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둔촌동, 둔굴, 약수터, 시비, 팔판동, 고덕동, 왕숙천 지명유래- ④. 사진 : 10매(7)
제 목 ; 둔촌동, 둔굴, 약수터, 시비, 팔판동, 고덕동, 왕숙천 지명유래- ④.사진 : 10매(7) -. 둔촌동, 둔굴, 약수터, 둔촌(遁村 諱 集) 선조는 1367년 신돈의 박해로 관직에서 물러나 피신을 갈 때 부친의 병이 심하자 부친을 업고 영천으로 가는 중 둔촌동의 약수터에 들렸다
약수터는 천연 탄산수가 솟아 올라 여러병에 특효라는 것을 알고 얼마간 그곳 둔굴에서 머무르며 약수로 부친의 병을 치료하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 호전이 되자 영천(永川)으로 향하였다.
이렇게 하여 둔촌(휘 이집) 선조는 부친의 병치료를 위해 머무르던 그 지역의 이름이 둔촌동으로 전해지는 연유이다.
*. 둔굴 이 지역에는 둔촌 선조의 피신한 곳으로 이용하였던 약수터의 굴바위,그리고 안둔굴, 밖둔굴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둔굴 위치를 찾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그 지역에 굴바위와 양달말과 응달말 사이에 있던 골짜기인 샛골, 아랫말 둔촌 안쪽에 있던 덜굴, 절 앞에 더운 우물이 있었다 하여 온수굴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주변이 모두 개발이 되어 흔적을 찾을 수도 없다고 한다.
어떻든 둔촌 선조는 이 지역에서 얼마간 지내며 부친의 피부병을 약수로 치료하였기에 이 동네의 이름을 훗날 둔촌동이라하였고 약수터가 제1둔촌 약수, 제2둔촌 약수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 둔촌동 지명 유래 강동구청 자료에 의하면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의 일부였던 곳으로광주 이씨의 시조이며 고려말 문장과 절개로 유명한 은사 둔촌 이집이 신돈(신돈)의 박해를 피해 바위굴에서 살면서 약수를 이용하여 아버지의 병환 치료를 하며 잠시 거주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둔촌동이라 하였다. 개발되기 이전 둔촌동은 구릉지대에 위치한 농촌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에 속하여, 둔골ㆍ밖둔굴ㆍ샛굴ㆍ아랫말ㆍ안둔굴ㆍ약수터ㆍ원숫굴(절굴ㆍ온숫굴)등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에 의해 둔촌리라 하였다.
그 뒤 1963년 법률 제 1172호에 의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둔촌동은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됨에 따라 시조례 제 276호로 설치된 성동구 천호 출장소의 관할 아래 있었다.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성동구로부터 강남구를 분리 신설하게 되자 둔촌동은 신설된 강남구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그 뒤 1979년 대통령령 제 9630호에 의하여 천호출장소가 강동구로 승격되자 강동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둔촌 약물 강동구 둔촌동에 있던 약수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물맛이 맵고 싸하므로 호추우물, 한자명으로 초천이라고 하였다. 또 찬우물・냉정・호추우물・초천・둔촌약물・호초우물・후추우물이라고도 하였다. 피부병・위장병・심장병 및 신경통에 특효가 있었다고 한다.
[출처] : 동아일보 1939년(소화 13). 6. 4(토) 및 경향신문 1983. 7. 2(토) 자 기사 -아래 신문 복사분 참고-
※. 일자산 둔촌 약수처 코스 : 서울보훈병원 →[둔촌동 안길]약수터 버스정류장 →[천호대로]→[언덕 2 길]둔촌 어린이 공원 → 둔촌고등학교 → 둔촌현대아파트 →[식당]솔마당 →[방아다리 길]일자산 입구 버스정류장 → 잔디광장 → 우측계곡[둔촌 2호 먹는물 → 둔촌 1호 먹는물 → 배드민턴장 → 등산로 [명일근린공원 방향 → 허브천문공원 방향 → 잔디 광장 →좌측 계곡방향]→ 잔디광장 좌측계곡[무명약수터 → 등산론]잔디광장 산책로 → 일자산 2 체육관 계곡[무명묘 → 둔촌 먹는물 →신당? → 돌탑 → 일자산 해맞이 광장 → 일자산 육교 (보훈병원) → 서울 보훈병원. -2010. 04. 02. 자- ※. 고덕동(高德洞)의 지명 유래 고려말 충신 광주인 석탄(廣州人 石灘. 諱 養中. 字 子精)의 높은 덕을 기리는 데서 유래한다.
석탄공(石灘公. 諱 養中)은 고려말 벼슬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방원(李芳遠)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조선조 3대왕 "태종"(1367~1422. 재위기간 : 1400~1418)으로 등극하자 "도덕과 예의를 모르는 무식한 놈이고 사귈놈이 못된다." 하고 혼자 고덕동에 은신하고 있었다.
조선조 3대왕인 태종은 즉위 후 어린시절부터 친구인 이양중을 한성좌윤에 임명했으나 그는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太宗)이 친히 거동, 이곳까지 와 이양중을 찾으니 그는 평민복장으로 태종을 맞이해 술과 거문고로 함께 즐겼으나 끝내 벼슬은 사양했다.
그 후 석탄공 이양중 선조는 수리골(지금의 하남시 덕풍2동)에 은둔하고, 동생인 암탄공(巖灘公. 諱 養蒙)은 광주 원적산 아래(실촌면 이선리)에 은둔하고 일체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들 형제의 이러한 절개를 기려 그가 죽은 후에도 인근 암사동에 있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둔촌 이집 등과 함께 이름이 올려져 이때부터 이양중이 살던 동네가 고덕리(高德里)로 불려졌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부도덕한 조선 조정에서는 벼슬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후일 이양중, 이양몽의 자손들은 그후 벼슬을 기피하고 살아왔다.
지금 강동구의 "고덕동이란 지명 유래"는 이 두형제의 높은 덕에 기인한 당시 선비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름인 것은 지금도 전해오는 유명한 얘기이다.
조선 태종때 수리골, 이선리에서부터 분리되어 분포된 것이다.
석탄의 묘는 원래 하남시 덕풍2동에 있었으나 도시개발에 따라 초월면 신월리로 이장을 하였고 암탄(巖灘. 諱 養蒙)의 묘는 원적산 아래 실촌면 이선리에 그대로 자리한다.
이종훈(李鍾勳. 十韻科公 후손. 3.1운동 33인중 1인), 이병승(실촌면 만세운동의 주동자)이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에 속하였는데 이때의 자연마을인 가재울ㆍ고더기ㆍ동자골ㆍ미역굴ㆍ방죽말ㆍ비석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뒤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해 경기도 구역획정이 있었는데, 이때 이 자연마을을 병합하여 고덕리라 하였다.
-. 둔촌 정훈(遁村 庭訓) 시비 서울시 강동구에는 강동 그린웨이 라고 하여 산의 높고 낮음이 크지 않고 일자로 되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일자산 공원(一字山 公園)이고, 1단계 4.6km 구간에 자연과 접할 수 있는 도심 공간의 휴식처가 있다.
그곳에는 둔촌(휘 집) 선조의 정훈 시비(詩碑)를 만날 수 있다. ‘한 권의 경서를 읽는 것은 한 광주리의 금덩이를 물려주는 것보다 값지다’는 시를 볼 수가 있어서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예나 이제나 가정교육의 훌륭한 지침이 되고 있다.
-. 종로구 팔판동 지명 유래 *.[출처 다음 지식] : 팔판동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에 여덟명의 판서가 살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저술된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각동조(各洞條)에도 팔판동의 유래가 되었던 8명의 판서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고 있다.(하략)
*. 또 한곳의 인터넷 검색 결과 : 이곳은 예부터 ‘팔판서골’이라 하던 곳으로 아마도 주요 관아가 경복궁 남쪽에 위치해 있어 직주 근거리의 편의성에 따라 경복궁 동북쪽 가까이 있는 이곳에 판서들이 주거지를 택하였을 가능성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팔판서골・팔판섯골이라고도 하였다. → 팔판동 [법정동]. 라고 게재되었다.
*. 나는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은바에 의하면 21대조 보문각 직제학 청백리공 호 탄천 휘 지직(淸白吏公 號 炭川 諱 之直)은 슬하에 3남 4여를 두셨는데
▲. 장남 사인공 휘 장손(舍人公 諱 長孫)은 슬하에 1남 8여 두시고, 그 아들 휘 극규(諱 克圭)는 호조참판공.
▲. 둘째 나의 20대조 우의정 시 충희공 풍애 휘 인손 (右議政 諡 忠禧公 風崖 諱 仁孫, 太祖 乙亥1395. 7. 4.~ 世祖 癸未 1463. 7. 13.)은 호조판서를 세차례나 역임하셨고, 후에 영의정 증직을 받으셨는데 슬하에 5남 3여를 두셨다. 장남 : 광릉부원군 시 익평공 호 일봉 휘 극배(廣陵府院君 諡 翼平公 號 一峰. 1422~1495. 諱 克培)는 6조에서 왕을 여섯분 모시며 우의정, 영의정을 지내시며 약 30여년 봉직하셨고, 두째 : 광성군 시 문경공 호 이봉 휘 극감(廣城君 諡 文景公 號 二峰.1427~1468). 諱 克堪)은 이조참판, 형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제학. 세째 : 광천군 판중추부사 諡 恭長公 號 三峰. 1431~1494). 諱 克增)은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숭정대부판중추부사. 넷째 : 광원군 좌찬성 號 四峰.1435~1503). 諱 克墩은 예문관 대제학, 평안 전라 관찰사, 호조판서, 이조판서, 숭정대부좌찬성. 다섯째 : 광남군 좌의정공 號 五峰. 1437~1504). 諱 克均은 좌찬성으로 서북면 도원수, 좌의정.
▲. 셋째 대사성 황해도 관찰공 휘 예손(大司成 黃海道 觀察使 諱 禮孫) 은 슬하에 4남 3여를 두셨는데, 장남 : 이조참판공 휘 극기 호 원봉(諱 克基 號 圓峰. 1426~1491)은 예조, 이조 , 공조참판. 차남 : 좌통례공 휘 극견(諱 克堅)은 좌통례공, 이조참의.
위 청백리공 호 탄천 휘 지직(靑白吏公 號 炭川 諱 之直)의 손자인 위 4촌 형제 사이인 8명(파랑색 표시)이 조선조 초기에 모두 문과 급제하여 판서(判書=장관급)에 올라 광주이씨 문중의 가문은 빛나고 벼슬이 연면히 이어졌으니 세상 사람들이 광이팔극조정 시대(廣李八克朝廷 時代)의 말이 전(傳)해져 오고있으니 옳은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형제들이 잠시 팔판서골(八判書谷)에서 살았던곳이 지금의 종로구 팔판동(鍾路區 八判洞)이라 이름이 붙여진것이라고 들은바 있다.
2013. 10. 15(화). 大田市 寶文山 아래 靑綠室에서 遁村(諱 集) 21代孫 李明鍾(鍾字 行列)
위 사진 설명 ; -.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 일자산(一字山) 등산로에 세워져있는 '둔굴' 안내판인데 내용은 둔촌동 동명 유래(遁村洞 洞名 由來)가 포함되었군요. 위 사진 설명 : 강동구 둔촌동 일자산(一字山)중에 있는 둔굴 안내문 내용은 -. 遁村(諱 集. 고려 충숙왕 14년 1327~1384(우왕 13년) 선생은 고려말에 등용된 대학자로 이색, 정몽주, 이숭인과 더불어 절개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공민왕 17년(1368년) 신돈의 실정 탄핵을 계기로 신돈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일시 은거하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은거동안의 고난을 자손 후세까지 잊지 않기 위해서 호를 둔촌으로 바꾸었다. 현재 둔촌동의 동명 유래는 이집의 호인 둔촌에서 비롯된것이다. 2008. 1. 강동구청장.
위 사진 설명 : -.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 일자산(一字山) 등산로에 -. 둔촌정훈(遁村庭訓) 시비(詩碑)가 그 해설과 함께 보는이들로 하여금 귀감이 되게끔 조형되었군요.
위 사진 설명 : -. 조선조 초기인 1410년(태종 10년)에 목판본 2권1책으로 되어 대한민국 보물 1218호로 보존되어 있는 둔촌잡영(遁村雜詠 : 둔촌의 시문집: 칠언절구, 오언절구, 칠언고시, 칠언사운율로 나누어 편성)의 내용중 시 한수가 둔촌동 일자산 등산로에 안내되어 세워져 있네요. 사진의 글자가 육안으로도 잘 보이네요.
위 사진 설명 : 둔굴 가는 안내판입니다. -. 둔촌(휘 집) 선생의 칠언절구 내용 天地無涯生有涯 천지는 끝이 없으나 삶에는 끝이 있네. 浩然歸去欲何之 돌아가고픈 마음 간절하나어디로 갈거나 驢江一曲山如麗 려강은 굽이요 산은 그림같이 고와 半似丹靑半似詩 절반은 그림같고 절반은 시와도 같네
※. 지금부터 640 여년 전의 자연을 대함이나 인간 심리에 대한 감정이 지금과 비슷하네요.
위 사진 설명 : -. 둔촌고등학교 교정내에 있는 약수터 안내 시멘트 콩크리트 조형물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둔촌 먹는물 공동 시설문 안내판이네요. 제1둔촌 약수터 와 제2둔촌 약수터로 기록되었습니다.
위 사진 설명 : -. 위 둔촌 약수터의 사진과 동일한 장소에서 방향만 바꾼 사진입니다. 위 복사분 설명 : -. 경향신문 1983. 7. 2(토) 자에 둔촌동 약수터 얘기가 게재된 기사입니다.
위 사진 설명 : -. 동아일보 1939년(소화 13) 6. 4(토) 자에 강동구 둔촌동 약수터를 소개한 기사입니다. |
|
첫댓글 여러모로 수고가 많으네 짝짝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