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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알려준 것 세 가지: 삼우제를 마치고
써보라고, 무슨 내용이든지 한번 써보라고, 그것이 고인에 대한 추모도 되고 자신에 대한 위로도 될테니, 한번 써보라고 하는 권고를 들었을 때, 나는 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조문객들도 다들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우제를 치루고 돌아와 자고 일어난 오늘 아침, 나는 이 사람이 쓰던 안방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할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 할 말이 많아졌다. 너무 많아졌다. 의사의 사망판정을 받은 5월 11일 오전 10시 52분 이래, 장례 절차를 준비하고 집행하면서 나는 내내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혹은 이 사람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시 말해,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잘못을 저질러왔는지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쉽게 알게 되었다. 그것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깨닮음은 이 사람이 가져다준 것이다. 이 사람이 자기의 죽음으로 알려준 것이고, 자기의 죽음으로 증명한 것이다. 컴퓨터 바로 옆에는 영정과 위패가 세워진 작은 제단이 마련되어있다. 어젯 저녁에는 맥주와 포 등의 마른 안주를 올렸는데, 아침부터 술은 좀 그렇게 해서, 지금은 그냥 오렌지 두 개만 올렸다. 장례식 내내 나를 제일 힘들게 했던 것은 저 사진이다. 어째서 저 사람이 저렇게 사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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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이번에 증명한 첫 번째 것은, 자기가 많이 아팠다는 사실이다. 자기가 오랜 기간 많이 아팠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증명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 물론 내가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집사람이 아프다는 것, 상당히 아프다는 것은 잘 알았다. 그러나 나는 평소에 속으로 집사람을 향하여 “죽을 만큼 아프다는 말인가?” 하고 따지곤 하였다. 주말에 안양으로 올라왔는데, 집은 어질러진 채 방치되어 있고 집사람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다. 이 때 나는 속으로 그렇게 따졌으며 어떤 때는 드러내어 그렇게 따졌다. 몇 차례의 제사와 명절, 시부모의 생일, 어버이 날 등 누구나 챙기는 기본적인 행사를 겨우 겨우 챙길 뿐 시댁 일에 열성을 다하지 않는 집사람을 볼 때 나는 그렇게 따졌다. (나는 장남이다.) 친정 부모 돌보는 일도 두 동생에게 밀어 놓고 가끔씩 가서 편하게 놀다가 올 뿐인 집사람을 볼 때 나는 그렇게 따졌다. (이 사람은 딸만 셋인 집의 장녀다.) 그러나 그 정도로 그렇게 아팠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트 어택에 노출될 만큼 몸 전체가 쇠약하고 순환기를 비롯한 여러 기관(호흡기, 척추 등)이 노쇠하였으며, 응급처치 후 심장 박동이 다시 시작되었으면서도 오래 버티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쇠약하고 노쇠하였다.
장례식장에서 딸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두 아이는 나와 인식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집 사람은 내가 집에 없는 주중에 더 아팠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가 아프다는 것을 나에게 어느 정도 숨겼던 것이다. 숨겼다는 말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아프면서도 어느 정도 할 바를 하였다는 뜻이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의 건강 상태에 대해 평생 혼란을 느껴왔다. “당신은 아픈 사람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입원을 하든지, 와병을 하라. 그렇게 하면 내가 환자로 대접을 해주겠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정상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평소에, 집사람을 평가하여, 육아는 A, 요리는 B, 그리고 청소는 D를 부여하였다. “방을 어질러 놓는 사람은 머릿속도 그런 거야.” 나는 이제 내가 냉혹한 사람이고 용렬한 사람일 뿐 아니라, 제일 기분 나쁜 것이지만, 인식 능력에 문제가 있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사람이 어느 정도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프지 않은 모양이네”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저 일을 다해냈군.”이라고 생각하였어야 한다.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사람은 아픈 몸을 이끌고 이 집 살림을 다해왔다. 나는 이제 내가 이 여자에 얹혀서 살아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몸이 아픈 이 여자에게 얹혀서 말이다. 우리는 두어 달 전, 의왕시에 있는 주상 복합의 아파트를 한 채 계약하였고, 그 비용을 대느라 집을 팔고 전세로 옮겼다. 이제는 내가 나서서 중도금 지불하는 것, 은행 융자를 받는 것 등등을 해야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랬다. 20여년 전의 일이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분양받은 것은 의왕시 오전동의 25평짜리 벽산 백합 아파트다. 발인 날 영구차는 공교롭게도 바로 그 아파트 곁을 지나, 두어 달 전 계약한 주상 복합 아파트의 건설 현장을 지나갔다. 내가 나름대로 자유롭게 살아온 것은 곁에 계약이니 대출이니 하는 복잡한 일을 해 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식사 후에 서재에 들어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설거지를 해 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이나 하기 어려운 말을 별로 하지 않고 세상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집사람이 최소한 가난함을 가지고 바가지를 긁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이것을 똑똑하게 안다. 그러나 이제야 알다니,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빈소에서 나는 휴대용 물수건을 뽑아내어 향로 주변을 자주 닦았다. 재가 계속 떨어져 지저분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원통해하면서 정성을 들여 깨끗이 닦아내었다. 그까짓 청소가 뭐라고? 집사람이 청소를 잘 하지 못하면, 내가 대신 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장지에서 돌아와 내가 제일 처음에 한 일은 집 사람이 쓰던 안방을 청소한 것이다. 깨끗이 청소를 하고 재단을 차렸다. 영정 사진은 큰 아이 결혼식 때 찍은 것이다. 내 옆에서 그 여자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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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죽음으로 증명된 두 번째 것은, 이 사람은 연극인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증명을 필요로 하는가?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는 연극인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사실이, 주변 사람들 중 유독 그녀의 남편에게는,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요,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 나는 그 동안 연극인으로서의 이영복(李永馥)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의 공연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관람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심지어 그녀가 연극인이라는 사실이 내 의식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이 점은, 내가 그 쪽 사람들에게는 부고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사실로, 아니, 그 쪽 사람들에게 부고를 할까, 말까 하는 질문조차 떠올리지 않았다는 사실로 잘 알 수 있다. 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사위에게 주면서 알아서 적당히 하라고 말했으며, 잊어버렸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 조문객들이 한 분, 두 분, 한 팀, 두 팀 들어오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많은 연극인과 예술인들, 특히 의왕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많은 분들이 이 사람을 찾아준 것이다. 둘쨋 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화환과 조기(弔旗)를 이동시켜, 고인(故人) 본인을 보고 보낸 것들이 빈소 안에 들어오게 하였다. 예컨대, 한국연극협회이사장, 경기도연극협회장, 의왕시예총 등에서 온 것이 있었고, 의왕시장, 의왕시의회의장, 지역국회의원 등이 보낸 것이 있었으며,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동문회 등 모교 중앙대와 관련된 것들이 있었다. 아, 이 사람이 바깥에서 제법 인정을 받았던 모양이구나.
집사람은 평소에 자기 일에 대하여 나에게 많은 말을 했고, 그러는 중에 많은 이름을 거론했다. 나는 대체로 건성으로 들었지만, 하도 자주 들어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이름들 -- 예컨대 형민씨, 경희씨, 수빈씨, 승걸씨, 강감독, 장국장 등 -- 도 있는데, 나는 장례식장에서 그 이름들의 주인을 볼 수 있었다. 이 분들 중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는지, 다른 지부 -- 예컨대 부천시 연극협회나 과천시 연극협회 등 --에서 온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는지, 아니면 집사람이 한 때 이끌던 아마추어 극단의 회원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몇몇 분이 ‘열정’과 ‘욕심’에 관하여 말했다. 이대표님은 연극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일에 대한 욕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집사람은 자기가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한다고 나에게 말하곤 하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 열정을 발산하기도 하였구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보였다. 그 중에는 초창기(1990년대)에 같이 작품을 하였던 사람들, 예컨대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공연하였던 연기자들도 들어있다. 아, 이 사람이 바깥에서 인정을 받고 심지어 사랑을 받았구나.
이 사람이 연극을 시작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인 1976년의 가을이었을 것이다. 그 때 현대극장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아버지의 반대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포기한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 때 김의경 대표가 지어준 예명이 이사리였는데, 이번에 나는 그 예명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만났다. 그 후 그녀는 결혼을 하였다. 그러다가 둘째 아이까지 어느 정도 키운 후 새로이 연극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그녀가 38세 경, 즉 1994년 경의 일이다. (이 때의 일은 내가 예전에 까페에 올렸던 ‘여자는 정말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와 있다.) 이것은 순전히 고교 동창이며 대학 동창인 극작가 주찬옥의 설득과 지원에 의한 것인데, 당시 대학로 등에서 공연한 주요 레파토리는 역시 주찬옥 교수의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그 이후 이영복은 당시에 거주하던 의왕으로 무대를 옮겼다. 연극협회 의왕시 지부를 설립한 것이다. 의왕시 지부를 설립하면서 ‘극단 의왕 97’을 창설하였으니, 지부 설립은 1997년이나 1996년 경의 일이 아닌가 싶다. 이 때부터는 연기와 더불어 기획, 행정까지 맡아서 하였다. 즉 무대에 올릴 작품을 결정한 후 예산을 따내고, 배우들과 연출자, 그리고 조명 감독을 비롯한 기타 스태프들을 캐스팅하여 연습을 시킨 후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이 대표는 많은 작품에서 본인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정극도 올렸지만 마당극이나 퍼포먼스도 올렸고, 아마추어 극단을 지도해 경연대회에 출전시키기도 하였다. 내가 알기로, 연극인으로서 행한 마지막 일은 올 봄에 인근 고등학교의 영어연극 ‘사운드 오브 뮤직’을 지도한 것이다. 장 꼭또가 각색한 ‘안티고네’에서 나레이터 역할을 맡아 연기했던 원숙한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마 10년 쯤 전, 그러니까 이영복이 48세 경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가장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38세의 나이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주인공 정희역을 연기할 때의 모습이다. 정희의 20대 모습까지 연기하였다. 앞에서 그 이름을 거론했던 강감독이라는 분은 현직 지부장이 타계한 것이니 의왕시 예술인장으로 장례를 치룰 수도 있었는데, 경황이 없고 전례가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면서, 그 대신에 일주기 때 추모 공연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내 아내 이영복이 이런 사람인 줄을 이제야 알다니...... 강감독의 제안으로 영구차는 이 대표가 여러 번 공연하였던 의왕시 여성회관을 경유하였고, 그녀가 연습 장소로 자주 활용하였던 의왕시 문화원을 경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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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전부 울었다. 고인은 두 여동생(내 처제들)과 평생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두 여동생은, 언니가 원래 몸이 약하고 자주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부모님의 병수발 등 친정 일에서 항상 면제시켜주곤 하였다. 큰 동생은 가까운 곳(산본)에 살면서 큰 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연극과 관련된 일, 연극과 무관한 일 가리지 않고 언니를 도와주었는데, 우리는 큰 동생을 가리켜, 농담으로 언니의 ‘매니저’라고 불렀다. 천사 같은 심성에 현명함까지 갖춘 작은 동생은 아마 이번에 제일 많이 운 사람일 것이다. ‘언니, 언니’ 하면서 흐느껴 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인의 시누이(내 누이동생)와 동서(내 남동생의 처)도 상복을 입었으며 많이 울었다. 그런 것을 보면, 집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시댁 사람들과도 깊은 감정의 교류를 가졌던 모양이다. 시동생(내 남동생 영진이)은 이틀에 걸쳐 장지(葬地)를 물색하여 결정하였을 뿐 아니라 2천 8백만원의 비용까지 지불하였는데, 그것을 보면 형수와 시동생 사이에도 쌓아온 정이 두꺼운 것 같다. 고인은 시동생 부부에게 항상 미안해했다. 그러니, 발인제를 지낼 때 내가 가족 전체를 향해 뱉어낸 다음과 같은 말은 결코 가족들을 원망해서 한 말이 아니다. 제단이라고 하는 약간 높은 곳에서 이 사람이 우리를 보고 웃고 있다. 가족들 전체가 이 사람을 바라보고 경배를 한다. 이 때 내가 절을 하다 말고 일어서서 말했다. “당연히 가족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있지 못했어. 시댁에서나 친정에서나 말이야. 오늘에서야 중심에 있게 되다니” 이 말이 산 자 중 누군가를 원망하는 말이라면, 그것은 물론 나 자신을 원망하는 말이다. 나는, 자기 마누라를 추켜세우는 녀석은 팔불출이라고 생각해 왔으니 말이다.
이렇게 이 사람은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서 사랑을 받아왔으며, 모든 가족들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들에게서 사랑을 받아왔다. 두 딸들에 관한 한, 말할 필요도 없다. 육아 부문에 대해서는 학점 짜기로 유명한 나도 A를 주지 않았는가? 큰 아이는 자기 엄마가 자기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한 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다정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남편에 관한 한, 어떠한가? 그녀가 나를 사랑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혹이 없다. 조문객 중 여러분이, 이 사람이 “우리 애 아빠는요, 우리 애 아빠는요” 하면서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전해주었다. 내가 잘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따로 증거가 필요 없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으며, 사랑하지 않을 때는 미워했다. 덤덤했던 적은 없다. 연애 시절부터 우리 부부를 잘 아는 몇몇 친구들이 이번에 접객실에서 “저들은 불같은 사랑을 했다”고 말하면서 나를 위로하였지만, 불같은 것은 주로 여자 쪽이었다.
남자 쪽은 대체로 덤덤하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우선 나는 이런 질문을 별로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사랑이 별 거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위의 주상복합아파트와 전셋집의 계약을 집사람 이름으로 하게 하였다. 이런 게 사랑의 표현 아닌가? 그러나 집사람에게 이런 나의 태도는 덤덤함의 극치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 사람은 보다 일상적이고 조금은 더 애틋한 표현을 원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집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의 죽음으로 증명된 세 번째 것이 이것이다. 입관식 중 고인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전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곱게 화장을 한 집사람의 얼굴에 내 얼굴을 비비면서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어.”라고 쉰 목소리로 울먹였다. 여기에는 내 마음과 내 몸 이외에 따로 증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 몸은 멍게와 같다. 쿡 찌르면 물이 나온다. 아니, 내 몸은 해면(海綿)과 같다. 건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물이 흘러나온다. 이런 내 사랑을 좀 더 자주 표현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너무 아프다. 항상 거기에 있었는데. 빈소에 딸린 내실에 처제들이 들어가 있으면, 이 사람도 거기에 섞여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실에서 딸아이와 텔레비전을 볼 때면, 안방에 이 사람이 누워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76년 8월 말 경이었다. 그 때 나는 뒤늦은 문학청년이었다. 이 세상에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 있나?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지만 -- 이 때 나는 ‘인도여자’라는 제목의 습작시를 썼는데, 그 시는 까페에 올린 같은 제목의 글에 들어있다 -- 우리는, 내가 대학교 4학년 때인 1981년 5월 7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날짜로 치면, 이런 일이 생기기 4일 전이었고, 정말로 화창한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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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죽음은 나에게 세 가지 깨우침을 가져다주었다. 첫째, 이 사람은 많이 아픈 사람이었다. 많이 아프면서도 집안을 꾸려나갔고, 그 덕분에 나는 책 읽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둘째, 이 사람은 연극인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연기와 기획 등 연극 활동을 하였으며 그 일에서 상당한 업적을 쌓았고 또 그 만큼 인정을 받았다. 셋째,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한 여자였을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한 여자다. 비록 그 표현에서는 서툴고 인색하기도 하였으나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여자를 사랑하였다. 이 세 가지를, 집사람 생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그렇다. 확신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 적도 없지 않다. 그것이 원통하다. 그러나 이제라도 확신하게 되었으니 다행으로 여긴다. 여기까지가, 집사람과 내가 35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혹은 그 동안 내가 집사람에게 어떻게 잘못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장지는 용인 공원이다. 매장(埋葬). 파관(破棺)하였다. 비석 후면에 “열정적 연극인, 다정한 엄마, 사랑스런 아내”라는 글자를 넣었다. 합장묘다. 장지까지 따라와 준 조문객과 가족들을 향해 나는 “내가 언젠가 저 옆쪽 자리에 들어가 만날 테니, 너무 서러워하지들 마시라”고 크게 말했다. 그리고 “묘지가 마음에 들어 크게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오, 육백 미터 떨어진 곳에 박목월의 묘소가 있더라. 집사람은 대학교 때 박목월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용인 공원에 저녁 어스름이 깔리면 스승과 제자가 연극과 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도란도란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 스승에 의하면, “거기는 눈도, 비도 오지 않는 세상, 열매가 떨어져도 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니 나는 의연하게 도(道)닦으며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대 떠난 지 5일 째인 오늘, 그대의 따뜻한 뺨, 동그란 어깨가 그립다. 그렇게 쓰러지기 하루 전 날, 바지를 갈아입는 나에게 와서 내 엉덩이를 톡톡치면서, 그대는 “아이고 예쁜 엉덩이”라고 말했다. 그 손과 손가락, 이제는 조금 도톰해진 그 손과 손가락이 그립다.
첫댓글 조문을 해준 친구들에게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지 모르겠네. 나는 월요일이 되면 삼례로 내려가 화요일부터는 출근하네.
떠남은 새로운 만남. 떠나고 나니 새롭게 다가서는 깨달음과 아쉬움...하늘에서도 고마워할 거야. 서둘러 떠난 것 미안해 할 거야. 잘 이겨내리라 믿네.
친구야 애썼다 수고했다 그리고 직접조문했어야했는데 하필그때 애중씨와 제주도여행중이라서 박주원/박태호편에 부탁할수밖에없었음을우리부부는 너무안타까워했다 영태친구야 화이팅하자꾸나 조영태교수 힘!!!
지금부터야말로 영원한 애인으로 사모하는 여인으로 늘 기억되시겠네~~힘내시게~~
파관(破棺)하여 매장했으니 님이 바라는대로 따뜻함을 느끼며 편안하게 잠들어있을게야..
조교수 글을 읽다 불현듯 이런 글을 본 기억이 나서 적어본다
"내가 죽고 난 이후에 받을 고통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일부예요."
기운내시게나..
이거 말이야..마누라고 자식이고 다 사랑하고 소중하지만 이렇게 홀로 가는 것 보니까 이 또한 생판 모르는 타인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든다.어차피 우리도 어느 한순간 이 길을 가야 하니 너무 자책치 말기 바레..그래도 사랑하는 이를 잃다는 것은 너무 슬픈 것 같아 기운 내 영태성!
고귀한 사람을 보내는 당신의 마음을 어쩌 헤아릴수 있을까.. 육체는 땅속으로 녹아 들어갔지만 영혼은 좋은곳으로 가시어 지켜보고 계실터.. 기운차리고 열심히 살아보세~~
열정적 연극인, 다정한 엄마, 사랑스런 아내, 그 순서는 아무래도 다 어울리네
영태야~ 네 글을 읽으니 마음 속 깊은 눈물이 흐르는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