鄧麗君私家相冊 등려군 개인 앨범 (제3부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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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部分:无端更渡桑干水:北上的列岛 无端更渡桑干水:北上的列岛(1)
까닭없이 다시 상건(桑乾) 강을 건너다: 북쪽의 열도(1)
理由のなくまた桑乾の 川を渡る: 北の列島(1)
在东南亚与香港的成功使邓丽君想要去尝试更多的音乐可能,对��乐,她有太多的追求。
1973年11月她与日本宝丽金公司签约,预备着赴日本发展。
동남아시아와 홍콩에서 성공은 등려군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음악의 가능성을 시험 삼아 도전하기를 바라고 싶어하게 하였다.
음악에 대해서 그녀는 너무나 많은 추구를 하였다. 1973년 11월 그녀는 일본의 寶麗金公司와 계약을 하여 일본에 가서 발전할 준비를 하였다.
東南アジアと香港で成功はテレサ ・テン にとってもっと多い音楽の可能性を試験して挑戦するように願いたがるようにした.
音楽に対して彼女はあまりにも多い追求をした.1973年 11月彼女は日本の 宝麗金(polygram)公司と契約をして日本へ行って発展する準備をした.
在日本的第一年里,她便见识了日本人对音乐制作的认真态度,从歌手的包装、唱片的宣传等等,
邓丽君成为整个“邓丽君音乐工业”流水线上的最重要的一环。
일본에서 첫해에 그녀는 음악 제작에 대한 일본인의 진지한 태도에 대해 견문을 넓혔고,
가수의 화장부터 음반의 선전 등등에 대해 등려군은 온전한 등려군 음악 사업의 일관 작업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이 되었다.
日本で初年度に彼女は音楽製作に対する日本人の真摯な態度に対して見聞を広げたし,
歌手の化粧からアルバムの宣伝等々に対してテレサ ・テン は完全なテレサ ・テンの 音楽事業の一貫作業システムで一番重要な過程になった.


在日本,她语言不通,无亲无故,所幸还有母亲陪护着。
邓丽君一切都要重新开始,她不再是东南亚的那位年轻歌后,在日本音乐界,她仅是个新人而已。
일본에서, 그녀는 말이 통하지 않고 친척이나 친구가 없었는데, 다행히 어머니가 여전히 곁에서 돌보아 주었다.
등려군은 모두 다시 새롭게 시작하여야 했고 그녀는 동남아시아의 저 젊은 스타 가수가 아니었으며, 일본 음악계에서 그녀는 단지 신인일 뿐이었다.
日本で,彼女は言葉が通じないで親戚や友達がいなかったが,幸いにお母さんが相変らずそばで面倒を見た.
テレサ ・テン は皆また新しく始め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し彼女は東南アジアのあの若いスター歌手ではなかったし,日本音楽界で彼女はただ新人であるだけだった.
“最初来日本的时候,一天到晚忙,尤其是新人,正挂虑是否会叫座的时期,嘴上说的完全是拜托两字,没有逛街的时间,
完全照着所定的日程做,非常怕出丑,就这样做了五年。相当严肃,尤其自己是外国人,感到压力更重。”
처음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 하루 온 종일 바빴는데 특히 신인은 언제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걱정을 하였고
언제나 부탁한다는 말이 입에 붙어 있으며 거리를 한가롭게 거닐 시간이 없었으며, 정해진 일정에 의해서 완전히 일을 하며
매우 망신 당할까봐 무서워하면서 이같이 5년을 지냈다. 매우 조심하였는데 특히 자기는 외국인이어서 부담이 더 무겁다고 느꼈다.
初めて日本に到着した時,一日終始忙しかったが特に新人はいつ人気をあつめることができるか心配をしたし
いつも頼むという言葉が口に付いているし通りをのんびりぶらつく時間がなかったし,決まった日程によってすっかり仕事をして
非常に恥をかくか心配で恐ろしがりながらこのように 5年を過ごした.非常に気を付けたが特に自分は外国人なので負担がもっと重いと感じた.
邓丽君在日本度过了最艰难而迷惘的一年,由于第一张日语唱片的失败,宝丽金公司甚至怀疑自己选错了人,
直至1974年,邓丽君推出了单曲《空港》一时大热,获得日本唱片大赏的“新人赏”,邓丽君方률�复了自信。
등려군은 일본에서 가장 어렵고 어찌할 바 모르는 한 해를 보냈다. 첫 일본어 음반이 실패를 하였기에 寶麗金公司조차도
자신들이 사람을 잘못 골랐다고 의심하였다. 1974년에 이르러 등려군이 Single Album [空港]을 내고 한 번에 대단히 열렬하게
일본 음반 대상인 신인상을 받아서 등려군은 비로소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テレサ ・テン は日本で一番難しくてどうするところ分からない一年を送った.初日本語アルバムが失敗をしたから 宝麗金(polygram)公司すら自分たちが人を過ち選んだと疑った.1974年に至ってテレサ ・テン が Single Album [空港]を出してした一気にすごく熱烈に日本アルバム大賞である新人賞を受けてテレサ ・テン は初めて自信感を取り戻すようになった.

《空港》,1974年度共卖出了80万张,一扫前一年的阴霾,至1975年,邓丽君又加盟了香港宝丽金唱片,
趁热打铁推出了经典系列《宝岛之情歌第一集》(之后1977年又录制了《宝岛之情歌第二集》,并获得了香港第一届“金唱片奖”)。
[空港 쿠우코]는 1974년에 모두 80만장이 팔려서 일 년전의 부진을 한꺼번에 없애고 1975년에 등려군은 다시 홍콩 宝丽金唱片에 참여를 하였으며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서 히트곡 시리즈 [寶島之情歌第一集](이후 1977년 또 '보도지가 제2집'을 취입하였다, 아울러 홍콩 제1회 金唱片奬을 수상하였다)
[空港 쿠우코]は1974年に皆 80万枚が売れて一年前の不振をいっぺんに無くして 1975年にテレサ ・テン はまた香港 金唱片に参加をしたし良い機会を利用してヒット曲シリーズ [宝島之情歌第一集](以後 1977年また '寶島之情歌第2集'を吹入こんにちはだった,同時に香港第1回 金唱片奨を受賞した)

随后的9月至10月,已经成功打开了日本市场的邓丽君再次回到马来西亚等东南亚地区展开巡回演出,
还于10月底在香港首次录制了《邓丽君电视特辑》。
뒤따라 9월부터 10월까지 이미 일본 시장을 개척한 등려군은 다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돌아와서 순회공연을 전개하였으며 또 10월 말에 홍콩에서 처음으로 [鄧麗君電視特輯: 등려군 텔레비전 특집]을 녹화하였다.
後に従って 9月から 10月までもう日本市場を開拓したテレサ ・テン はまたマレーシアなど東南アジア地域に帰って来て巡演を展開したしまた 10月末に香港で初めに [鄧君電視特輯: テレサ ・テン のテレビ特集]を録画した.
(3월)
1976年,在香港颇有历史的利舞台迎来了邓丽君第一次驾临,当年3月,邓丽君在利舞台开唱,举办首次香港个人演唱会。
而其后连续几年,邓丽君又在利舞台举办过多场个人演唱会,并获得了空前的成功。
1976년, 홍콩의 역사가 상당히 있는 利舞台(홍콩 퀸 엘리자베스 스타디움)에서 등려군의 제1회 공연을 열렸다.
그해 3월 등려군은 利舞台에서 노래를 함으로서 최초 홍콩 개인 콘서트를 열었다.
이후 이어서 수년 동안 등려군은 또 利舞台에서 여러 번 개인 콘서트를 열었고, 아울러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다.
1976年,香港の歴史がよほどいる 利舞台(香港クイーンエリザベトスタジアム)でテレサ ・テン の第1回公演を開かれた.その年 3月テレサ ・テン は 利舞台で歌を歌うことで最初香港個人コンサートを開いた.
以後であって数年の間テレサ ・テン はまた 利舞台で何回個人コンサートを開いたし,同時に空前の成功をした.
1978年9月的第三度的香港利舞台个人演唱会更是破纪录地举办了三天共五场。
香港是邓丽君的一块福地,她在20世纪70年代的唱片很大一部分都是港人购买的,而香港的东西融汇,
它的大都市氛围、现代气息,也深深吸引着邓丽君,成为她最喜爱的一座城市。
1978년 9월 제3회의 홍콩 利舞台 개인 콘서트에서 다시 기록을 깨는 3일 모두 5차례 공연을 하였다.
홍콩은 등려군의 행운의 땅으로 그녀는 20세기 70년대의 음반은 대부분 모두 홍콩 사람이 구매한 것으로, 홍콩의 물건이 서로 융합이 되고
이것의 대도시적 분위기와 현대의 정취도 등려군을 깊숙이 끌어당겨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었다.
1978年 9月第3回の香港 利舞台 個人コンサートでまた記録を破る 3日皆 5回公演をした.
香港はテレサ ・テン の幸運の地で彼女は 20世紀 70年代のアルバムは大部分皆香港人が購買したことで,香港の品物がお互いに融合になってこれの大刀詩的雰囲気と現代の趣もテレサ ・テン を深く引き寄せて,彼女が一番好きな都市になった.
而1976年7月,邓丽君也在日本新宿举办了首次日本个人演唱会,仿佛是与香港利舞台演唱会的遥相呼应。
11月,她又率领丽星歌剧团赴马来西亚进行巡回演出。
그래서 1976년 7월 등려군이 일본 新宿에서 처음으로 일본 개인 콘서트도 열었는데, 마치 홍콩의 利舞台 콘서트와 멀리서 서로 호응하는 것 같았다.
11월 그녀는 또 麗星歌劇團을 이끌고 말레이시아에 가서 순회공연을 하였다.
それで 1976年 7月テレサ ・テン が日本 新宿で初めに日本個人コンサートも開いたが,まるで香港の 利舞台 コンサートと遠くからお互いに互応するようだった.11月彼女はまた 麗星歌劇団を導いてマレーシアへ行って巡演をした.

邓丽君开始奔忙于东南亚、香港与日本三个主要音乐市场,走马兰台,她的个人演唱会和巡回演出开展得紧锣密鼓,而她乐此不疲。1978年9月,邓丽君又出演台视剧场的《天涯常念此时情》。
등려군은 동남아시아, 홍콩 그리고 일본의 3대 주요 음악 시장을 분주하게 뛰어 다니기 시작하였다.
馬蘭台에 가서 그녀의 개인 콘서트와 순회공연은 긴박하게 철저히 준비하여서 열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것을 피곤해 하지 않고 즐거워하였다. 1978년 9월 등려군은 또 대만 텔레비전의 드라마 [天涯常念此時情: 하늘 저 멀리 언제나 이때의 사랑을 그리워하네]에 출연하였다.
テレサ ・テン は東南アジア,香港そして日本の 3まかなってください音楽市場を慌ただしく走り回り始めた.
馬蘭台に行って彼女の個人コンサートと巡演は緊迫に徹底的に準備して開かれた.しかし彼女はこれを疲れてしないで楽しがった.1978年 9月テレサ ・テン はまた台湾テレビのドラマ [天涯常念此時情: 空私遠くいつもこの時の愛をしのぶのね]に出演こんにちはだった.
邓丽君在美丽的音乐之路上一路奔跑,繁花似锦,而一块巨大的石头正在路途中等着将她绊倒。
1979年2月发生的“假护照风波”是她一帆风顺的事业历程中最大的波折。邓丽君的身影以另外一种方式又被聚合在闪光灯之下,
她试图以“假护照”飞往日本,尽管没有成功,却依然被人告发,而牵涉入籍印尼的猜疑,随之引起了日本与印尼两国的关注。
등려군이 아름다운 음악의 길, 마치 비단에 화려하게 꽃이 수놓아진 듯한 길을, 쭉 달렸는데 그러나 길 도중에
그녀를 걸려 넘어뜨리려고 기다리는 커다란 돌이 때마침 있었다. 1972년 2월에 발생한 가짜 여권 소동은 그녀의 순풍에 돛단 듯한 사업 여정에 최대의 위기가 되었다. 등려군의 모습은 이 외의 방식으로 또 사진 플래쉬 아래에 노출되었다. 그녀는 가짜 여권으로 일본으로 비행기로 들어오려고 시도를 하였다. 비록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발을 당하여서 인도네시아 비자 취득에 관련된 의심과 이에 따라서 일본과 인도네시아 양국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テレサ ・テン が美しい音楽の道,まるで絹に派手に花が刺繍されたような道を,ずっと走ったがしかし道途中に
彼女をかかって倒そうと待つ大きな石がちょうどあった.1972年 2月に発生したにせ物パスポート騷動は彼女の順風にドッダンような事業旅程に最大の危機になった.テレサ ・テン の姿はこの以外の方式でまた写真フラッシュの下に露出した.彼女はにせ物パスポートで日本で飛行機で入って来ようと試みをした.たとえ成功しなかったがそれでも告発にあ
ってインドネシアビザ取得に係わる疑心とこれによってで日本とインドネシア両国の気を引くようになった.

在确认护照非邓丽君本人的之后,日本出入国管理事务所随即留置了她,人们还怀疑她这张“假护照”中藏有更大的背景和更深的秘密。于是“叛国”、“丢中国人的脸面”、“抓回来”种种上纲上线的言论频频出现在台湾的媒体报章之上,
演艺界也不同情她,称其损害了艺人的荣誉,要求她解释事件始末。
등려군의 본인 여권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된 뒤에, 일본 출입국관리 사무소는 바로 그녀를 가두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가 이 가짜 여권속에 더 커다란 배경과 더 깊숙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고 의심을 하였다. 그래서 나라를 배반하였다, 중국인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돌아오라, 등등 잘못된 언동 등을 정치적 원칙의 관점에서 검토, 비판하는 내용이 대만의 언론매체 신문에 자주 올랐다. 연예계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고 이것이 연예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그녀가 사건의 전말을 밝히길 요구하였다.
テレサ ・テン の本人パスポートではないということが確実にになった後に,日本出入国管理事務所はまさに彼女を閉じこめた.人々は相変らず彼女がこのにせ物パスポートの中にもっと大きな背景ともっと奥深い秘密を隠していると疑心をした.それで国を裏切った,中国人の体面を損傷させた,帰って来なさい,等々誤った言動などを政治的原則の観点で検討,批判する内容が台湾の言論媒体新聞によく上がった.芸能界も彼女を同情しないでこれが芸能人の名誉を損傷させたことだと言ったし彼女が事件の始末を明らかにするのを要求した.
综观事件始末,邓丽君的“假护照风波”只不过是一次情急中的小作弊,
我们并不能说她在这件事情上就没有错误,只是加之于“叛国”等罪责却是极不相称。
사건의 전말을 종합하여 보건데 등려군의 가짜 여권 소동은 단지 한차례의 성급한 가운데 저지른 작은 잘못에 불과하며,
우리들은 결코 그녀가 이 사건 본질에서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게다가 나라를 배반했다는 등의 책임 추궁은 오히려 매우 걸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事件の顛末を総合して見るがテレサ ・テン のにせ物パスポート騷動はただ一度の性急な中やらかした小さな過ちに過ぎなくて,私たちは決して彼女がこの事件本質で過ちがないと言うことはできないがそれに国を裏切ったというなどの責任追及はむしろ非常にふさわしくないと言える.
事情被闹大了自然有作为观众的落井下石、人云亦云的不良习气,
然而在一个不自信的台岛上,“爱国”、民族等等精神、意识自然成为人们治疗心中羸弱与失意的一剂中药。
남들이 말을 하는 것을 따라서 역시 말을 옮기는 나쁜 습속으로, 사람들이 우물에 빠진 이에게 돌을 던지는 격이 되어 자연히 사건이 크게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자신감이 없었던 대만에서는 애국, 민족 등등 정신, 의식이 자연스럽게 마음속의 허약함과 실의를 치료하는 한약이 되었다.
他人達がものを言うことをよってやっぱり言葉を移す悪い習俗で,人々が井におぼれた人に石を投げる柄になって自ずから事件が大きくうるさくなった.しかし自信感がなかった台湾では愛国,民族等々精神,意識が自然に腹中の虚弱さと失意を治療する漢方薬になった.
邓丽君演唱于日本、东南亚等地时又喜于中国人身份为荣誉,因此,可以看到,在她的成长史中被不断添加了诸多精神符号,
她并非单纯地作为一个歌手而受人欢迎,除了她的歌声,她的“爱国”情怀也一再被人们所提及。
등려군은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때로는 중국인의 명예를 위하여 기쁘게 노래를 불렀으며, 이로 인하여 그녀의 성장의 역사에는
끊임없이 수많은 정신 부호가 더하여졌다고 볼 수 있다. 그녀는 결코 단순히 한낱 가수로 사람들의 인기만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그녀의 노래이외에 그녀의 애국심도 거듭하여서 사람들에게 언급되어 졌다.
テレサ ・テン は日本,東南アジア等地で時には中国人の名誉のために嬉しく歌を歌ったし,これによって彼女の成長の歴史には絶えず幾多の精神符号が加えられたと見られる.彼女は決して単純にただたんに歌手で人々の人気のみを受けたことで思われなかったし彼女の歌以外に彼女の愛国心も繰り返えして人々に言及されられた.

(1980'미국)
(1980'アメリカ)
既为“假护照”所害,邓丽君的音乐事业再次陷入了迷途,事件平息之后,她径直飞往美国,开始了一场痛并快乐着的疗伤。
她与母亲一同飞往了美国洛杉矶,其时五弟也在洛城读书。
이왕의 가짜 여권의 나쁜 영향으로 등려군의 음악 사업은 다시 미로에 빠져 버렸는데
사건이 가라앉은 뒤에 그녀는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 가서 한바탕 아프기도 하고 즐거운 상처 달래기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어머니와 같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었는데 그때 남동생도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已往のにせ物パスポートの悪い影響でテレサ ・テン の音楽事業はまた迷路にはまってしまったが
事件が沈んだ後に彼女は直ちにアメリカに飛んでひとしきり痛かったりして楽しい傷なぐさめるのを始めた.
彼女はお母さんと一緒にアメリカのロサンゼルスに飛んだがあの時弟もこちらで勉強をしていた.

(1979'LA)
她在事业高峰处直跌谷底,世态炎凉,未免灰心丧气,经过与家人商议之后,邓丽君决定告别舞台,再次捧起书本,预备潜心读书。
그녀는 사업이 최고조에서 갑자기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을 하게 되고 세상 인심이 야박하여서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가족들과 상의를 한 뒤에 등려군은 무대와 이별하기로 결정하고는 다시 책을 잡고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잡기로 준비하였다.
彼女は事業が最高潮で急に下積みでまっさかさまに墜落をするようになって世の中人心が無情で意気消沈しなければならなくなって家族たちと相議をした後にテレサ ・テン は舞台と別れることに決めてからはまた本を取って勉強することに心を入れ替えることに準備した

她在洛城认识了正在美国拍戏的成龙,两人时有约会,而成龙也常去邓丽君的寓所探望她们母女,邓丽君甚至亲手煮粥,奉与成龙。这是一场真假不明的爱情,媒体问及,邓丽君只说认识了“成龙的朋友”,至于究竟是否就是成龙本人,却不肯明说。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침 미국에서 영화를 촬영하던 성룡을 알게 되는데 두 사람은 때때로 만남을 약속하여서 성룡도 언제나 등려군의 거처에 가서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 보았다. 등려군은 심지어 손수 죽을 쑤어서 성룡에게 주기도 하였다.
이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애정이어서, 매체가 질문을 하자 등려군은 단지 성룡의 친구로 알고 있다고 말을 하였다.
결말을 확인하고자 하자 성룡 본인은 오히려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彼女はロサンゼルスでちょうどアメリカで映画を撮影したジャキチャンが知るようになるのに二人は時々出会いを約束してジャキチャンもいつも テレサ ・テン の居所へ行って彼女のお母さんを捜してみた. テレサ ・テン は甚だしくは手ずからおかゆを炊いてジャキチャンに与えたりした.これが本当なのか偽りなのかわからない愛情なので,媒体が質問をすると テレサ ・テン はただジャキチャンの友達に分かっているとものを言った.結末を確認しようとするとジャキチャン本人はむしろ言いたがらなかった.
暂别舞台,邓丽君一时还不大习惯,她天生就是舞台上的人,喜悦于谢幕时的掌声,
因此,在洛城的生活未免令她因闲生愁,联想自己从小休学而赶场于台北各大歌厅、夜总会,一路辛苦走来总算有如此成就,却横生枝节,凭空来了一场风波,如今,竟连台湾也回不了,不时伤感起来。
잠시 무대를 떠나고 나니 등려군은 한때 또한 크지 않은 버릇이 생겼다. 그녀는 천생 무대 체질이기에 무대를 마칠 때 받는 박수소리를 좋아하여서, 이로 인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녀에게 한가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자기가 어렸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대북의 여러 음악 홀, 나이트 클럽을 뛰어다니던 것을 생각하며 함께 고생스럽게 달려서 겨우 이처럼 성공을 하였는데
오히려 뜻밖의 작은 문제가 생겨서 까닭없이 풍파에 시달리고 지금껏 마침내 대만조차도 돌아가지 못하나 하며 때도 없이 슬픈 느낌이 생겨났다.
しばらく舞台を発ってからこそテレサ ・テン はひとときも大きくない癖が生じた.彼女は天生舞台体質だから舞台を終える時受ける拍手音が好きで,これによってロサンゼルスで彼女にのんびりする生活ができないようにした.
自分が幼い頃学校をやめて対北の多くの音楽ホール,ナイトクラブを走り回ったことを思って共に苦しく走ってやっとこのように成功をしたがむしろ思いがけない小さな問題が起こって理由のなく風波に苦しんで今まで遂に台湾までも帰ることが一つする事ができないhて時もなしに悲しい感じができた.

其弟邓长禧撰回忆时称及“在‘护照风波’以后,我有一天下午看到她一个人孤坐窗前,
望着窗外洛杉矶陌生的车水马龙,独个自顾自地掉眼泪,为人弟弟的我心如刀割,既难过,又无可奈何”。
그 남동생 鄧長禧가 가짜 여권 파문 이후를 언급하며 기억을 기록할 때에
나는 어느 날 오후, 누나가 홀로 창가에 앉아서 창밖의 로스앤젤레스의 낯선 혼잡한 거리를 바라보며,
외롭게 자기만 생각하며 눈물을 떨어뜨리던 모습을 보니, 동생인 내 마음도 칼로 파내는 듯 아팠고, 이미 견디기가 어려워서 어찌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その弟 鄧長禧がにせ物パスポート波紋以後を言及して記憶を記録する時に私はある日午後,お姉さんが一人きり窓べに座って窓の外のロサンゼルスの不慣れな混雑する通りを眺めて,さびしく自分だけ思って涙を落とした姿を見たら,弟である私の心も刀で掘りだすように痛かったし,もう耐えにくくて難しくてどう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言った.
回台之后,邓丽君重回舞台,在日本、香港等地接连召开记者会,旧事重提,再次解释“假护照”一事。
并在这一年,第四次在香港利舞台举办个唱。
대만으로 돌아온 뒤에 등려군은 다시 무대로 돌아가서 일본 홍콩 등지에서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었고,
지난 일을 다시 꺼내고는 여러 번 가짜 여권의 사건을 밝혔다. 아울러 이 한 해에 제4차 홍콩 利舞台 공연을 열었다.
台湾に帰って来た後にテレサ ・テン はまた舞台に帰って日本香港等地で相次いで記者会見を開いたし,
去る事をまた取り出してからは何回にせ物パスポートの事件を明らかにした.同時にこの一年に第4次香港 利舞台 公演を開いた.

첫댓글 희귀사진 잘 보았 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귀한 자료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