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에선자의축복/
(벼랑 끝에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살다보면 살아있음의 무게가 천근만근일 때가 있습니다. 추워 덮은 이불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만큼 내가 작아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겨우 겨우 붙잡은 동아 밧줄을 인하여 숨을 고르는 순간에 위를 보니 생쥐 한마리가 밧줄을 갉아 먹고 있을때 우리는 밧줄이 끊어지기 전에 미리 잡은 손을 스스로 놓아 버립니다.
인생은 누가 뭐라 해도 허들경기와 같습니다. 장애물 하나를 겨우 넘는 순간, 순식간에 다가오는 또 다른 장애물을 준비해야 함에 늘 벅차오릅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이라고 넉두리 했던 엘이랴 처럼 나만 당하는 불행이라 생각됨에 찢어진 상처에 소금 치듯 합니다. 나 외에는 모두가 다 형통의 영향권 안에 있어 보이고 오직 나만 축복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스칠 때 우리는 차라리 벼랑으로 떨어지기를 갈망합니다.
고난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고난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벌이 부당해서가 아닙니다.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고난당함 때문이 아닙니다. 악인이 신속히 형통하기 때문입니다. 문제 해결이 더딤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의 해석이 더디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이루어 놓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극한 위기와 벼랑 끝의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믿음의 영웅들도 기도의 거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때면 누구나,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굴속에 갇히고 싶지요. 심장이 터질듯 하고 뼈가 녹아내리는 듯한 절망과 낙심의 동굴 말입니다. 그 절망의 원인이 사람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에게도 상처를 받지만, 하나님에게도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거절, 하나님의 썰렁하심,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우리는 차마 기도의 호흡조차 중단 됩니다. 천 날을 기도로 헌신하고도 하나님의 거절 앞에서 잘 견뎌 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의 기도의 헌신이 없으면서도 시온의 대로가 열린다는 사람들의 소문이 들릴 때 우리는 살아있음의 존재의미와, 믿음의 잉태가 오히려 심해의 압력이 되어 영혼을 짖누릅니다. 많은 사람 찾아오고, 그 무슨 말로 위로하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들린다 해도 아무 힘이 못되곤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과 지금껏 받은 복을 잊은 것도 아니지만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당장 벼랑 끝에 서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이 믿음의 뿌리는 물론 삶의 뿌리까지 흔들어 놓습니다. 한 발자국 만 디딜 공간과 여유만 있어도 이렇게 까지 서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한 발자욱도 옮길 수 없는 벼랑 끝에서 우리의 할 일은 원망뿐입니다. 이때(벼랑)를 위하여 준비해 놓은 믿음도 한 순간의 신기루 되어 나를 발가벗겨 놓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믿다보면. 기도하다 보면 죽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때를 만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 채 시간도 멎고 심장도 멎는 듯합니다. 나 때문에 격어야 할 시련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하심 의 확신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혼란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한 패배의식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매질할 때 보면, 아이들은 울며불며 속으로 말합니다. '엄마, 아빠, 미워!' '날 사랑하면 왜 이렇게 때리는 거야?' '내가 미워서 그러는 것일 거야' 그럴 때에도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매질의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커서 청년이 되면 부모의 매질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매질의 은혜를 알게 되겠지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십니다. 그리고 밀어 부치십니다. 그리고 매를 들어 후려치십니다. 그리고 필요하시다면 우리를 벼랑으로 매정하게 떠다미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의 작은 머리와 믿음으로는 이해할 수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벼랑 끝의 고통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혼란으로 더 힘들어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속으로 외칩니다. 하나님, 미워요. 하나님, 싫어요.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을 한동안 풀지 못한 채 서먹한 상태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쉽게 매질의 이유와 벼랑 끝의 의미를 설명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여 장성하게 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매질과 벼랑 끝으로 몰고 가신 신묘막측한 섭리를 알아 갈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 할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선 것이 무슨 축복입니까? 오히려 재앙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무슨 은혜입니까? 그것은, 항복의 은혜입니다. 항복의 은혜는 교회에서는 받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시온의 대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반드시 벼랑 끝에서만 받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자원하여 항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항복을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 받아 내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기적의 주인공들..영적인 거인들은 동일하게 벼랑 끝에서 항복의 은혜를 경험한 분들입니다. 하나님이 하신일 하나님이 이루신 결과.. 그것이 무엇이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항복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은혜입니다. 어디 항복이 쉬운 일인가요?
사람은 죽을지언정 항복을 피하려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항복하지 않고 믿으려 합니다. 기도를 해도 항복을 피하여 기도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항복을 받아 내십니다. 뿐만 아니라, 항복한자를 마침내 높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항복한 자에게 기막힌 은혜를 예비하십니다.
수많은 승리의 주인공들은 우리와 성정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빨리 항복의 은혜를 경험한 분들입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고 항복한 분들, 직장을 잃고 항복한 분들 건강을 잃고 항복한 분들, 평생의 꿈을 잃고 항복한 분들 사랑하는 분들을 잃고 항복한 분들,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항복한 분들 그분들의 항복 뒤에는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포상이 준비되어 있겠지요.
이제,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는 자가 이기는 자이며, 항복하는 자가 승리하는 자이며, 죽는 자가 사는 자이며 무명한자가 유명한자이며, 가난한자가 진정한 부자이며, 낮아진 자가 높이 세워지는 자라는 진리말이죠. 더 나아가 계란으로 바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선지자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때(요나의 항복을 얻어내심)하나님은 요나를 위하여 큰 물고기를 준비하여 놓으셨습니다. 항복한자..그것이 억지이건 자원이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항복된 자들을 위하여 큰 물고기(?)를 이미 준비해 두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벼랑위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벼랑 바닥에 숨어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오히려 화가 나고
말씀에 대하여 회의가 들어 성경책이 보기도 싫고 인생에 대하여 무상함이 느껴지고 내 자신에 대하여 깊은 열등감이 찾아들 때 우리는 죽는 줄로만 압니다. 이제는 끝난 줄만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항복한자의 축복이 있습니다. 항복한자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사명이 따로 있습니다. 항복한자에게만 베푸시는 말로 못할 은혜가 있습니다. 천사의 어루만지심으로 또 다시 일어나 달려갔던 엘리야처럼 벼랑 끝에서도 기도실로 엉금 엉금 향하는 당신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벼랑 끝에서도 또 다시 성경 앞에 무릎을 꿇는 당신의 믿음은 참으로 명품입니다. 벼랑 끝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또 다시 부르는 당신이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벼랑 끝에선.. 흔들리십시오. 푸념도 하십시오. 갈등도 하십시오. 시험에도 드십시오. 짜증도 내십시오. 원망도 하십시오. 그러나, 잠시 그러십시오. 그런 후에는 마음과 생각을 추스려 자원하여 항복하십시오. 하나님께 얼른 지십시오. 지는 자가 이기는 자임을 아는 것이, 벼랑 끝의 은혜입니다.
사진작가들에 의하면 밤하늘도 파랗다고 합니다. 영의 눈으로 벼랑을 바라보면 파랗게 보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자세히 보면 별 하나는 보인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방석을 펴고, 믿음의 눈으로 자세히 벼랑을 살펴 보십시오. 희망의 별., 가능성의 별 하나쯤은, 당신을 위하여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을 겁니다. 벼랑 끝에서 고생하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이 실제적으로 만져 주시고 신속히 회복케 하시기를 젖은 눈으로 강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