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님은 의식주 걱정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였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그의 의”는 “아버지의 의”입니다. 이유는 32절을 보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신다”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사례로 새와 들의 백합화를 말씀하십니다. 새와 들 백합화의 공통된 특징은 먹고 마실 것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이것의 첫 번째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입니다. 창조의 질서입니다. 사람이 언제 먹고 마시는 일을 걱정하게 되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입니다. 타락을 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 효과를 땅과 싸워야 먹을 것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세계 질서를 아십니다.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바다의 질서(예: 바닷고기 어획 사건, 풍랑 바다를 잔잔케 함)를 아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바다의 물고기를 다스린 두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이고, 다른 하나는 솔로몬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자신의 지혜를 주시는데, 이 지혜는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주신 지혜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 지혜를 가지고 타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솔로몬의 자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은 에덴에서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솔로몬의 모든 영광”과 “백합화 꽃 한 송이”와 대조시킵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솔로몬이 추구하여 얻은 모든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은금과 말과 병거를 많이 둡니다(열왕기상 10:14~29). 이스라엘 전 지역에 병거성을 둡니다(열왕기상 9:19).
예수님이 오셔서 이룬 구원은 창조 질서의 회복입니다. 그 질서가 영구적으로 진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타락한 후손이 추구하는 것이 의식주입니다. 그러면 신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입니다. 의식주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33절을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이후에 의식주를 구하라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라는 단어는 있는데, “그다음”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입니다. 신적 수동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동물 세계는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하십니다. 다 해결하여 주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할 때 주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사십일 금식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배고프셨을까요? 배고프시지 않았을까요? 마태복음 4:2절을 보면 “금식하신 이후에 주리신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은 말씀으로 사는가? 떡으로 사는가? 중에 떡으로 사는 편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선택합니다.
마태복음 4:11절을 보면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배고프신 예수님께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수종드니라”와 똑같은 단어가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 집에 들어갔는데, 그때 베드로의 장모가 “시중들다”와 같은 단어입니다(마태복음 8:15).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질서대로 가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예수님 자신과 제자가 음식 문제로 고민하고 염려한 사례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마가복음 4:12~13절을 보면 땅의 짐승이 예수님의 광야 시험 때 같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짐승이 예수님을 헤치지 못합니다. 짐승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타락한 세상이 회복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신자는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 선물 받은 자로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야 합니다. 이런 사실이 주기도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소서”입니다. 누구의 나라입니까?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받들어야 할 자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주옵소서”입니다.
원래 타락 이전 질서와 같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다음에 내가 이렇게 사는 데 필요한 것 주옵소서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상실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 그 질서가 영원히 확립되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고, 하나님의 나라 추구할 사람들이 따라야 할 내용입니다. 결국 기도의 내용과 추구할 삶의 내용이 같습니다.
우리가 의식주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세속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나라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면 아버지가 의식주 다 해결하여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해야 할 기도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삶이 같습니다. 삶을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해도 삶이 안되니까? 부족하니까? 하나님께 더 기도해야 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돈으로 의식주의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눈이 있느냐? 눈이 없느냐? 예수님의 눈이 있느냐? 예수님의 눈이 없느냐? 여기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마태복음 6:19~25절을 보면 땅에 보화를 쌓아두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25절을 보면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앞의 교훈 결론이면서 결론 적용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명령은 모든 일에 우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말씀합니다. 그리하였을 때 의식주를 하나님 아버지가 다 해결하여 주십니다.
지금 죄로 말미암아 눈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눈만 뜨면 하늘에 보화를 쌓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눈이 열려야 아버지가 책임져 주시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 복을 주셨네, 이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3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공급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보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입니다.
누가복음 11:34절을 보면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는 몸도 어둡다”(가톨릭 성경)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눈에 불 또는 불빛이 있다는 것이 보편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즉, 빛이 몸에 있으며 몸에 있는 빛이 눈으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이 밝으면 밝은 빛이 몸으로 들어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과학적이거나 생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윤리적으로 옳은지 나쁜지의 대조로 말씀하십니다. 밖을 보는 눈이 나쁘면 그 사람 자체가 나쁘게 되고, 밖을 보는 눈이 밝으면 그 사람 자체가 선하게 됩니다.
결국 눈이 열려야 의식주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를 추구합니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3:5(“돈을 사랑하지 말라”)절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너희 행동양식이 돈 사랑과 무관하게 하라”입니다. 왜 돈을 추구합니까? 만족을 소유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만족을 필요한 것을 주셔서 누리게 하는 하나님께 두면 문제가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를 구하면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의식주)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기 때문에 공급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창조 세계의 질서를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신자에게 의식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함으로 눈이 열려야 합니다. 눈이 열릴 때 비로소 이 사실들을 발견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