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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연구회총서>
정왜론(征倭論)[1]*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본)
꿍더뽀(?德柏) 著
구 양 근譯
(성신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해설
이 ??정왜론??은 역자가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아직 사계에는 여기에 대한 번역본이나 연구서가 없다. 이 책은 9?18 만주사변(滿洲事變) 기간에 꿍더뽀(?德栢)라는 중국인이 저술한 강한 반일사료이다.
꿍더뽀는 일본유학생 출신으로, 동경에서는 한 때 ??상해상보(上海商報)??의 통신원을 하였으며 귀국하여서는 왕따전(王大楨)의 수행원으로 워싱턴회의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왕따전의 소개로 ??국민외교잡지??의 주간을 맡았고, 영국인이 경영하는 ??동방시보(東方時報)??의 중문판 편집장을 겸하였다. 뒤에는 ??중미통신(中美通信)??의 편집장을 맡고 세계만보(世界晩報)를 경영하기도 하고 ??대동만보(大同晩報)??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또 남경의 ??혁명군일보??에서 일하다가 상해 ??신보(申報)??의 국제판 편집을 맡는 등 중화민국 초기의 만년 언론인이었다. 그는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대포(大砲)’라는 별명을 가진 강성 반일투사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자 최고의 지도자 장지에스(蔣介石) 장쉐량(張學良)마저도 일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있고 일반 백성은 공일병(恐日病)이 만연하였으나 꿍더뽀는 즉시 무력항쟁을 부르짖고 나선다.
??정왜론??이 출판된 것은 만주사변이 나고 불과 10여일만이기 때문에(만주사변 1931.9.18: 책출판 동년 10.1), 시간적 절박성 때문에 자신 없는 부분도 일단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급히 쓴 책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한 증거를 대고 이론도 정연한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출판 된지 불과 50일 만에 7판을 거듭 인쇄 배포한다.
이 책이 끼치는 영향은 심대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왜론??이 나오고 1개월여 만에 흑룡강성에서 마잔산(馬占山)의 항일 무력항쟁이 시작되었고, 일본으로부터 흑룡강성 주석으로 임명받은 장하이펑(張海鵬)이 주석으로 취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군을 향하여 공격을 가하는 쾌거가 벌어진다.
이 책에는 부록으로 ‘일본의 중국병탐계획서’ 라고 단서를 단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의 ??중국관견(中國管見)??과 ‘왜군이 중국을 교란하는 분명한 증거’ 라는 단서를 단 고토 신패이(后藤新平)의 ??중일충돌사건의 진상??이라는 두 편을 꿍더뽀가 직접 중국어로 번역하여 함께 싣고 있다.
본 저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중국의 항일투쟁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한중일 삼국의 관계사나 상호관념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사료되어, 부록까지 전문을 번역하여 사계에 제공하는 바이다.
중국과 왜(倭)는 절대 양립할 수 없다.
중국이 망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오직 왜를 정벌하는 한 길 밖에 없다.
전국의 동포여 어서 일어나라.
서언
수십 년 전부터 우리 중국에 외환(外患)이 들이닥쳐 그 위태로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알고 보면 외적인 것이 아니고 바로 내적인 것이었다.
무릇 외세가 갑신(甲申) 년 전승(戰勝)으로 할지(割地) 배상을 받게 되자 갑오(甲午)년에 왜인(倭人)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갑오년의 전승으로 할지 배상을 받게 되자 무술(戊戌)년에는 각 항구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각 항구가 점령당하자 경자(庚子) 년의 반동이 있었고, 경자년의 반동으로 북경이 함락 당하자 국운은 더욱 위태로워진다.
이로부터 삼십 여 년간의 외환에 대하여는 저항도 해볼 수 없게 되었고 드디어 오늘날 왜(倭)가 요녕(遼寧)?길림(吉林)을 병탐하는 거화(巨禍)를 가져오게까지 된다. 그 원인은 다름이 아니다. 외세를 두려워하고 일시적인 안일을 탐하는 심리가 전국적으로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무릇 터키 같은 나라도 항상 중국처럼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다. 구라파전쟁 때는 독일을 가까이 하다가 종묘사직이 하마터면 끝날 뻔하였다. 그러나 케말 파샤〔Kemal Pasha. 본명은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이며 일명 케말 파샤라 한다. 파샤는 군사령관이나 고급관리에게 주는 칭호이다. 터키에서는 케말 아타튀르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타튀르크는 국부(國父)란 뜻인데 1934년 터키의 국회인 대국민회의에서 증정한 칭호이다?역자〕가 민병대 수만 명을 이끌고 그리스를 급습하여 승리함으로써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외세가 감히 터키를 넘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사태가 역전된 것은 다름 아니다. 외세를 두려워하고 일시적인 안일만 취하던 심리가 결사의 심리로 바뀐 것이었다. 외국인들도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 감히 힘센 자의 노여움을 사려고 하겠는가.
지금 왜가 우리의 요녕?길림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이미 우리의 목을 조이기 시작한 것이다. 국운의 위태로움이 당시 위기에 처했던 터키와 너무나 닮았다. 그러나 지금 왜의 군벌들은 이미 지구력이 떨어졌고 또 무엇보다도 천하 민중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들은 지금 그리스가 연합국의 원조를 받아야만 했던 상황보다도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도 현재 중국의 세력은 케말 파샤 수만의 민병대를 거느리던 상황보다도 못하다.
싸우겠다는 기세가 바로 싸울 수 있는 자산이다. 만약에 외세를 두려워하고 일시적인 안일만 취하는 심리가 팽배해 있다면 군중은 의심만 가득 차고 한 치 앞도 못 내다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중화민족은 차라리 태평양 깊은 바다 속에나 가라앉아야지 현세계에 존립하여야 할 아무런 자격이 없다.
옛날 조조가 형주(荊州)에서 동오(東吳)에게 격문을 전달하여 항복을 종용하였다. 손권(孫權)은 조조의 많은 병력이 두려워서 감히 결전을 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 때 제갈량이 칙명을 받들고 오군(吳軍)의 진중에 있었다. 제갈량은 조조의 병사가 비록 많기는 하지만 염려할 것은 없다고 조목조목 명확히 그 결함을 개진한다. 주유(周瑜)의 견해도 같았다. 그렇게 하여 손유(孫劉)는 연합하게 되었고 조조는 드디어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의 왜구(倭寇)는 결코 조조의 강함에 미치지 못한다. 중국의 국력도 손유의 연합군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지금 왜인의 세력에 대응할 중국의 방책을 개진하려 한다. 원컨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빨리 계략을 마련하기 바란다. 만에 하나라도 실기(失期)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중화민족의 흥망성쇠와 유관한 문제로서 보통의 국난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일의 성취는 신앙심에 있을 수밖에 없다.
옛날 넬슨 제독은 영국 함대를 이끌고 나폴레옹의 침략을 막을 때, 트라팔가 해전에 임하기 직전 한 참모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가정한다면 후세인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우리가 승리한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가정’이라는 두 자는 필요없다.”
결과적으로 과연 영국은 승리하였다. 넬슨은 비록 전사하였으나 그 명성은 천추에 길이 남을 것이니 그것은 바로 강한 신앙심이 가져다준 소치였다. 우리 혁명군이 북벌을 한 것도 바로 그 신앙심 때문이었다.
“우리는 기필코 올해 안으로 무한(武漢)을 요절내고 유연(幽燕)에서 집결하자.”
라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적은 병력으로 그 엄청난 군벌세력을 격파할 수 있었고 드디어 2년 내에 전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병력은 북벌 이전의 백배는 된다. 전국을 총동원한 왜구일지라도 질풍으로 낙엽을 쓸듯이 우리는 그들을 격파할 자신이 있다.
본 저술의 목적이 바로 그 신앙심을 굳건히 하여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옛날 미국이 영국에 항거하여 독립을 쟁취하려 할 때 좀처럼 중론이 모아지지 않았다. 그 때 패드릭 헨리는 대중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여러분은 우리가 힘이 약하기 때문에 적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오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만약 강성해진 이후에 적과 대적하겠다면 그 강성해진 때가 어느 때입니까? 열흘 후입니까? 일년 후입니까? 지금부터 며칠만 지연하여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병기마저 모두 빼앗겨버리고 말 것입니다.
영국의 병졸들이 떼 지어 모여 있는 데도 우리는 이제껏 우유부단하게 기회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안주를 꽤하고 평화를 갈구하며 헛되이 훗날 강성해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는 적의 올가미가 나의 목을 조여 오는 것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행위이외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이 주신 힘이 있습니다. 그것만 사용하여도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어찌 저따위 적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 삼백만 민중이 힘과 마음을 합하여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든다면 능히 우리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고 우리의 국토를 지킬 수 있고도 남습니다. 아무리 강한 적일지라도 우리를 당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오직 힘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正義)와 인도(人道)가 우리 편입니다. 지금 적은 약자를 침탈한다는 인륜의 도리를 어기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의가 우리 편입니다.
우리 모두가 떨쳐 일어나 싸우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우리가 힘이 약할지라도 하늘은 우리에게 반드시 원군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대의명분을 잃은 적은 힘만 가지고 절대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군대가 당당히 진용을 갖추고 돌진만 한다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진퇴양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일시적인 안일만 꽤하다가, 싸우고 싶어도 나아가지 못하고 후퇴하고 싶어도 후퇴하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이상 더 주저하며 후퇴만하고 싸우지 않는다면 이는 소돼지나 노예나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적은 여러 해 동안 우리들의 목에 쇠사슬을 채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벌써 보스톤 평야에서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사태는 급박합니다. 이제 싸우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 싸워야 합니다. 당장 싸워야 합니다(하략).
우리는 이 연설의 내용 중에서 영국을 왜로 바꾸고 보스톤을 만주로 바꾸면 된다. 여기 한 글자 한 글자는 모두 지금 오늘의 우리의 국면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 말을 빌려 서문의 끝을 대신한다.
저자 씀
민국 20년(1931) 9월 28일
정왜론 목차
제1장 왜인의 역사적 대륙침략 정책
제2장 금번 왜화(倭禍)의 유래
제1절 중국이 통일되면 왜인은 침략의 기회를 잃게 된다
제2절 길회(吉會)철도와 청진항(淸津港)은 일본 침략정책의 필수
제3절 동삼성의 독점을 위하여 중국 자영의 철로를 허락하지 않음
제4절 왜 군벌들의 실업(失業)의 두려움
제5절 점령음모의 온양(?釀)
제3장 왜인(倭人)의 만몽(滿蒙)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음모
제1절 음모의 역사
제2절 금번 독립음모의 경과
제3절 독립음모와 상해신보(上海申報)
제4장 왜인이 절대 승전(勝戰)할 수 없는 이유
제1절 외교상의 이유
제2절 재정상의 이유
제3절 물질적인 이유
제4절 국민생계상의 이유
제5절 국민사상사적 이유
제6절 왜장교의 부패와 병사들의 심리적 변화
제7절 왜군벌의 순전한 투기행위
제5장 일본 정벌의 필요성
제1절 중?왜(中倭)는 양립할 수 없다
제2절 국권회복과 일본정벌
제6장 일본정벌의 전략
제1절 외국공포증과 일시적 안일을 제거해야
제2절 해안선을 포기하자
제3절 지구전과 적의 허점 찌르기
제4절 왜국 정벌은 미국 식민지가 영국에 항거하듯이
제5절 왜국 정벌은 러시아가 나폴레옹에 항거하듯이
제6절 왜국 정벌은 보어인이 영국에 항거하듯이
제7절 왜국 정벌은 터키인이 희랍에 항거하듯이
제8절 왜국 정벌은 증국번(曾國藩)이 홍양(洪楊)을 평정하듯이
제7장 미국?러시아와 일본정벌
제1절 미?왜(美倭)의 관계
제2절 러?왜의 관계
제8장 일본 정벌과 대내(對內) 관계
제1절 거국일치의 가능
제2절 재해민 구제의 문제
제9장 왜구 평정
제1절 근세에 약자가 강자를 이긴 선례
제2절 근세 전쟁은 양국만 단독으로 싸울 수 없다
제3절 근세 전쟁은 제왕을 타도하는 도구
제4절 결론
부록1 왜인의 중국병탐 계획
부록2 왜군이 중국을 교란하는 분명한 증거
정왜론
제1장 왜인의 역사적 대륙침략 정책
왜인은 옛부터 중국문화의 훈도를 받아 겨우 야만의 세상에서 벗어났다. 때문에 왜인은 이제껏 문화적으로 중국에 종속되어 스스로 동이(東夷), 왜이(倭夷)라 자칭하며 중국을 천조(天朝)로 받들어왔다.
명(明) 신종(神宗) 때 소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라는 자가 왜의 정권을 틀어쥐더니 대륙침략의 야망을 품고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명조에서 병사를 파견하여 이를 저지하자 히데요시는 그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으나 병사를 물리치려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야 왜군은 겨우 철수하였다. 이것이 왜인의 대륙침략의 시초이다. 히데요시에 이어서 도쿠가와(德川)가 정권을 잡았고,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의 실패를 거울삼아 쇄국정책을 취하기 어언 삼백년간을 계속하나 명치유신(1867)에 이르러 형세가 일변한다. 당시 유신의 제원훈(諸元勳)들은 명조 주순수(朱舜水) 선생의 존왕양이(尊王攘夷) 학설에 훈도되거나 서양 각국의 침략주의의 영향을 받아 군국주의 사상이 왕성하였다.
유신 이래로는 본격적으로 정치를 개혁하고 군대를 확장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청조(淸朝)가 극히 부패해 있다는 것을 알고 소위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난다. 주창자는 사쓰마(薩摩) 군벌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 일파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날개가 충분히 자라지 않아 왜 조정에서도 수년 동안이나 동의해 주지 않았다. 사이고 타카모리 등은 자기의 주장이 실패하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하야한다. 그 뒤로 그들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소위 서남지역(西南之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뒤로 20년이 지난 명치 27년이 될 때까지 왜인은 정치적으로 궤도에 들어서고 군비(軍備)도 점점 충실해져 갔다. 청정(淸廷)은 그 때 여인이 정권을 틀어쥐고 있으면서 끊임없는 부패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래서 왜인은 감히 청조에 도전을 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본인이 번역한 일본 외무대신 미쓰 무네미쓰의 ?건건록(蹇蹇錄)?을 참조할 것. 지금은 ?일본의 중국침략 외교비사?란 이름으로 바뀜. 상무인서관 출판). 그 결과 그들은 청조를 협박하여 조선을 독립하게 하고 대만과 요동반도를 왜에 할양하게 한다. 왜는 이로써 대륙 침략을 위한 공고한 근거지가 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유연(幽燕)에 직행하여 청정(淸廷)을 입수하고 중국을 병탐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일본은 상하를 막론하고 좋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청천하늘에 벼락이 떨어졌다. 러시아가 자기들의 극동정책의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독일?불란서와 연합하여 간섭에 나선 것이다. 결국 왜인을 강박하여 요동반도를 토해내게 만들었고, 왜인은 이를 일생일대의 치욕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왜는 이로부터 와신상담하기 십년, 종국에 거대 러시아의 동삼성에 대한 야망을 깨트리고 동삼성의 남부를 장악하게 된다. 러시아의 수중으로부터 여순(旅順)?대련(大連)의 조차권을 양여 받게 되며, 또 장춘(長春)에서 대련까지의 철로 경영권을 양여 받게 되니 바로 현재의 남만철도(南滿鐵道) 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울러 왜는 청정을 협박하여 광산?산림 등 여러 가지 권리를 양여 받으며 또 안봉선(安奉線)의 부설을 요구한다. 청정이 허락하지 않자 왜는 강제적으로 안봉선 부설에 들어간다. 청국 정부는 이를 보고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이 후로 왜는 소위 그들이 말하는 ‘남만’을 참으로 적극적으로 경영하게 된다.
왜국의 제일 야심가 고토 신페이(后藤新平)를 남만철도 총재(總裁)로 삼아 매년 15만 명을 동삼성에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니, 그렇게 되면 이십년 후에는 이민자 수가 1,000만 명에 달하게 되어있었다. 일단 거동을 한 이상, 왜는 군대 및 철로수비대를 기본으로 하여 20만 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동삼성을 명실상부하게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여순?대련 조차지나 남만철도는 유효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왜인이 좀처럼 거처를 옮기려 하지 않아서 이민정책은 실패로 돌아간다.
일단 잡아두고 시간을 끌던 그들이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은 구주(歐洲) 전쟁이다. 열국이 동양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는 기회를 틈타 결국 왜는 청정에 최후통첩을 보내온 것이다. 소위 21조를 강요한 것인데, 그것은 여러 가지 특별 권리 획득은 말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도 여순?대련의 조차기간(원래는 25년)과 남만철도의 경영기간(원래는 36년)을 99년으로 연장한 것이다. 또한 왜인이 임의로 부설 중이던 안봉선 경영기간도 역시 99년으로 확정짓게 된다. 그들이 일단 잡아두고 시간을 끌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명약관화해 진 것이다.
이때부터 왜는 남만을 전심전력으로 경영하고 많은 지로(支路)들을 부설한다. 지로인 사조선(四?線 : 四平街에서 ?南까지), 조앙선(?昻線 : ?南에서 昻昻溪까지), 정통선(鄭通線 : 鄭家屯에서 通遼 즉 白音打拉까지) 같은 것은 모두 왜가 차관을 해주어 부설하게 된 것이다. 심해선(瀋海線 : 瀋陽에서 海龍까지)은 조앙선 부설 때 차관을 일본에서 해주었다는 대가로 중국에게 그 부설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지로들이 모두 남만철도의 영양선(營養線)이었던 것이다.
해운되는 화물은 모두 남만철도를 경유하여야만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때문에 남만철도의 영업은 대단한 번성을 누렸으니, 철도 운임비 한 항목만 보아도 12,000만 엔 이상이 되었다. 기타 광산의 총수입까지 합하면 왜가 얻는 액수는 매년 24,000만 엔이라는 엄청난 숫자에 이른다. 때문에 남만철로는 왜인의 남만침략의 대동맥이 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수익을 얻는 보고(寶庫)가 되었다. 왜인이 얼마나 의기양양했는지 상상만 해도 알만하다.
그런데 의외로 장작림(張作霖)이 왜인에 의해 폭사 당하자 동삼성이 오히려 중앙에 의해 통일되어가고, 동시에 타통선(打通線 : 打虎山에서 通遼까지)이 개통되고 금값이 폭등하고 은값이 하락하면서 남만철도의 수입도 대거 감소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침략정책에 위기를 느낀 왜인은 오늘과 같은 대모험을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2장 금번 왜화(倭禍)의 유래
제1절 중국이 통일되면 왜인은 침략의 기회를 잃게 된다
왜인의 중국에 대한 근본정책은 중국을 사분오열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중국이 외세에 대하여 저항할 능력이 없어졌을 때 중국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오늘은 갑(甲)을 돕고 을(乙)을 넘어뜨리고, 내일은 병(丙)을 돕고 갑(甲)을 넘어뜨리고, 그런 짓을 십여 년간이나 계속하며 중국을 영원히 통일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그것은 상당히 유효하여 왜인의 침략정책은 결국 실행 가능성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왜인의 기만적인 술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국이 점점 감지하게 된다. 혁명군이 북벌을 한 이래로는 추풍낙엽처럼 일체의 혁명반대 세력이 타도된다. 거두 장작림(張作霖)도 패배하여 도망가다가 왜인에 의하여 남만철로 변에서 폭사 당한다.
그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은 통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부친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사감이나 자기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중앙정부의 통일정책에 호응하게 된다. 왜는 사전에 몇 번 저지해 보려고도 하고 사후에도 몇 번 도발하여 보지만 장학량은 여기에 동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년에는 병대를 이끌고 입관(入關)하여 중앙정부를 도와 반동세력을 소탕하고 북방을 진무하였다. 올해는 또 독자적으로 왜군이 부식(扶植)하여 놓은 어용군벌 스이우싼(石友三)을 소탕하여 기타 반동세력으로 하여금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덕분에 중앙정부로 하여금 적화(赤禍) 평정에 전력할 수 있게 하여 중국통일을 눈앞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왜가 중국을 사분오열시켜 불난 집에서 도둑질을 하려던 정책과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었다.
중국의 통일은 중국의 존망(存亡)과 유관하며 왜의 흥망성쇠와 유관하다. 때문에 왜는 중국이 통일되기 전에 동삼성을 침탈하여야 그들의 대륙정책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으며 중국통일을 일보 직전에서 그르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계산으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또 다시 있을 수 없었다. 중국이 통일되려고 하는 정국, 이것이 왜 군벌들이 급히 동삼성을 병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제2절 길회(吉會)철도와 청진항(淸津港)은 일본 침략정책의 필수
왜가 대륙을 석권하려는 계획으로 대련(大連)과 청진(淸津) 그리고 남만선과 길회선을 함께 중시하였다. 이것을 실현하지 않으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길회선이 개통되지 않으면 청진항은 폐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때문에 왜인의 대륙정책의 성공여부는 길회선을 획득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길회선은 길림성(吉林省) 성성(省城)에서 조선의 회녕(會寧)까지의 전장 270마일의 철로를 말한다. 청 선통(宣統) 원년(1909)에 중국과 왜가 맺은 ‘도문강계(圖們江界)’ 제6조에 의하면 중국이 장차 길장선(吉長線)을 회녕까지 연장할 시는 길장선 규정대로 절반을 왜에서 차관을 얻기로 되어 있었다. 다만 언제 부설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국정부가 스스로 결정한 이후에 왜와 협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즉 이 조약은 비록 차관의 절반을 왜에서 얻기로 되어 있지만 언제 부설을 할 것인가 하는 권한은 완전히 중국에 달려 있었다. 만약 중국정부가 지금 부설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부설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왜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대륙정책의 성공여부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즉시 부설을 원하고 있었다. 중국은 시기가 적당치 않다고 부설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장작림이 왜인에 의하여 폭사된 후에, 왜는 전에 장작림이 살아있을 때 1년 내에 부설하기로 약속하였다고 하며 장학량과 교섭을 하였다. 장학량은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서 왜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래 왜인의 소위 만주철로 교섭은 길회철로가 주요 목적 중의 하나가 되었다. 길회철로로 인하여 중일 양국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하여 나라 사람들은 아직 자세히 모를 것이다. 다음에 잠깐 거기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지금 길회철로가 이미 부설되어 있다면 회녕(會寧)과 왜인의 현철로가 연결되어 조선 동해안의 청진항(淸津港)까지 관통될 것이다. 청진항에서는 다시 윤선(輪船)으로 왜국의 북부해안 쓰루가(敦賀)까지 갈 수 있고, 다시 쓰루가에서 철길을 이용하여 오사카(大阪)에 이를 수가 있다. 장춘(長春)에서 오사카까지를 계산하여 보면 육로 406 마일, 수로 475마일이고 시간은 약 51시간이 소요되게 된다. 이에 비해 길회철로가 부설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장충에서 대련을 거쳐 오사카에 도착하려면 육로535마일, 수로870마일이 되며 시간적으로는 92시간이 걸린다. 약 배가 걸린 셈이다. 또한 길회철로가 부설되면 경과하는 수로는 모두 일본해이기 때문에 동쪽은 쓰가루해협(津輕海峽), 서쪽은 쓰시마(對馬) 해협으로, 방어 면에서 약간의 조치만 있으면 된다. 외국함대가 함부로 난입할 수 없기 때문에 항로는 지극히 안전하며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절감이 된다. 이에 비하여 길회선이 부설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대련에서 오사카까지 가는데 반드시 외국해협을 경과하여야 하기 때문에 방어가 쉽지 않으며 시시 때때로 외국함대의 위협을 받을 우려가 있다.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다.
만약 길회선이 개통되면 왜인이 타국과 개전을 해서 왜해군이 타국에 의하여 격침당하더라도 왜인은 일본해를 통하여 동삼성에 물자를 운송하여 군수품과 식량을 공급할 수 있다. 아울러 다량의 육군을 북만(北滿)의 심장부에 운송하여 중국과 러시아를 위협할 수 있다.
즉 일본은 백전불패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 좋은 예를 독일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이 구라파전쟁 때 해협이 봉쇄당하자 보급노선이 끊겨 결국 패전할 수밖에 없었으니 가히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때문에 길회선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국방철로’이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치명철로(致命鐵路)’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필사적으로 탈취하려고 하고 중국이 필사적으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절대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상은 오직 군사적, 경제적으로만 살핀 것이다. 이 외에 길회선의 연선(沿線) 부근에는 풍부한 삼림이 자리 잡고 있어서 왜인에게 2백년간은 쓸 수 있는 목재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연도에는 대형 탄광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질량이 능히 석유를 추출할 수 있다. 목재와 석유는 모두 왜인이 가장 필요로 한 것이어서 매년 2억 엔 어치나 수입하고 있다. 만약 이 노선이 개통되면 무엇보다도 목재와 석유를 외국에 아쉬운 소리하며 수입할 필요가 없게 된다. 더구나 왜해군이 쓰는 석유는 평소 때는 타국에 아쉬운 소리를 하여 공급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일단 개전하면 외국은 석유공급을 중단하고 말 것이니, 그렇게 되면 왜의 해군은 폐물이 되고 만다. 때문에 이 길을 개통하여 석유를 자급자족하는 것은 경제문제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군사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이 길은 중동로(中東路)의 시베리아 철도와 병행하고 있으며 청진은 부동항(不凍港)이기 때문에 일단 개통만 되면 북만의 화물을 모두 이 선에 집중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중동로의 시베리아선 및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는 모두 쓸모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왜인의 침략정책으로 말한다면 길회선은 실로 부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문제이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를 크게 위협하기 때문에 부설을 원치 않고 있다. 따라서 왜인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유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효과가 없을 것이다. 요컨대 그 침략의 도구가 되는 길회철도를 완성하고자 하는 야심이야말로 이번 일본군벌이 동삼성을 점령하고자 하는 제2의 원인이 되었다.
* 추신 : 길회선은 이미 왜인이 부설을 시작하고 있다.
길회선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왜 군벌은 요녕?길림 두 성을 점령한 후 즉시 돈화(敦化)와 천보산(天寶山)에 군사를 파병하여 동서 양면에서 동시에 부설을 진행하고 있다. 예정은 3개월 내에 완성한다는 것이다. 9월 25일자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에 실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스기야마(杉山) 육군차관, 고이소(小磯) 군무국장, 나가타(永田) 군사과장 등 육군수뇌들은 24일 아침 참모본부에서 가나야(金谷) 참모총장과 함께 모임을 갖고 현안을 해결할 중요한 협의를 하였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먼저 철로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목하 다른 현안문제는 교섭할 상대가 있지만 철로문제는 교섭할 상대가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철로를 부설하여 해결하려는 것이다. 군대는 먼저 국방계획상 가장 중요한 길회철도를 부설할 모양이다.
이로써 볼 때, 왜 군벌은 이미 길회선의 부설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철로도 부설하려하고 있다. 길회선이 침략정책에서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부설하려는 것뿐이다. 만약 시간과 상황이 허락한다면 다른 각 선도 부설을 시작할 것이다. 다만 길회선이 완성되면 중국과 러시아가 받는 타격은 계산하기조차 어렵다. 그 관계의 중요성을 알만하다.
제3절 동삼성의 독점을 위하여 중국 자영의 철로?항구를 허락하지 않음
남만철도는 왜인의 중국침략을 위한 교통의 대동맥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교란시키는 재원이다. 마적?토비 등을 매수하여 질서를 교란하고, 군벌?정객을 원조하여 통일을 방해하고, 중국인?조선인 간신배들을 매수하여 각종 비밀조사를 행하는 침략에 필요한 제비용이 모두 남만철도로부터 지급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기네 국내 정당에 대한 당비지원도 남만철로의 수입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남만의 수입은 침략정책과 관계가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군벌정당의 생명 줄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작년에는 세계경제시장의 대공황으로 동북지방의 산물을 다른 나라에 수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남만 철도의 수입도 300만 엔 감소하였다. 기타 광산이나 부두의 제 수입까지 합하면 약 5,100만 엔이 감소한 것이다. 전에는 모든 정당한 지출 및 부당한 지출(마적 매수비 등)을 제외하고도 순이익이 4,500만 엔에 달하였으나 작년에는 순이익이 이미 2,100만 엔으로 줄어든 것이다.
남만철도 영업수지의 연도별 감소액
연 차 수 입 지 출 손 익
서기 1907년도 12,543,116엔 10,526,531엔 2,016,585엔
1926년도 215,614,944 181,457,060 34,157,884
1927년도 230,558,524 194,284,201 36,274,323
1928년도 240,427,752 197,874,891 44,255,286
1929년도 240,998,062 195,492,205 45,505,857
1930년도 188,104,000 166,431,000 21,673,000
어쩌면 세계 경제불황의 분위기에서 이런 정도의 수입 감소는 필연의 추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군벌과 정객은 자기 생명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중국철도가 남만철도를 포위한다고 허풍을 떨면서 중국의 각 철도 영업을 금지해야 한다고 한다.
민국 15년(1926)에 장작림이 일찍이 운수의 편리를 위하여 타호산(打虎山)에서 통료(通遼)까지의 타통선(打通線)을 부설하고, 통료에서 다시 정통선(鄭通線)?정조선(鄭?線)?조앙선(?昻線)을 연결하여 흑룡강성 치치할(齊齊哈爾)에 이르게 하였다. 이 철길에 연선된 사람과 화물이 이 철길을 이용하는 것은 별개의 일로 남만철도와는 원래 관계가 없다. 타통선이 완전히 개통된 것은 민국 16년(1927)인데, 민국 17-18년의 2년간은 남만철도의 수입이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민국 19년(1930)부터 세계 경제공황이 발생하여 남만철로의 수입이 약간 감소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타통선의 개통과 남만철로는 추호의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인이 위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중국의 문호를 폐쇄하고 동삼성을 독점하려는 야심을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또 중국이 호로도(葫蘆島) 항구를 수축(修築)하자 왜인은 대련의 번영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각종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자기 나라 사람이 듣고 놀라게 하여 침략음모에 일조를 하게 하였다. 실은 호로도 항구를 수축하는 것은 요녕성 서부와 열하(熱河)의 화물을 운반하는 것으로 결코 대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타통선이 남만철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음과 같은 원리이다.
알고 보면, 왜 군벌은 동삼성을 독점하기 위해서 그 문호를 폐쇄하고 중국 자영의 철로나 항구를 순조롭게 운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남만철도와 대련항구에 대하여 오늘과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제4절 왜 군벌들의 실업(失業)의 두려움
왜인은 바다를 나라로 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해군력은 상당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적인 지위가 있는 것도 상당한 이유가 있다. 그런데 대륙을 침략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으면서부터 육군군벌이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육군이 막대한 숫자를 차지하게 되면서부터 중국과 러시아를 위협하게 되니 중국과 러시아가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육군의 증가로 말미암아 왜인들의 부담도 크게 가중된다. 최근 수년래로 왜의 궁핍한 재정으로는 육군을 거의 유지할 수 없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때문에 민국 18년(1929) 7월, 하마구치(濱口) 내각이 성립한 이래 다음과 같은 구호를 정책으로 내걸었다.
“국방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군비(軍備)를 정리하도록 노력한다.”
그 때 우가키 가즈나리(宇垣一成)가 그 정강을 찬성하였다는 인연 때문에 하마구치 내각의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사실 국방에 필요한 왜의 육군은 상비군 3만 명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외국 육군의 공격을 받을 염려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방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군비를 정리하도록 노력한다는 정강은 실로 육군군벌들이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강의 소위 ‘노력’이 실행될 경우 현재 육군의 6-7할을 감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 군벌들은 하마구치의 군축정책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품고 각종 방해를 서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가키 육군상은 결국 칭병청가(稱病請假)하고 오랫동안 출근하지 못하는 사태가 온다. 그 뒤로 하마구치가 중상을 입고 사직하자 동시에 우가키도 하야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자는 미나미 지로(南次郞)였다. 미나미 지로 는 중국에서 오래 살며〔민국 9년에 주천진(駐天津) 왜군 사령관을 하였다. 일찍이 서수쟁(徐樹錚)을 북경에서 빼낸 것으로 유명하다〕, 뱃속 가득히 침략의 야욕을 품었던 자이다. 또한 왜의 외교?재정?경제에 대하여 전혀 이해가 없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민정당(民政黨)의 군축정책을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사비용의 증가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여기에 대하여 대단히 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론은 군벌들에게 대단히 불리했다. 더군다나 왜의 재정은 근래 대단히 좋지 않아 군비(軍費)를 대폭 감소하지 않으면 올 예산을 짤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내년도 예산도 편성할 수 없게 된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명년 2월에는 세계 각국이 제네바에서 군축회의를 개최하기 때문에, 어떻든 왜의 방대한 육군은 대폭 감소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군벌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자기들에게 절대 불리한 내외정세를 관망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전쟁을 일으켜 자기들의 지위를 확보하는 길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육군을 감축하면 사병들이야 징병제이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장교들은 일시에 실업자가 되고 마는 것이니 어떻게 해서라도 군축은 막아야 했다. 더구나 전쟁이 시작되기만 하면 장교의 수입은 세 배는 뛰어오르기 때문에 군축 실업과 비교해 볼 때 실로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군벌들은 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너나없이 중국을 침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정부가 중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다는 것은 현재의 국제관계나 재정상황으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군벌들은 오직 ‘자유행동’이라는 한 길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정부로 하여금 하는 수없이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성공하면 자기들의 현재의 지위를 견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일보하여 군벌들의 정치적 지위까지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불행히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군벌들이 받는 화는 오직 실업자가 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앉아서 실업자가 되는 것보다는 죽음을 무릅쓰고 활로를 한 번 뚫어보는 것이다. 왜인들도 이번 행동을 자위(自衛)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군벌들이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도 한다. 실은 후자 즉, 군벌들의 실업에 대한 공포야 말로 이번 침략의 중대한 원인이 되고 있다.
제5절 점령음모의 온양(?釀)
이상과 같은 원인으로 말미암아 왜 군벌은 중국을 향해 도전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왜 군벌은 각종 도발적인 사건들을 날조하고 있었다. 예컨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 같은 것은 왜 군벌이 이를 계기로 사단을 일으키려고 작정했던 것인데 중국이 너무나 잘 대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 예이다. 계속해서 일어난 조선에서의 화교 학살사건 같은 것도 왜군벌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국민이 보복행위에 나설 것이고 그렇게만 되면 이를 구실로 본격적으로 도발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중국이 문명적으로 대처하는 바람에 왜 군벌은 크게 실망한다.
최근에는 또 나카무라(中村) 사건을 계기로 도발하려 하였다. 지난 7월중에 왜 군벌은 육군대위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郞)가 중국군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일본 외무성에서는 군벌들이 이를 구실로 격동된 분위기가 조성될까봐 각신문사에 이를 기사화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금령(禁令)을 내렸다. 일본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외무성의 금지명령에 대하여 대단히 분개한다. 때문에 8월 4일 사단장 회의에서 이를 공식발표하고 모든 군인들을 격동시켜 그들의 중국에 대한 계획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러한 논조의 분위기만 조성되면 틀림없이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주에서도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각신문은 외무성의 금령을 어기고 공개적으로 군벌을 선전하고 왜국민을 격동시킨다. 군벌들의 중국 ‘응징’론이 일시에 기세를 탄 것이다. 스즈키(鈴木) 소장은 공개적으로 만몽문제(滿蒙問題)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군비축소는 불가하다고 성명을 발표한다. 다테카와(建川) 소장은 다카다(高田) 연설에서 나카무라 사건은 왜의 국치라고 선전한다. 제9사단 사령부는 군용기를 이용하여 가나자와시(金澤市)에 전단을 살포한다. 국민들은 분기하라! 만몽의 특수권리를 보호하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몽을 점령해야 한다는 의론이 전국에 만연하게 되었다.
왜 군인들은 대련의 가부키자(歌舞技坐: 일본극을 연출하는 극장)에서 군중집회를 개최한다. 동원된 군중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 때까지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본 적이 없었다. 왜 군벌은 불꽃 튀기는 기염을 토하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만든다. 거기에 정우회(政友會) 요인 모리카쿠(森恪) 같은 자는 새로 동삼성을 시찰하고 귀국하여 공개성명하기를, 왜인의 특수권익은 위험에 처해 있다, 지금 국력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은 기득권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가세한다.
보고를 접수한 정우회는 이를 정강으로 삼고 주전파로 돌변한다. 그래서 외교문제는 정쟁(政爭)의 도구로 이용되게 된다. 민정당 의원중 주전파들은 이 문제가 정우회에 의하여 이용당하는 것을 보고 정권이 정우회에 탈취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더 열심히 대화(對華) 강경론을 주창한다. 와카쓰키(若槻) 수상 같은 사람도 민정당 강경파를 지지하며 실력으로 만몽의 특수이익을 보호해야 한다고 성명한다〔혹카이도(北海道) 민정당 대회에서의 연설〕. 활활 타는 불길이 결국 요원에 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식자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시데하라(幣原) 외상은 국제정세의 불리함을 감안하여 여전히 주전론에 찬동을 하지 못하고 나카무라 사건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한다. 중국 쪽에서는 왜 군벌의 행위가 이치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으므로 세 차례나 조사단을 파견하여 왜군벌과 만족할 만한 해결을 보려고 하였다. 형세가 점점 완화되어 가자 왜주재 중국공사는 공공연히 성명을 발표하여, 왜 군벌이 장차 사단을 일으킬 것이라는 심상찮은 풍설을 부인하였다. 왜 군벌의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게 사건이 외교적으로 해결되어버리면 침략의 좋은 구실을 잃을 뿐만 아니라 언제 또다시 그런 좋은 구실을 잡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중국군대가 남만철도를 파괴하였다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이유가 하나 잡히자 공공연히 갑자기 요녕?길림의 두 성을 점령해 버리고 만다. 어떻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고 또 그것은 필연의 추세가 되었으니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제3장 왜인(倭人)의 만몽(滿蒙)을 독립시키고자 하는 음모
제1절 음모의역사
왜가 만몽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 제1보가 바로 만몽을 중국에서 떼어내 독립시키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조선을 멸망시켰던 것처럼 만몽도 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야심을 대담하게 표명한 것으로는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의 ?대화관견(對華管見)?이라는 소책자를 들 수 있다.
가와시마는 대륙낭인의 수령이며 참모본부의 책사(策士)로서 수십 년을 하루같이 만몽을 병탐하기 위한 조사?연구?획책?실행에 전심하였던 자이다. 민국의 제1차 혁명 초두에 가와시마는 그 대계획을 실행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 대화관견(對華管見)?이라는 책자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 책자로 당국에 진정하고 군벌의 찬동을 얻어서 일에 착수하려 하였다. 그러나 외교당국의 입장에서는 아직 시기가 성숙치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구나 왜는 새로 4개국 은행단에 가입하여야 했고, 영미의 공채를 모집하여 다시 이를 중국에 차관해 주어야만 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패하면 도리어 세계 각국의 혐오를 사기 쉬우며 은행단 가입도 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직접행동은 절대 반대하고 있었다. 이에 가와시마는 크게 분개하고 그 계획서를 비밀리에 공포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음에 그 책자의 중요한 내용을 열거해 본다.
(상략) 수단을 강구하여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만몽의 일부를 떼어서 우리의 영토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아주 명쾌하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주위의 환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주위의 환경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 제국에 해로운 작용을 하는 것은 물론 열국이 이를 모방하게 되면 시비를 가리기가 어렵게 된다. 지금 만몽인의 머리 속에는 독립사상이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다. 우리 제국에서는 이들을 인도하고 도와주어서 시기가 무르익으면 표면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행동한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본토에서 분리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 일본세력 하에 놓는 것이다.
먼저 비밀리에 원조를 하여 하나의 무명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 보호국은 중국 본토와는 반드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고 더욱더 우리 제국의 힘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력을 이용하여 점차 그 정권을 인수하고 그 이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몇 년 되지 않아서 제국의 실력은 어렵지 않게 남만과 내몽에서 확고부동한 근거를 얻게 된다. 이것이 힘을 들이지 않고 비용도 들리지 않고 피명취실(避名取實)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여 훗날 만몽지대를 우리 국토로 완전히 편입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는 조선을 병탐하던 수법을 쓰는데, 그 때는 조선의 경우보다 쉬웠으면 쉬웠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 독립을 돕고, 은혜도 베풀고 위엄도 부리면서 회유하고 견제하면서 적당히 조종하면 만몽인이 순종할 것은 물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다. 그 나라를 취하려면 먼저 인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천고불변의 원리이며 세계 제국들이 발전하던 금과옥조이다. 우리 자손들도 명심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나의 이상대로 먼저 만몽을 독립시키려면 다음 몇 가지 요소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우리 제국과 만몽의 주요 인사들과 사전에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여 은연중에 튼튼한 결탁을 맺어놔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완전히 우리의 보호를 신뢰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 만몽의 내정과 외교는 제국의 지시에 따르게 하고, 문무 요로에는 우리나라 사람을 적당한 명의로 배치하여 실권을 쥐게 한다.
셋째: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만몽의 수뇌들로 하여금 완전히 우리를 믿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손발과 같은 사람을 골라야만 자연스럽게 사람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이하 생략)(부록1 참조).
이상이 왜인의 만몽 병탐의 정책적 골격이다. 당시 가와시마가 심중에 두고 있는 만몽국의 수뇌는 청실(淸室)의 잔당 숙친왕(肅親王) 선기(善耆)였다〔비본(秘本)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 저 ‘숙친왕전’ 참조〕. 제1차 혁명 때는 국제관계에 얽혀 가와시마의 만몽 독립정책은 성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민국 5년(1916) 구주 각국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을 때 왜인은 그들의 욕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왜 정부의 소개로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남작을 통하여 100만 엔을 선기(善耆)에게 차관하여 준다. 왜 정부는 이를 계기로 대련 조차지에 근왕군(勤王軍)을 모집하게 하고, 왜군이 그 근왕군을 호송한다는 명목으로 동삼성에 들어온다. 그래서 정가둔(鄭家屯) 사건이 벌어지니 이것은 세인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에 왜 정부는 아무런 실력도 없는 선기를 이용한 것보다는 만주의 실력자 장작림(張作霖)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책을 변경하게 되니, 이것은 고토 신페이(后藤新平) 남작의 계획이다. 고토가 오쿠마(大?) 내각의 정가둔 사건의 실패를 추궁하는 비밀 소책자에서 한 말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상략) 장작림은 만주에서 일종의 특별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관력(官歷)이 없다. 중앙정부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장작림은 만주를 떠나면 아무런 지위가 없다. 때문에 만주는 그의 유일한 지반인 것이다. 그런데 장작림은 오직 권세욕만 가득 찬 자로서 다른 어떤 경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는 만주에서의 절대적인 세력이 된 일본을 잘 알고 있고, 일본을 등지면 불리하고 일본에 순종해야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특별한 지위를 이용하고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장작림을 이용한다면 만주의 생사여탈권은 우리가 쥐는 것이다. 장작림 한 사람 뿐만 아니라 만주 자체를 일본은 이러한 세력을 이용하여 종횡무진할 수 있다.(하략)
이것이 바로 고토신페이(后藤新平)가 주장하는, 선기(善耆)를 버리고 실력자 장작림을 이용하여 만몽 병탐의 야욕을 달성하고자 하는 음모이다. 얼마 되지 않아 오쿠마(大?) 내각이 와해되고 데라우치(寺內) 내각이 뒤를 이었으며, 고토신페이(后藤新平)는 내무대신(內務大臣)에서 외무대신으로 자리를 옮겨 장작림을 이용하고자 하는 정책을 착착 진행한다. 그래서 장작림의 세력은 날로 증가하였으니 그것은 왜인의 음모대로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작림이 비록 왜인에 의하여 난육(卵育)되지만 그가 일단 실력을 조성한 후에는 왜인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몽을 병탐하고자 하는 음모는 오히려 사사건건 제약을 받는다. 왜인은 이를 죽도록 미워한 나머지 17년(1928) 6월 드디어 황고둔(皇姑屯)에서 그를 폭사시키기에 이른다.
그 때는 벌써 왜인이 괴뢰로 삼으려고 했던 선기도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한 푸이(溥儀)를 만몽 독립국의 왕으로 삼으려한다. 장작림 사건과 동시에 이미 왜인들은 부의를 천진의 왜조계에서 빼내온다. 명목은 혁명군의 난을 피하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부의는 대련으로 호송되어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어떤 생각에 머무르게 된다. 그것은 왜인에 의하여 이용당할 위험성이 아주 크다는 것이었다. 그는 임기응변으로 꾀를 생각해 내서 기차를 타지 않고 다시 천진의 왜조계로 돌아와 버린다. 왜인은 이때까지만 해도 장작림의 죽음을 명료하게 밝힐 수 없었으며 공공연한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만몽 독립의 음모는 일단 실현될 수가 없었다.
그 후 장쉐량(張學良)이 그의 부친을 대신하여 동북 4성을 통치하게 되자 왜인은 적극적으로 그를 중앙과 격리시켜 자기 마음대로 그의 목줄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장학량은 부친의 참사를 애통해 하고 있었고 왜의 음모를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인의 사활을 건 간섭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중앙정부에 합류한다. 드디어 왜인은 20년 동안이나 계획했던, 만몽을 중국에서 독립시킨 후에 병탐하려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것이 이번 무력점령까지 가져오게 된 동기이다.
제2절 금번 독립음모의 경과
왜인의 이번 요녕?길림 점령은 물론 영구히 점령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국제연맹과 미국이 간섭에 나섰고 러시아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으로 이미 세상의 주목거리가 되었다. 어떻던 왜의 원래 계획은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 가장 편리한 방법이 바로 동북 각성과 몽고 각부(各部)를 독립시키고 왜인이 뒤에서 조종한다. 그리고는 몇 년 지나서 조선을 병탐했던 것처럼 그것을 병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와시마 나니와(川島浪速)가 말하는 소위 명목을 피하고 실리를 취하는 방법이다. 그 때문에 왜 군벌은 계속하여 이 일을 전력 추진하였으며 왜 신문기관이나 통신사?연합사 등도 적극적으로 이 일을 선전하였다.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동삼성을 왜가 점령하고 자치제를 선포한 후 독립운동이 있으면 헌법을 제정하고 신정부를 수립한다. 이 운동을 달성하기 위한 두 가지 방안이 있다. (1) 동북 4성 및 몽고를 중국본토에서 분리시켜 독립국을 조직한다. 청년독립당을 시켜 군장(軍長)을 타도하고 민족자결의 목표를 실현한다. (2) 동북당국을 대신하여 만몽을 장악하되 3가지 길이 있다. 갑: 부의(溥儀)를 옹립하여 제제(帝制)를 회복한다. 을: 장모(張某)를 옹립한다. 병: 장쫑창(張宗昌)을 옹립한다. 이상 운동은 이미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추세이다.
둘째, 만몽 유력자들로 하여금 만몽 독립계획을 세우게 하고 국호를 ‘중화(中和)’라 하되, 이미 기초(起草)되어 있는 헌법을 2-3일 내에 공포한다.
셋째, 현재 요녕성 독립을 주장하는 중국측 유력자를 시켜 ‘요녕성 시국해결회’의 명의로 장지에스(蔣介石)?장쉐량(張學良) 두 사람 앞으로 전문을 띄우되, 국민당 정부의 무력정치를 부인하고 국민정부와 관계를 끊고 새 정부를 만드는 서약을 하게한다.
넷째, 웬진카이(袁金鎧) 등 민간인 유력자들이 조직한 ‘유지회(維持會)’를 이용하여 동삼성 신정권의 방침을 협의하되 다음과 같이 결의하게 한다. (1) 신정권의 기초는 동북4성 전체 민중에 있다. (2) 신정권의 본체는 민의에 부합되는 인물이 조직하고 모든 정치체제도 그가 결정한다. (3) 인물천거나 정체(政體) 문제는 선거에 의해 뽑힌 위원들이 결정한다. (4) 제한된 동북4성만 중국본토에서 탈퇴하여 독립을 선포한다.
다섯째, 길림성 대리주석 시차(熙洽)는 26일 길림성 신정부 조직조례 10조를 선포하였다. 거기에는 길림성장(吉林省長) 이라는 관직을 두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신정부는 이미 위원제를 폐지하고, 장관이 군정?민정 및 지방감독권 등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하는 바로는 하얼빈이 장징후이(張景惠)에 의하여 독립을 선포했다고 하고, 흑룡강성도 벌써 독립을 선포했다고 하며, 또 후룬베이얼(呼倫貝爾) 독립당 수령 꾸오따오푸(郭道甫)가 이미 왜와 상의하여 독립했다고도 한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알고 보면, 실은 왜 군벌들의 이와 같은 음모를 그들의 통신기관을 통하여 세계에 선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초고를 쓸 때까지, 오직 길림성에서 시차(熙洽)만이 왜군벌의 총칼의 위협에 의하여 독립성정부를 조직했을 뿐이다. 시차가 취임할 때 왜군경 사령 쓰보이(坪井)의 도장을 받았다고 하니 협박에 의하여 이루어진 소치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기타 각지의 왜인의 음모는 현재까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그 외 협박과 회유에 의하여 한 둘 후안무치한 무리들의 예를 찾아볼 수 있으나 모두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독립음모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위험한 짓이니 절대 경시할 수 없다.
길림의 민중은 왜군의 강박에 의하여 시차가 독립을 하자 대표를 변장시켜 천진까지 가서 중앙에 전문을 띄웠다. 여기 천진으로부터 장(蔣) 총사령에게 도착한 전문의 내용을 보면 왜군의 내정간섭의 전반을 알 수 있다.
장(蔣) 총사령관 각하! 일본은 우리의 재난을 틈타 진군하여 여러 번 동북의 요지를 점거하더니 9월 양일(?日: 23일)에는 길림성 대리주석 시차를 무력으로 협박하여 길림 성정부를 조직하게 하였습니다. 장관 공서(公署)를 설치하고 시차를 장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다시 유일(有日: 25일)에는 성정부내 성성(省城) 각 기관의 법단수령회의(法團首領會議)를 무력으로 감시하고 개조(改組)를 강박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서 길림성 장관공서가 협박을 받아 성립되었습니다. 길림이 우리나라 영토임을 감안하여 볼 때, 정부조직권은 마땅히 중앙정부 소관입니다. 법단기관은 의결권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의 소위 개조는 순전히 일군의 폭력과 협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길림의 민중이 승인한 바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군사 점령 하에서 모든 전신국이 통제를 받고 서신이 검열을 받아 사정을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각계 동지들이 특별히 저를 개명 변장시켜 밖으로 빼내준 덕분에 성도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이곳 천진까지 와서 전보로 일본의 내정간섭 상황을 천명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편리를 위하여 만든 소위 장관 공서는 불법적으로 탄생했으니 일체의 행위는 물론 무효입니다. 지금 동북지방의 민중들은 고압적인 폭력 하에서 활동할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국군이 하루빨리 진군하여 화근을 뽑아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진군만 해주시면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호응할 것입니다. 학수고대하며 명령을 기다립니다.
길림 민중대표 후티깐(胡體乾)? 장쑹니엔(姜松年)
제3절 독립음모와 상해신보(上海申報)
왜인이 만몽을 독립시킨 후 자기의 소유로 하려는 것은 20여년에 걸친 일관된 정책이다. 무릇 중국인이라면 ‘만몽독립’ 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왜인의 음모를 연상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은 매우 값있는 것이다. 왜가 조선을 병탐할 때 바로 먼저 중국에서 때어내 독립시킨 후 목적을 달성하였다. 3년 전 왜인이 장학량의 중앙합류를 그처럼 저지하였던 것도 그 의도가 분명하다. 아무리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중국인일지라도 이 3년 전의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개 범부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자칭 중국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상해신보가 이런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가. 그런데도 9월 27일자에 상해신보가 대서특필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각국의 오해를 살까 심히 두려워 함”
“각 방면의 정치적 교섭을 사절”
동경(東京)
최근 소식. 몽고 각 단체는 심양(瀋陽)의 일군 총사령 및 일영사를 방문하고 후룬베이얼의 지위협정에 관한 협상을 원했다. 미나미(南) 육군상은 총사령에게 어떤 군관, 어떤 몽고인과도 독립 건에 관하여 협상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외국의 오해를 살까 두려워서 이다.(26일 로이타 통신)
동경(東京)
신문보도에 의하면 화인(華人) 대표단은 웬진카이(袁金鎧)를 수령으로 하여 관동사령관 혼조(本莊)를 방문하여 장학량을 타도하고 만주독립국을 건설해 달라고 부탁하다. 그러나 소식통에 의하면 혼조는 이미 중국내정에 간여할 수 없다고 이를 사절했다고 한다.(26일 로이타 통신)
이상은 상해신보를 한 자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긴 것이다. 우리가 보건데 이는 완전히 왜인의 음모를 변호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의의도 찾아볼 수 없다. 왜구의 창궐에 대하여 거국적으로 비분강개하고 있는 이 때에 중국 제일의 신문이라고 자칭하고 있는 상해신보가 왜인의 음모를 위하여 아낌없는 변호를 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진실로 그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신보는 자기변호를 하기를, “이는 로이터통신의 뉴스로서 우리는 다만 그것을 인용했을 뿐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동경에서 타전되는 로이터 통신은 왜인 연합사와 합작한 것인데 연합사는 바로 왜 정부기관인 것이다. 때문에 동경발 로이터 통신은 왜정부의 선전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전신을 접수한 상해방면의 영국인은 이를 가감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상해신보는 사실 확인이 불분명할 때는 신문에 등제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고도 어찌 여론을 주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소식을 전한 것이 왜인의 음모를 변호했다는 것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은 싣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으며 설사 싣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주석을 달았어야 했다. 아니면 표제에 회의적인 의미를 담는 의문부호정도는 달았어야 한다. 그러나 상해신보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일본은 각국의 오해를 살까 심히 두려워 함” “각 방면의 정치적 교섭을 사절” 운운하여 정면에서 왜를 변호하고 있다. 선의로 말한다 해도 이는 완전히 지식의 파산인 것이니 다시 말하면 왜인에게 매수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여론을 주도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마땅히 폐쇄하여야 할 대상이며, 뒤에서 말한 매국행위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 죄는 더욱 무겁게 된다.
상해신보는 10여 년 전에 왜인 오카다(岡田)의 명의로 상해 왜영사관에서 입안(立案)되었던 신문이다. 처음부터 왜기(倭旗)를 내건 것과 마찬가지인데 지금이라고 설마 그들과 관계를 완전히 끊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 내막을 알 길이 없다. 상해신보 책임자가 성명을 발표해 주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전 국민은 이 신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제4장 왜인이 절대 승전(勝戰)할 수 없는 이유
지금 왜인은 대병력으로 요녕?길림을 점령하고 철수하려 들지 않을 뿐 아니라 그네들이 설립한 소위 독립정부란 것을 적극 보호하고 있다. 중국이 통일을 원하고 종전의 상태를 회복하려면 어차피 왜군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중국이 무력으로 해결하겠다는 결심이 없는 한 실지회복은 어렵다. 그런데 지금 당장 중국이 만부득이 하여 왜와 개전을 하였을 때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참말로 알고 싶은 대목이다. 나는 여기서 대담하게 말할 수 있다. 왜인의 이번 행동은 완전히 그들 군벌들의 투기행각일 따름으로서 전승할 가능성은 추호도 없다고.
다만 우리 국민들의 결심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제 나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여 우리 국민들에게 망설이지 말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제1절 외교상의 이유
왜인은 전에 중국을 이긴 적이 있고 러시아를 이긴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승리가 어떻게 하여 얻어진 것이었던가? 알고 보면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고 외교상의 승리였던 것이다.
중?왜(中倭) 전쟁 때만 해도 그렇다. 조선에서 사단이 일어나자 미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외교정책은 처음은 피동적 입장이었고 오직 군사적으로만 주동적이었다. 때문에 왜인들은 중국이 먼저 출병하기를 유인하였다. 중국이 출병하자 때를 기다리고 있던 왜병은 대거 출병을 한다. 세계 열국에게는 허리를 굽히고 후한 예우를 하며 중?왜 사건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로 비록 삼국간섭을 초래하긴 하였으나 그것은 왜가 과대한 욕심을 부렸기 때문에 초래한 결과였다. 그래서 강화회의에서는 왜인에게 오직 대만(臺灣)만을 취하게 하였는데 그 대신 요동반도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삼국간섭이 별 사고 없이 끝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조금이라도 역사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러?왜 전쟁 때는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가 먼저 영국과 동맹을 맺고 다시 미국과 결탁하여 우방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때문에 결국 러?왜 전쟁에서 왜는 외교상으로 영미의 원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큰 원조를 받았지만 만약 루즈벨트 대통령의 강화권유를 놓쳤더라면 어쩌면 패전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것은 왜인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오늘 날 왜인의 외교상의 지위는 어떠한가? 그들의 행동은 국제연맹 협약, 워싱턴 9개국 협약 및 반전공약 등에 위배되기 때문에 국제연맹 및 미국의 간섭을 초래하였다. 세계가 아무리 크다고 하여도 왜군의 행동에 대하여 동정을 표하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근대 국제관계가 성립한 이래로 양국의 분쟁은 처음부터 시비가 분명하여 왜인이 이처럼 전 세계의 공격을 받은 적도 없었다. 비록 왜인이 국제연맹의 간섭을 거절하고 스스로 국제연맹에 철병을 약속했지만, 국제연맹에서는 10월 14일 이전에 철병하고 9월 18일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라고 한정하였다. 만약 왜가 감히 이를 위배한다면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국제연맹에서도 그 존엄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진일보한 방법을 취할 것이다. 지금 만약 국제연맹이 왜인에 대하여 무력사용을 하지 않는다하여도, 국제연맹규약 제16조에 근거하여 경제상의 제재를 취할 수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음에 국련 규약 제16조 제1항의 전반부를 인용해 본다.
제12조(이 번 중일사건에 적용되는 조문) 제13조 혹은 제15조의 규정을 위반하거나 전쟁에 호소하는 연맹국은 기타 전체 연맹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인정한다. 기타 전체 연맹국은 이 위약국에 대하여 응당 모든 통상과 금융상의 관계를 단절하며 본 국민과 위약국 국민과의 왕래를 금지시킨다.(하략)(본 조약 제2항은 군사적 제재를 규정하고 있다)
왜인의 이번 행동이 최소한 이 조항에 해당한다는 것은 추호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왜인은 원시상태의 고립상태로 환원되었다. 다음에는 지금처럼 복잡한 경제상황하에서 왜인이 배겨낼 수 있는지 알아보자.
미국과 러시아는 비록 연맹국은 아니지만, 미국은 이미 국제연맹의 결의를 받아들이고 반전공약 및 워싱턴 9개국협약에 근거하여 단독으로 간섭에 나섰다. 미국이 최소한 연맹 각국과 보조를 함께 할 것이란 것은 당연하다. 러시아가 왜의 행동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있으며 그들 각 신문들은 어떤 나라보다도 왜를 맹공격하고 있다. 듣건데 카라한은 중국대표 모더후이(莫德惠)에 대하여 극진한 예우를 하였으며, 왜인이 러?왜가 양해하였다고 선전하는 설에 대하여 대단히 분개하였다고 한다.
왜인은 이제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데 그래도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까? 세계는 왜인의 세계가 되게 편리하게 되어있지 않다. 더구나 왜인의 진의는, 먼저 만몽을 병탐하고 그 만몽의 자원으로 미?러를 대항하고자 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바보가 아니다. 왜가 여유만만하게 만몽을 병탐하고 자기에게 해가 오게 놔두지는 결코 않을 것이다. 중국과 왜가 전쟁이 발발하면 반드시 왜를 견제하여 후환을 없앨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오늘의 국제관계로 볼 때 어떤 상황에서도 왜인의 착상은 성공할 확률이 전혀 없다.
제2절 재정상의 이유
현대전은 완전히 금전의 전쟁이다. 구라파전쟁에 소요되는 자금 때문에 구주 각국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민국 7년(1918)에 왜인이 시베리아에 출병할 때 소요되는 시간은 약 2년이었으며 동원된 병력은 많을 때 7개 사단, 적을 때 2개 사단이었다. 그 때 소요되는 비용은 7억 엔 이상이었으니 1개 사단 당 매년 약 1억 엔이 소요된 셈이다. 그런데 왜와 중국이 개전한다고 가정해 보면 100개 사단은 출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매년 군비가 100억 엔이 소요된다. 만약 전쟁이 2년간 계속된다면 군비만 200억 엔이 소요될 것이니 왜인이 과연 재정적으로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는가?
중?왜(中倭)전쟁은 전장의 범위가 아주 좁고 동원된 병력도 10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시간도 7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인은 군비 때문에 재정적으로 무척 옹색하였다. 러? 왜 전쟁 때는 중?왜 전쟁에서 받은 배상금으로 예비금을 삼았기 때문에 첫 수개월 동안은 전 국력을 소진하여서 겨우 지탱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완전히 영미시장에서 공모한 공채에 의지하여 그 전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영미가 재정상의 원조를 하지 않았다면 왜인은 결코 버티지 못했다는 것은 왜인뿐만 아니라 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지금은 전쟁의 규모가 더 크다. 전선의 길이도 러?왜 전쟁 때보다 십 배 이상이나 되며 왜 인은 이제 예비금도 없다. 더구나 외국의 원조를 얻을 아무런 희망도 없다. 어떻게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왜가 절대 승리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왜인은 지금 경제공황을 맞아 산업은 시들어가고 국고수입은 모두 ‘적자’를 보고 있다. 거국적으로 소란이 일고 있는 소위 ‘적자’는 바로 국고수입이 딸리는 숫자를 말한다. 정부에서는 이 적자를 보충하기 위하여 성한 부분이 없다. 내년도 예산은 아직 착수도 못했는데 국고의 잉여금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
구라파전쟁 이래로 영미제국에게 맡겼던 예비금마저 전부 소비하여 지금은 역으로 현금을 수출하여서 겨우 수입초과에 수요되는 현금을 보충하고 왜화페의 환가격을 보유하고 있다. 거기에 국채(國債)까지 합하면 벌써 적자는 68억 엔 이상이다(대장성(大藏省)증권, 미곡증권, 차관을 합한 것). 매년 지급하는 이자만 해도 3억 엔 이상이 된다. 백성들의 부담능력에도 한도가 있어서 감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국을 메아리 치고 있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모든 무역은 침체되고 진전되지 못할 것이며 국고수입은 현재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로 감소할 것이다. 그 뿐인가 군비는 매년 100억 엔 이상씩 증가할 것이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결코 유지가 불가능하다. 재정적으로 돌출구가 없는데 어떻게 전쟁을 이기겠는가? 이것이 왜가 절대 승리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이다.
왜인은 이미 외채를 빌릴 수 없으며 정부 자신도 전비를 지원할 능력이 없다. 만약 그 국민의 경제능력이 충분할 때라면 국가 위난 시에 공채를 모집하여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왜국민의 경제능력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왜인은 전국의 은행이 1,163가(家)이며 자본금 총액은 18만 2천 6백 72만 7천 엔이다. 공채금액 총액이 9만 6천 7백67백 4천 엔이며 전국예금 총액이 1백 14만 9천 1백만 엔이다. 은행자금, 공채금 및 예금액의 세 항목을 합하여도 1백 42만 8천 5백 40만 1천 엔이다. 왜국민이 가지고 있는 총 활동자금이 오직 140여만 엔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자금마저도 금융사회의 필요에 의하여 10분의 1은 이미 방출되었다. 이 액수 중에서 10분의 1이나 20분의 1만 감소되어도 금융사회는 거대한 공황이 일어난다는 것쯤 경제의 상식만 가진 사람이라면 다 아는 바이다. 지금 왜인이 가지고 있는 전부의 자금을 가지고 전비에 충당해도 1년 반을 지탱하지 못한다. 만약 1년 반 후에도 평화를 극복을 하지 못하면 왜인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왜인이 절대 전승할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이다.
왜 은행의 예금 및 지출 총액 (단위 100만 엔)
년 월 특 수 은 행 보 통 은 행 저 축 은 행 합 계
예 금 지 출 예 금 지 출 예 금 지 출 예 금 지 출
민국 15
16
17
18
19 12
12
12
12
12 1,321
1,475
1,300
1,343
1,292 3,257
3,662
3,480
3,488
3,762 9,179
9,028
9,216
9,213
8,659 9,220
8,181
7,555
7,313
6,954 1,097
1,101
1,241
1,421
1,541 265
297
336
403
478 11,568
11,604
11,757
11,797
11,491 12,742
12,140
11,371
11,204
11,193
왜대장성에서 조사한 금융사업 참고서 및 은행 통신록 참조
왜인의 재정 형편은 이상과 같아서 원래 전쟁을 일으킬 자격이 없었다. 그런데도 군벌들은 일체를 돌보지 않고 사단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것이 일종의 투기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때문에 도발을 하던 그 다음 날(19일) 왜 금융시장은 공전의 대공황이 일어나고 말았다. 개장한지 1시간 만에 모든 채권이 7-8엔이나 폭락하므로 폐장하고 말았다. 20일은 일요일이어서 장이 서지 않았고, 21일에 수종의 채권을 개장하였으나 단 1시간 만에 또 13엔 남짓이나 폭락하였으므로(19일까지 합하면 20여 엔이 폭락) 다시 폐장하고 지금까지 개장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일단 개전(開戰)을 하게 되면 왜인의 모든 채권은 휴지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니 재정적으로 말을 하더라도 왜인이 승리할 가망은 만에 하나도 없다.
제3절 물질적인 이유
구라파전쟁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 두 나라는 열국에 의해서 완전 봉쇄당하였지만 4년 반이나 버틸 수 있었다. 이유는 국내에 풍부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위에 아주 우수한 과학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가지 독일에 결핍된 물자의 대용품을 발명해냈다. 그런데도 종국에는 물자가 뒤를 잇지 못해서 패배하고 말았다. 국제봉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왜와 독일을 비교해 보면 개와 코끼리를 견주는 것과 같다. 조금이라도 국제정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것이다. 대저 전쟁에 필요한 물자라고 한다면 철강, 석유, 면화(棉花), 양털 등인데, 왜는 그것들을 극소량만 생산하거나 전혀 생산해 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 국제봉쇄에 들어가면 타국으로부터 운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년을 버티지 못하고 왜의 소위 대육군, 대함대, 대공군은 모두 폐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다음에 항목을 나누어 설명하겠다.
갑, 철강
왜는 공업이 날로 발달하고 강철의 수요도 거의 매년 증가하였다. 전년도의 선철(銑鐵)과 강재(鋼材) 두 가지의 수요량이 450여만 톤에 달한다. 작년은 경제가 조락(凋落)하여 400만톤으로 수요가 감소하였다. 그러나 왜가 국내에서 생산하는 철광석은 약 16만 톤이며 가황(加黃) 철광석에서 20만 톤을 채취하고 조선에서 약 2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다. 또 요녕성내 왜인경영의 안산(案山) 제철소에서 선철을 약 30여만 톤 생산할 수 있다.
그 외는 모두 외국에서 구매하는데, 철강은 중국과 말라이 반도에서(약 절반), 선철은 인도 및 구라파에서 구입한다. 그런데 강재는 구미에서 구매하며 지불하는 대가는 재작년에 17,900만 엔, 작년도에는 철가 폭락으로 11,260만 엔이었다.
일단 개전이 되면 병기제조의 수요량 때문에 철강의 수요량은 평시의 배 또는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런데 왜인이 자가 생산하는 철은 조선 및 왜인 세력하의 안산제철소 생산량까지 모두 합하여도 100만 톤이 되지 못한다. 부족한 700-1,000만 톤의 철을 모두 외국에서 구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국련에서는 왜가 국련의 규약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그와 통상관계를 단절하고 있으니 왜는 과연 어디서 철강을 구입할 것인가?
하물며 왜인의 이번 행동은 실로 안하무인격이어서 모든 국제공약을 휴지화하고 있다. 세계 각국은 평화를 해치는 왜의 파멸을 희망하고 있으니 당연히 강철 원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수행은 직접적으로는 중국을 해치는 것이요 간접적으로는 세계를 해치는 것이다. 만약 왜인이 철강으로 군수품을 보충하지 못하고 1년을 지낸다면 군수품 결핍은 심대하여 소위 말하는 왜의 대육군도 폐물이 되고 말 것이다. 중국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한다면 왜인이 패하지 않고 무슨 수가 있겠는가?
왜인의 철류(鐵類) 수입액
종 류 별 민국 16 17 18 19
천 톤 백만톤 천 톤 백만톤 천 톤 백만톤 천 톤 백만톤
광철(?鐵)
선철(銑鐵)
강괴(剛塊)
강재(鋼材)
쇄철(碎鐵)
계(計) 937.5
478.0
88.1
802.1
228.2
2,533.9 9.1
22.0
6.0
98.8
8.4
144.3 1,617.0
572.9
90.0
805.1
367.2
3,452.2 16.2
26.1
7.1
102.8
13.4
165.6 1,944.8
657.2
166.3
774.8
496.5
4,039.6 19.3
29.1
12.6
99.6
18.3
179.0 1,973.6
408.6
69.8
429.3
488.9
3,370.2 19.0
16.5
4.5
55.3
17.3
112.6
왜대장성 무역월표 참조
을, 석유
석유는 근래 각국의 수요가 격증하고 있으며 왜도 예외는 아니다. 예컨대 민국 16년(1927)에는 오직 2만 7천여만 가론만 수요되던 것이 18년에는 4만 3천여만 가론이 소요되었다. 이중에 등유(燈油)가 10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을 제외하면 모두가 근세 공업국가가 필요로 한 것 들이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군함의 연료로 중유가 필요하고 자동차와 비행기의 연료로 휘발유가 필요한데 그 양은 평시의 2배 내지는 3배에 달한다. 그런데 왜 국내에서 생산되는 양은 7천 5백만 가론에 지나지 않아, 평시에도 6분의 1밖에 되지 못하고, 전시라면 20분의 1밖에 되지 못한다. 그 나머지 부족량을 모두 외국에서 구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에서 산유량이 가장 많은 나라를 치라면 모두 미국을 꼽는다. 미국의 산유량은 세계의 75%를 점유한다. 다음이 러시아이고, 그 다음이 남미의 베네수엘라이며, 기타 나라는 산량이 제한되어 있어서 대량공급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는 모두 왜의 가상적국이며 베네수엘라는 미국의 세력권 하에 있는 나라이다. 일단 왜와 중국이 개전하면 미국과 러시아는 중국을 원조하지도 않고 왜인을 공격하지도 않을 것이나, 일체의 군수품에 대해서는 엄정 중립을 지키되 적에게 만은 절대 공급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중국의 적은 내일의 미?러의 적이 되니, 적병(賊兵)에게 양식을 대주는 일을 국가를 다스려 본 자라면 아무도 할리가 없다. 미?러 양국은 스스로가 왜인에게 석유를 공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국은 베네수엘라 조약에 의하여도 공급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왜인은 석유를 날 곳이 없다. 모든 대군함, 자동차, 비행기가 사물(死物)이 될 것이니 우리를 무슨 힘으로 해칠 수 있겠는가?
지금 왜 군벌이 비록 약간 비축하고는 있지만 이러한 유동성이 강한 물품을 보관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보관할 수량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으니 기껏해야 3개월분의 용량(3개월간 쓸려고 하여도 최소한 2억 가론은 있어야 한다)을 비축하고 있을 것이다. 즉 3개월 후에는 왜인의 공?해 양군의 역량은 영이 되어버리니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해칠 수 있을까?
왜인의 석유 수요량 (단위: 100만 미국가론)
민국 16 17 18
휘
발
유 자가생산원유정제
수입원유정제
제품수입
제품 이입(移入)
재품 이출
순 수요액
(전년비증가율) 14.0
16.6
38.2
0.4
0.3
68.9
38.0 16.8
28.5
48.8
0.1
0.4
93.8
36.0 19.6
34.7
70.8
0.0
2.6
122.6
31.0
등
유 자가생산원유정제
수입원유정제
제품수입
제품 이입(移入)
재품 이출
순 수요액
(전년비증가율) 6.9
6.7
28.2
0.6
1.6
39.5
15.0 6.1
9.6
30.2
0.2
1.7
44.0
12.0 7.5
10.5
29.4
0.2
1.8
45.5
12.0
경
유 자가생산원유정제
수입원유정제
제품 이입(移入)
재품 이출
순 수요액
(전년비증가율) 22.2
25.6
0.0
2.6
45.2
15.0 23.3
33.7
0.0
2.3
54.7
21.0 28.5
29.6
0.2
3.1
55.2
1.0
기
계
유 자가생산원유정제
수입원유정제
제품수입
제품 이입(移入)
재품 이출
순 수요액
(전년비증가율) 15.2
17.3
11.5
1.1
3.7
39.8
12.0 1.6
2.7
1.1
1.8
4.0
4.5
7.0 13.7
27.5
13.4
0.8
4.3
49.5
18.0
중
유 자가생산원유정제
수입원유정제
제품 이입(移入)
재품 이출
순 수요액
(전년비증가율) 5.0
4.1
76.3
1.3
84.1
65.0 5.0
6.6
117.3
0.6
128.3
51.0 6.0
4.8
147.3
0.5
157.7
22.0
합
계 자가생산원유정제
수입원유정제
제품수입
제품 이입(移入)
제품수출
재품 이출
순 수요액
(전년비증가율) 63.2
70.3
154.2
0.4
1.7
9.5
277.0
22.0 64.8
100.0
209.3
0.2
2.0
9.0
363.2
31.0 75.3
107.2
260.9
0.3
0.9
12.3
430.5
18.0
일본 석유주식회사 편 ?석유편람?개정 제4판 참조
병, 면화(棉花)
왜국 내는 면화 생산이 없어서 매년 필요한 양을 타국으로부터 구입한다. 가장 많을 때는 7억 엔 이상이나 되었다. 작년도는 가격이 하락하여서 3만 6천여만 엔이었다. 국내에서 의복으로 소비한 외에 직포(織布)를 짜서 수출하는데, 중국과 인도로 수출하는 량이 가장 많다. 그로써 105만 노동자의 생계가 유지되며 자본가는 엄청난 수확을 올린다.
이러한 면화는 미국이 약 42-43%를 공급하고, 인도가 약 45-46%를 공급하며, 중국이 약 5-6%, 이집트가 3-4%, 기타 소량을 불란서 령 인도나 화란 령 인도에서 공급한다. 오늘날 전쟁에서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화약은 바로 면화를 가지고 제조한 것이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미?영 양국은 면화의 공급을 중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화약을 제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방직공장의 노동자들은 모두 작업을 중단하여야 한다. 왜는 전쟁에 승리도 못하고 사회실업문제(뒷장에서 자세히 설명)며 상장(商場)의 상실 등이 뒤를 이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좋은 선후책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영국도 면화공급을 정지할 것은 당연하다. 영국은 국제연맹의 규정에 따라 의무적으로 공급을 정지할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영국은 동방에서 왜인과 정치상으로, 상무상(商務上)으로 모두 양립할 수 없는 위치에 처해 있으니 절대 면화를 공급해서 침략전쟁을 돕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을 유리하게 하면 장차 인도에 해가 되기 때문이다. 왜인은 면화를 획득하여 화약을 제조하지 못하면 대포가 있다한들 폐철에 불과할 것이니 어찌 해롭지 않겠는가?
왜인의 면화 수입과 면제품 수출액 (단위: 100엔)
년 차 면화수입 면 제 품 수 출 면화수입수량
(천톤)
면사(綿紗) 면직물 면제의류 기타합계
민국 2
15
16
17
18
19 233.6
725.9
624.6
549.9
573.0
362.0 71.0
70.7
38.8
25.9
26.8
15.0 33.6
413.7
381.8
352.2
412.7
272.1 10.6
28.9
31.9
34.2
37.8
31.3 120.6
532.5
472.6
431.9
498.3
335.2 404.1
698.8
768.0
585.3
647.3
574.4
왜대장성 무역연표 및 월표 참조
정, 양모
왜 국내에서는 절대 양모를 생산하지 못한다. 작년도에 수입한 양모 및 양사(羊絲)는 1만 2천만 엔에 달했다. 작년도에는 가격이 하락하였기 때문에 수량은 증가하였으나 금액은 8천 8백만 엔으로 감소하였다. 일단 개전이 되면 군복이나 군용 모전(毛氈)에 쓸 양모는 다량이 필요하다. 왜는 이것을 면직물로 대치하고자 해도 면화가 없기 때문에 역시 곤란하다.
평소에 왜인에게 양모를 공급했던 나라는 거의 영국령 오스트레일리아뿐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장차 닥칠 왜화(倭禍)를 방지하기 위하여 반드시 지금 그들에게 양모 공급을 단절할 것이다. 일년만 지나면 왜군은 군복과 군용 모전이 없어서 추워도 방한을 못할 테니 어떻게 작전을 하겠는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공격하던 지난 역사를 오늘에 다시 보게 되었다. 패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왜인의 양모 및 모직사(毛織絲) 수입액
년 차 양 모 (+) 모 직 사 합 계
천 톤 백 만 엔 천 톤 백 만 엔 백 만 엔
민국 2
15
16
17
18
민국19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영국
독일
불란서
폴란드
기타
산양모 및 낙타모
계 9.5
36.8
47.6
53.1
49.1
50.9
0.6
0.2
?
?
?
0.3
0.2
52.2 16.0
86.2
101.9
112.2
102.1
72.3
0.6
0.3
?
?
?
0.4
0.3
73.9 3.3
5.5
8.5
5.2
3.4
?
?
0.5
1.2
0.2
1.4
0.3
?
3.6 10.2
32.5
43.6
32.1
18.7
?
?
1.9
4.6
0.8
5.4
1.4
?
14.1 26.2
118.7
145.5
144.3
120.8
72.3
0.6
2.2
4.6
0.8
5.4
1.8
0.3
88.0
왜대장성 무역월표 참조 (+)는 산양 및 낙타모를 포함한 것임
이상 서술한 강철, 석유, 면화, 양모는 모두 군사적 필수품이다. 왜는 그것들이 심히 결핍되었거나 완전 결핍된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을 논한다면 왜는 참으로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있다. 더구나 군수품으로 소요되는 다른 아연?청연(靑鉛)?피혁(皮革)?상피(象皮)?초석(硝石)?초산(硝酸)?백동(白銅)?수은?알루미늄?주석 등도 왜인은 전혀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외국에서 구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왜인은 벌써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있다. 세계는 왜와 모든 통상과 금융관계를 단절할 것이다. 왜인은 근본적으로 생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고도 그들이 과연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때문에 물자상으로 볼 때도 그들은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제4절 국민생계상의 이유
왜인은 재정상황이 그와 같으며 물자상황이 이와 같다. 더욱이 그들의 국부(國富: 국가의 재력) 및 국민소득을 보면 전쟁을 지탱해 낼 수 없다는 것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민국 13년(1924) 왜내각 통계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왜의 국부는 다만 1천억 엔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조사한 다카하시 히데요시(高橋秀吉)의 통계도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은 민국 13년의 숫자이다. 그 때는 구라파 전쟁이 끝난 후여서 물자의 수요공급이 비교적 잘 되고 물가도 높았다. 이때부터 물가는 점점 하락한다. 재작년 세계경제 대공황 이래로 모든 물가가 민국 13년 당시의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러기 때문에 왜의 국부는 현재의 시가로 5백억 엔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설령 6백억 엔이라 한들 대수인가.
더구나 13년 당시의 통계 숫자는 그렇게 신빙성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 높이 정했으면 정했지 너무 낮게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3년의 통계에 의하더라도 국민의 매년 소득총액은 128억 엔이고 매인의 소득은 210엔이다. 지금은 경제가 저조하여 물가가 떨어져서 백성들의 수입이 감소하였다. 매인의 소득은 많아야 13년 당시의 10분의 6 정도밖에 안 된다(사실은 이보다 더 적을 것이다). 즉 매인의 매년 소득은 120여 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숫자적으로 이 정도라니 놀라울 일이다. 왜 국민의 생활의 궁핍을 족히 알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평균 소득의 숫자이고, 그 안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본가?특권계급도 있다. 그들의 하루 수입만 해도 소시민 10인이 일생동안 벌어도 벌기 어려운 액수이다. 그러기 때문에 왜 국민소득 중에 이러한 자본가 및 특권계급의 소득은 제외하였다. 소시민의 소득은 아마도 평균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소시민 매인이 매년 약 100엔(사실은 이 액수에 미치지 못하지만)을 번다고 가정해보고, 여기에 근거하여 왜국민의 생계와 전쟁이 발생했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영향을 연구해 보겠다. 그것을 알면 왜인은 결코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단정할 것이다.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그 국민의 태반이 굶어 죽을 것이다. 여기서 항목을 나누어 해설해 보기로 한다.
왜국의 국부 (민국 13년 말 조사)
종 별 금 액(백만 엔) 백 분 비
토지
광산
해호천(海湖川) 및 항만
수목
건축물
가구 가재(家財)
제조공업 기계
가축 및 가금(家禽)
철도 및 궤도
차량
선박
수도(水道)
교량
농산품
공산품
화폐 및 금?은?지금(地金)
각부 재산
기타
계 33,247
3,523
5,159
1,748
16,326
9,683
1,987
526
3,544
429
320
283
374
3.310
2.311
1.824
6.484
11,264
102,342 32.5
3.4
5.0
1.7
15.9
9.5
1.9
0.5
3.5
0.4
0.3
0.3
0.4
3.2
2.3
1.8
6.3
11.0
100.0
왜내각통계국 조사 참조
(1) 현재 실업문제
지금 실업문제는 각국이 모두 심각한 과제이다. 세계의 패권을 3백 년 동안이나 쥐고 있던 대영제국마저 2백여만 명의 실업자를 양산하여 국가기반이 흔들리는 공전의 대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의 재권(財權)을 쥐고 있던 북미 합중국마저 6백만 명의 실업자를 양산하여 국가 전체가 마비되어 감각이 무뎌질 지경이다. 그 나라도 비록 거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으나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실업은 실로 근세 상공업국가의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의 실업문제도 역시 다른 나라와 다를 수 없다. 왜의 실업자 수는 작년 10월 1일 국세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총 32만 5천 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는 아주 부정확하다. 대게 조사원은 모두가 같은 마을이나 인근지역 사람이어서 체면문제 때문에 자기의 실업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실업자 수는 이 인원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일반인이 승인하는 사업만 말한다면 실업인원은 당연히 더 늘어날 것이다. 민국 19년(1930) 왜내각통계국에서 편찬한 ??노동통계편람??에 의하면 왜의 공업노동자수는 4백 83만 2천명이다. 그런데 ??일본은행?? 조사에 의하면 노동자의 실업인수는 민국 18년에 10%, 민국 19년에 25%였다. 즉 4인중에 1인이 실업을 하고 있는 셈이니 480만 명 중에서 120만 명이 실업자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왜인은 가족제도이기 때문에 실업자중 가족이 있는 경우,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가족이 공동부양을 한다. 그러나 가족이 없는 경우는 중대한 생활의 압박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왜인의 실업문제가 구미각국에 비교해서 완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가족제도가 중요한 원인이다. 다만 왜인은 매인의 소득이 매우 적기 때문에 부담을 증가시킬 수 없다. 실업자 한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 전체의 생활의 고통은 그만큼 가중된다. 현재의 상황도 벌써 충분히 곤란한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모든 사업이 다 정지할 것이고 생활은 더욱 유지할 수 없는 추세가 된다. 국민이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국가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데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첫 번째 이다.
(2) 생사(生絲)와 사직물(絲織物)은 수출할 수 없다
왜인의 생산은 쌀을 제외하고는 잠사(蠶絲)를 대종으로 하고 있다. 매년 수출하는 생사는 7만 5천만 엔에 달하고 사직물까지 합하면 10억 엔에 이른다. 국민 생계의 10분의 4가 생사에서 얻은 소득으로 유지되고 있다. 작년에 세계경제가 불화인데다가 중국 생사는 은가의 하락으로 수출이 대폭 증가하여 왜사(倭絲)의 가격을 폭락시켰다. 중국에서 수출한 생사와 사직물 두 항목의 수출액은 다만 5만 3천여 엔이었는데도 왜국민 생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왜정부에서는 근본적인 동요가 일어날까봐 사가보조법(絲價補助法)을 만들어서야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사가보조법이란 것은 은행이 생사 100근에 대하여 1,250엔을 융자해 주고, 은행 손실분은 정부에서 매 100근당 190엔을 보상해 주는 것이었다. 그 뒤로 사가(絲價)가 점점 떨어지자 전부의 배상금액은 매 100근당 350엔까지 증가하였다. 정부의 손실은 3천만 엔 이상이었으나 백성의 고통은 감소하지 않고 일반 농민은 거개가 파산에 직면하였다. 그 영향력이 국민생계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가격만 떨어져도 그 결과로 왜농민 전체가 파산지경에 이르는데, 전쟁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보면, 생사는 완전히 수출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농민의 십중팔구는 파산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왜생사의 95%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는데, 미국은 앞으로의 화근을 근절시키기 위해서 절대 그들의 생사를 사주어 침략전쟁을 돕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공장에서 소요되는 생사는 중국에서 사들일 수 있다. 중국의 생사 산량은 왜의 다음이고 가격이 싸다. 미국도 그 제조술이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하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고가의 왜사를 살 리가 없고 당연히 중국생사로 대치할 것이다.
다만 이 생사 한 항목만 가지고서도 족히 왜인의 목덜미를 쥘 수 있으니 중국인이 왜상품 천만 개를 배척하는 것보다 효과가 크다. 왜국민은 70%가 농민이다. 농민이 생사를 수출할 수 없으면 십중팔구는 파산하고 만다. 왜의 근본이 동요되는데 그들이 어떻게 다시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두 번째이다.
왜인의 생사 생산 및 수출액
연 차 생 산 수 출 그 중 미국에 수출
천 톤 백만 엔 천 톤 백만 엔 천 톤 백만 엔
민국 2
15
16
17
18
19 14.0
34.3
37.1
39.7
42.3
41.7 199.5
856.5
798.8
835.5
857.6
550.0 12.1
26.6
31.3
32.9
34.8
28.6 188.9
734.1
742.3
733.4
784.1
419.1 8.0
25.7
29.5
30.9
33.4
26.9 31.9
709.4
698.8
688.0
755.4
398.7
왜농림성 통계표 및 대장성 무역월표 참조
(3) 방직 공인(工人)의 실업
방직 한 가지가 왜인의 공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매년 수입한 면화는 가공방직한 후에 국내소비를 하고 다시 외국에 수출한다(중국과 인도를 위주로). 벌어들인 대가는 현재 이미 수입면화 가격과 맞먹는다(면화 항목의 표 참조). 즉 왜인의 전국의 의복은 그 방직공업에서 얻은 이익에서 얻어지고 있다. 이 안에는 화약을 제조하는 면(棉)도 포함되어 있다.
매년 방직공업으로 생활이 유지되는 자는 직원과 공인을 합하여 1백 5만 명 남짓이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 외국으로부터 면화를 수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방직 공인들은 모두 실업하고 만다. 또 이들 직원이나 공인들은 기타 노동자와는 달리 그 직업의 안정성 때문에 남여를 불문하고 십중팔구는 모두 가정을 가지고 있다. 일단 실업을 하게 되면 다시 시골의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가족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중대성은 오늘의 구미 각국보다 더 심각하면 심각했지 못하지 않는다. 구미인은 쾌락주의가 성하여 고정적인 직업은 있어도 결혼을 안 한 사람이 왜인보다 많다. 결혼을 한다 해도 자녀수는 아주 적다. 그런데 왜인은 출산율이 지구상에서 수위를 차지한다. 피임도 보편화 되어 있지 않고 낙태는 아예 범죄시 되고 만다. 막 결혼했다 하면 삼년 남짓에 자녀가 주렁주렁 하다. 심지어는 10인 8인까지도 낳는다. 가령 매 개인이 1처 2자 만 두고 있어도 자기까지 합하면 4인 가족이다(실질적으로는 이보다 많지만). 105만 명이 실업을 하게 되면 즉 420만 명이 생활의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지금 이미 있는 실업자와 방직공인의 실업자를 합하면 그 수는 220여만 명에 달한다. 영국의 실업자 수와 대략 비슷하다. 대영제국의 부강함도 실업인원의 과다로 말미암아 위험한 경지에 처해 있는데 하물며 ‘빈강(貧强)’한 왜인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또한 이러한 방직공업은 일단 정지되면 장차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다. 대게 지금 왜인의 방직업의 발달은 영국이 구라파전쟁에서 방직공업을 돌볼 여념이 없을 때 동방(주로 인도와 중국)의 면포?면사(棉紗) 시장을 왜인이 빼앗은 것들이다. 구라파전쟁이 끝난 후에 그것들을 회수하지 못했다. 일단 왜인의 방직공업이 정돈(停頓)되면 영국은 반드시 기회를 보아 잃어버린 시장을 회수하려 할 것이다. 한 번 영국인이 회수하면 두 번 다시 왜인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대저 중국인은 이번 왜인의 침략을 당하여 그들을 뼛속까지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에 혹 뒷날 평화가 온다 하여도 왜인의 상품은 쓰지 않을 것이다. 인도도 목하 자력으로 방직하고 영원히 외국물품을 쓰지 않으려 하고 있다. 왜인은 이번 전쟁을 통하여 영구히 그 방직공업을 잃게 될 것이다. 설령 전승한다 하여도 종전의 번영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으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이것이 그 세 번째이다.
(4) 어업 노동자의 실업
왜인은 어업으로 유명하여 세계 제1위를 점하고 있다. 매년 소득은 4만 7천만 엔에 달하며, 매년 어업종사자는 1백 84만여 명에 달한다. 간접적인 어업생활자까지 합하면 8백만 명은 된다. 얻은 어류는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하고 수출하는 양도 상당수 된다. 민국 17년(1928)의 통계에 의하면 어류 수출총액은 5,1481,000여 엔이고, 18년에는 58,800,000여만 엔, 19년에는 50.523.000여 엔이다.
그 중 대부분을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일단 개전이 되면 이 5천만 엔 이상의 금액은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그 뿐인가. 국내는 어류를 수출하지 못함으로 공급과잉이 되고 전쟁의 영향까지 가세하여 어류의 가격은 현재의 절반 이하로 하락할 것이다. 어업으로 먹고 사는 8백만 명이 대부분 생활의 터전을 잃게 되어 사회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래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네 번째이다.
이상 열거한 4가지는 분명하게 드러난 것들이다. 그 외에 전쟁으로 인하여 받은 영향은 결코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 열거한 것만으로 논하여도 왜국은 민국 17-18년쯤에는 벌써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왜인민의 생계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왜인은 결코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다.
제5절 국민사상사적 이유
왜인은 명치유신 이래로 완전히 군국주의가 그들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왜국민은 완전히 군벌의 노예가 되고 희생물이 되고 있다. 중?왜, 러?왜 두 전쟁은 이러한 상황 하에서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작용하여 겨우 승리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주전쟁 이후로 백성들은 사상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군벌들의 행위는 스스로 자기들의 무덤을 파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더구나 국가가 강하면 강 할수록 군벌의 압력은 점점 더 커지고 국민의 자유는 점점 더 신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군벌의 희생물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은 군국주의가 패배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국민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종전의 중?왜, 러?왜의 역(役)에서는 누가 군대에 나간다면 모두 자기가 군에 출정하는 것처럼 환송해 주며 영광되게 죽기를 바랐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사상가들은 오히려 전쟁에서 패하기를 바라고 군벌의 타도를 희망하고 있다. 민국 17년(1928) 제남참안(濟南慘案) 때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데, 지금 다시 3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왜국민의 사상은 큰 진보를 하게 되었다.
군벌들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행동은 전보다 훨씬 심하다. 이번의 침략행위는 온 세상이 그르다고 하는 행동이니 왜국민도 당연히 각오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제남학살 때는 동원된 인원이 아주 적었고 자유사상가들도 보편적임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는 동원된 인원만도 100만 명 이상은 될 것이다. 자유사상가들도 훨씬 많은 인원이 그들의 대오에 끼어들 것이니 그들의 동료를 개도할 기회도 훨씬 많아지게 된다. 전쟁이 시간을 끌면 군대자체의 사상적 변화도 병행될 것이다.
거기에 또 근래 지식계급의 실업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생활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자는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군벌과 자본가들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품고, 현상타파를 노리고 출로를 모색하고 있다. 태평시대에는 경찰력으로 견제가 가능하지만 일단 개전이 되면 모든 산업은 침체하고 실업자가 갑자기 늘어나기 때문에 어느 곳이나 그들의 활동무대가 된다. 일반 인민들도 군벌의 시대역행적인 행위가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군벌에 대한 반항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거기에 자유사상가들의 전쟁반대 기운이 기류를 탈 것이니 과연 그들 마음대로 되겠는가?
구라파전쟁 때 러시아와 독일의 두 제국이 붕궤한 것은 바로 이 순환논리 때문이었다. 왜인이 군벌을 무너뜨리는 것은 러시아나 독일보다도 빠를 것이다. 그 인민들의 사상이 점점 성숙되어 가는 것으로 보아 기껏 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국민의 사상적 입장에서 말하더라도 왜인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제6절 왜 장교의 부패와 병사들의 심리적 변화
왜인은 여러 가지 관계로 보아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런데 왜군이 전쟁을 잘 한다는 명성이 벌써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강적을 만나보지도 않고 미리서 명성만 들은 소치이고 알고 보면 정말 싸움을 잘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을 예로 들어 보자.
중?왜지역(中倭之役)의 아산(牙山) 전투에서는 이에즈차오(葉志超)의 2천 5백의 구식군대가 왜군 1만 2천여 명의 신식군대에 의하여 포위되었었다. 이치적으로 말한다면 중국군대는 완전히 괴멸되었어야 옳다. 그런데도 중국군대는 왜군에게 심각한 손상을 입히고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와서 평양에 다시 집결하였다. 이런데도 중국군대가 싸움을 못한다고 하겠는가?
평양전투에서는 중국군대가 1만 5천명이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는 웨이루꾸이(衛汝貴)의 비군(匪軍)이 포함되어 있어서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장수들이 화목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면을 방어하기 위하여 병력을 분산시켰는데 실지로 적과 대치하는 병력은 8천명에 불과했었다. 이 때 왜군 4만 명이 공격하여 왔다. 격전 수일 만에야 왜군은 너무나 힘들게 겨우 평양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래도 중국군대가 싸움을 못한단 말인가? 그 뒤로 중국군대는 1만 명 이상의 군대를 한데 모아본 적이 없다. 왜군은 항상 우리 군대의 수배의 병력으로 공격하였다. 이만하면 잘 싸운 것 아닌가?
러?왜지역을 보면, 그 때 러시아 군대는 극도로 부패하여 있었다. 왜군이 아니고 어떤 적을 만나도 러시아군은 패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왜군은 수차례나 곤궁에 빠진 적이 있으며 사상자를 20만 명이나 내고서야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왜군의 노기(乃木) 대장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자결한 일까지 발생하였다. 참모총장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는 매일 꼭두새벽에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 천우신조를 기원하였다. 그들이 추호의 자신도 없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증거이다. 하여튼 이 때부터 왜군은 사면에 강적이 없게 되어 세상을 종횡무진하게 되고 자기가 하늘의 자식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민국 17년(1928) 제남지역(濟南之役) 때는 중국의 수성군은 1개 연대 병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군은 조금도 유리하지 않았다. 그 뒤에 중국군은 상부로부터 철군하라는 명령을 받고서야 포위망을 뚫고 나오다가 왜군에게 가까스로 패하였다. 그 때 오사카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기자는 본국에 왜군이 곤경에 처해 있다고 전보를 친 일이 있다. 이 때문에 왜군 참모장 구로다 쥬록켄(黑田周六見)은 이를 치욕으로 여기고 각 신문사 기자들을 소집하여, 진상을 폭로한데 대하여 애국심이 없다고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심통을 부린 적도 있다.
이로써 충분히 왜군은 무용지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운 좋게 왜군은 러?왜 전쟁 이후에 큰 전쟁을 치룬 적이 없었던 것뿐이다. 더구나 지금 중장 이하의 장교들은 실전경험이 없어서 군사교육을 받긴 하였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잇장 위의 담론일 따름이다. 백전의 경험을 갖춘 중국군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또 왜군 장교들은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갖은 음탕한 짓을 다한다. 출병할 때마다 게이샤(일본 기생)를 대동하여 매일 밤 갖은 음탕한 짓을 다하고 전쟁에는 관심이 없고 병사를 초개와 같이 여긴다. 그 부패상이 이미 러?왜전쟁 때의 러시아군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런 군대가 강적을 만난다면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는가?
병사들의 심리도 지금과 옛날은 크게 차이가 있다. 이전의 병사들은 대부분 농가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군국주의의 훈도를 받아서 침략을 영광으로 알고 패배를 수치로 알았다. 만약 패전하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고 여기기 때문에 무조건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있었고 실지로 결사 항전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하였다. 병사들이 비록 많이 농가에서 차출 되었다고 하지만 그 사상은 이전처럼 그렇게 편협되지가 않다. 더구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자들이 퇴역한 후에(왜는 전쟁이 벌어지면 퇴역장병을 소집한다), 비록 연령은 많지만 견문은 넓은데다가 군영 안에서 장교들의 냉대를 받기 때문에 군벌에 대하여 극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절대로 이전처럼 군벌을 위하여 사력을 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뿐인가, 자유사상을 가진 자들은 군벌타도를 고취할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이번 전쟁은 왜인의 완전한 침략전쟁이기 때문에 설령 패전한다 하여도 침략주의가 실현되지 못할 따름이다. 이전처럼 국가의 근본이 흔들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와 같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사상이 있는 왜인이라면, 결코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여 군벌들의 승관발재(昇官發財)의 도구가 돼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병사들도 모두 상당한 사상이 있어서(특히 퇴역 장병), 군벌들의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음탕하고 오직 일신의 쾌락만 생각하는 것을 보고 어찌 반감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와 같이 부패한 장교와 이와 같은 심리를 가진 병사가 과연 러?왜전쟁 때처럼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겠는가? 때문에 군벌의 부패와 병사들의 심리적 변화상으로 볼 때 왜인은 절대 승리할 리가 없게 되어있다.
제7절 왜 군벌의 순전한 투기행위
이상 열거한 여러 가지 원인에 근거하여 왜인은 절대 승리할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왜군벌은 일체를 볼보지 않고 이번 같은 도발행위를 하고 있으니, 그것은 첫째, 군벌들이 외교와 재정에 완전 맹목적이란 점과, 둘째, 완전 투기에서 나온 행위 이외 아무것도 아니란 점이다. 중국의 통일의 기운은 이미 최후의 단계에 접어들어서 몇 개월만 더 있으면 완성하게 되어있다. 왜군벌은 이 때 만몽을 병탐하지 않으면 이후는 영구히 병탐할 기회를 잃고 만다. 또한 왜국내에 육군 감군운동이 맹렬하고 명년 2월에는 또 국제연맹의 감군회의의 개회기여서 조금만 있으면 감군이 실현되고, 그렇게 되면 군벌들은 자기 밥그릇을 잃게 된다. 두 가지가 모두 절박한 문제이다.
왜군벌의 안목으로 볼 때는, 구라파의 경제위기가 이미 극에 달해 있으며 특히 영국이 가장 심하다. 영국은 스스로를 돌보는데도 바쁜데 어떻게 동아를 넘볼 수 있겠는가. 미국도 구라파 경제문제와 자국의 실업문제 때문에 동아를 넘볼 겨를이 없다. 러시아는 5개년 계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역시 즉각적인 개전은 원치 않는다. 중국자신은 전국적으로 수재(水災)가 만연하여 그 구제에 여념이 없다. 또 광동(廣東)이 분열되고 토비(土匪)가 횡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단정한 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원인을 감안하여 이런 투기행각을 벌렸는데 다행히 성공한다면 그들은 만몽을 점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목을 조이고 숨통을 끊어서 차후 10년 동안만 열심히 경영하고, 미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는 여유 있게 대한다. 그러면 왜인은 장차 영국을 대신하여 세계의 패권을 쥘 것이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중국을 완전히 왜의 판도에 넣을 수 있다.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런데 불행히도 중국은 벌써 저항의 길로 나가고 있다. 세계 각국은 설령 왜인공격에 참가하지 않는다 해도 엄정중립을 고수하고 있다. 이렇게 1년만 가면 왜인은 존립할 아무런 희망도 없어진다. 때문에 이번 왜군벌의 투기행위는 중국의 존망과 유관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 중국 국민이 왜군벌의 투기행각을 좌시하며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