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표나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우리 가난홍보대사 흥보하고는 항렬이 어떻게 되는지요
요즘엔 눈총도 손가락질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지만
구구절절 피눈물 흘린 그대 가난
끊임없는 전란 군주의 어리석음 미색 양귀비의
요사스러움 때문이었을까요
그대 애옥살이 행적 손가락 짚어가며 좇아가는 밤
간언도 잘하지만 딸린 식구들 밥 굶기지 않으려고
쌀 좀 보내달라고 간청도 곧잘 해야 하는 그대
성도 밖 물가에 친척과 벗들의 도움으로
띠풀로 지붕 이어 지은 초가집이
지상의 유일한 안식처라 그리도 마음에 들어했는지요
지금은 웅장한 '두보초당(杜甫草堂)'이 되어 관람객이 끊
이지 않는다지요
삼협에 뜬 달이 물마루 가슴마루에 비쳐드는 외로운 심사
타향 떠나면 또 다른 타향 거기 어딘가에 굶어 죽은 아들
묻고
평생 먹물 노릇 후회는 하지 않았는지요
그대 시편 행간마다 피비린 북소리 울리고
쫓겨가는 백성들의 창백한 옷자락 나부끼고
잔나비 울음소리에 촛불마저 꺼지는 밤
내일이면 또 식솔들 굴비 두름 엮듯 한 줄로 세워
누런 하늘 아래를 걸었으니
그대 지고 이고 간 하늘은 오늘 여기도 매한가지
동서에 고금을 통해 글쟁이 호강한 적 없으나
이 나라 조정에서 글지이 딱한 사정을 어찌 헤아려
방방곡곡에 방을 내어 작품을 응모케 하여
낙점을 받으면 구휼미 스무 석씩 나눠준다기에
상갓집 개도 먹길 꺼린다는 국록에 눈이 멀어
우선 그거라도 받아 호구를 덜어볼 욕심에
때묻은 공책 침을 발라 넘겨가며 떨리는 손으로
무딘 붓 잡고 한 자 한 자 적어내려가는 밤
그대같이「빈교행(貧交行)」노래하던 가객도 사라지고
찬 서리 눈보라에 국화꽃 상찬하던 풍류도
기개도 눈 녹은 듯 보이지 않고
난삽과 교언영색의 말들만 무시로 춤추듯 어지럽고
가난은 사랑의 하인이라는 사랑스러운 금언도
더는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직장도 없고 소중하던 사람은 가까운 듯 멀리 있고
처자식과 떨어져 노모와 밥 끓여 먹는 날들
요행히 글삯 몇 푼 생기면 서슴없이 서너 냥쯤 헐겠습니다
그대가 반색했다는 말젖과 포도로 빚은 유주는 구하기 힘
들더라도
여기 불소주 물소주 된 지 오래되어 제 맛을 잃었더라도
한산곡주와 이강주는 아직 불기운 살아 있어 마실 만하
지요
그게 안 맞으시면 제가 한 때 즐겨 마셨던 이과두주나 고
량주에
마파두부 안주 삼아 마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제가 마시고 있는 막걸리를 맛보시는 건 어
떻겠습니까
황하의 ㅇ리엽편주같이 떠돌던 그대의 파란만장이
천파만파 허연 물보라로 일어났다 스러져가는
한강 유람선 난간에 기대어 추억에 잠기는 건 어떨는지요
우리 사는 속내 물고기 배래기처럼 확 뒤집어보는 건 또
어떨는지요
살벌한 북풍 휘몰아치는 상강
병든 몸으로 배에 누워 세상에 작별을 고한 그대
주검을 운구할 방법이 없어 마흔세 해가 넘어서야 겨우
고향으로 돌아간 그대
다시 한번 몸 일으켜 기러기 편에 일자서 띄우면
멀지 않은 평택 나루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버드나무 없어도 버드나무 가지 잡고
버들잎 없어도 버들잎 한 잎 두 잎 씹으며
서늘한 가난 앞세우고 올 당신
꼭두새벽부터 기다려보겠습니다
[중얼거리는 천사들],문학동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