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25
7월18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KTgIbiSc_4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81808455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해결사 예수님>
나이에 맞지 않게 이른 성공처럼, 자기도 모르게 다가온 ‘반짝 인기’처럼, 갑자기 굴러들어온 횡재처럼 위험한 것이 또 없다고 합니다.
재물이란 것, 사람들의 박수갈채란 것, 세상의 화려함이란 것은 손으로 움켜쥔 물과도 같기 때문이겠지요. 있다가도 순식간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재물이요, 더 새로운 대상을 향해 황급히 옮겨가는 것이 사람들의 시선이기 때문이겠지요.
결국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인간만사와 달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 보다 영속적인 것, 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 세상이 것들과는 달리 크게 실망시키지 않는 것...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세월과 함께 더욱 깊어가는 훈훈한 우정, 인간관계 안에서 오고가는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 진리와 정의를 향한 투신...
그런데 따지고 보니 그런 것들도 결국 인간과 더불어 시작되고, 인간과 더불어 끝마치게 되는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니고 마는군요.
세상이 지나가고, 모든 인간이 지나가고, 인간이 한 평생 쌓아온 탑도 무너지고, 다 지나가고 나서 결국 다가오시는 분이 계시는 데, 그분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분,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실 분, 우리 생명의 주관자, 우주만물을 주재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집요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군중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덧없음, 인간만사의 무상함을 온 몸으로 체득한 사람들이지 않았을까요?
여기 저기 좋은 곳, 기댈만한 곳, 실망시키지 않는 곳을 찾아 숱한 곳을 다녀봤을 것입니다. 딱딱 속 시원히 짚어준다는 예언자도 찾아가봤을 것이고, 용하다는 의사도 만나봤을 것이고, 민간요법, 대체요법.... 다 다녀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몸 버리고, 가산 탕진하고, 시간 다 낭비하고, 결국 엉뚱한 곳에서 헛물만 켜다가 드디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물론 고질병을 치유 받은 행복도 컸을 것입니다. 몹쓸 마귀로부터 해방되는 그 기쁨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을 더 기쁘게 한 것은 다른 데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 늘 고민 고민해 오던 문제, 다시 말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단 칼에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발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고정되어 있습니까? 더 한 차원 높은 곳,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곳, 우리의 근원적인 갈망을 해결시켜줄 곳, 그곳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
<(2)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면이 텅 빈 사람들, 자기 성찰이나 영성이 결핍된 사람들이 보이는 한 가지 특징이 있으니, 가장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식별력의 부족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혼돈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닌 특기가 있는데, 상대방을 얕보기, 꼬투리 잡기, 하대하고 무시하기, 잘난 체 하기 등입니다.
오늘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공격하는 바리사이들이 가장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정말이지 별것 아닌 규칙, 지나가는 개도 웃을 안식일 규정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눈에 불을 켜고 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가?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눈에 띄면 가차 없이 비판하고 칼날을 들이댔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 ‘바리사이’라는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되다’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나 나환우들이나 그릇된 신앙인들과는 분리되고 차별화된 정통 신앙인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원래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만을 유일무이한 계시라고 강조하는 사제들에 반대하던 평신도 개혁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예언서들과 시편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과 제사를 드리려했습니다.
이토록 좋은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신앙생활은 점점 복잡해지고 부담스럽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신앙생활을 추구하던 그들이었기에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에 대한 준수뿐만 아니라 구전을 통해 내려오던 실천사항까지 세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신앙행위는 점점 반드시 해치워야만 하는 의무사항이자 무거운 짐, 족쇄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자연히 그들의 신앙은 정신보다 제사행위 자체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내면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유달리 강조한 것 규정 가운데 정말 웃기는 규정들이 있었는데, 정결 예식이요,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귀가했을 때 물이 떨어져서 손이나 발을 못 씻을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는데, 씻지 않으면 완전 중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안식일만 되면 누가 규정을 어기나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안식일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도 요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가닥 뜯어먹는 것조차 용납을 못하고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누군가 죽어가도 안식일에는 치료행위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종교의 힘을 통한 영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종의 종교 중독으로 인한 이상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꽤 뚫고 계시던 예수님,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삶의 방식,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 양식을 죽어도 참아내지 못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법 같지도 않은 법, ‘웃기는 짬뽕’같은 안식일 규정을 사정없이 짓뭉개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오 복음 12장 7~8절)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산산조각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우리 역시 제도나 규정의 틀에 사로잡혀 이웃을 단죄하거나 고통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뒷전이고 일이나 구조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lWoEvxwY04w
++++++++++++++++++
<지식의 크기가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을 찾아온 이들을 ‘외딴곳’에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외딴곳에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치셨기에 그들은 음식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빵과 물고기가 많아지는 기적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양 떼를 가르치시는 것을 ‘말씀의 전례’에 비유한다면 그 뒤 빵의 기적은 ‘성찬의 전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는 천상 ‘지식’을 넓히는 시간이고 성찬 전례는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 성찬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위해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성체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힘을 잃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체와 성사에 대한 중요성은 매우 강조되는 반면 말씀과 지식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명축일과 같은 때에 신자분들이 바친 기도를 보면, 미사 몇 대, 묵주기도 몇 단 바쳤다는 것은 있지만, 교리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성경공부나 영성 서적은 얼마나 읽었는지에 대해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성체성사를 몇 번 했는지 혹은 묵주기도를 몇 단 했는지만을 강조할 때 그것을 통해 오는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는 간과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영적 지식을 넓혀주시고 성체성사는 단 한 번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리옷 유다는 올바른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에 성체성사를 하고도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습니다. 모든 은총엔 그릇이 있고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먼저 배운 다음에 그것에 합당한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자동차부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용법도 몰라 낭비되는 은총만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체는 아무리 많이 영해도 그 은총이 제한됩니다. 쥐가 매일 성체를 영한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배운 사람만이 그만큼 은총을 담아갑니다.
미국 플로리다 사라소타의 54세 노숙자 도널드 굴드. 그는 미군 해병대 밴드로 전역 후 음악 교사의 꿈을 꾸며 대학을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부족하여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결혼하고 잘 살아가고 있었으나 갑자기 아내가 사망합니다. 그 슬픔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중독자가 되었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양육권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8년간 길거리에서 남이 버린 빵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눈을 뜨면 지붕이 있고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당 앞에 놓은 피아노가 눈에 보였고 그의 숨길 수 없는 본능이 살아났습니다. 누군가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SNS에 올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노숙자로 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피아노맨 ‘도널드 굴드’는 꿈같은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재활 치료와 함께 노인들을 위한 피아노 연주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음악 대학의 전액 장학금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아들과 재회하고, 미국 4대 스포츠 중 ‘내셔널 풋볼 리그’ 오프닝 피아노 연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 앨범도 발매가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눈을 뜨면 천장에 지붕이 있고 따뜻한 커피가 있다는 게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출처: ‘피아노 치던 노숙자, 정상의 무대에 우뚝 서’, 유튜브 채널, ‘파인딩 스타’]
은총은 그 은총을 담을 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옵니다. 그 그릇이란 ‘지식’입니다. 만약 도널드 굴드 씨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 이후에 올 새로운 세상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들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배운 것들이 그것에 합당한 세상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그 지식과 합당한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은총입니다.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그 은총의 가치를 깨닫는 지식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지식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놓아야지 성체성사가 참 은총이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죽는 것입니다.
영화 ‘킨: 더 비기닝’(2018)은 고철을 팔아 생활하는 한 입양된 일라이라는 흑인 어린아이가 외계인의 엄청난 무기를 지니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습니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백인형을 그 무기로 구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무기는 일라이만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무기는 외계인이 사용하는 무기였는데 일라이도 그 외계에서 온 아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는 성체성사의 효과를 어떻게 자아내는지 잘 알려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을 배우지 못한다면 성체성사는 그저 비타민의 효과밖에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성체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알게 될 때 그 성체는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이 됩니다.
유튜브 동영상에 색맹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천연색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안경이 개발되어 그것을 선물 받고는 감동하는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들이 색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진정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게 해 줍니다.
말씀의 전례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 속한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것이 말씀의 전례입니다. 계속 우리가 인간이라고 믿어 행위만 강조하는 강론만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천상 존재가 되게 만드는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게 됩니다. 천상의 존재만 천상의 양식이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리, 성경, 영성의 지식이 쌓이지 않으면 은총을 담을 그릇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전례는 지난주의 “선교사명”의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목자와 양 떼라는 상징적 표현들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당시의 왕들과 지도자들이 ‘목자’들이라고 하기에는 부당하다고 비난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귀양살이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에게 당신 마음에 맞는 목자들을 주심으로써 돌보아 주시리라는 것을 예언한다.(예레 23,3-4 참조) 그리고 마지막 날 이상적인 왕이며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성덕과 정의를 펼쳐 보이시리라고 예고한다. 그분은 ‘정통 왕손’,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로 불릴 것이라고 한다.
복음: 마르 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다.
복음에서는 사도들이 선교활동의 결과를 예수께 보고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좀 쉬자고 하신다(31절). 군중들이 많이 밀려들었기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났지만, 군중들은 이미 알고 앞질러 그곳으로 갔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33-34절)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은 양 떼가 흩어지는 것을 보살필 뿐 아니라, 양 떼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기적의 빵으로서 양육시키고자 애쓰시는 그런 목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이상적인 목자이시다. 왜냐하면 첫째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힘보다는 사랑과 헌신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이시다.(요한 10,11-12 참조)
두 번째는 양 떼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함께 느껴 그들과 하나가 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빵의 기적을 통하여 그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마르 6,37 이하 참조) 이 빵의 기적에서 사도들의 태도는 바로 교회 안에서 우리의 봉사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강해지도록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양 떼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한 종으로 느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마태 20,25-28 참조)
세 번째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홀로 있는 것과 휴식의 필요성을 실천하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이루실 수 있었고 또 필요한 빛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침묵과 기도를 위한 휴식을 필요로 하셨다.(마르 6,45-47 참조)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봉사자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할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한다. 즉 기도와 묵상이 없는 봉사활동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화해시켜 ‘한 몸을’ 이루게 하셨다고 한다(에페 2,14-16 참조). 즉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화해의 의미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서로 대립하는 두 민족으로부터 “하나”(에페 2,14), “새 인간”(에페 2,15), “한 몸”(에페 2,16)이 생겨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목자들은 먼저 자신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또한 그들이 맡은 신자들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증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두가 다 같이 서로 노력하는 여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려야 한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
오늘 복음의 내용은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자들을 제외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목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신자들은 사랑으로 충실히 목자의 소리에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들과 한데 어우러져 그들과 하나가 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군중들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 우리가 비록 여럿이지만, 다양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하느님 안에, 주님의 이름 안에 진정한 하나,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을 올바로 알아듣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징이 되어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하자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인류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은 어쩌면 더 많은 빵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와준다는 명분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는 싸움일 뿐입니다. 테러와의 전쟁, 평화 유지를 위한 싸움도 무기를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고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옳은 전쟁과 싸움은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 이래 인간의 탐욕은 전쟁과 폭력을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역사 속의 전쟁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짓밟으며 경쟁합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고 빼앗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늘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주위를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 참조)을 행하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 예수님께서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쉬고 싶으셨습니다. 쉬시며 허기를 달래고 싶으셨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바람에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예수님께서는 쉬실 수도, 허기를 달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피곤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신의 허기를 달랠 빵이 아닌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 시선에서 예수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빵이 필요합니다. 충분하기보다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이익과 욕심에 주의를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가난하고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들과 함께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기적의 현장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1) 복음 선포 활동을 하고 돌아온 사도들은 많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마태 10,16) 것과 같은 상황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박해도 받았을 것이고, 마귀들의 저항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이 겪은 일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새 힘’을 주기 위한 배려입니다.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은 오늘날의 ‘피정’을 풀이한 말과 같습니다. 피정은 세속에서 소모된 영적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고, 또 세속에서 묻은 때를 씻어내는 시간입니다. (우리 교회의 주일 미사는 ‘작은 피정’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영적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주일은 주말이 아니라 주간 첫날이라는 점입니다. 주일을 주말의 휴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신앙인에게 주일은 한 주간을 시작하는 날이고, 예수님으로부터 새 힘을 얻는 날입니다.)
2)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는 말씀은, 사도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지 당신이 쉬고 싶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도 많이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는 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의 뜻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입니다. (원래 이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도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말씀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요일과 상관없이 계속 일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가신 것은, 당신이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쉬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가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좀 뜸해졌을 때 가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라는 말은, 사도들에게 휴식이 필요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이 ‘외딴곳’으로 간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앞에 있는 예수님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말이 아니라, 뒤의 32절에 연결해서 생각할 말입니다.)
3) 사람들이 예수님의 목적지를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막연하게 짐작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먼저 가서 기다릴 수 있었는지,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다는 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로써 그들의 심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들보다도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있었던 그 사람들이 진짜로 휴식(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선교활동을 하면서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들’ 같은 상황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예수님과 함께(또는 성령과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언제나 항상 ‘목자와 함께 있는 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군중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보호자 없는 고아 신세였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빵의 기적’도 일으키신 것은, 그들에게 목자가 되어 주신 일이기도 하고, 그들에게 참된 휴식(안식)을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4) 그렇다면 사도들은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계속 일하게 되었을까?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사도들만 데리고 가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애타게 찾았던 그 사람들도 함께 데리고 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표현만 보면, 그들이 외딴곳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피정을 방해한 사람들이 아니라, 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사도들도 그 가르침을 함께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참된 휴식(안식)을 주실 때, 사도들도 그 안식을 함께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도들도 그 빵을 받아서 배불리 먹었을 것입니다. <바로 뒤에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보면, 제자들이 먼저 사람들의 배고픔을 걱정했고(마르 6,35-36),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적의 빵’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했습니다.(마르 6,41) 그런 제자들의 모습은 군중과 하나가 되어 있는 모습이고, 또 피정을 하면서 동시에 ‘피정 봉사자’로서 일하는 모습입니다. (피정에 참여하지는 않고 봉사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피정하면서 봉사도 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5) 우리는 이미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서 벗어나서, 목자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 일에 정신을 빼앗기거나 한눈을 팔다가 목자를 잊어버리고, 인생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에너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양들을 찾으시고 지켜 주시고 먹이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주님이신 분’입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에 대한 다큐를 보았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권력이 분산 되어 있고, 공정한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세금은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위한 복지를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부유한 나라는 부정과 부패가 적었습니다. 기업의 독점을 막았고, 경쟁을 통해서 생산성을 향상 시켰습니다. 특허를 통해서 창의성을 보장하였고, 국가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나라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었습니다. 집중된 권력은 공정한 기회를 박탈하였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생기고, 세금보다는 뇌물에 익숙해졌습니다. 뇌물은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위해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뇌물은 부유한 이를 더욱 부유하게 하였고,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통신사가 독점하니 통신비가 비싸고, 핸드폰이 있어도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도가 들어오지 않으니 물동이를 들고 물을 얻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소수의 부유한 사람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유했던 나라가 추락하는 모습을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정과 정의가 사라질 때입니다. 소수의 탐욕이 사회의 조직과 질서를 무너트릴 때입니다. 공화정에서 황제의 통치로 바뀌었던 로마가 그랬습니다. 왕실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던 스페인이 그랬습니다.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보유했던 베네수엘라가 그랬습니다. 잘 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탐욕은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다수의 국민들을 헤어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자원이 많아도, 국토가 넓어도 권력이 독점되면, 재벌과 권력이 유착하면, 소수의 탐욕이 기승을 벌이면 가난한 나라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적어도, 국토가 좁아도 공정과 정의가 보장되면, 기회가 균등하면, 부정과 부패가 자리 할 곳이 없으면 나라는 부유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영적으로 충만하게 성장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여름 날 메말라 갈라진 논바닥처럼 생기를 잃어버리는 신앙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디딤돌로 삼아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신앙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걸림돌이 되어서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는 신앙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 내면의 삶을 성찰하는 사람,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은 자갈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세상의 명예, 부, 권력을 향해 나가는 사람입니다. 삶은 풍요로울지 모르지만 영혼은 고독한 사람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은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공정과 정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권력이 독점되었고, 소수의 탐욕이 다수를 희생시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공정과 정의를 실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고, 유배를 가는 신세가 되었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고향 땅으로 돌아 올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부산교구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좀 쉬어라>
주일학교 1학년 어린이가 미사에 안 나오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바빠서요.” 합니다. 아, 벌써 부터 바빠서 어쩌나, 안쓰러웠습니다.
하루는 동네에서 구두를 닦고 값을 치르는데,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시는 분이 무엇을 더 열심히 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어르신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평생 일만 하신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은 돌보지 않고, 자녀들, 가족들 부양하며 일생을 사신 겁니다. 이제 겨우 한시름 놓는 거지만, 온몸에 고생 자국이 역력합니다. 어르신들이 힘든 몸을 이끌고 주님 앞에 오셔서, 기도 손하며 미사 참례하시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사도들은 복음 선포 활동을 하고 돌아와 주님께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고초도 겪고 시련도 당하며, 최선을 다했을 겁니다.
제자들에게 일 잘했다고 칭찬하실 만도 한데, 예수님은 다만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복음 6장 31절)고 하십니다. 대견해 하시면서도, 그들의 고단함과 피로를 먼저 알아보신 겁니다.
복음 선포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딪혀야 하고 부대껴야 하며 때론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자신을 황무지의 밑거름으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 안에 머무는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외딴곳으로 인도하시며 쉬게 하십니다.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새로워진다는 것을 이번에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몰려든 군중을 바라보시며,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근심 걱정에 찌들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신 겁니다.
바쁘게 일하고,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하기만 한 이들을 보시며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마르코 복음 6장 34ㄷ절)
예수님은 복음 말씀으로 이들을 어루만져주셨습니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죄의 찌꺼기를, 가정과 사회 안에 만연한 어둠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사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분 곁에 머물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들 역시 그분 안에 쉬며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
[군종교구 최연수 라티노 신부님]
<내 삶의 휴식과 에너지>
우리 인간들은 휴식을 통해 일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런데 휴식을 취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휴식으로 여기고, 다른 누군가는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캠핑하는 것을 휴식으로 여깁니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에 따라, 에너지를 얻는 척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휴식이라는 시간이 나의 삶에 윤활유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온종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윤활유와 같은 시간이 없다면, 벌써 지쳐 쓰러지고도 남았습니다. 휴식이라는 시간을 통해 육체적인 피로를 씻고, 정신적인 피로를 내려놓기에 쓰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두 가지 휴식 방법이 드러납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의 휴식이며, 두 번째는 군중의 휴식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방해받지 않는 휴식이었고, 군중에게는 말씀을 듣는 시간이 휴식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되지만,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얻기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어서 자기 자신이 휴식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양 떼를 이끄시는 목자로서 제자들에게도, 군중에게도 에너지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양 떼를 떠나지 않듯, 주님께서도 군중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군중은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삶의 피곤함과 괴로움, 쓸쓸함 등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다른 휴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할 수도 있었지만, 정녕 필요한 에너지는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중은 주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 앞질러 달려가, 주님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에너지가 있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편안함과 에너지를 찾아 나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내 안에도 계시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십니다. 주님을 애타게 찾을 때도 계시고, 주님과 멀어져 있을 때도 계십니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군중이 보여주었던 모습, 주님을 찾아 뛰어가서 에너지를 얻었던 그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시간보다 더 좋은 휴식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갖은 스트레스와 불안함을 견디어 나갈 수 있으며, 홀로 있지 않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양 떼에 속한 한 마리의 양입니다. 양 떼에서 가장 나약한 양이어서 비틀거리며 걸어갈지라도, 참된 목자께서 끝까지 옆에서 함께 걸어가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가엾이 여기시며 힘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 중 주님과 함께 하는 휴식을 며칠이나 보내고 있는지 돌아보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 주님과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내시기를 희망합니다.
=====================
[의정부교구 안승관 베드로 신부님]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어 (in persona Christi)>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 복음 6장 31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활동과 기도의 문제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활동한 후에는, 하느님 안에서 기도가 따라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일을 잘하며 살 수 있을까요? 정답은 우리에게 주신 모습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상하는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첫째로, ‘나는 누구인가?’ 둘째로, ‘하느님은 누구신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의 정체성을 찾는 길은 성경 말씀 안에서, 삶 안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는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길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에 의해서 뽑힌 제자들이기에,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일을 해야 하고, 예수님을 머리로 모시고 지체로서 그분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며, 예수님의 심장이 되어 이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체가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인격이기에, 성체를 모신 나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어’(in persona Christi)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으로 기도를 한다면, 한 구절을 2번~10번 반복해서 읽고, 그에 대한 묵상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좋은 기도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도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 중에 만났던 예수님을 삶 안에서 모시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내 머리가 예수님의 머리, 내 심장이 예수님의 심장, 내 손이 예수님의 손, 내 발이 예수님의 발이라는 것을 믿고, 순간순간을 예수 성심께 봉헌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는 “예수님, 그분은 누구이신가?”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 전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곧 예수님은 양떼를 돌보는 “진정한 목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참된 목자”의 상이 곧 메시아의 표상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의 제도권 지도자들(왕들, 사제들)이 하느님의 양떼인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흩어버리고 헤매게 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떼들을 보살필 ‘진정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신 주님으로 “참된 목자”로인 메시아로 예고됩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습”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 받은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시편>과 <호세아서> 말씀의 진동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호세 2,16-22)
그렇습니다.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외딴 곳까지 먼저 달려 온 군중을 보시고(마르 6,32 참조)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6,34).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의 발로로 타인의 상황에 마음 아파함이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그냥 둘 수 없는, 차마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나서 사랑을 건네주지 않고는 차마 못 베기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몸살이 난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그토록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께서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마르 6,3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목자가 되려면,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참된 목자”는 단지 양떼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헤매지 않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 양떼를 인도하고, 헤매는 양떼를 보호하는 분, 양떼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로 제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페 2,14-15)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의 갈라진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에페 2,14-16)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는 일’ 말입니다. 아멘.
++++++++++++++++++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시고,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6,34)
<땅을 사랑하고 지키자!'>
7월의 셋째 주일인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농민주일은 농부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땅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땀 흘리고 있는 농민들의 수고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농민들의 소중함과 창조질서보전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는 날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창세1,1.11)
'땅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땅은 생명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 땅에 많은 농민들, 특히 화학 비료나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은,
'하느님의 첫 창조물'인 '땅을 사랑하는 이들'이며, '생명이 시작되는 땅을 지키는 이들'입니다.
이런 농민들에게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드립시다! 우리도 땅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에 함께 동참합시다! 그들의 수고와 땀으로 맺어진 '우리 농산물'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많이 애용합시다!
농촌이 살아나야 합니다. 농촌과 도시가 함께 살아나야 합니다.그러기 위해서 농민들은 건강한 먹거리와 친환경 제품을 만들어 내고, 도시 사람들은 그런 농민들이 만들어 낸 건강한 먹거리와 제품들을 많이 애용해야 합니다.
산 정상에 섰을 때 항상 갖게 되는 마음은 '창조주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이며, 인간이 대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깨닫는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이 아름다운 자연이 산업화와 도시화와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인해 파괴되어가고 있고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느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해 드리는 '우리의 죄'입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두 번째 회칙인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통해 죽어가는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자고, 생명의 땅을 살리자고 호소하십니다. 이 호소에 함께 동참합시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쉼>
마르코 6,30-34 (‘오천 명을 먹이시다’ 전반부)
그때에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쉼>
홀로 쉼은
모자란 쉼
더불어 쉼은
가득한 쉼
홀로 쉼은
아쉬운 쉼
더불어 쉼은
넘치는 쉼
홀로 쉼은
쉼 아닌 쉼
더불어 쉼은
쉼인 쉼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형제님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워낙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는 저입니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다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래도 지금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을 것 아니에요?”라고 물어보십니다. 바로 그 순간, ‘떡볶이’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떡볶이요!”라고 대답했더니, “남자가 무슨 떡볶이에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와 점심 식사를 같이하러 밖에 나갔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고르다가 제가 “파스타 먹으러 갈까?”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남자끼리 어떻게 파스타를 먹어요?” 남자가 떡볶이를 먹으면 안 되고, 남자끼리 파스타를 먹으면 안 되는 법이 있을까요? 깜빵 갈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라는 식의 편견이 우리의 생각 안에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아서 새로운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변화를 추구하는 이를 오히려 커다란 죄인 취급을 합니다. 일상 안의 고정관념 탈피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쫓아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일까요? 그냥 좋은 구경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들, 즉 사람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또한 배부르게 먹여주는 등,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짜증도 나고 미움의 감정도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가지셨음을 복음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어떻게든 사랑을 주시려는 주님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도, 다른 이유로 당신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어떤 선입견도 품지 말고, 주님의 뜻인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빠른 판단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함을….>
첫 번째 방은 잔인한 킬러가 칼을 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방은 한 달을 굶은 사자가 있고, 세 번째 방에서는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위험한 방과 그래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방은 어디일까요?
많은 사람이 첫 번째, 세 번째 방이 비교적 안전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킬러라도 사람이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불이 났으면 자신이 그 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말도 통하지 않는 배고픈 사자이기에 당연히 제일 위험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그런데 제일 안전한 방은 한 달 굶은 사자가 있는 방이라고 합니다. 너무 긴 시간을 굶어서 탈수증세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혹은 죽은 상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의 결정은 대부분 이렇지 않았을까요? 깊이 생각하기보다 순간적인 빠른 판단을 신뢰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것보다는 빠른 판단이 더 이로울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로 나아가는 것도, 섣부른 판단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죄의 숫자를 계속해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가엾은 마음으로 챙기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쉰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쉬는 방법과 우리의 쉬는 스타일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지만 우리는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곳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으로 갑니다. 길도 막히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휴가를 다녀와서는 더 피곤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휴식은 바람직한 쉼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휴식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지니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바삐 지냈습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마귀를 쫓아내며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예수님 앞에 모여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자랑 삼아 보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아침에 계획한 것을 열심히 살고 저녁에 삶을 되돌아보며 자기가 지낸 하루의 시간을 예수님께 보고하는 시간은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고 하셨습니다.
왜 외딴곳을 선택 하셨을까요? 동안에 열심히 할 일을 한다고 했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이었는지, 내 일이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혹 하느님의 일은 접어두고 인간적인 일에 매달린 것은 아닌지 내적으로 반성하고 채울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일에 치이면 마지못해 억지로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은 신성한 노동이 아니라 부역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휴식을 잘해야 합니다.영혼을 돌보는 일에 쉼은 꼭 필요합니다.
어느 수도원의 두 수사가 원장으로부터 들에 나가 밀을 거두어들이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두 수사는 낫으로 밀을 베어 단으로 묶어나갔습니다. 한 수사는 시간마다 쉬곤 하는데 반해 한 수사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었을 때 보니 쉬면서 일한 수사가 쉬지 않고 일한 수사보다 훨씬 더 많은 밀을 베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수사는 어떻게 그런 결과를 가져왔을까 궁금해 했는데 쉬면서 일을 한 수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틈틈이 쉴 때마다 제 낫을 갈았습니다.”
쉰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세상일에 파묻혀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가족, 이웃과 잘 지내고 있는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회복하는 시간이 휴식입니다.
쉼을 잘못하면 안 쉰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식을 잡수실 겨를조차 없이 바쁘시더라도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때때로 한적한 곳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는 바로 훌륭한 휴식입니다. 자주 성체 앞으로 오십시오. 피정이나 성지순례도 꼭 필요한 휴식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챙기는 것도 훌륭한 쉼입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들은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연 피정, 월 피정을 해야 합니다. 피정이란 말 그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해 고요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교회법으로, 수도회 규칙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자기 소명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대개는 침묵 피정을 합니다. 동안에 말을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 침묵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내적 성장의 토대를 다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 몇 일씩 시간을 내서 피정하기란 힘듭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좋은 휴양지에 가서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휴가를 내서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들은 중환자실에서 똥, 오줌을 받아내고 식사수발도 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배우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일깨웁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들의 휴가는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의 휴식입니다.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휴가를 내서 성경연수에 참석하시는 분도 있고 단식원에 들어가 단식기도를 하며 주님 안에서 쉬기도 합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정에서 실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른 아침, 일상을 시작하기 전 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 시간, 침묵의 시간을 꼭 챙겨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예수성심상이나 성모님 앞에서 하루를 살피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자기를 봉헌하면서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주님과 함께 마쳐야 합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쉼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쉰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높은 곳에, 귀한 곳에, 천상에 두어야하겠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도 하셨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분께 능력이 있고 힘이 있으며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그 휴식장소로 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이 파김치가 되어서 휴식을 취하고 싶은데 군중에게 떠밀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충분히 짜증이 날 만한데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 같아 오히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비심으로 가득 차 귀찮고 짜증이 날 법한 상황에서도 꾸준한 사랑의 길을 가십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피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미리 가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처럼 주님의 뜻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엔 바쁘고, 주님 것엔 관심이 없으면서도 주님의 복을 청하는 모습에 부끄러운 하루입니다. 오늘 만큼은 외딴 곳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꼭 마련하시기 바라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목자이자 참 농부農夫이신 하느님>
- 참 목자, 참 농부 영성이 절박切迫한 시대-
새벽 휴게실에 들어서는 순간 7월18일자 가톨릭 신문 1면 큰 활자가 한눈에 들어왔고, 앞부분을 다시 읽어 봤습니다.
“기후와 감염병 위기 시대---‘생명농업은 선택아닌 필수. 산업화된 대규모 관행농업, 온실가스 대량으로 배출, 환경오염 피해자이며 가해자, 자연 순환 원리 존중하는 생명농업으로 대전환 절실, 한국교회 힘과 지혜 모아야.”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제28차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현동 아빠스의 담화문 요약입니다. 이어 매일미사 신자들의 기도 둘째 내용이 참 적절하다 싶었습니다.
“창조주이신 주님,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민들을 보살펴 주시어, 지구 온난화로 예축하기 어려워진 자연환경 속에서 힘을 잃지 않게 하시고, 농민주일을 지내는 교회가 농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데 앞장서게 하소서.”
작금의 시대에 최대의 화두는 기후변화, 기후위기, 기후재앙일 것이며 여기서 부각되는 산업농업이 아닌 생명농업의 중요성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다.”(요한15,1)
언제 들어도 마음에 참 다정히 와닿는 말씀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농부일 것입니다. 이런 진실한 농부들을 보면 순박하기가 수도자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참 목자이며 참 농부이신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추구해야 할 ‘참 목자, 참 농부 영성’입니다. 비상한 영성이 아니라 인간은 물론 지구와 자연 전체를 망라한 존중과 배려, 공감의 영성입니다. 이제 사랑의 이중 계명은 사랑의 삼중 계명, 하느님 사랑과 사람사랑에 이어 자연사랑까지 확대되어야 할 절박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참 목자 영성의 상징적 인물이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일 것입니다. 이번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된 유흥식 대주교(나자로)와의 인터뷰 기사중 교황님과의 관계된 대목을 나눕니다.
-“저는 유명한 신학자도 아니고 교회와 세상에 대해서도 박학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자들과 친근하게 지내고, 신학교를 사랑하면서 좋은 사제들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저 소박하게 사제들과 주교님들과 친교를 나누는데 조금 애쓸 뿐입니다.”
바로 대주교님의 이 대목에서 교황님은 목소리를 높이시며 다음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주교님, 바로 그거예요. 그렇게만 하시면 됩니다. 실무를 잘하는 좋은 차관과 좋은 차관보를 임명해줄 테니까 일을 그분들이 하면 될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교황이요 대주교인지요! 이어 교황님에 대한 대주교의 소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참 많은 감동을 선사하는 교황님입니다.
-‘교황님께서 추기경들을 지나서 40명의 주교들이 앉은 자리를 지나가시다가 저를 알아보시고 반갑게 인사를 나눠주셨습니다. 저로서는 큰 기쁨과 영광이었지요. 교황님은 놀랍게도 당신 앞에 있는 사람과 항상 눈높이를 맞춰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면 그분께서 오직 나만을 위해 거기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교황님의 또 한가지 특징은 언제나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공중에 뜬 이론, 애매한 입장과 모호한 가르침이 아니고, 신앙생활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이끄십니다.-
참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을 닮은 착한 목자들을 모신 참 자랑스럽고 복된 천주교 신자들입니다. 세상 곳곳에는 묵묵히 착한 목자 영성을 사는 무수한 분들이 있으며 우리에게 이분들 역시 착한 목자 영성을 살라는 부단한 자극과 도전이 되고 분발 노력케 하는 원천이 됩니다.
아주 예전 몇 년 동안의 주방장 소임을 통한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삶과 농사일과 주방일의 원리가 똑같다는 것입니다. 안 하려들면 최소한도로 할 수 있겠지만, 하려들면 끝없이 해야 할 삶의 일들이요, 농사일들이요 주방일들이요,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한눈에 들어오는 일들의 현실입니다. 하여 영적 삶을 위한 성사聖事, 먹는 일을 식사食事, 농업일을 농사農事라 칭하는가 봅니다. 생명유지를 위한 삼대 필수 큰 일이 성사, 농사, 식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 목자 영성을 살려는 이들은 삶과 농사와 식사에 깊고 넓은 시야를 지녀야 함을 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참 목자 영성을, 농부가 아니면서도 참 농부같은 심성을 지닌 참 농부 영성을 살 수 있을런지요. 간단합니다. 참으로 평범한 일상에 지극히 충실하는 것이요 구체적으로 다음처럼 살면 됩니다.
첫째, 기도와 쉼입니다.
기도와 쉼입니다. 삶의 쉼표가 정말 중요합니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평생 마라톤 경주입니다. 누구와 경쟁이 아닌 제 페이스대로 완주하면 되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입니다. 하느님 눈엔 모두가 1등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 필수적인 것이 기도와 쉼입니다. 중독의 병에 기도와 쉼보다 더 좋은 해독제도 없습니다. 아니 온갖 중독의 예방과 치유, 힐링에 기도와 쉼이 제일입니다.
코로나19 감염병이 바로 기도와 쉼을 통한 삶의 깊이를, 건강을 회복하라는 회개의 표징입니다. 이제 예전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날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할 절박한 시기입니다. 기도와 쉼의 시간은 철저한 자기 성찰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의 활동 보고가 끝나자 즉시 쉴 것을 명령하십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는 제자들의 처지였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은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언제나 외딴곳에 머물러 기도와 쉼 중에 아버지와 함께 하며 영육을 충전시켰습니다. 사실 우리가 수도생활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음은 바로 여기 외딴곳 성전에서의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사랑과 분별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분별의 지혜도 나옵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분별력임은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분별력의 지혜와 함께가는 조화와 균형의 중용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서 주님의 분별력이 빛을 발합니다. 바로 연민의 사랑이 분별의 잣대임을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자하셨다.’
착한 목자로서 예수님의 모습이 약여합니다. 참으로 가엾이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사랑이 참 목자 영성의 빛나는 표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군중의 영적 굶주림을 해결하십니다.
절박한 군중들의 필요에 응답하느라 외딴곳에서의 쉼은 일단 보류하는 분별의 사랑이자 지혜입니다. 참으로 그림처럼 눈에 선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의 이기적 삶을 부끄럽게 하는 회개의 표징이 되는 장면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회개의 표징들 가득한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화해와 평화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참 목자의 모범입니다. 공동체의 화해와 평화가 참 목자 영성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 주님 친히 화해와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바로 우리 요셉 수도공동체가 이를 입증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인간으로 창조하시고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무슨 말을 보태겠습니까?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평화의 새인간으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에 하나 추가할 것이 있습니다. 비단 인간 서로간뿐 아니나 세상 만물의 자연까지 아우르는 우리의 화해와 평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연을 약탈하고 착취한 결과가 오늘날의 기후위기요 코로나 감염병입니다. 다시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늘 용서하고 사람은 때때로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의 적극적 실천을 통해 자연과의 화해와 평화가 참 절실합니다.
넷째, 공정과 정의입니다.
공정과 정의의 목자가 참 목자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제1독서에서 불의한 악한 목자들을 질타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예나 이제나 악한 목자들은 어디나 있는 법입니다.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게 합니다. 정말 착한 목자 영성을 지닌 우리들이라면 이런 공동체의 분열과 파괴적인 일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누고 보살피고 떠받쳐 주는 존중과 배려의 사랑으로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은 못하더라도 훼방은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부정으로, 절망으로, 벌함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구원이 있을 뿐입니다. 희망의 예언자 예레미아가 전하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리라.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오늘이 그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정의입니다. 마침내 예레미야의 예언은 공정과 정의의 참 목자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을 스승으로 둔 우리들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오늘날은 참 목자, 참 농부 영성을 탐구해야 절박한 시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 목자, 참 농부 영성을 지니고 살게하십니다. 1.기도와 쉼, 2.사랑과 분별, 3.화해와 평화, 4.공정과 정의의 영성입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선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 주위로 모여들어 그간의 일들을 보고합니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 보람과 아쉬움을 헤아리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육의 쉼이 필요하다고 느끼신 듯하지요. 그래서 일단 외딴곳으로 떠나서 쉬도록 배려하십니다.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34)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하신 쉼은 안타깝게도 불발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쫓아온 군중이 먼저 그곳에 다다라 갈망 가득한 눈으로 예수님 일행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에게서 목마르고 허기지고 불안해하는 양들의 모습을 보십니다. 흡사 목자 없는 양들의 처지와 같습니다. 그들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 예수님 마음을 움직여, 예정했던 쉼을 미루신 채 그들에게 다가가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제1독서는 거짓 목자에 대한 주님의 단죄와 참 목자의 도래를 약속하는 대목입니다.
"너희는 내 양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예레 23,2)
사실 양들의 주인은 목자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목자로 세우신 이들에게 당신 백성을 맡기신 것이지요. 하지만 목자들은 자기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양들을 제멋대로 다룹니다. 섬김은커녕 돌봄조차 소홀히 하면서 양들의 우유와 고기와 가죽과 털로 제 이익을 채웠지요.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예레 23,5)
하느님께서 새로운 목자를 약속하십니다. 거짓 목자에게 시달린 당신의 양 떼를 다시 불러들여 참 목자 아래 모아주실 것입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목자 아래서 양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길을 잃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생기에 넘치고 번성하며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평화의 주님을 선포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 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6)
그리스도는 양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분이십니다. 옛 목자 아래의 양들과 새로운 목자의 양들은 이제 더 이상 서로를 경계하거나 적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참 목자께서 목숨을 바쳐 양 떼들 사이의 장벽이었던 계명과 조문을 율법과 함께 폐지하시고 적개심을 허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 속 제자들이 착한 목자의 섬김과 돌봄의 첫 수혜자가 바로 자신들임을 잊지 않았다면 불발된 쉼의 기회도 크게 서운하지 않았을 겁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받아들여 가르치고 격려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은 천방지축 미숙하고 부족한 자신들이었으니까요.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섬김과 돌봄의 사랑을 앞으로 만날 양들에게 베풀 것입니다. 스승의 사랑을 고스란히 받았고 또 목격했으니 영육에 각인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들은 군림하거나 이용하지 않고 존중하며 섬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착한 목자이신 주님 앞에 머물러 그분 사랑의 눈길을 듬뿍 받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는"(영성체송) 참 목자이십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육의 생명을 떠받치시고 말씀과 성체로 영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니 우리는 그분과 함께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를 것이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vlO1QqMppY&feature=youtu.be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르 6, 34)
우리 삶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만난다.
가엾은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진실한
마음이다.
삶이란
주님 사랑을
알아가는
진실한
마음의
여정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진실한
열매가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안에
마음이 있다.
연약함을
껴안아주는
연민의
마음이며
교만을
무너뜨리는
연민의
마음이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마음을
먼저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실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실한 마음의
회개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마음이었다.
마음을
잃어버린
신앙은
기쁠 수 없다.
마음을
낮추는 것이
끝내 마음을
살리는
복음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복음은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가난하고
절박한
가엾은
우리들
모습이다.
사랑이 없으면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목자는
보여주신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의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는 사랑의
신앙인들이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만나게 되는
농민 주일이다.
보살피고
가꾸고
인내하는
이 땅의
농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금과 빛은
진실한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