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의 온돌방
1940년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를 보살피던 손양원 목사가 옥에 갇힌다.
그는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일본은 망한다고 했다.
"덴코(轉向·전향)하면 풀어주겠다"는 검사에게 그가 말했다.
"당신은 덴코가 문제지만 내겐 신코(信仰·신앙)가 문제다.
" 48년 두 아들을 좌익에 잃고는 "원수를 아들로 삼겠다"고 기도했다.
그는 형제를 죽인 좌익 학생이 체포돼 총살되기 직전 구해 목사로 키운다.
환자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피란선에서 뛰어내린 뒤 북한군에 총살당한다.
연세대 의대 인요한 교수는 손 목사를 "내 영혼의 발원지"라고 이른다.
틈날 때마다 애양원 손 목사 묘를 찾는다.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무덤 앞에서 기도한다.
'내 삶이 그가 실천했던 삶 10분의 1만이라도 되게 해달라'고.
그는 120년 전부터 전남 지역 선교를 이끈 유진 벨 집안의 4대 외손이다.
아버지 휴 린튼만 해도 검정 고무신 신고 남해안을 돌며 600여 교회를 개척했다.
인 요한은 손 목사를 '부모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는다.
손 목사의 삶과 순교가 교회 본연의
모습과 정신이라고 본다.
그는 말한다.
"한국 대형 교회들이 너무 화려해졌다.
화려해질수록 교회는 망한다.
교회를 넓히고 치장하는 대신 낮은 곳으로
뛰어나가 이웃을 돌봐야 한다."
그는 예수님이 다시 온다면 으리으리한
교회로 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 교회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나 있겠느냐고 했다.
인요한은 한국 사회와 교회가 원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죄짓고 오면 '심판받고 회개하라'고 하기에 앞서
'나는 더 흉측한 죄를 짓고 산다'며 위로하고 끌어안아야 한다."
이주민과 북한 의료 봉사를 해온 그가
그제 대한민국 인권상 근정훈장을 받고 말한 소감도 비슷하다.
"남이 나를 홀대한다 해서 내가 남을 홀대할 자격을 가진 건 아니다."
남을 존중하는 마음이 곧 인권이라고 했다.
그는 그런 가르침을 고향 순천의 온돌방에서 얻었다고 했다.
어릴 적 무척 가난해 나무를 해다 군불을 땠다.
추운 날 모여 앉으면 어른들로부터 사람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배웠다.
친구 집에 갔다가 그 집 아버지가 돌아오면 친구가 벌벌 떨었다.
"조용히 해. 아버지 쉬셔야 해."
어린 인요한은 아버지 무서운 줄을 그렇게 알았다.
그는 그것을 '온돌방의 도덕'이라고 했다.
가족이 각자 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중앙난방 시대,
지금은 사라진 한국식 인성 교육이다.
대리석 교회에 옅어져 가는 빛과 소금처럼.
- 조선일보 만물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