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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문제가 많았습니다. 먼저, 군대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노농적군의 기반은 다져져 있었지만, 그 위에 세워질 미래의 군대를 결정할 계획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두 개의 방안이 대립 중이었기 때문이었죠. 트로츠키와 그의 측근인 [에프라임 스클랸스키]의 주장으로 나온 ‘500만 징병안’과 스워지니치니가 주장하는 ‘200만 징병안’이었습니다.
스클랸스키의 500만 방안은 매우 공격적인 방안이었습니다. 장교와 지휘관은 오로지 충성심에 따라 지도부에서 선출한다.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는 정치위원은 사상이 의심되는 지휘관의 명령을 번복할 수 있으며 즉결처분권을 가진다. 징집 및 징발을 거부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무제한의 무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후퇴를 막기 위해 지도부에서 직속으로 통제하는 독전대가 각 부대의 후방마다 기관총과 함께 배치되어야 한다.
이는 철저하게 군율이 잡힌 군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시체로 산을 쌓을 것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좋은 계획이었습니다. 실제로 500만 병력에는 치안유지와 식량 공출을 하는 병력과 건설 및 보수를 담당하는 건설부대 병력만 합쳐도 따로 100만이 넘을 정도였으니,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붉은 군대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전쟁 기계로 만드는 계획이었지요.
이와 반대로 스워지니치니의 방안은 ‘상대적으로’ 소수인 200만의 전투병을 중심으로 정예화된 군대를 건설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징병제는 연령대를 좁히되 남녀를 전부 대상으로 한다. 통일전선에 합류한 모든 혁명운동 세력에게서 자원병을 차출한다. 참전자에게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이익을 제공한다. 징집되는 병사와 자원병 모두 민족과 종교, 성별을 가리지 않으며, 국제 사회주의 혁명운동가들의 참여도 환영한다. 가혹행위를 방지하고 계급을 간소화한다.
두 개의 방안 모두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스클랸스키 방안은 군대에 대한 지도부의 무한한 통제권을 보장했습니다. 백군이 콜차크 제독의 쿠데타를 겪은 것을 보면 이는 분명 매력적인 요소였습니다. 트로츠키와 안토노프오브셴코, 스클랸스키를 비롯한 그의 측근들은 군사적 식견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분명 문민 정치인이었고 이들이 노농적군의 건설을 철저한 상명하복식으로 진두지휘한다면 노농적군은 확실히 문민통제가 확립된 ‘국군’이 될 것이었습니다.
스워지니치니 방안은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에 젖은 이들에게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니콜라이 키릴렌코]와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휘관 선거제 같은 제도는 없었지만, 가혹행위를 방지하고 계급을 간소화한다는 평등주의적 요소도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스클랸스키 방안이 ‘전 사회의 군사화’를 불러올 것을 우려하는 인사들의 지지 또한 받았습니다. 스워지니치니 방안으로 노농적군이 건설된다면 진정한 ‘혁명군’이 탄생하는 게 가능했죠.
그러나 사실 이 두 방안의 근본적인 대립은 다른 이유였습니다. 이는 두 방안을 제출한 인산들의 사회적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정권의 2인자이자 러시아 최고참 사회주의 혁명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반대로 스워지니치니는 2월 혁명 이전까지는 볼셰비키 당원도 아니었으며, 그를 지지하는 병사들은 오히려 아나키스트나 사회혁명당 좌파 등이 더 많았던 데다 귀족 출신의 직업군인이었습니다.
각료가 된 트로츠키가 지극히 냉정한 시각에서 국가기관으로써의 국군의 창설을 원한다면, 스워지니치니로써는 7월 혁명을 이끌었던 자기 경험과 이후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각지의 전위대의 전통을 계승하는 혁명군의 창설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스클랸스키의 방안이 사회의 군사화이며 필요 이상으로 잔혹하다고 비판받는다면, 스워지니치니 방안은 혁명의 주도권이 군인들에게 넘어갈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스워지니치니가 ‘러시아의 나폴레옹’이 될 것일 수도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혁명만 생각하며 정권의 유지에 골몰하던 레닌의 마음은 스클랸스키 방안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정권이 군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스워지니치니 방안은 통일전선과 동질적 사회주의 정부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는 현재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와 흑군, 녹군이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이 담판이 실패한다면, 스클랸스키 방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더 컸습니다.
트로츠키 본인은 순수하게 군사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녹군 및 흑군과의 협상에 찬성했습니다. 그는 자기 오른팔이자 노농적군 최고사령관 중 한 명인 안토노프오브셴코를 협상 대표단에 포함했습니다. 오랜만에 트로츠키와의 의견 일치를 본 욕받이 토템 우스트랼로프는 러시아에서 어쩌면 레닌만큼이나, 혹은 레닌보다도 더 유명한 혁명운동가를 만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바로 전설적인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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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낭만적인 온건파에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러시아의 상황은 ‘권위적이고 과두제적이며 규율을 중시하는 볼셰비키’와 ‘자유와 반권위주의를 추종하는 아나키스트 세력’으로 쉽게 나눌 수 있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회혁명당의 기원이 된 인민주의자들은 개인적인 테러와 암살을 혁명 수단으로 삼았던 러시아식 아나키스트들이었고, 사회혁명당 좌파와 최대주의파도 본질적으로는 아나키즘에 가까웠습니다.
당장 볼셰비키를 열렬히 지지하는 [아나톨리 젤레즈냐코프]와 발트 함대 선원들이 레닌의 지역구 역할을 하면서도 실상 볼셰비키 당원도 아닌 아나키스트들이었다는 점이 현 정권의 급진주의적 경향과 불안정성을 증명했죠.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정말로 이전하고, 노동자들이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고 실권을 얻으며 사유재산이 철폐되고 부르주아 국가기관을 철저히 해체되기를 원했습니다.
온 러시아가 내전으로 빠져드는 현실은 둘째치고 본디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임하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부는 이러한 급진적인 요구를 전부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권력을 당에 집중하려는 레닌의 시도는 통일전선이 구성되며 실패로 돌아갔지만, 다른 세 개의 요구는 지켜질 가능성이 크지 않았습니다. ‘사상이 불건전한 노동자’들은 이미 강제노동에 투입되고 있었으며, 사유재산은 철폐되기는커녕 스톨리핀의 경제부흥계획을 수정한 경제계획이 ‘전환적 사회주의 경제’라는 이름으로 도입될 예정이었습니다.
부르주아 국가기관의 파괴도 불가능했습니다. 관료들의 보이콧으로 국가 예산을 얻기 위해 은행 습격대를 꾸려야 했던 볼셰비키들은 일부와 타협하고 일부는 협박하며 구 임시정부의 관료조직을 최대한 흡수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을 통해 내전을 수행할 노농적군을 구성하고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서, 국가 최고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와 행정부인 인민위원회의 실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습니다. 정통 아나키스트들이 보기에 이들이 혁명정부가 될지, 색깔만 더 붉어진 임시정부가 될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쪽인지 밝혀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죠.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의 수장인 [네스토르 마흐노],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의 대표인 [레프 체르니], 발트 함대 아나키스트들을 대표하는 [스테판 페트리첸코] 등은 바레츠노프와 안토노프오브셴코 등이 포함된 중앙집행위원회 대표단과의 회담에서 모두가 예상한 비판을 늘어놓았습니다.
트로츠키의 노농적군 계획안에 대한 비판, 인민위원회에 대한 권력 집중의 비판, 노동자들의 권리가 약속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경제 집산화가 즉시 심화되지 않는다는 문제 등이 언급되었습니다. 브레스트-리토프츠크 조약에 대한 불만도 나왔지만, 이전 우스트랼로프의 밀약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소한 이 불만은 요식적인 것에 불과하였죠.
분명 칭찬도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체카의 비밀경찰 활동을 반혁명 세력에 대한 의거라며 높이 평가하였고, 볼셰비키당이 통일전선을 승인한 것 또한 좋게 보았습니다. 토지의 사회화, 즉 소농과 협동조합에 토지를 분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토지개혁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애매한 타협안’이지만 지금 상태에선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반대로 볼셰비키당을 놀라게 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나코-코뮤니즘을 추종하는 흑군 대다수는 자신들이 통제하는 지역의 지방 행정기구를 ‘소비에트’라 불렀고, 군사지도기관은 ‘군사혁명위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중앙에서 통제되는 20세기식 군대는 없었지만, 소규모 제대 단위의 빨치산 부대들은 편견과는 다르게 범죄자들이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고 각 소부대 단위에서는 적위대보다 몇 배는 더 군율이 잡혀있었습니다.
특히 이 빨치산 부대들의 행동 원칙은 기존의 아나키스트들과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과거 차르정 시대의 행동 원칙인 ‘행동으로서의 프로파간다’(Propaganda by deed)에서 벗어나 부르주아 계급에게서 얻어낸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백군의 군복을 빌려 러시아를 공격하는 국제 자본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군사 조직임을 명확히 하여 수색, 체포와 같은 행위는 적위대와 소비에트에 맡기고 빨치산 활동에 힘쓸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들이 서로를 혁명의 적이라 선포할 가능성은 아직 컸지만, 최소한 타협의 여지가 존재는 한 것이었습니다.
몇 가지 복잡한 협의 과정을 거치며, 특히 규율과 조직을 다른 아나키스트들보다 중시하던 마흐노의 지지로 협상안의 가안이 나왔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내의 아나키스트들은 모스크바 아나키스트조직동맹(МФАГ)을 확대 개편한 전러시아 아나키스트조직동맹(ВФАГ) 하에서 활동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가안이었습니다.
가안의 여러 항목 중에서도, 다른 정당과는 달리 조직동맹은 단순히 의견 수렴과 러시아 내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을 중앙집행위원회와 소비에트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대표집단의 역할을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습니다.
조직동맹을 두고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들은 서로 다른 마음을 품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아나키스트들을 제도적인 조직으로 묶어 양지화시켜 일반적인 사회주의자로 ‘전향’시킬 계획을 꾸몄고,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중앙에서도 대변하게 함으로써 혁명정부의 중앙집권을 막고 각지의 아나키스트 공동체를 수호하려 하였습니다.
보그다노프와 부하린 등 당내 극좌파 분파를 제외하면 다른 정당들보다 규율이 훨씬 잘 잡혀있다고 자부하는 볼셰비키당은 이러한 주도권 싸움에서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도권 싸움을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게 있었습니다. 바로 중앙행정기관이 볼셰비키당이 믿을 수 있는 핵심 인사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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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들과의 협상안 가안은 분명히, 노농적군은 스워지니치니의 ‘혁명군’ 계획으로 편성될 것이라 적혔습니다. 그러나, 이 가안이 중앙집행위원회에 보고되고 승인되는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스워지니치니 본인이 노농적군의 핵심 보직 그 어디에도 올라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전쟁영웅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의 보좌관이자 사회주의 혁명과 아무 관련이 없었던 [니콜라이 스토고프] 중장, 귀족 출신으로 서부전선 병참감과 군사 통신 담당을 겸임했던 [니콜라이 라텔] 소장, 러시아 제국의 정예부대이자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예부대로 이어진 라트비아 소총군의 수장이자 볼셰비키 당원도 아니었던 [유쿰스 바셰티스] 대령 등이 노농적군의 수뇌로 발표되며 회의장에선 일대 파란이 일었습니다.
스탈린은 분노하며 ‘최고군사평의회가 백군을 위해 일하고 있다’라는 폭탄 발언을 내뱉었고, 지휘관이 병사의 선거로 뽑혀야 한다고 믿던 니콜라이 키릴렌코나 혁명군 방안에 동의하던 좌파공산주의자들도 분노했습니다. 이들이 단순히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귀족 출신 지휘관들을 통제하기 위해 노농적군 총정치국과 정치위원들의 권한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질 것이고, 혁명군은 통째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부에 넘어가게 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트로츠키 이들에게 맞서 ‘전쟁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라며 이러한 반발을 모조리 쳐냈고, 레닌이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극좌파와 고참 당원들의 반발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윽고 스워지니치니가 남부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 발표되자, 노농적군의 계획안을 만든 선구자인 그가 좌천당하는 듯한 모양새에 많은 이들이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스워지니치니는 그 발표에 대해 평소처럼 열변을 토하는 대신 조용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 흑군과의 협상에 참여하긴 했지만 큰 역할을 했던 바레츠노프가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노농적군 개편안에 열렬히 찬성하며 흑군과의 연락담당관에 자원하자 분위기는 묘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귀족 출신 무당파 장군들의 영입을 반대했던 스탈린이 남부전선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자 많은 인사들은 식은땀을 흘릴 지경이었습니다.
이는 스워지니치니와 바레츠노프를 묶어 전선에 보내고 스탈린으로 그 둘을 감시하겠다는 의미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스워지니치니와 바레츠노프는 회의가 종료되는 순간까지 반대의견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둘은 그저, 파우코이가 둘에게 가져다준 체스 말을 자신의 자리 앞에 두고 가만히 지켜볼 따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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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파우코이를 통해 스워지니치니와 바레츠노프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레츠노프가 귀족 출신 장교들에게 접근하고, 스워지니치니도 이 접근에 동조하는 것을 레닌은 전부 알고 있다로 시작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전쟁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며 귀족 출신 장교를 ‘공개적으로’ 영입한 트로츠키와는 달리 이들의 활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레닌은 이를 결코 하하 호호하며 넘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레닌은 둘에게 남부전선에서 전공을 세우면서도 절대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과제를 내렸습니다. 지도부와 자주 대립하던 스워지니치니에게는 특히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스워지니치니 ‘개인’을 존경하는 추종자는 많았지만, 중앙집행위원회를 비롯한 정치권, 행정부, 군부 내의 고위직 중 그의 아군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는 얄궂게도 개인 자격으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합류했던 트로츠키와 똑같은 입장이었습니다. 트로츠키와 스워지니치니의 사이는 무척이나 나빴고, 이는 사람을 무시하는 트로츠키의 언행에 스워지니치니의 폭력적인 성격이 충돌한 결과였습니다. ‘두 동지가 서로를 싫어하는 것은 동족 혐오다’라는 기괴한 평이 있을 정도였지요.
레닌은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가인 트로츠키를 조금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바레츠노프의 경우 외교관을 자임한 만큼 해외 주재 대사로 파견해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7월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인 스워지니치니를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당장 배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레닌은 당분간 스워지니치니를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귀족 출신의 장교들의 모임에 거창한 당파명은 어울리지 않으니 ‘체스 동호회’라는 이름을 붙이라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충고와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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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체스모임이 여기서 나오는군요
레닌은 모든걸 알고 계신대! 는 원본이랑 같은데, 파우코이가 유능해졌군요 ㅋㅋㅋ 이름도 본인이 지은게 아니라 레닌이 지어주고...
본래 체스를 좋아했다죠(?)
난 분량이 없네...
이 스토리에선 무소식이 희소식이죠
@렌지파일
@돈이 곧 진리 만협추 에필로그에서 언극없던 김상덕을 생각하면 될듯
드디어 소설판의 첫 하이라이트 등장.. 역시 조금은 달라진 연대기에서 카플란이 어떻게 표현될지도 궁금하네요 ㄷ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을 최대한 풀어서 쓰다보니 생각보다 양이 많아지네요 ㅋㅋ
4일-2일-10일-4일... 의 주기로 순환하는 연재니까 오늘 3화가 올라올거라는 기대를 해도 되겠죠(?)
연재는 제맘대로입니다(?
@렌지파일 오 그럼 언젠가는 하루에 10개가 이어서 올라오는 연참도 가능하시단거군요(?)
@dear0904 그건 무리일걸요...ㅎㅎ...
@dear0904
가안은 적어놓았고, 아마 내일 올릴 듯 합니다. 다음 편...은 아니고, 다다음 편부터는 전개가 소설과도 좀 달라질 듯 합니다.
@렌지파일 과연 어디서 달라질것인가...라고 해도 기억이 잘 안나니...ㅋㅋ
@렌지파일 오... 바뀌는걸 보는 느낌이 있겠군요 ㅋㅋ 연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