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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송년예배 특강
산 소망
말씀 / 베드로전서 1:1-25
요절 / 베드로전서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어느 덧 2024년도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송년예배로 드립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또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전후서는 로마 황제의 핍박을 받아 소아시아 지역 각지로 흩어져 있던 성도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쓴 격려와 소망의 서신입니다. 성도들은 살던 곳을 뒤로하고 정처 없이 떠나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당장 가족들과 함께 먹고 마실 것, 잠잘 것을 걱정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더욱이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이 현지인들에게 멸시받는다면 어떨까요? 예수님이 진리요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지금까지 왔는데 이것까지 무시당한다면 이제 무엇을 의지하며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신앙마저 회의적이 되기 쉬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많은 사회 분위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각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 삶의 여유 가운데 세상을 누려보고도 쉽습니다. 또 때로는 삶에 지치고 피곤한 생각이 들면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신앙과 사명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우리에게 분명한 영적 방향을 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호칭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흩어진 나그네’와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흩어진 나그네’라는 단어가 앞에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 곧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노니”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라는 생각보다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는데 ‘택하심을 받은 자’와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먼저 ‘흩어진 나그네’를 보면 ‘나그네’는 지금의 장소에 정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잠깐 들렀다가 어디론가 다시 떠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종착지가 아니기에 거기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시 잠깐의 불편함과 고난을 감수합니다.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기에 많은 짐을 쌓아두지도 않습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킵니다. 신앙의 나그네들에게 있어 세상은 정 둘 곳이 아니기에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영어로 ‘strangers’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성도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삶은 나그네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정 두고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본향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로서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세상과 섞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힘이 없고 무능력해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셨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이 택하심은 일개 선생이 택한 것도 아니고 황제가 택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택함 받느냐에 따라 택함 받는 영광과 무게도 달라집니다. 황제의 택함을 받았다면 흩어진 나그네로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으니 큰 영광이요 이에 따르는 고난도 마땅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으니 나그네로서의 아픔을 마땅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택하심이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선택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나그네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성삼위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세 전에 작정하시고 당신의 자녀 삼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택하심을 받은’ 곧 ‘chosen’이라는 단어가 6번이나 나옵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또 이것을 얼마나 큰 축복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무시 받고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야 할 때는 자기가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때 성도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택함 받는가가 참 중요한 일인데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일까요?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피 뿌림의 은혜를 받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화되고 주 예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과거 우리는 어둠 속에서 죄악된 본성을 따라 살다가 심판받고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되어 가며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과거에는 죄악된 욕심에 사로잡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생명의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대반전입니까?
이처럼 한 사람이 택함을 받으려면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지속적인 관심과 넘치는 사랑으로 한 사람이 택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나그네’와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두 가지 신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두 신분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나그네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택하심을 축복으로 알고 믿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베드로 당시의 성도들처럼 현실적인 삶에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때로는 두려워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극심한 혼돈과 고난과 방황 속에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개개인차는 있겠지만 그래도 비교적 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과 그 끝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인식이 있을 때 세상에 대하여 ‘나그네’로서의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군인은 군인으로서의 정체성, 군인다움의 자세를 요구받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거기에 합당한 삶의 자세를 요구받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르게 살고자 할 때 여러 가지 불편함과 어려움과 고난이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그네로서의 가치관과 자세를 유지할 때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령님의 도우심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더 크고 확실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이 택하심 받은 은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원어 성경에는 “찬송하리로다!” 이 말이 맨 앞에 기록됩니다. 베드로 당시 성도들은 많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흩어져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힘들어도 견딥시다!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오겠지요.” 적어도 목자라면 그들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 공감하는 말을 먼저 해줘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 베드로는 “찬송합시다!”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일이 잘 풀리고 즐거우면 찬송하지 말라고 해도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꼬입니다. 또 당시 성도들은 나그네로서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고 살 수 없었습니다. 서럽고 억울하고 고독한 사람에게 “찬송하세요”하면 따귀 한 대 얻어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찬송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원래 죄악된 본성대로 살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크신 긍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지금 박해를 받고 고생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고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 유업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들은 때가 되면 썩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좋은 차도 때가 되면 폐차 처분해야 합니다. 좋은 집도 오래되면 물도 새고 보일러도 망가지고 처음에는 없던 벌레도 나옵니다. 많은 재물도 순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젊음도 세월이 가면서 달라짐을 느낍니다.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고 싶어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좋은 사진 나오거나 자기가 잘한 것들을 쇼츠나 릴스 영상으로 올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곱고 예쁘고 잘생긴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어느덧 흰머리도 늘어나고 좀더 젊었을 때 입었던 옷들이 이제는 안맞고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또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옵니다. 소망이 더 이상 소망이 되지 않을 때 그 소망은 ‘죽은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대하고 바랄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한계적인 소망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 세상의 소망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희망이 되어 삶의 활력을 가져다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영원하고 온전한 소망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에게 무엇이 ‘산 소망’입니까? 무엇이 지속적으로 설렘과 기대와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는 ‘a living hope’가 됩니까? 이 세상의 것과는 달리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해 친히 예비하신 하늘에 준비된 것을 상속받는 것, 사도 베드로는 이것이 성도들의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산 소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됩니까? 계시록 20장 15절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는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거듭나서 구원받은 우리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생명책에는 부동산, 주식, 대박 난 것 기록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어떤 차를 몰고 다녔는지 재산이 얼마였는지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배 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은 사람들만의 이름이 생명책에 당당히 기록됩니다. 생명책 명단에 빠지면 조금 섭섭한 정도가 아니고 절망이요, 끝장입니다.
또 부활의 영광으로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a절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부활하신 예수님의 찬란한 모습처럼 우리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부활의 몸으로 사랑하는 예수님과 성도들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외모가 좀 안 받혀 주는 것, 병들고 연약한 것, 머리가 나쁜 것,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그곳은 이 세상의 경쟁과 비교의 아픔도 질병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 그곳은 사랑과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곳입니다.
우리 마음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오늘이 좀 고통스럽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찬송하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말세에 나타나기로 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 유업을 생각할 때 그것을 그냥 마지막 날에 대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있을 미래의 소망은 현재의 나와 분리시키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리라” 말씀하실 때 “마지막 날에 다시 살 줄을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의 대답은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대답이요, 현재 오빠 나사로가 죽은 이 마당에는 사실상 무의미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지식은 오늘의 슬픔을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말의 벌어질 이야기를 뒤로 밀어놓습니다. 지금은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 이 세상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언제나 미래의 것이지 지금의 것으로 삼기는 쉽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유명한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믿음과 희망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만일 이 희망이 없다면 비록 우리가 신앙에 관해 제아무리 재치 있고 점잖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 신앙은 희망을 세우는 기초이고 희망은 신앙을 키우고 지원한다. 희망은 언제나 신앙을 새롭게 하고 활기차게 하며 항상 거듭 더 힘 있게 일어서게 함으로써 신앙이 끝까지 견디도록 도와준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노라하면서 분명한 소망이 없다면 그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쫓아가면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신앙인의 승리 비결은 확고한 소망에 있고 이 소망은 찬송함으로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소망과 함께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능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5절 또한 보십시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여기 ‘보호’라는 말은 군사용어입니다. 군인들이 든든히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이 능력으로 우리의 구원을 철통같이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 좋은 것은 알겠는데 우리가 그것을 얻지 못하고 중간에 낙오자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연약하고 죄악되어 산 소망에 걸맞게 살지 못할 때도 많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산 소망이 취소됩니까? 구원이 취소됩니까? 그럴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철통같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찬송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떠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크게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8절을 보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신앙생활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건강문제, 전공문제, 취업문제, 입시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자녀 교육의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세상과 사회 속에서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고난일 수 있습니다. 목자로 살아가고자 할 때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양들을 섬기면서 인내하고 희생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으면 고난도 아닐 건데 열매 맺지 못하면 고난이 아픔이 됩니다. 하지만 산 소망은 모든 시련과 고난을 온전히 극복하게 합니다. 사실 시련 자체로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있기에 근심하지만 그러나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시련이 닥치면 근심합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의 근심은 근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근심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고 묵상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금광석이 용광로에 들어가 시련 후에 불순물이 다 타고 순도 100%의 정금이 되어 나오듯 고난을 통해 순수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므로 오히려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7). 점차 믿음이 견고해지면 우리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주어지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정금보다도 더 귀한 명품 신앙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을 체질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이 있지 않으면 내 속에 있는 교만, 위선, 거짓, 세상 욕망 등을 털어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통해 진실하게 회개함으로도 가능하지만 인간이 워낙 죄악되다 보니 말씀을 잘 안받아들이고 변화되는데 오래 걸립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신앙으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하는 모든 신앙 행위는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영적 반응입니다. 시련 속에서 죽지 않으려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붙들고 사명도 감당하다 보니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우리 삶 속에서 없어지기를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는 시련에 잘 반응해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살다보면 크고 작은 시련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들을 통해 얻어지는 견고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7,8). 9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the goal of your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우리 믿음의 최종목표는 영혼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 연단된 우리 믿음이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영광스럽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아야 합니다(13).
그러면 이 같은 산 소망을 가진 우리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성결한 삶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거룩’은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분리가 아니라 구별되어 성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불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죄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결한 삶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고 진정으로 생명력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둘째,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닮아가는 삶은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세상은 생존경쟁의 시대입니다.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상대를 눌러야 내가 돋보이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나 중심으로 이기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무관심으로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성도로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로서, 그때를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자로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존중하고 신뢰하는 공동체, 아름다운 영적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산 소망’이 여러분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 속에 ‘산 소망’이 고이고이 간직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는 우리를 택하셔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 산 소망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산 소망이 이뤄지기까지 우리를 지키시며 여러 시련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견고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삶의 크고 작은 시련 속에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므로 현실 삶의 문제들을 잘 감당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로서 더욱 성결하게 더욱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새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풍성함을 소망 가운데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