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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지맹(城下之盟)
성 아래의 맹약이라는 뜻으로, 힘에 굴복하여 굴욕적인 조약을 맺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城 : 성 성(土/7)
下 : 아래 하(一/2)
之 : 어조사 지(丿/3)
盟 : 맹세 맹(皿/8)
출전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수도의 성 밑까지 적군의 공격을 받아 할 수 없이 강화를 맹세하고 굳게 약속한다는 뜻으로, 대단히 굴욕적인 강화나 항복을 이르는 말이다. 전쟁은 평화를 위해서 있다. 그러니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 최상이다. 손무(孫武)는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고 했다.
비위부전(非危不戰), 위기가 아니면 싸우지 않아야 하지만 부득이하게 싸울 때가 왔다면 존망이 걸려 있으니 이겨야 한다. 병불염사(兵不厭詐)란 말이 있듯이 어떤 속임수를 쓰더라도 이기면 비난받지 않는다. 성을 굳게 지키다, 속임수에 빠져 무너지고 성 아래(城下)에서 굴욕적인 맹약(之盟)을 맺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
춘추시대(春秋時代) 강대한 초(楚)나라의 침략을 받은 작은 교(絞)나라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잘 알았다. 초군이 도성의 남문까지 육박해 오자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籠城)작전을 펼치며 밖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초나라 진중에 굴하(屈瑕)라는 사람이 초군 장수에게 계책을 말했다. 교나라 사람들이 경솔하고 지략이 부족하므로 유인책을 건의했다.
먼저 나무하는 초부들을 병사 호위 없이 보내면 교나라 병사들이 성 밖으로 나와 잡아갈 것이라 했다. 초의 장수가 실행했더니 과연 교나라 군사들이 초부들을 30명이나 붙잡아 갔다. 다음번에는 초의 병사들을 나무꾼으로 변장시켜 나무하게 했더니 역시 교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 산중으로 추격했다.
이때 미리 ‘매복해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도성의 북문을 막고 교의 군사들을 크게 쳐부순 다음 성벽 아래에서 맹약을 맺고 돌아갔다(楚人坐其北門, 而覆諸山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병사를 나무꾼으로 변장시켜 목마(木馬)작전으로 성공한 셈이다. 좌씨전(左氏傳) 환공(桓公) 12년조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계략에 넘어간 교나라가 대패하고 성벽 아래에서 맺은 맹약은 굴욕적인 것을 의미하게 됐다.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오늘날의 외교전에서도 국력의 차이와 지략의 유무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전번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싱가포르의 미국과 북한 정상회담에서도 벼랑 끝 전술을 펼치다 황급히 거둬들이는 등 치열한 대결을 펼쳤다. 성벽 아래에 있었던 나라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성하지맹(城下之盟)
이 성어는 수도의 성 밑까지 적군의 공격을 받아 할 수 없이 강화를 맹세하고 굳게 약속한다는 뜻으로, 대단히 굴욕적인 강화나 항복을 이르는 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환공(桓公) 12년조(十二年條)에 나오는 말이다.
그 계책을 따르니 교(絞)의 사람들은 초나라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從之, 絞人獲三十人). 이튿날에는 교의 사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나서서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 속으로 달려갔다(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숨어 있었으므로 교의 사람들은 대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楚人坐其北門, 而覆諸山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위의 글은 초(楚)나라가 교로 쳐들어갔을 때의 일을 보여 주는 것이다. 초나라가 교의 남문에 진을 쳤을 때 초나라의 굴하(屈瑕)가 “교의 사람들은 매우 경솔하니 땔나무를 하는 인부를 호위병을 붙여 내보내서 유인하면 어떤지요”라고 계책을 제안하였다. 그러자 장수가 수용하여 이와 같은 전술을 펼친 것이다.
성하지맹은 교의 사람들이 성 아래까지 진격해 들어온 초나라에게 항복할 것을 맹세하는, 즉 초나라에게는 압도적인 승리요, 교에게는 굴욕적인 패배를 비유한 말이다. 제대로 반격해 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여 치욕적인 강화를 하는 것을 말한다.
성(城)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 서양을 막론하고 성은 최고 통치자의 안보를 위해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양의 성(城)은 정권의 상징적 공간으로 생성되었기에 건물의 형태로 발달한 반면, 동양의 성(城)은 거주민들의 안보를 위해서 생성되었기에 도성, 산성 등의 형태로 구분되고 발달했다. 기록 상 나타난 최초의 성곽은 춘추시대다. 만국사물기원역사에 따르면,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성(城)을 쌓아 군을 지키고 곽(郭)을 만들어 백성을 지켰으니, 이것이 성곽의 효시다.”
중국의 성문은 기본적으로 한 면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삼문(三門)으로 되어 있었다. 옛날에는 성문 전면에 옹성이라는 소곽(小郭)을 설치했다. 이 옹성의 상징성은 매우 강해서 농성(籠城)이란 말을 낳았다. 즉 정예 병사들이 지키던 옹성이 무너지면 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철저하게 성을 지켰는데 이를 농성이라 했다. 이에 유래하여 오늘날 농성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뜻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장군이 있는 성의 한가운데에 호화스런 깃발을 세우고 장군의 위세를 과시했다. 이 깃발은 깃대의 끝을 황백색의 상아로 장식하고 거기다 교묘한 조각을 하는 등 볼품 있었다. 이 깃발을 아기(牙旗)라 불렀고, 대장군이 있는 성을 아성(牙城)이라고 했다. 오늘날 아성은 아주 중요한 근거지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외적으로는 어떤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그 주위를 둘러막은 성곽의 개념이 강했다. 수도의 보위를 위해서 도성, 왕궁의 보위를 위해서 궁성(宮城), 각 지방의 행정 소재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읍성(邑城) 등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처에 미리 쌓아놓은 성들도 적지않다. 그런 성의 하나로 우리 편의 근거지를 삼기 위해 산 위에 쌓은 것을 산성(山城)이라 하고 요지를 따라 한 줄로 쌓아 적을 방어하는 것을 행성(行城)이라 한다
남한산성은 한 맺힌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이곳에 피신하였으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 수항단으로 나가 항복하는 굴욕을 치렀다.
춘추(春秋) 시기 초(楚)나라 군주 장왕(莊王)은 대부 신주(申舟)를 제나라로 파견하였는데, 제나라로 가려면 송나라를 거쳐야 했다. 제후국의 사신이 다른 나라를 통과하게 될 경우 먼저 가도(假道) 즉 '길을 통과한다'는 뜻을 밝히는 것이 예의였으나 송나라를 얕잡아 봤던 초장왕은 '가도'의 인사를 하지 말 것을 신주에게 당부했다.
신주는 과거 싸움에서 송나라의 미움을 샀던 적이 있었던 터라 만약 이번 사건으로 또 한번 책잡히게 되면 목숨을 잃을까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자 초장왕은 신주를 죽이면 송나라를 공격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신주는 아들을 초장왕에게 맡긴 후 길을 떠났다. 그가 송나라에 이르자 과연 송나라 사람이 길을 막았다. 송나라의 대신들은 초나라의 이런 무례한 행위에 격분하여 신주를 죽여버렸다.
기원전 595년, 초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고 도성을 포위했다. 송나라는 진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 지원군을 부탁했지만 초나라와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진나라 군주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송나라가 초나라에 넘어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 해양(解揚)이라는 사신을 보내 진나라의 병사들이 곧 구원하러 오니 초나라에 항복하지 말고 조금만 버티라고 전하게 했다.
그러나 해양은 뜻밖에도 포로로 잡혀 초나라에 보내졌다. 초장왕은 해양에게 뇌물을 주면서 말을 뒤집도록 회유하였다. 송나라를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해양은 겉으로는 그러마 하고 대답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음날 해양을 망거(樓車; 망루를 설치한 수레)에 올려놓고 병사들을 향해 구원군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외치게 했다. 그러나 해양은 오히려 절대 투항하지 말고 진군이 곧 올테니 조금만 버티라고 전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초왕이 해양을 죽이려 하자 해양이 말했다. '진나라 군주의 명을 따르고 복종한 것뿐입니다. 지금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에 초왕은 군주에 대한 해양의 충성심을 높이사 그를 풀어주고 병사를 철수시켰다. 그후로도 초나라와 송나라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훗날 송나라가 어려워지자 화원(華元)이라는 대신을 파견해 초군의 진영에 몰래 잠입시켰다.
화원은 초나라 장군 자반(子反)을 만나 부탁했다. '우리 군주께서 저를 파견하여 송나라의 현재 가난한 상황을 말씀드리라 하였습니다. 송나라의 백성들은 이미 자식을 양식과 바꾸어 먹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라가 쓰러져 간다고 해도 치욕적인 성하지맹(城下之盟)만은 맺지 않으려 합니다. 만약 초군이 30리만 물러가 준다면 그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초군은 그 말대로 30리 밖으로 물러났다. 화원은 초나라에 인질로 잡혔고 따라서 초나라와 송나라 양국은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좌전(左傳) 선공(宣公) 十五年에 수록되어 있다. 성하지맹은 적군 병력이 성에까지 다다라서 물러날 곳 없게 될 때 적군과 동맹을 맺는 것을 말한다. 즉 핍박으로 어쩔 수 없이 협약을 맺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성하지맹(城下之盟)
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나라 태종 앞에서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12개 조항의 맹약을 체결한 일을 말한다. 이 맹약으로 조선과 청나라는 신하와 임금의 관계로 전환되었다. 성하지맹은 당시 조선지식인들에게 반청의식을 불러왔으며 이는 북벌론(北伐論)과 존주론(尊周論)으로 이어졌다.
성하지맹이란 춘추좌씨전 환공(桓公) 12년조에서 유래한 말로, 초(楚)나라가 교(絞)로 쳐들어갔을 때, 초나라의 굴하(屈瑕)가 땔나무를 하는 인부를 호위병을 붙여 내보내서 유인하는 계책을 내었는데, 그 계책이 적중하여 교의 군대가 앞을 다투어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속으로 달려가서 결국 잠복해 있던 초나라 군사들에게 섬멸되고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대단히 굴욕적인 항복을 의미하였다.
조선의 경우 병자호란 때 전세가 어렵게 되자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나라 황제 앞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인조는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을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청나라 진영으로 갔으며, 청나라 태종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둘러섰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하는 모습이었다.
인조는 청나라 태종앞에 나아가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였다. (인조실록 15年 1月 30日) 이때 인조와 청나라 태종 사이에 체결된 맹약의 내용은 청국과 조선이 군신(君臣)의 의리를 맺으며, 명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끊고, 조선 왕의 장자와 차자, 대신의 아들을 인질로 보낼 것, 청국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기일을 어기지 않고 군병을 보낼 것 등 모두 12개 조항이었다.
인조와 청나라 황제 사이에서 이루어진 맹약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치욕적인 것이었다. 왕이 몸소 청나라의 진영에 나아간 것이라든지, 대군과 빈궁이 포로가 되고 세자가 인질이 된 것 등은 소중화라고 자부하던 조선의 사림들이 오랑캐라고 여기던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었으므로 대단히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인조실록 18年 5月 9日)
조선사림들의 수치심은 전란 후 반청의식의 고조로 이어지면서 그것이 결국 북벌론과 존주론으로 나타났다. 북벌론은 청나라를 공격하여 멸망 시킴으로써 상처받은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하자는 논리였고, 존주론은 공자(孔子)가 주장한 춘추의 대의, 즉 주(周)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이념에서 나온 것으로 여기서 주 왕실은 중화의 문물을 가진 문화국가를 의미하였다.
이후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완전히 장악한 뒤에 북벌론과 존주론은 조선중화주의로 이어졌다. 이것은 중화 문물의 계승자를 조선으로 설정함으로써 조선을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국으로 회복하자는 자부심의 산물이었다.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해서 숙종대에 창덕궁 후원에 명나라 의종을 제사 지내는 대보단(大報壇)이 건설되었고, 영조대에는 대보단에 의종과 함께 명나라 태조와 신종을 배향하고 제사지냈다.
▶ 城(재 성)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成(성)으로 이루어졌다. 成(성; 이루어지다)은 盛(성; 수북하다), 整(정; 일치하다, 정리되다)과 뜻이 통한다. 城(성)은 흙을 높이 쌓아 방벽을 지어 백성을 지키다의 뜻으로, 적군이 쳐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올린 큰 담, 성곽(城郭)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동네 전체를 성벽으로 에워싸기 때문에 동네를 성시(城市)라 한다. ❷회의문자로 城자는 ‘성’이나 ‘도읍’, ‘나라’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城자는 土(흙 토)자와 成(이룰 성)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성(城)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높은 장벽을 말한다. 고대의 도시들은 대부분이 흙을 쌓아 만든 장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城자에 쓰인 土자는 그러한 뜻을 전달한다. 그러니 城자는 성벽을 쌓고 창을 들어 지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城(성)은 (1)적군(敵軍)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올린 큰 담. 성곽(城郭) (2)카프카(Kafka, F.)의 미완성(未完成) 장편소설(長篇小說) 등의 뜻으로 ①재(높은 산의 고개) ②성(城) ③도읍(都邑), 나라, 도시(都市) ④무덤, 묘지(墓地) ⑤구축하다, 성을 쌓다 ⑥지키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성의 주인을 성주(城主), 성의 담벼락을 성벽(城壁), 성을 새로 쌓거나 또는 고쳐 쌓는 일을 성역(城役),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성의 둘레에 깊게 파 놓은 연못을 성지(城池), 내성과 외성을 아울러 일컫는 말을 성곽(城郭), 성의 출입구에 있는 문을 성문(城門),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는 것을 농성(籠城), 성문을 엶을 개성(開城), 흙으로 쌓아 올린 성루를 토성(土城), 높은 성을 고성(高城), 산 위에 쌓은 성을 산성(山城),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성이나 도시를 공성(空城), 성 밖에 겹으로 쌓은 성을 외성(外城), 수령과 백성 사이의 신분과 권리 상의 한계를 성화지분(城化之分), 수도의 성 밑까지 적군의 공격을 받아 할 수 없이 강화를 맹세하고 굳게 약속한다는 성하지맹(城下之盟),성곽에 사는 여우와 사단에 사는 쥐라는 뜻으로, 임금 곁에 있는 간신의 무리를 이르는 말 성호사서(城狐社鼠) 등에 쓰인다.
▶ 下(아래 하)는 ❶지사문자로 丅(하)는 고자(古字)이다.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❷지사문자로 下자는 ‘아래’나 ‘밑’, ‘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下자는 아래를 뜻하기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下자의 갑골문을 보면 윗부분은 오목하게 아랫부분은 짧은 획으로 그려져 있었다. 윗부분의 오목한 형태는 넓은 대지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의 짧은 획은 땅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下자는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하여 ‘아래’나 ‘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금문에서 숫자 二(두 이)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소전에서는 아래의 획을 세운 형태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下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下(하)는 (1)아래. 밑 (2)품질(品質)이나 등급(等級)을 상(上)과 하(下), 또는 上, 中, 下로 나눌 때의 가장 아랫길(끝째). (3)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밑에서, ~아래서의 뜻으로, 그 명사가 조건이나 환경 따위로 됨. 나타냄. ~하에, ~하에서, ~하의 형으로 쓰임 등의 뜻으로 ①아래 ②밑(물체의 아래나 아래쪽) ③뒤, 끝 ④임금 ⑤귀인(貴人)의 거처(居處) ⑥아랫사람 ⑦천한 사람 ⑧하급(下級), 열등(劣等) ⑨조건(條件), 환경(環境) 등을 나타내는 말 ⑩내리다, 낮아지다 ⑪자기를 낮추다 ⑫못하다 ⑬없애다, 제거하다 ⑭물리치다 ⑮손대다, 착수하다 ⑯떨어지다 ⑰항복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낮을 저(低), 낮을 비(卑), 내릴 강(降), 항복할 항(降), 낮출 폄(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존(尊), 높을 고(高)이다. 용례로는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을 하강(下降),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어떤 사람의 도급 맡은 일을 다시 다른 사람이 도거리로 맡거나 맡기는 일을 하청(下請), 아래쪽 부분을 하부(下部), 강이나 내의 흘러가는 물의 아래편을 하류(下流),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낮은 자리를 하위(下位),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옴을 하교(下校), 한 달 가운데서 스무 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의 동안을 하순(下旬),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하오(下午), 차에서 내림을 하차(下車), 위에서 아래로 향함을 하향(下向), 보호를 받는 어떤 세력의 그늘을 산하(傘下),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치적이 나쁜 원을 아래 등급으로 깎아 내림을 폄하(貶下),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을 귀하(貴下), 끌어 내림이나 떨어뜨림을 인하(引下), 원서나 소송 따위를 받지 않고 물리치는 것을 각하(却下), 낮아짐이나 내려감 또는 품질 따위가 떨어짐을 저하(低下),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는 하석상대(下石上臺),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하필성장(下筆成章), 아랫사람의 사정이나 뜻 등이 막히지 않고 위에 잘 통함을 하정상통(下情上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한다는 하우불이(下愚不移)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盟(맹세 맹)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그릇 명(皿; 그릇)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明(명, 맹)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明(명, 맹)은 똑똑히 나타내는 일을, 血(혈)은 희생된 짐승의 피의 뜻으로, 나중에 皿(그릇 명; 피를 넣는 그릇)을 더하여 썼다. 盟(맹)은 희생된 짐승의 피를 번갈아 빨고 신에게 맹세(盟誓)하여 약속하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盟(맹)은 ①맹세(盟誓) ②약속(約束) ③비슷한 사람끼리의 모임 ④구역(區域) ⑤땅의 이름(孟) ⑥맹세(盟誓)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맹세할 서(誓)이다. 용례로는 장래를 두고 다짐하여 약속함을 맹세(盟誓), 동맹을 맺은 나라를 맹방(盟邦), 굳게 맺은 약속을 맹약(盟約), 맹약을 서로 맺은 개인이나 단체의 우두머리를 맹주(盟主), 맹세하는 말을 맹언(盟言), 장래나 그밖의 어떤 일을 서로 굳게 맹세한 벗을 맹우(盟友), 희생을 잡아서 서로 그 피를 마시고 서약을 꼭 지키기로 신에게 맹세하는 절차를 맹제(盟祭), 개인이나 단체 및 국가가 서로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동일한 행동을 취할 것을 맹세하여 맺는 약속이나 언약을 동맹(同盟), 공동 목적을 가진 조직을 연맹(聯盟), 동맹이나 연맹 또는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가맹(加盟), 연맹이나 동맹을 결성함을 결맹(結盟), 위협하여 맹세하도록 함을 겁맹(劫盟), 이전의 맹약을 구맹(舊盟), 피로써 굳게 맹세함을 혈맹(血盟), 모여서 서로 맹세함을 회맹(會盟), 진실한 충정으로 맺은 맹세를 정맹(情盟), 즐거워하며 맹세함을 환맹(懽盟), 이웃과 서로 친밀하게 지내자고 맺는 맹약을 인맹(鄰盟), 마음속으로 맹세함 또는 그러한 맹세를 심맹(心盟), 썩 굳게 맹세함을 이르는 말을 맹산서해(盟山誓海), 팔뚝을 베어 피로 맺은 맹세라는 뜻으로 남녀의 굳은 사랑의 맹세를 이르는 말을 할비맹(割臂盟), 쇠와 돌같이 굳게 맹세하여 맺은 약속을 이르는 말을 금석맹약(金石盟約), 수도의 성 밑까지 적군의 공격을 받아 할 수 없이 강화를 맹세하고 굳게 약속한다는 뜻으로 대단히 굴욕적인 강화나 항복을 이르는 말을 성하지맹(城下之盟)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