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피
도피를 위한 길이었을까. 하늘은 구름 한 점이 없다. 구름이 한 점도 없을 정도로 맑은 하늘은 되려 이상하게 느껴진다. 고요하고 모상적이게 창문을 뚫고 내비치는 푸르른 배경의 뜨거운 햇빛은 알 수 없는 감동을 내면 깊이 쑤쎠넣는다. 그 감동은 매우 이질적인 것이기에 내 속의 비의식의 세포들은 그 모순의 감정을 붙잡지 못한다. 그저 푸르른 하늘을 볼 때, 그 옆에서 기계적으로 빛을 내뿜을 뿐인 태양이 눈 안을 간지럽게 할 때 어째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난 적어도 이런 이상현상을 가볍게 지나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분노했다. 다만 고정되어 폭력적이고도 강압적인 매트 의자에 앉아 내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창문 밖에 풍경을 바라보는 것 뿐이니 난 이 의자가 밉다. 적어도 그저 바라볼 수만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바라볼 때 나는 비의식 속에 공상의 길로 들어선다. 이 길은 매우 기계적이게 내 안에 프로그레밍 된 것 같아서 부조리를 느낀다. 난 수동적이게 능동적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 부조리의 대한 나의 능동적인 깨달음이 나를 잠시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이 깨달음 역시 버러지 같은 수동적인 나의 비의식의 톱니바퀴들이 만들어낸 인과일 뿐이라는 곳까지 생각이 닿자 잡시 생각을 접어 냈다.
생각을 돌이켰다. 하늘은 괴상했다. 마치 천국의 성당들이 전부 도괴되고 분쇄되어 미진의 형태로 나의 눈 앞에 산재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비현실적이게 맑고 푸르를 수 없다. 너무 맑다, 너무 푸르르다. 이것은 존재하지도 않을 창작자를 향한 칭찬이 아니라 무하는 존재를 향한 불의를 느낀 무인도에 떨어진 설진의 울부짖음이다. 맑은 하늘이 눈에 인식될수록 기묘한 감각은 몸에 각인 되었다. 더 이상 변하질 않을 하늘에 의미 부여하기를 멈췄다. 저 대기는 기계적인 활동으로 언젠가나 나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을 것이다. 혹 내가 눈멀어 저 위대한 법칙에 반기를 들어 폭죽을 하늘에 쏘아 올린다 하더라도 하늘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감성이 없으니 말이다. 돌고 도는 바퀴의 이미지가 머리에 떠올라 졌다. 그것은 자동차 바퀴였다. 울퉁불퉁한 돌들을 밟고 지나갈 때마다 듬직한 타이어를 감싸고 있는 육중한 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별개로 그저 그 바퀴 위에 남은 공간과 공간과 바퀴를 연결하는 스프링에 의하여 이리저리 움직이고 튕기며 그저 그 돌들에 쳐박혔다. 뭔지도 모르는 자신 위에 앉은 물질들에 의하여 이 불쌍한 친구는 바닥을 깔아 주었다. 불의하다, 이런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성이 없으니 말이다. 바퀴는 얼마나 부조리 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 고심해 보았다. 더 이상 눈 앞에 있는 불가지한 풍경은 머리 속까지 인식되지 않았다. 눈으로 들어왔다가 망막에서 끊겼다. 바퀴에 대하여, 그런 망상을 하다가 벌레라는 명사를 뒤에 붙였다. 어디선가 보았던 바퀴의 인상이 떠올랐다. 역겹고 지독한 것이었다. 이따위의 결론을 내리는 나의 의식의 이성 또한 그런 것이었다.
차는 막힘없이 갔다. 이 전에 놓였던 자리에서 저 앞으로 도약하였다. 나는 아무런 의지없이 이 고철 덩어리의 목표로써의 도약에 망라 되었다. 그저 과거의 잠깐, 그 순간의 동의에 이 긴 시간이 뜯겨져 간 것이다. 하염없이 달려가는 그 고도의 물체에 몸을 맡긴 이 때에 나는 부당함을 느낀다. 무리한 것이다. 잠깐의 발언과 사건을 겪기 전 갓난아기의 무지한 선택이 어찌 나의 현재를 앗아 갈 수 있는 건가. 과거와 현재의 이음선이 된다는 개념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움직임이 불의하게 느껴진다. 하늘이 푸를수록 나는 왜 만족하는가, 심각하게 아름다운 태양의 정열함을 볼 때에 나는 왜 감동하는가, 톱니바퀴는 왜 자신의 임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가. 돌기만 하면 될 톱니바퀴에게 왜 도는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할 생각은 도대체 어떤 시계공이 한 것인가. 만약 자연이 그런 의지를 가졌다면 과연 신이라 부를 만 하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역시 어째서 세상은 톱니바퀴의 형태로 성립된 것 인다. 과거가 현재로 연결되는 형태는 왜 만들어진 것인가. 누가 그런 무책임한 건설을 이륙한 것인가. 과거의 짧은 다짐과 깊이 없는 고백이 어째서 미래를 결정하게 내버려 뒀는가.
개소리에 불과한 이야기를 할 때에 나의 마음은 편해져 갔다. 오늘 새벽 나에게 말을 걸고는 5분 정도 주저리 말을 읊다가 갑자기 본론을 말했다. 먼 길을 가는 걸음에 말동무가 필요하다는 내용을 대충 풀어 설명했다. 난 오늘 아침 출근해야 한다, 이 문장이 내 목젖에 가로막혔다. 오늘은 금요일이다, 그래서 출근해야 한다. 경탄하다. 출근이란, 의무와 사람으로써 살 수 있게 만드는 의지와 현재까지 내 인생의 결과인 것.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목표로 도약했다. 언젠가 돈통으로 빠지는 꿈을 꾸고서는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는 몇 년 후에 출근을 했다. 도약한 후 씁쓸한 무릎의 절임과 함께 힘찬 함성 소리 하나가 방에 울려 퍼졌다. 문을 열고 나왔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필드를 바꾼 것이다. 나의 힘으로, 대견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돈통에 빠지는 꿈, 그 꿈에 쫓긴 것이다. 그리고서는 완벽한 대피소에 몸을 던진 것이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런 건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돈통”이라는 단어는 나의 존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돈통을 만들었나? 내가 돈통을 없앴나? 그 돈통에 쫓기다 찾은 출근 할 수 있는 “대피소”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런 대피소를 만들었나? 내가 그런 대피소를 없앴나? 수동적이게 쫓기고 수동적이게 이겨냈다. 그 과정 속에서 참으로 추하게도 여러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그 감정들은 누가 보기에는 고귀하다 할지 모르지만 슬픔, 분노, 기쁨, 환희 이런 수동적인 것은 혐오적인 것이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그런데 출근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구속된 현장이다. 분명한 일정이 있다는 것은 과상해도 될만하다. 수동적인 태엽들이 보기에는 말이다. 쩌렁, 울리면서 돌아가는 중에 출근은 참으로 귀감이 될만한 요소이다. 미친 듯이 규칙적이게, 광기로써 돌아가는 유기체들의 귀감에 소름 돋은 나의 목젖은 출근이라는 단어를 금지했다. 지배 되어진 형태의 저 한 글자에 나의 시신경은 온몸으로 혐오와 고약의 표현을 쏟아냈다. 자연히 찌글어지다. 어쩌면 난 새로운 형태로 지배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그의 목줄에 매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들의 표정을 한 내가 창문에 비쳐져 주인과 떨어져 거사를 치루기 직전의 개새끼들이 울 때 짓는 눈의 찌그러짐 정도로 가엽게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운전석 문이 열렸다 닫히고 이내 뒷문이 열렸다. 케이스 속에 든 정장 외투를 꺼내더니 대충 위에 걸쳐 입는 사람이 보였다. 곧 내 쪽 문이 열리더니 대뜸 넥타이를 내밀었다. 무슨 신호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무리 잘 길러진 침팬지가 결국 갑자기 뛰쳐나가 어느 침팬지를 강간하듯 난 넥타이를 받고 좌석에서 일어나 그의 가슴을 쳐다보며 넥타이를 매주었다. 그 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왜 그렇게 이타적인 행동을 했을까. 이 또한 기계적이게 프로그레밍된 하나의 형태일까,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역겨운 짐승같구나. 애초에 이타적이란게 무엇일까, 그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선택지인가? 난 그 선택지에 휘둘릴 뿐인 톱니바퀴-태엽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참으로 우울하구나. 이렇게 본질,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해대며 회의의 결론을 내리는 것의 이유는 또 무엇일까. 도피를 위한 것일까.
그대로 따라갔다. 건물에 들어가고 신발을 벗기까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앞에 놈이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나도 따라 적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어느 지점에 들어서서 멈췄다. 바닥이 전에 걷던 것과는 달랐다. 양말도 안 신어서 인지 더욱 자세하고 이질적이게 느꼈다. 앞 사람의 등을 향했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보기 힘든 매트였다. 다시 시선이 앞을 향하자 앞 사람들은 다 사라져 있고 정면의 누군가와 눈이 맞았다. 웃고 있는 인상은 공허로 채워져 있었고 눈은 활기차게 죽은 것이었다. 영정사진을 바라본 것이었다. 궁금증이 들었다.
당신은 누구신지요, 무슨 인생을 사셨는지요. 이 따위 것이 아니었다. 만족이 되십니까, 죽기 전에 무슨 기분이었습니까, 바퀴의 인생에 후대 바퀴들이 회고하고 추억하며 기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난 다시 바퀴가 되어 출근 도장 찍고 언젠가는 내 심장까지 그렇게 찍을까요, 그때에 나는 바퀴로써의 인생을 끝낼 수 있나요, 그래서 오늘 출근은 어떻게 하지요, 반차를 쓸까요 아님 아예 휴가를 쓸까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니, 다시 새로운 태엽을 돌렸다 이성이라는. 난 뭘하는 걸까 사진에게 말을 걸다니. 창피, 참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