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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쉽게 풀리는 일은 없는 법, 독일과의 전쟁이 종료된 뒤에도 러시아에는 단일한 정부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반볼셰비키 세력은 무력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에 대항해 똑같이 무력으로 반격하려 시도하였습니다. 당장 혁명 직후 1개월도 지나지 않아 1917년 8월에는 표트르 크라스노프 기병대장을 중심으로 한 코사크 부대의 위협이 있었지요.
페트로그라드 근방의 차르스코예 첼로를 점거한 크라스노프 부대는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 엄청난 위협이 되었고, 약속한 지원을 받지 못한 크라스노프 부대가 항복에 가까운 휴전에 동의하며 간신히 위기는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러시아 각지에서는 볼셰비키 중심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봉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을 ‘혁명 및 조국 수호위원회’라 칭한 구 임시정부 세력은 볼셰비키가 장악한 대도시를 벗어나 시베리아와 남러시아 등지로 향해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케렌스키를 지지하던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도 가장 우익인 노동인민사회당, 입헌민주당을 비롯한 중도 공화주의 세력이었습니다.
구 러시아의 주축을 이루던 세력들도 볼셰비키당에 적대적인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러시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빼앗기게 될 위기에 처하자, 동방 정교회는 대단결했습니다. 본래 정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하던 러시아의 차르가 공위한 상태에서, 정교회는 수백 년 만에 전러시아 총대주교직을 부활시키고 모스크바 대주교 티혼을 그 자리에 올렸습니다. 티혼 총대주교는 소비에트 러시아 지도부를 사탄과 같은 자들이며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저주하고 노골적으로 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볼셰비키는 이들에 맞서기 위해 정교회의 오랜 탄압 대상이었던 고의식파를 끌어들여 아군으로 삼았습니다.
이슬람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볼셰비키는 ‘피억압 민족의 종교’로써 이슬람교도들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청년튀르크당과 손을 잡고 범이슬람주의-범투란주의 유라시아 제국을 세우고 싶어 하는 이들은 남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반볼셰비키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타슈켄트를 점거했던 볼셰비키들은 고립되었고,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범투란주의에 찬동하는 인사들이 선포한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 정부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추가로 저지르며 인종주의적인 색채를 노골적으로 강화시켰습니다.
이렇게 반 볼셰비키 세력이 후일 ‘백군’이라 불릴 이름 아래 뭉치는 동안, 적군 내의 통일전선도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회혁명당의 영수인 빅토르 체르노프와 당의 핵심 인사인 [아브람 곳츠] 등은 소비에트 의원직에서 사퇴하지는 않았으나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정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려 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아군을 찾던 볼셰비키당이 반유대주의 배격을 명목으로 유대인 노동총연맹, 즉 분트와 사회주의-시온주의 세력인 포알레 시온을 끌어들이며 사정은 또 변했습니다. 한때나마 볼셰비키 정부를 인정하는 듯하며 ‘우크라이나의 자치가 인정되는 사회주의 러시아’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던 우크라이나의 최고기관인 중앙 라다가 분열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협력을 지지하던 수상 [볼로디미르 빈니첸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능하지만 우유부단하던 국방상 [시몬 페틀류라]는 우크라이나만의 군대 창설을 주장하는 자신의 의견이 계속해서 반려되자 자신이 이끄는 민병대 병력으로 키이우 점령을 시도했습니다.
1917년 12월에 페틀류라의 병력은 격퇴되었으나, 그의 수하들이 여러 세력 중 최초로 볼셰비키 정부를 ‘유대인 정부’라 지칭하며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을 시작하며 백군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게 된 것은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페틀류라 본인은 일단 말로는 반유대주의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수하들의 패악질을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권장하기까지 하며 반유대주의의 확산에 일조했습니다. 이윽고 페틀류라의 실패한 쿠데타는 러시아를 파괴하려는 국제공산주의 유대인들의 음모에 맞서는 성전의 시작이며, 유대인들을 러시아에서 쓸어내야만 한다는 인종주의 음모론이 백군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략)…. 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국가의 모든 인력과 자원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2) 모든 소비에트와 혁명적 조직에 모든 영토를 최후의 한 방울의 피까지 흘려가며 수호할 것을 명령한다.
3) 철도조직과 그와 관련된 모든 소비에트는 적대세력이 철도를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며, 후퇴를 위해 물러나야 할 시에는 철도를 부수고 관련 시설을 불태우거나 폭파해야 할 것이다. 모든 기관차와 객차, 화차는 소비에트의 통제하에 있는 곳으로 이송되어야 한다.
4) 모든 곡물과 식량 비축분을 비롯해 적의 손에 떨어질 위험이 있는 모든 재물과 자산은 무조건 파괴되어야 하며, 이 파괴 의무는 각지의 소비에트와 그 주석이 책임지고 수행해야만 한다.
5) 페트로그라드, 키이우를 비롯해 전선에 걸친 모든 도시와 마을의 노동자와 농민은 건설대대를 구성하여 군사 전문가들의 지시를 받아 참호를 건설하여야만 한다.
6) 이러한 건설대대는 적위대의 감시하에 부르주아 계급의 노동 가능한 모든 남녀를 포함할 것이며, 반발하는 자는 사살될 것이다.
7) 혁명의 수호에 반대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편에 서거나 제국주의-자본주의 세력의 공격을 기회 삼아 소비에트의 통치를 거부하려는 모든 언론은 폐간될 것이며, 해당 언론의 노동 가능한 편집자와 직원들은 참호 건설을 비롯한 방위 노동에 투입될 것이다.
8) 적대세력의 요원, 사기꾼, 강도단, 폭력단, 반혁명사범, 간첩은 현장에서 사살될 것이다.
사회주의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주의 조국 만세! 국제사회주의 혁명 만세!
인민위원회
1918년 2월 7일, 페트로그라드
그러나 이들이 맞서는 볼셰비키 지도부, 즉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결코 이상주의자들의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인종주의 음모론에 맞선다는 명목으로 볼셰비키는 가장 급진적인 조치를 내세웠습니다. 인민위원회는 국방위원 트로츠키가 초안을 작성하고 레닌이 마무리한 결의안이자 선언문 ‘사회주의 조국이 위기에 빠져 있다’를 발표하며 이를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정부가 ‘조국이 위기에 빠져 있다’라는 표어를 발표했던 것과 맞닿아 있었지요. 소비에트 러시아는 로베스피에르의 공안위원회와 파리 코뮌 등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인지하고 있었기에, 프랑스 혁명은 모든 면에서 본받아야 할 이상이자 실패한 혁명의 반면교사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정권 내의 합법적인 반대자로서 레닌과 점점 더 각을 세우기 시작한 법무위원 이사크 스테인베르그는 적대세력을 무조건 사살할 수 있는 결의안에 경악해 레닌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레닌의 답변은 단호했습니다.
“이러면 도대체 법무위원회가 왜 필요합니까? 차라리 이름을 사회 절멸 위원회로 바꿉시다!”
그 말을 듣자, 레닌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맞는 말이오. 사실 그 이름으로 바꿔야 하지.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할 수는 없잖소?”
특히, 레닌의 이너 서클에 사실상 포함된 파우코이는 ‘공개적인 폭력보다 밤에 찾아오는 체포 요원들이 통제에 더 효과적이다’라며 체카의 비밀경찰 화를 가속했습니다. 자신에게 오는 비판을 피하지도 않았지만, 나서서 혁명을 수호한다는 피비린내 나는 명예를 챙기려고는 하지 않는 파우코이는 ‘혁명의 유령’, ‘배후의 음모자’와 같은 경외와 두려움이 섞인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권위주의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자신들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을 움직여 각지에서 습격을 저지르게 해 폭력과 공포로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 한편, 백군을 지지하는 듯한 언행을 보이는 인사나 단체들을 ‘동요계층’(Социально опасный элемент)으로 묶어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탄압의 규모는 광범위했습니다. 러시아에 파견된 독일의 대사 빌헬름 폰 미르바흐 백작이 ‘제정 러시아의 비밀경찰 오흐라나가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강력해졌다’라고 평할 정도였죠. 소비에트 러시아는 자신들이 선전하는 대로 사형제를 폐지했고, 적대 인사에 대해 즉결처분하는 일은 무척 적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동요계층으로 낙인찍힌 이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노동교화소’나 ‘형벌부대’로 배치되어 자원처럼 소모되었습니다.
제르진스키와 파우코이, [그리고리 작스]를 비롯한 이들이 이끄는 체카의 권한은 점점 더 막강해졌습니다. 국경과 국가 기반 시설의 방위를 위해 군대에 버금가는 무장 조직을 창설하는 한편, 지방에서의 권한도 점점 더 강화했습니다.
유일하게 체카를 방해하는 요소라면, 적위대의 주축을 이루는 라트비아 소총부대와 마찬가지로 체카 구성원의 대다수가 라트비아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체카 상무회는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라트비아를 방문하는 것을 막아야 할 정도였는데, 체카의 업무가 이들이 없으면 마비될 정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였죠.
* * *
갑자기 제정신이 약간 돌아온 듯한 독일의 루덴도르프는 동부전선에서 돌아온 사기가 낮고 조직력이 떨어진 병력을 이탈리아 전선과 알자스-로렌에 배치하는 강수를 두고 모든 병력을 파리 공략에 투입했습니다.
협상국 군대의 공세로 벨기에 국경 근처까지 밀려났던 독일군은 기관단총 소리와 함께 아미앵을 점령하고 에펠탑을 관측할 수 있는 거리까지 도달했습니다. 프랑스군에게 장비를 제공받던 미군은 어떠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가운데,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의 파천을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내부 보급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식량은 점점 더 떨어져 갔고, 전쟁을 지속할 능력도 점차 낮아지고 있었죠. 동부전선의 빠른 종결은 무너지는 독일 제국과 동맹국에 산소호흡기를 부착해 생명 연장을 약간이나마 한 것 외에는 더 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에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재집권해야만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구 임시정부 세력은 협상국에서 물자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구두 약속이나 군사 고문단 파견 정도나 받아올 뿐이었습니다. 화기와 탄약, 식량이나 의약품 등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그나마 물자를 양보할 수 있다는 의사을 밝힌 일본은 지원을 받고 싶다면 영토를 할양하라며 강짜를 부렸습니다.
구 임시정부가 볼셰비키와 투쟁하는 데 쓸모없다고 판단한 구 러시아군은 재빠르게 행동했습니다. 혁명 및 조국 수호위원회는 우랄산맥의 대도시인 우파에서 러시아 임시정부의 복귀를 주장하며 뭉쳤으나, [알렉산데르 콜차크] 제독과 [블라디미르 카펠] 소장 등이 일으킨 쿠데타에 전복되어 토사구팽당했습니다.
콜차크는 제정의 부활을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을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로 ‘추대’하게 만드는 한편 백군 내의 공화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제거했습니다. [블라디미르 볼스키]를 비롯한 인사들은 격노해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본래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지했던 일부 자유주의자들도 통일전선에 가담했습니다.
그렇게 1918년 3월 콜차크 제독의 쿠데타 직후 구 러시아 제국은 크게 두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먼저 친소비에트 세력은 당연하게도 유럽 러시아 대부분을 장악한 동질적 사회주의 정부가 이끄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그 휘하에 새로이 창설된 군대인 ‘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 이하 노농적군이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적군과 손잡은 농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결성된 사회혁명당의 녹군, 아나키즘을 추종하는 흑군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삐걱거리는 동맹이었습니다. 특히 녹군 대다수와 흑군 일부가 기존의 지주와 자본가 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유대인과 독일계 소수민족을 공격해 학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반유대주의와 민족차별을 배격한다는 적군의 선전과는 무척이나 다른 상황이었지요.
협상국 군대 소속으로 노동자로 일하던 중국인 노무자들로 군병력을 꾸려 [이오나 야키르]의 휘하에 맡기고, 라트비아 소총부대를 충격군 삼고 그 수장인 [유쿰스 바셰티스]를 아예 새로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삼을 예정이었던 소비에트 러시아 지도부로서 동맹 세력의 이러한 반응은 내부 총질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인제 와서 녹군과 흑군을 손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페틀류라 반란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키이우를 비롯한 대도시만 통제하는 상태가 되어 껍데기만 남은 상태에서 녹군과 흑군의 협력 없이 우크라이나에 지배권을 행사하려면 붉은 군대가 통째로 진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의미했죠.
첫댓글 혁명하나로 혼란스러운 러시아...
포알레 시온... 스테인베르크... 으윽... 머리가...
오래 전 일이다보니 이렇게 힘들었던가? 싶은 생각이 먼저 들긴 하네요 ㅋㅋㅋ... 힘들긴 했지만,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던 느낌이라 그런가...? 아니면 고증 강도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네요 ㅋㅋㅋ. 소망문 소설판과 연대기판 같이?
레닌의 발언은 실제로 한 말입니다 (...)
작중 상황이 rpg시절보단 훨씬 나쁘지만 현실보단 여전히 낫다는게 참..
@렌지파일 네...? ㄷㄷㄷ... 그게요...?
+ 아니 이게 현실보다 낫다구요...? 어케 이겼냐...
@dear0904 사실 다른 것보다도 흑군이 적군에게 이 정도로까지 협조적인 시점에서 난이도가 확 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별빛 아 하긴... 생각해보니 소-폴 전쟁때 우크라이나는 폴란드랑 손 잡았었죠...
실제대로 고증했으면 아마 다 떨어져나가지 않았을지..(?)
@E.E.샤츠슈나이더 아마 순차적으로 떨어져 나갔을거라고 생각합니다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사실 소설판도 얼렁뚱땅 넘어갔었죠 ㅋㅋ
@렌지파일 괴로운 부분은 빠르게 넘어가는게 상책이죠 ㅋㅋ... 저야 무지성 사이다 패스를 싫어하긴 한다만, 고구마는 아무리 그래도 환영 받진 않기도 하구요.
@렌지파일 10분의 1형, 프락치 현장사살령, 500만 징병계획이 몽땅 현역이면서 녹군과 흑군이 협상 테이블에 앉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비현실적이지만, 혁명뽕은 못 참죠(…)
@E.E.샤츠슈나이더 혁명뽕은 못 참지로 넘어간 만협추까지... 진짜 혁명뽕은 못 참죠 ㅋㅋ...
@E.E.샤츠슈나이더 몇몇 아나키스트들은(네...칼란다리쉬빌리.....) 혁명뽕 하나만 믿고 볼셰비키에 가담하기도 했죠.
애초에 순양함 아브로라를 필두로 한 발트함대가 레닌의 선거지역구였을 정도로 볼셰비키를 지지한 아나키스트들이었고요(1921년 이전까지지만요 물론)
@렌지파일 지금 다시 그 부분을 진행한다면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들을 칼란다리쉬빌리 류의 인간백정 집단으로 타락시키는 방향이 될 것 같은데, 문제는 피카레스크물은 보통 인기가 없죠(….)
@E.E.샤츠슈나이더 그래도 마흐노 흑군은 그나마 상식적이었죠.. 조직체계가 잡혀있었으니..
후일 마흐노가 망명하고나서 그 조직체계 때문에 까인 걸 보면 정말 억울하겠지만요;
@렌지파일 그나마 조직 체계가 잡혀있기라도 하면 최소한 통제에서 벗어난 약탈등 잔혹 행위가 벌어질 일은 적죠. 사코디 로마... 때도 통제가 안되서 터진거기도 하고... 사례 정말 많을건데, 사건 명으로 말할라니까 딱 안 나오네요 ㅋㅋ...
막장 ㄷㄷ....
위에도 적었지만 현실에 비하면 이게 순화/미화된 버전입니다 ㅋㅋ
@렌지파일 실제 소련은 상상 이상으로 사나이의 웅심을 자극하는 거친 국가였네요(?)
요즘 차기작 준비 겸 해서 프랑스혁명사/나폴레옹전쟁사 책 읽는 중인데, 로베스피에르의 통찰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하더군요… 마침 로베스피에르 국민공회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양반은 끝까지 혁명전쟁을 반대했다죠. 이유는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군사독재자가 필연적으로 출현할 것“이었으니, 이후 전개를 생각하면…
문제는 그 통찰력이 경제엔 발휘되지 못해서(...) 뭐, 우린 현대 사람이니 가격 통제가 가져올 결과를 알지만, 그쪽은 모를법 했지만, 우유 통제 실패하고 건초를 통제 하려 한건(...)
혁명의 적을 죽이지 않으면 혁명정부는 무너지고(자기가 죽음) 배반당하고(테르미도르) 군사독재자(나폴레옹)가 출현할 것이라 예측했죠 (...)
@dear0904 만약 그에게 빅토가 있었더라면 좀 나았을텐데..
@E.E.샤츠슈나이더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 했다면(?) 오 왓 이프...? 라기엔 시대가 조금 차이가 나네요 ㅋㅋ
@렌지파일 이런걸 보면 왜 스탈린 등 볼셰비키 지도부들이 투하쳅스키를 그렇게 견제했는지 알 것도 같고… 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대숙청도 이해는 가긴 하더라구요(...) 소-폴 전쟁이랑 프랑스 혁명사 두개를 보니, 안 그럼 나라가 쪼개졌을테니... 문제는 힛총통이 생각보다 미쳤다는거...?
@dear0904 ???: 장교 놈들을 죄다 죽였어야 했어! 스탈린처럼!
뭐 전쟁이 장기화되면 누군가 호국경 크롬웰이 될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다만 혁명정부가 원치 않는다고 해서 혁명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오히려 루이 카페와 그 처가댁에게 달려있지 않았을지?
@E.E.샤츠슈나이더 예전에 네이버에서 나폴레옹보다 로베스피에르를 더 고평가하는 말이 생각나네요.
"사후 반대파들에 의해 음침한 선동가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진거지 통치는 괜찮았고 전유럽 및 반군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며 혁명 이후로 경제 사정도 가장 좋아졌으니 정치력이 부족한것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나폴레옹은 군사.정치적으로 정말 뛰어났던건 맞 지만 도덕적으론 문제가 있었다.
개인적으론 공화국을 무너뜨린 황제보단 공화국을 세운 공안위원회 의원을 더 높게 칩니다."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