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에서 길을 묻다 / 이종영
새봄의 기운을 머금고 4월의 햇살을 기다리던 산벚꽃이 연분홍빛으로 산야를 수놓았다. 예년보다 열흘이나 일찍 피었다가 제 색채를 다 보여주기도 전에 시들어버린 봄꽃에 아쉬움이 남는다. 군무하듯 피어난 산벚꽃으로 마음을 달래며, 아직 더딘 봄에 둘러싸인 양평 구둔역을 찾았다. 평화로운 지평면 마을, 얕은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구둔역은 세상과 단절된 듯 고요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세상은 이토록 빠르게 변한다. 하루가 다르게 새 도로가 뚫리고, 열차를 이용하던 이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갖가지 추억과 아픈 사연을 간직한 간이역 또한 한때의 영화를 뒤로한 채 기억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여객 업무가 중단되어 철거되었거나, 일부는 폐역으로 쓸쓸히 남았다. 풀잎처럼 고운 색채감과 대나무 속살처럼 부드러운 곡선의 박공지붕을 인 역사(驛舍)부터, 모더니즘 공간을 구현한 목조건물까지 그 건축 양식 또한 다채롭다.
그중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 보존되는 역사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축에 속한다. 추억과 역사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간이역마다 새겨진 사연도 제각각이다. 일제강점기, 호남 지방의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고자 수탈의 통로로 세워진 호남선 춘포역과 임피역은 지금도 애잔한 아픔으로 남아 있다. 1970년대 중반, 석유파동의 대체 에너지였던 석탄산업의 번창으로 검은 진주를 실어 나르던 문경선 불정역과 가은역, 영동선 고사리역은 석탄 수송의 중추였다. 그 외의 수많은 간이역 역시 힘들고 고단하던 시절 서민의 발이 되어 시대의 증인처럼 말없이 자리를 지켜온 곳들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했다. 비록 지금처럼 좋은 자재를 쓰지는 못했을지라도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며 칠·팔십 년, 혹은 백 년의 세월을 버텨낸 간이역들이다. 단지 낡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혹은 직선화와 복선화라는 개발 논리로 철거한다면 후세에게 물려줄 우리의 유산은 무엇이겠는가.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아간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는 학문에만 국한되는 통찰이 아니다. 유서 깊은 해외 도시들이 몇백 년 된 건물을 문화유산으로 엄격히 관리 보존하는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숨 가쁜 현대적 삶 속에서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옛것을 추억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등록문화재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구둔역의 빛바랜 역사와 주위 환경은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황량함마저 풍기고 있었다.
오래된 간이역을 단순히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온전히 보수하고 가꾸어 자라나는 후손에게 역사적 교육적 공간으로 물려줄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나아가 간이역을 연계한 참신한 문화 관광 콘텐츠를 개발해 지역 경제를 살리는 마중물로 삼아야 한다. 문경선 가은역과 호남선 임피역이 좋은 예다. 문경시는 작은 시골 마을의 가은역 주변에 폐광 자료를 모아 석탄박물관을 개관하고, 낡은 선로를 레일바이크로 활용해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았다. 군산시 또한 임피역을 보수하고 이 지역 출신 문학가인 채만식 테마공원을 조성해 주민과 관광객의 큰 호응을 얻었다. 모든 것은 결국 관심과 발상의 차이다.
일본 홋카이도에는 영화 "철도원"의 배경이자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작은 간이역 이쿠토라(幾寅)역이 있다. 낡은 목조건물이지만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그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역무원은 없어도 여전히 1인 승무 열차가 멈춰 서는 이곳 역시, 영화의 무대가 되기 전에는 활기를 잃은 시골 마을에 불과했다. 영화가 상영된 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당시의 촬영 세트가 그대로 남아 여전히 전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버릴 뻔한 간이역이 영화 한 편으로 시골 마을의 든든한 명소로 거듭난 것이다. 낡고 오래된 옛것이라 하여 쉽게 허물 일이 아니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지역의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에게도 90년이 넘는 세월을 간직한 구 서울역사가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우리 민족의 숱한 애환과 추억을 품어온 구 서울역사는 거대한 신역사가 들어선 뒤에도 철거되지 않았다. "문화역 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새 옷을 입고 시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버려질 뻔한 공간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준 시도는 후세에게 건축사적, 철도 역사적 측면에서 훌륭한 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다만, 서울역의 지난 궤적을 깊이 있게 회상할 수 있는 아카이브 사진전이나 역사적 정체성을 살린 문화 콘텐츠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옛것보다 새것, 빠른 것만을 좇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간이역의 닳아진 대합실 의자와 낡은 박공지붕을 바라본다. 그곳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지혜 즉 옛것을 가만히 보듬으며 새 길을 찾아가는 온고지신의 혜안을 다시금 배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