한다고 고집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 제발 부탁한다.챙피하다.
이 말은 아무도 하지 못하지만 나는 해야 한다.
병부공파 30세손 양 방수 원문번역 고증
https://www.youtube.com/watch?v=ftJUnF9acCw&list=UUZdBJIbJz0P9xyFipgOj1fA&index=1689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 30세손 양 방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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