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강화군 문화관광해설사 현장학습이 11월7~8일, 1박2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첫날은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 상원사, 오대산 사고지를 방문하고 둘째날은 강릉의 오죽헌, 선교장, 허균 허난설헌 생가를 방문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0월말에 3박4일도 일본에 가고 바로 11/4 청평 천보수련원에 가고, 이번에 강원도에 가니 너무나 피곤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축복하신 것 같은 좋은 날씨에 우리나라 국보 및 보물을 볼 수가 있어서 뜻깊은 여행이었습니다.
먼저 월정사의 국보가 보관되어 있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을 찾았습니다. 국보인 석조보살상을 봤습니다. 가슴에서 손을 모으며 무릎을 꿇고 앉은 독특한 모습이었는데, 이 모습은 강원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라 합니다. 실제 월정사에 가니 신성한 풍위기를 느꼈습니다. 월정사는 한자로 月精寺라 씁니다. 꼭 밤에 오면 더욱 신비스러운 느낌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월정사의 말사(末寺)인 상원사는 월정사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으니 공기가 맑고 천상세계에 온 것 같았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동종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종이라 합니다. 월정사도 상원사도 다 오대산 사고를 지키는 수호사(守護寺)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미지막에 오대산 사고지를 방문했습니다.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가져갔다가 관동대지진(関東大震災) 때,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합니다. 강화에도 정족산사고가 정족산성(삼랑성) 안에 있습니다. 지금은 수호사인 전등사가 훨씬 유명해졌지만, 원래 사고가 제일 중요한 건물인 것입니다. 산성 남문 맞은편, 북문 근처에 사고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릉에서 숙박하고 둘째날은 테라로사 라는 커피점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강릉이 커피가 유명하다 합니다. 다음은 오죽헌에 이동하였습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 아들 율곡선생이 태어난 곳입니다.
강릉 해설사님의 안내로 관람하였는데, 해설사님이 말하시기에 “신사임당은 19세로 결혼을 했는데, 당시로는 좀 늦은 나이였다. 그것은 사임당의 부모님이 자신의 딸이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그 재능을 꽃피우게 하기 위해 그렀다 한다. 평범한 남편과 결혼을 시키는 것도 그렇다”하셨습니다.
사임당을 행복한 여인으로 보면 정 반대의 삶을 사는 여인이 허난설헌이라 합니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이입니다. 생가는 오죽헌과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가까운 지역에 태어나 뛰어난 재능을 가져온 두 여인이지만, 둘은 서로 정반대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인당 보다 약 60년 후에 난설헌(난설헌은 호이고 이름은 초희)이 태어나지만, 60년의 세월이 흐른 사이에 조선사회가 남성중심한 사회로 완전히 모습을 바꿨기 때문이라 합니다.
신사임당은 남편 이원수가 장가 들었지만,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에게 시집을 갑니다. 그러나 남편은 파람을 피우고, 시어머니께 구박을 받아 아이도 잃어 26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작품은 남동생 허균을 위해 세상에 나왔다 합니다. 신사임당의 오죽헌은 넓고 아름답게 꾸미고 있고, 아들 율곡선생에게 지극한 효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난설헌 생가는 왠지 쓸쓸하게 느꼈습니다.
이번 여행으로 내게 큰 강동을 준 장소가 선교장입니다. 전주 이씨 효령대군의 후손인 완풍부원군의 자손이 정착하는 곳입니다. 집 앞에 경포호수가 있었고, 배로 다리를 만들어서 호수를 건너 다녔으며 선교장(船橋莊)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여기를 100여년 동안에 꾸준히 건물을 증축하니 “대궐 밖 조선 제일 큰 집”이라 부렸다 합니다. 경지가 좋아서 풍류,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아낌없이 베풀었다 합니다. 안내하신 해설사님이 말하시기에 “여기는 개인 집이 아니라 지역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선교)장(莊)자를 붙었다.”고 하셨습니다. 신종족메이사를 목표로 삼은 나에게 하나의 방향을 보여주었습니다.
선교장 안에 초장이라는 초가집이 있습니다. 선교장의 선조들이 자연 속 초가에서 살면서 소작인들의 심정을 체휼하려고 했던 곳이라 합니다. 주인이 너무 겸손하고 백성들을 위해 사셨다 합니다. 그러니 어느 날이 화재로 선교장이 위험하다 할 때, 백성들이 힘을 합쳐서 지켰다 합니다.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피난한 선조를 원망하여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붙인 것과 대조적(對照的)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양반에 대한 이미지가 악한 것으로 왜곡되었지만, 원래는 (하늘의)부모의 심정을 배우는 사람이 양반인 것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나의 시댁도 전주 이씨 효령대군 후손입니다. 그래서 친근감도 느끼며, 나도 선교장의 정신을 상속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