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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
2013. 1. 금계
지난 2012년 12월 4박6일로 계림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이 여섯 번이라면 결코 많이 다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여섯 번째의 해외여행에서 느낀 점이 많았다.
첫째, 나는 텔레비전에서 얼마든지 자주 보여주는데 해외여행 해봤자 돈 들고 고생만 한다고 코웃음을 쳐왔다. 그러나 막상 나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직접 그 땅을 밟아보지 않고 텔레비전 시청만으로는 도저히 그 나라의 냄새를 맡을 수도 없고, 그 나라의 분위기나 그 나라의 음식이나 그 사람들의 세계관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요컨대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이제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느 누구처럼 집을 팔아서라도 세계 여행을 다니고 싶은 심정이라고.
둘째, 여행경비가 천차만별이었다. 열아홉 명이 계림 여행을 4박6일 똑같이 하면서 같은 호텔에서 자고 같은 버스 타고 같은 식당에 들어가는데 우리보다 10만 원 20만 원 싸게 주고 온 사람이 여럿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여행사의 미묘한 속사정이 숨어 있겠지만 입맛이 씁쓸했다. 그래도 나는 애써 조금쯤 비싸게 주고 다니는 게 좋다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부지런하고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은 인터넷을 열심히 뒤적이면 훨씬 싼 값에 다닐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셋째, 가능하면 친구들이나 부부끼리 배낭여행이 고생은 많지만 뜻도 깊고 값도 싸다. 거기 비하면 패키지여행은 너무 자유가 없고 일정이 꽉 짜이고 쇼핑도 많이 해야 하니까 선뜻 내키지 않는다. 가능하면 배낭여행이나 단독 여행을 많이 다닐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여섯 번 모두 패키지였다. 그래도 해외여행이 서투르다거나, 외국어가 약하다거나, 나이가 늙었다면 패키지여행이 훨씬 더 편리할지도 모른다.
퇴직교사 모임인 화백회 회원 네 명에다가 아내까지 다섯 명, 이 정도면 여행이 쓸쓸하지 않다. 게다가 아내는 다른 세 명하고 동갑이니 데면데면하지 않고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만남이라면 썩 괜찮은 편이었다. 앞으로는 아내와 둘이서도 어디든 갈 수 있겠다 싶지만 돌이켜보니 여섯 번 모두 외롭지 않은 나들이 길이었다. 상하이 여행 때와 백두산 여행 때에는 전교조 목포지회 주최였고, 베이징 여행 때에는 처남 내외와 그 친구 분들을 따라갔고, 인도네시아 발리 여행은 우리 조 씨 가문 열여덟 명이었고, 터키 여행은 아내 계원들과 여섯 명 동행이었다.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여행은 행복하였다. 여행뿐 아니라 이 세상살이도 다른 사람들과 오순도순 잘 어울려 살아갈 일이었다.
오거리 덕인주점 주인은 나보다 한 살 위이지만 허물없이 친구를 삼기로 했다. 얼마 전 덕인주점 술자리에 그까지 합석하여 즐기는데 내가,
“이제 나이를 먹다보니 나이를 떠나서 같은 하늘을 이고 동시대에 태어나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반갑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고맙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 모두 고맙데.”
그랬더니 그 주인 왈,
“맞어, 맞어. 자네같이 태어나서 고맙다고 하는 말씀은 처음 들어보네.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라니까.”
그래서 내가 술 한 잔 얼큰한 김에 기고만장하여 떠들었다.
“글쎄, 그렇다니까. 태어난 것 자체가 행복하다니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찌 내가 이 사람들하고 이 자리 앉아서 맛난 은학상어, 꿩고기에 술을 마실 수 있겄는가.”
첫째 날은 인천에서 동방항공으로 계림 국제공항에 자정 가까워 도착했고 둘째 날 이강에서 배를 탔다. 배 타기 전 자칭 전주 이 씨라는 연변 조선족 안내인이 예고했는데 유람선을 타니까 아니나 다를까 아주머니가 이강에서 잡았다는 민물 게 튀김에다 아몬드 섞은 접시와 도수 높은 배갈주 ‘이강주’를 가지고 나타났다. 도합 만오천 원이라 했다. 총무인 류 박사가, “형님, 살까요 말까요?” 나는 이미 출국 전 아내한테 술 조심하겠다는 각서를 썼지만, ”마셔 부러!“ 정말 참을 수 없는 각서의 가벼움이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조사해보니 계림은 네 가지가 좋단다. 산이 푸르고, 물이 맑고, 동굴이 기이하고, 바위가 아름답다던가.
한 시간 가량? 유람선으로 이강을 구경하니 이태백이 물에 뛰어들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나도 달만 떴더라면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수 높은 이강주가 들어간 김에 나는 호언장담을 했다. “이번 일정이 4박6일이지만 나는 이강에서 이 미치도록 좋은 경치 구경하고 끝났네. 이제 다 봤어. 더 볼 것도 없다니까. 나머지는 후렴이여, 후렴.”
아내는 몇 방울 남은 이강주 병을 한사코 숨기려 애썼지만 나는 기어코 그 병을 찾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웠다. 미안하오. 내 호를 취공(醉空)이라 불러다오.
산호초가 석회암이 된다. 3억 년 전 바다 밑 석회암이 화산 폭발과 지각 변동으로 솟아올라 육지가 되었다. 풍화침식 작용으로 지금의 계림과 하롱베이의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을 빚어냈다. 광서성 계림은 베트남 호치민시와 지호지간이다. 금강산은 일만이천 봉이지만 계림은 삼만육천 봉이란다. 계림을 닮은 우리나라 산봉우리는 마이산 두 봉우리뿐이란다.
별유천지비인간 (別有天地非人間), 사진으로만 보던 계림에 당도하여 나는 넋이 달아났다. 그 황홀한 자연경관 때문이었다. 절대로 술 때문이 아니었다.
이강을 본 뒤풀이로 무용과 서커스가 어우러진 몽환이강 쇼를 보았다. 몽환이강(夢幻漓江), 어쩜 그리 이름과 실상이 딱 맞아 떨어질까. 계림이 몽환의 세계요 이강이 몽환의 세계였다. 중국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공연이었다. 정교함의 극치, 화려함과 뻥튀기의 최고봉! 서커스를 볼 때마다 나는 애수의 트럼펫 소리와 함께 사라진 우리나라 유일의 동춘 곡마단을 떠올리며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신다. 서커스가 사라진 나라는 꿈과 낭만이 떠나간 나라가 아닐까.
우산공원, 우 임금의 사당을 모셨단다. 공원에서 파는 사탕수수는 지름이 한국보다 다섯 배는 굵었다. 압착기로 단물을 짜서 한 컵에 천 원! 둘이 나눠 마시려 했는데 아내가 맛을 보더니 따로 한 컵씩 마시자 했다. 워따메, 시원하고 맛있는 거.
용왕의 일곱째라던가 아홉째 자식이라던가. 똥구멍이 막혔단다. 먹을 줄만 알지 쌀 줄을 모른단다. 차곡차곡 쌓이는 부의 상징이라서 부자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렬히 숭상한단다. 우리는 예전에 꽉 막힌 사람을 ‘매캥이’라 불렀다. 워메, 징헌거. 중국 사람들은 모두 ‘매캥이’란께.
우산공원에 멋진 3층 누각이 있었다. 예전에 여관이었다던가. 장개석 총통이 며칠 묵었던 방 침대를 그대로 보존 전시했다. 총통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참, 중국, 대단한 나라다. 대장정! 총통한테 쫓겨 만 리를 도망 다니고 동지의 절반을 잃었으면서도 여태껏 총통의 흔적을 기념한다니 그 아량이나 배짱 한 번 우리도 본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곰곰 반성해볼 일이었다.
계림 시는 100만 명쯤 된다던가. 이틀 밤 계림 시에서 묵고 80킬로쯤 떨어진 양삭으로 이동했다. 계림의 풍광이 천하제일이라면 계림에서는 양삭이 으뜸이라 했다.
양삭으로 가는 도로, 계림 주변 도로는 어디 가나 사진과 똑같았다. 편도 1차선, 왕복 2차선, 양쪽에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다니는 갓길. 운전사들은 왕복 2차선만 아니라 눈치껏 갓길도 활용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왕복 2차선이 아니라 왕복 3차선이나 3.5차선쯤 되는 셈이었다. 거기에서도 중국 사람들의 만만디나 똘레랑스가 엿보였다.
양삭에서 맨 처음 간 곳이 은자암 동굴. 역시 석회암 종유석. 밑에서 자라 올라오는 놈, 위에서 내려가는 놈, 위아래 맞붙은 기둥. 주꾸미를 닮은 놈.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되게 굴이 엄청 길고 대규모였다. 가운데는 대형 선풍기를 틀었는데도 땀이 날 만큼 더워서 빠져나오느라 애를 먹었다.
저녁 먹고 ‘인상유삼저’ 공연 관람. 전주 이 씨 안내인은 어디서 장난감 등불을 사다가 간짓대에 매달아 우리 관광단 표지를 삼았다. 야외 관람석, 우리 들어갔을 때에는 빈자리가 보였지만 나중에는 꽉 찼다. 3천 명이라던가. 2012년에 계림은 관광객이 3천만 명을 넘어섰단다.
중국의 거장 장예모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란다. 주로 현지 주민들로 채워진 600여 명의 방대한 등장인물, 멀리 이강 너머 바위산까지 야간조명으로 배경을 삼은 통 큰 무대, 강 위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군무와 함성과 환상적인 무대 소품들, 요지경을 들여다보는 듯 현란한 빛의 마술,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었다. 유달산에는 괜히 무덤덤한 조명을 밝혀 전기세만 축내는 인상이었지만 계림에서는 깜깜한 무대에서 갑자기 먼 뒷산들이 훤히 밝아왔을 순간 수천 명이 일제히 ‘아!’ 놀라운 환호성을 터뜨렸다.
최 진사네 셋째 딸 비슷한 줄거리, 류 박사 전 박사는 내용이 엉성하고 단조롭고 시시해서 별 감흥이 없다고 투덜거렸지만 나는 너무나 황홀해서 탄식을 멈출 수 없었다. 스토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광활한 자연을, 그것도 산과 물과 강가의 땅을 몽땅 활용하여 무대로 삼을 생각을 어떻게 했단 말인가. 이것이 중국 아닌 한국에서도 상상이나 가능한 노릇인가. 또 인민공화국답게 예술가뿐 아니라 평범한 인민들을 대거 등장시킨 것도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이강 유람선을 타고 계림 구경 다했다고 호언장담하였지만 그게 아니었다. ‘인상 유삼저’ 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짜잔헌 카메라 때문에 밤무대를 제대로 찍지 못해서 유감이었다. 자세한 공연 광경이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뒤적거려 좋은 사진들을 많이 찾아 감상하시기 바란다.
양삭에서 하룻밤 묵고 ‘세외도원(世外桃源)’을 구경했다. 도연명의 ‘무릉도원’과 관계가 있을 성싶기도 하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자면 대만의 실업가가 계림에서 세 번 실패하고 네 번째 기획한 관광지가 드디어 성공했단다. 세상에나, 우리는 많은 돈을 쏟아 부어 한두 번 실패하면 포기할 텐데 중국 사람들은 배포가 이만저만 아니다.
유람선을 타고 한 시간 가까이 무릉도원에 걸맞은 수려한 산과 물과 별세계를 구경했다. 쫭족, 동족, 야오족, 묘족. 계림 인근에는 소수 민족들이 많이 산다. 배를 타고 천천히 나아가면 그 소수 민족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춤과 노래로 환영하고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워따메, 이곳을 구경하지 않고 어찌 계림을 왔다 갔다고 뻐길 수 있으리오. 네온사인 반짝이며 차량과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문명사회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적요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초라하고 왜소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세외도원을 구경하고 다시 계림을 거쳐 용승온천으로 갔다. 계림에서 세 시간 반이나 걸리는 먼 거리였다. 계림의 석회암 예쁜 산들이 끝나고 해발 500미터 1000미터 되어 보이는 준엄한 봉우리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남해의 다랑이논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슬아슬한 다랑이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대밭이 산 전체를 뒤덮은 광경도 드물지 않았다.
[2편으로 계속..]
첫댓글 인상 유삼저..여행기 프로에서 봤던 기억이나네요.
힘든 묘족 여인들의 노래소리도 들리는듯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