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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정원 스크랩 [경북/영덕] 전통 고가(古家)로의 여행, 영해 괴시리마을
연초록 추천 0 조회 52 10.10.30 07: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통 고가(古家)로의 여행,

괴시리 마을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1리 (호지마을)

 

200여전의 세월을 이어온 전통마을,

인적 드문 돌담길과

여유로운 풍경이 있다.

산길로 들길로 곱게 난 깔끔한 길로의 여행,

세월 머금은 고택과의 어울림이 좋은 전통마을이다.

 

 

 

 

영덕 영해, 괴시리마을,

200년 넘은 가옥들이 즐비한 호지마을이다. 너무도 잘 정돈된 느낌이 치장 잘한 규수와 같아 비딱하게 보일수도 있다. 너무도 정갈한 풍경에 짐짓 넉넉한 여유를 즐기기에 모자란듯도 싶다. 그러나 우리네 멋진 '집'들에 대한 보전, 보존은 그 어느곳보다 잘 보호되고 있다. 아니, 철저하다 싶을 정도의 정갈함이다. 보전이라는 이름아래 방치된 고가옥보다는 백배 낫다. 전통 한옥체험이라는 이름 아래 불편함의 감수를 요구하는 체험보다 낫다. 괴시리마을은 직접 살며, 청소하고, 보수하며 관리되어 있다. 큰 틀은 두고 사는 사람이 우선인 셈이다. 그러면서 저마다의 집들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르다. 보전되어야 할 테마의 또 다른 본보기가 될수 있겠다.

 

지금은 괴시리 전통 마을이라 불린다.

7번 국도상 울진에서 영덕을 따라 가다 영해 사거리에서 12번 지방도를 따르면 시간이 멈춘듯한 옛 풍경들을 지나 옥토를 넘어서면 옛 과거의 고즈넉한 고가의 한옥들이 즐비하게 선 자리가 있다.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목은 이색 선생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마을 앞으로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주위로 늪이 많았으며,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골이라 불렸는데, 목은 선생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중국 구양현(毆陽玄)의 괴시마을의 풍경과 호지마을의 아름다운 풍광이 비슷하다하녀 과시(槐市)마을로 고쳐 불렀다. 마을의 앞으로는 기름진 영해 평야가 그림같은 풍경으로 펼쳐져 있으며 남동의 망일봉에서 내린 산줄기가 괴시마을 '八'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이런 지형으로 대부분의 집들은 서남향이다.

고려말, 함창 김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으며, 조선 명종때 수안 김씨와 영해 신씨가 들어왔으며 인조때 영양 남씨가 들어와 살았다. 이 후 다른 3성씨들은 점차 다른곳으로 이주 하였으며 지금은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이루어졌다. 관내에서는 보기 드문 고가옥들로 남씨 괴시파종택을 포함하여 6점의 고택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과시리 마을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선생의 출생지로 목은의 외가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시호는 문정(文精), 고려말 대학자 가정 이곡선생과 함창 김씨사이에서 괴시리 무가정(無價亭)에서 태어났다.

20세때, 부친이 머물던 원나라로 유학을 한다. 이후 고려로 들어와  26세에 과거급제 하였으며 숙옹부승을 시작으로 우간의대부를 지내다가, 40세에 판개성 부사 및 성균관의 대사성을 겸직한다. 47세에는 왕명을 받아 같은 영해부 출신의 나옹선사의 비명을 지었다. 65세에 이르러 태조에 의해 조선이 개국 되었고 태조는 선생에게 한산백으로 봉하며 국정에 서 주길 바랬으나, 선생은 고려조에 충성을 다하고자 모둔것을 고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나이 69세 되던해 여강 청심루 아래 연자탄에서 세상을 떠났다.

7천여수의 시문을 남긴 대문호이자 성리학을 진작시킨 대학자인 목은선생을 받들고자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2006년 6월 목은기념관을 세웠다.

 

목은의 부친 가정공 이곡누군인가,

우리나라 역사 속, 들어내지 않는 치부 "공녀폐지"에 앞장 선 장본인이다.

가정공 이곡(稼亭公 李穀, 1298~1351)선생은 고려말의 대학자로 고려와 원나라의 성리학 종장으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타고난 학식과 외교능력을 지닌 분이다. 당시 고려여인들은 원나라의 지배속에 "공녀"라는 이름으로 원나라로 끌려가 그들의 노리개로 전락하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고려판 정신대로 가정공은 1335년에 공녀폐지요청의 항소문을 올리게 된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황제의 명으로 처녀들을 원나라로 끌고가던 시대인것이다. 그것을 피하고자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풍습 아닌 풍습이 생겼으며, 이로서도 피할수 없을때는 일부러 몸을 헤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사정을 적은 가정공의 상소를 접한 원나라는 더이상 고려여성의 '공녀"를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여인들의 수난은 이후 20여년간 더 지속됐으며, 공민왕 5년(1356년)에 이르러서야 중단이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가정공의 공덕을 기려 곡도와 감사제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

 

괴시리 마을의 초입격인 노인정의 뜨락에는 수령 150년이 넘은 거재한 왕버들이 춤사위를 벌이듯 하고 선다.

고택들의 사이로 곧고 길게 난 길을 따르며 깊은 가을의 기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괴시마을의 길, 치장한 담장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이지만 담장안으로 고택이 풍기는 세월의 모습은 그대로다. 검은 나무빛과 흙빛의 조화가 부드럽고 매끄럽다.

 

잘 정돈된 마을의 모습에,

길손의 마음까지도 정갈해지는 곳이다. 아직은 많지 않은 사람들이 ?는 곳, 깊은 가을 한번쯤 고택으로의 나들이도 좋을듯 하다. 

 

 

 

 

 

괴시리 영감댁(도문화재 자료 제424호)

호은공 남흥수(濠隱公 南興壽, 1813~1899)가 1847년경에 세운 건물로 1938년에 공의 증손이 중수하였다. 호은공은 정재 유치명의 문인으로 빈민규휼에 앞장서고 후학교육에도 힘썼다.

1950년대 까지는 대문채와 방앗간, 마굿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도민속자료 제75호)

17새기 말에 건립된 건물로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된다. 정면8칸, 측면 5칸반의 'ㅁ'자 건물인데, 사랑채 부분이 오른족으로 3칸 돌출되어 있는 한쪽 날개집의 형식을 취한다. 사당은 1900년댜 초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3칸, 측면1칸 반의 맞배기와집이다.

스차에 걸친 보수로 배치와 평면상에 다소의 변형이 있다 하지만, 조선후기 주택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가옥이다.

 

 

 물소와 서당(勿小窩 書堂, 도 문화재 자료 제394호)

물소와 남택만(물소와 남택만, 1729~1810)의 학덕을 추모하고 학슴의 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50년전에 건립된 서당으로 한대는 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ㅡ'자형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맞배지붕이다. 중앙은 4분합문을 잔 대청이며 좌우로 방을 두었다.

 

 

 

물소와 고택 (도 문화재자료 제198호)

조선 후기 주택양식의 전형적인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 정침과 고방, 중방, 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택은 유교적 윤리에 따라 남,녀의 생활공간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목은기념관

괴시리 마을이 목은선생의 유허지로 그를 기념하기위해 2006년 6월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목은 산책로의 진입로에 있으며 인근에는 홍련암이라는 암자가 자리한다.

목은선생의 연조와 가계도, 출생지와 사지가 같았던 나옹선사와의 이야기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옆으로 선생의 출생한 무가정터가 자리한다.

 

 

 

 

영해 구계댁(寧海 邱溪宅, 도 문화재자료 제396호)

호지마을의 좌측에 자리한 고택으로 졸헌 남경악(졸헌 남경악, 1763~1821)이 1805년경에 세운 건물이다.

홑처마 팔짝지붕으로 정면 4칸, 측면6칸의 'ㅁ;자형 구조다. 정면으로 1칸 돌출되어 있는 사랑마루가 돌출되어 있으며, 안채의 평면은 겹으로 이루어져 정면 2칸을 2통칸의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꾸몄으며 좌측에 부엌을 우측에 건너방을 두었다.

 

괴정(槐亭, 도 문화재자료 제397호)

1766년 괴정 남준형(괴정 남준형)이 지은 정자다. 영조 29년 사마시 합격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괴정에서 경서와 학문의 연구, 후진양성에 힘썼다. 양로회를 만들어 노인을 공경했으며, 벼슬아치들의 횡포로 부터 민초들의 세금을 감면하는등의 민생에 열중했다.

괴정의 뜻을 이어 최근까지 학당으로 쓰였으며, 현재는 다도예절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괴시리 사곡댁(沙谷宅, 도 문화재자료 제425호)

남용이 고종때 건립한 건물로, 현 건물 소유자의 고조부인 남조영의 처가 동명인 경주사곡을 따서 이름 지었다.

정면4칸, 측면5칸의 'ㅁ'자형 건물로 사랑방 전면 지붕이 박공으로 되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imfo..............................................................................................................................................

영해 괴시리 전통마을(호지마을)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1리  /  영덕군청 문화관광과 054-730-6114

 

 

by 박수동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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