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은 한국인이다. 근래에 귀화하는 여느 외국인들과는 좀 다르다. 호남 기독교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교사 유진 벨이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부터 시작된 인 씨 가문의 대를 이어 한국에서 사는 4대손이다.
모친 로이스 린튼 여사는 평생을 국내 결핵환자 퇴치를 위해 헌신했으며, 부친 류 린튼 씨는 600여 곳의 교회를 개척했다. 순천에서 자란 그는 우주의 중심이 순천이라고 생각했다. 연세대 의과대학에 재학할 때에는 가지 않아도 되는 문무대에 자원 입소하였으며, 북한의 의료지원 사업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부친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의 응급구조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한국형 구급차를 개발·보급했다. 1세기 동안 가족 4대가 이 작은 나라에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를 이루 열거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참 겸손하다.
요 즈음 항간에서는 푸른 눈,
갈색머리, 190cm가 넘는 키를 한 영락없는
서양인 하나가 “내 고향은 전라도요,
내 영혼은 한국인입니다”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며 다닌다는 소문이다.
그이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면 굳이
‘전라도 순천 촌놈 아무개올시다’라고 밝히곤 한단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단일민족’ 운운의
순혈주의 교육에 젖은 한국 사람들이라면 대개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매, 전라도 순천에 거 뭐시다냐,
앵글로색슨족인지 켈트족인지 코 큰 노랑머리 부족이 산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요잉?’ 하며 그이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이와 반나절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어본다면 참말로
전라도 촌놈인 것을 단박에 실감한다는 것이다.
아니 저이는 ‘그냥 전라도 촌놈’이 아니라 ‘뼛속까지 전라도 촌놈이요,
영혼까지 한국인’임을 공공연히 자랑한다는 것이다.
뿐 아니라 단군 이래 이땅에 대대로 살아온 우리에게 도리어
‘당신들이 진정한 한국인이 맞느냐?’고 반문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끔 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누구인가?
‘전라도 촌놈’을 만나러 갔다.
많은 ‘촌놈’들이 촌을 떠나 도회지로 올라왔듯 저
‘전라도 촌놈’도 전라도에 있지는 않았다.
나는 서울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를 찾았다.
지난 해(2005년 5월) 새롭게 개원한 센터의 현대식
건물이 눈부신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만치 커다란 사내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한눈에 사진에서 보았던 예의 ‘전라도 촌놈’인 걸 알았다.
손을 내밀자 마치 작은 계란을 쥐듯 담쑥 내 주먹을 덮어 쥔
그가 은근히 팔을 잡아당긴다.
대단한 완력이다.
마치 기중기에 붙잡힌 듯 발꿈치가 번쩍 들린다.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인요한, 순천 촌놈은 바로 저이이다.
1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실에 걸려 있는 어린 시절의 사진.
당시 제일 친했던 황인순(왼쪽)과 황용기(오른쪽)와 함께.
2 대학교 2학년이던 때 결혼식을 올렸다.
저 이의 본명은 존 린튼John Linton.
195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국내 최초로 구급차를 개발했고,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벌여왔다.
린튼 가문과 한국과의 인연은 무려 111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호남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한국에 왔다.
유진 벨은 미국 애틀랜타에서 온 젊은 선교사
윌리엄 린튼(인돈)을 사위로 맞으니이가 바로 인요한 소장의 할아버지이다.
윌리엄 린튼은 전주, 군산,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중,
고교를 설립하는 등 48년간 교육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의 셋째 아들 휴 린튼(인휴)은 전라, 경상도 도서 산간 지역에 60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고, 아내 로이스 린튼(인애자) 역시 한국에 만연한
결핵 퇴치 사업을 위해35년 동안 헌신적으로 봉사를 해왔다.
저이는 바로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사이에서 태어난 5남 1녀 중 막내이다.
덩치 큰 저이에 비해 소장실은 아담했다. “국제진료센터를 간략히 소개해 주시죠?”
“여 기는 한국에 온 외국인들을 돌보는 곳이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갑자기 아프면 얼마나 당혹스럽겠어요.
1962년 외국인 진료소International Clinic로 시작해서 지난해
국제진료센터International Health Care Center로 승격했습니다.
건물 멋있죠? 무려 90년 동안 병원만 디자인한 팀이 설계한 겁니다.
저도 지난 3년 동안 그 팀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런데 건물을 너무 잘 지어 놓으니 문제가 있어요.”
“건물을 잘 지어서 문제라구요?”
“예전 에는 거지부터 대사까지 출입을 했습니다.
어려운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이 이용을 했는데 건물이 너무 으리으리하니까
진료비가 비싼 줄 알고 그 분들이 지레 겁먹고 찾아오지를 않아요.
또 전산화가 완벽히 되어서 이제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몰래 도와줄 수도 없어요.
전에는 CT(컴퓨터 단층촬영)도 공짜로 해주기도 했는데요. 하하핫.”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연신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대는
저이는 과거의 ‘비리 선행(?)’를 밝히는 데도 거침이 없다.
가끔 가족들과 집에서 영화를 봅니다.
최근에는 <집으로>라는 영화를 봤어요. 그 영화를 보니 어릴 때 저를 키워주셨던 문간방 할머니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영화 속 꼬마가 할머니를 괴롭히니까 꼬맹이를 혼내고 싶어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