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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파우스트
뚜르게네브[로씨아]
투르게네프 (Turgenev, Ivan Sergeyevich) -일리아 레삔 그림
1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B로부터 세묜 니콜라에비치 V에게 M마을에서, 1850년 6월 6일 사랑하는 친구여, 나흘 전에 나는 여기 도착했네. 그리고 약속한 대로 펜을 들어 자네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 걸세.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서 밖에 나갈 수도 없는데다, 마침 자네와 한바탕 지껄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지. 결국 나는 또다시 옛 보금자리로 돌아왔지만, 여기에는--말하기조차 무섭군--만 9년 만에 처음이니 말이야. 사실 생각해 보니, 나는 딴 사람이 된 것 같네. 아니, 정말 사람이 달라졌어. 자네도 기억하고 있겠지, 응접실에 걸려 있는 흐릿하고 조그만 거울을, 증조모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네 귀퉁이에 꼬불꼬불하고 이상스러운 장식문이 달려 있지.--자넨 옛날에 이 거울을 보며 백 년 전에 이 거울은 어떤 것을 보았을까 하고 곧잘 공상에 잠기곤 했지만, 나는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네. 나는 갑자기 내가 나이를 먹은 나머지 최근에 모습이 달라진 것을 발견한 걸세. 물론 나만 늙었다는 것은 아니야. 오래 전부터 이미 고가였던 내 집은 삐뚜름하니 기울어진데다 땅 속으로 움푹 주저앉고 말아서 지금은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지탱하고 있는 형편일세. 마음씨 고운 하녀 바실리예브나--자네도 이 여자를 잊지는 않았을 테지. 곧잘 자네에게 맛있는 잼을 대접해 주었으니까--는 완전히 시들어서 허리가 굽고 말았다네. 내 얼굴을 보고도 소리를 지를 수 없을 뿐더러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고, 그저 한숨만 몰아쉬며 기침을 하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좌우로 손을 흔들 뿐이야. 테렌티 노인은 아직도 건강해 여전히 등이 꼿꼿하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휘청하니 발을 비틀곤 하지. 그 다리는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노란 남경 무명 바지로 감싸이고,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리본 달린 양가죽 단화를 신고 있다네. 이것은 수없이 자네를 가동케 했던 것이지만‥‥슬프게도 지금은 그 바지가 바짝 마른 다리 위에 축 늘어져 있질 않겠나.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도 머리가 희어졌을까! 얼굴은 쪼그라질 대로 쯔거라져 주먹만해지고, 노인이 내게 이야기할 때나 옆방에서 지시할 때, 그리고 명령하는 것들을 들으면 나는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가엾은 생각이 들곤 해. 이란 이는 몽땅 빠져서 입을 오물거리며 말하노라면 퉁소 소리도 나고 슈슈 하는 소리도 새어 나오는 거야. 그 대신 정원은 놀라울 마늠 훌륭해졌어. 라일락이며 아카시아며 인동 덩굴의 초라한 나무들이--우리가 함께 심었던 것을 자네도 기억하고 있겠지--웅장하고 무성한 숲으로 변했고, 자작나무며 단풍나무도 모두 싱싱하게 가지를 뻗고 있다네. 특히 보리수의 가로수는 훌륭해졌어. 나는 무엇보다도 이 가로수를 좋아해--녹회색의 부드러운 빛깔이며, 그 둥근 지붕 밑에 풍기는 희미한 향기들을. 그리고 흑토위에 선명하게 얼룩진 레이스 무늬들을 좋아하지.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집 정원에는 모래라고는 없으니 말이야. 내가 사랑하는 참나무 묘목도 이젠 의젓한 나무로 자랐더군. 어제 낮, 나는 그 남 그늘의 벤치에 앉아서 한 시간 이상이나 보냈다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어. 주위에는 사뭇 즐거운 듯이 화초들이 만발해 있고, 그 위에 강하고도 부드러운 금빛 햇살이 춤추는 거야. 그 빛은 나무 그늘 속까지 새어들어왔어‥‥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는 온갖 노래 소리! 자네는 내가 새를 좋아한다는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 테지. 산비둘기가 끊임없이 구구 뽑고 있으면 이따금씩 꾀꼬리가 휘파람을 불고, 몬티(참새과 의 새 이름)가 귀여운 목소릴 멋지게 한 곡조 읊는 거야. 개똥지빠귀가 화를 내서 요란스럽게 울어대는가 하면, 멀리서 뻐꾸기가 여기에 호응을 하고, 갑자기 딱딱구리가 미친 듯이 시끄러운 목소리로 외쳐대는거야. 나는 잘 조화된 이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어. 그리고 내 마음 속에는 게으름도 감동도 아닌 야릇한 감정이 가득 넘쳐 흘렀지. 성장한 건 정원만이 아닐세. 씩씩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이 자주 눈에 띄는데, 그들이 예전에 보던 장난꾸러기들이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더군. 자네가 좋아하던 티모샤(티모페이의 애칭)도 이젠 어엿한 티모페이로 성장하여 자네는 상상도 못할 정도일세. 자넨 그 때 티모샤의 건강을 염려해서 앞으로 폐병에 걸릴 것이라고까지 근심했지만, 지금 남경 무명 플록 코트의 좁은 소매에서 커다란 붉은 팔이 쑥 튀어나오고, 뭉실뭉실한 탐스러운 근육이 여기저기 솟아올라 있는 모습을 자네한테 한 번 보여 주고 싶어지는군 그래. 목덜미는 마치 황소 같고, 머리에는 단단하게 엉킨 아마빛 머리카락이 뒤덮여 있어. 마치 파네스 극장의 헤라클레스 동상 그대로야! 하지만 그 얼굴만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변하지 않았어. 부피로 보아서도 그다지 커지지는 않은 것 같고 자네가 말하는 '하품을 하는 듯한' 즐거운 미소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네. 나는 그 사나이를 하인으로 고용했네. 페테르부르그에서 데리고 있던 하인은 모스크바에 두고 왔어. 너무 도회지에서 굴러먹어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하고, 나를 무안케 하는 버릇이 심해졌기 때문이지. 내 개는 한 마ㄹ 찾아볼 수가 없더군. 모두 죽어 버렸어. 그래도 네프카만은 가장 오래 살고 있었다지만, 근ㅁ조차 아르고스가 우리스를 마지막까지 기다린 것처럼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주지는 않았어. 그래서 자기의 옛 주인이며 친구였던 나를 그 거슴츠레한 눈으로나마 바라볼 수 없었던 걸세. 샤프카는 무사하며, 여전히 쉰 목소리로 짖고있네. 한쪽 귀는 예전과 다름없이 찢긴 채로이고, 꼬리에는 언제나처럼 우엉 열매가 달려 있지. 나는 옛날의 자네 방에 거처하기로 했네. 사실 말이지, 이 방은 볕이 너무 들어 파리 떼가 들끓지만, 그 대신 다른 방보다 고가에서 나는 냄새가 덜 풍기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퀴퀴하고 시큼하며 어딘지 맥이 풀린 듯한 내매가 내 상상에 굉장한 작용을 하고 있다는 걸세. 그렇다고 그것이 불쾌하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지. 내 마음 속에 우수를 불러일으키고, 나중엔 우울한 기분에 빠지게 하니 말이야. 나는 자네와 마찬가지로 청동 장식이 달린, 배가 불룩한 낡은 장롱이며, 타원형 등받이에 다리가 휜 하얀 안락의자며, 가운데다 자주빛 금속으로 된 커다란 달걀 장식이 붙은 파리똥투성이인 유리 샹들리에--한 마디로 말해서 이와 같은 선조 대대의 가구들을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늘 이런 것만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단 말일세. 그 어떤 불안스러운 권태--정말일세!--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거야. 내가 거처하는 방에 장식되어 있는 가구들은 흔히 볼 수 있는 수제품들이지만, 나는 한쪽 구석에 좁고 갸름한 찬장을 남겨 놓기로 했네. 그 찬장위에는 녹청색 유리로 만든 구식 쟁반이 먼지가 쌓인 채로 흐릿하게 투명해 보이지. 벽에는 검은 테두리의 액자를 걸게 했네. 자네도 기억하겠지? 자네가 늘 마농 레스콩듸 초상이라고 하던 부인상 말이야. 지난 9년 동안에 좀 검어지긴 했으나, 눈은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겨 교활하면서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고, 입술에는 여전히 가볍고 슬픈 미소가 감돌고 있다네. 그리고 반쯤 뜯긴 장미꽃 역시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 조용히 흘러내릴 듯하고. 내 방에 걸려 있는 커튼은 정말 나를 즐겁게 해 주네. 그것은 옛날에 초록빛이었던 것이 햇볕에 바래 누르스름해졌지만, 그 위에는 다르란쿠르의 <은자>에서 인용한 몇몇 장면이 먹으로 그려져 있다네. 한커튼에는 무시무시하게 턱수염을 기르고 샌들을 신은 은자가 눈을 크게 부릅뜬 채 머리를 풀어 헤친 어떤 처녀를 산 속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에는 머리에 베레모를 쓰고, 어깨에 버프를 걸친 네 무사가 목숨을 걸고서 격투하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한 사람은 죽어 넘어져 있다네.--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무서운 광경들이 연출되고 있지만, 주위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지없이 고요한 정적뿐이고, 커튼은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반사된 빛을 천장에 던져 주고 있단 말일세‥‥ 여기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무언지 모를 이상한 마음의 정적에 휩쓸리고 말았어.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가 않아. 공상할 것도 없고, 사색한다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야. 하지만 생각한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 아닐 테지. 이 두 자기는 자네도 잘 알고 있듯이 완전히 성격이 다르니까. 먼저 유년 시절의 추억이 날 휩싸더군. 어디로 가나 무엇을 보나 여기저기서 선명한 추억들이 솟아오르는 거야. 아주 사소한 일까지 떠올라, 마치 그 선명한 윤곽대로 굳어지고 만 듯한 느낌이었어‥‥이윽고 그것은 다른 추억으로 변하고, 그 다음 나는 살며시 과걸부터 등을 돌렸지. 그러자 내 가슴에는 흐리멍덩한 일종의 무거운 짐밖에 남는 게 없더군. 그런데 여보게! 나는 버드나무가 늘어진 둑위에 앉아 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네. 그옆을 지나고 있던 시골 여인만 없었던들, 나는 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계속 울었을지도 모르지. 시골 여인은 신기한 듯이 흘끗 나를 쳐다보았으나, 이윽고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정면으로 공손히 인사한 다음 옆을 지나가 버리더군. 나는 이 곳을 떠날 때까지, 즉 9월까지 이런 기분으로 지내고 싶네(물론 두번 다시 눈물을 흘리진 않을 걸세). 그래서 만약 이웃의 누군가가 나를 방문하겠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무척 실망시킬 것임에 틀림없어. 그러나 내게는 다정한 이웃사람이 없으므로 그러한 근심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자넨 내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믿네.--고독이란 것이 인간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때가 얼마나 많은가를 자네 자신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을 테니까‥‥지금의 나로서는, 온갖 방랑을 다 겪어 온 나로서는 바로 그 고독이 필요한 거야. 그렇다고 나는 지루한 것 같지는 않네. 책을 몇 권 가지고 온 데다가 여기에도 제법 설비를 갖춘 서재가 있으니까. 어제 난 책장을 모조리 열어 젖힌 다음, 곰팡이가 슨 책들을 들추면서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있는 책을 많이 발견했다. 1770년대 손으로 복사해서 나온 <캉디드(볼테르의 소설)>의 번역본이며, 같은 시대의 보고서와 잡지, 그리고 <개선한 카멜레온>--미라보의 작품 말이야--<바람둥이 농부>등의 책들 말일세. 어린이 책도 나오더군. 내가 보던 것도 있고, 아버지의 것도 있고, 나의 할머니 것도 있질 않겠나. 아니, 그뿐 아니라 증좀의 책까지 나오는 거야. 알락달락하게 장정을 한 프랑스 어 문법책에는, 커다란 글씨로'이 책은 예ㅂ키야 라브리나 양의 것임.'이라고 쓰고, 연대가 씌어 있는데--그것이 1741년이란 말일세. 그리고 언젠가 내가 외국에서 가지고 돌아온 책도 발견되었는데, 그 속엔 괴테의 <파우스트>도 섞여 있더군. 자네는 아마 모를지도 모르지만, 나는 한때<파우스트>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암송한 적이 있었다네--물론 제1부긴 하지만--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싫증이라는 걸 몰았어‥‥그러나 세월이 바뀌면 꿈도 바뀌게 마련인가 봐. 그래선지 지난 9년 동안 나는 괴테의 책을 손에 잡아 본 적이 거의 없으니 말이야. 내가 그토록 낯익은 자그만 책자를 보았을 때의 감정이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네. 나는 책을 손에 들고 침대에 누ㅇ 읽기 시작했지. 그 웅장한 제1장이 얼마나 나를 가동시켰는지! 지령의 출현과 그의 말--자네도 기억할 테지. '인생은 파도 위 창조의 폭풍우 속에'는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환희의 전율과 냉기를 불러일으켜 주더군. 나는 모든 것을 상기해 냈지--베를린도, 당시의 학창 생활도, 클라르 슈티흐 양도,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한 자이델리만도, 리자빌의 음악도, 이것저것 하나 남김없이‥‥나는 오랫동안 잠들 수가 없었어. 내 청춘이 다시금 되살아나서 환영처럼 눈앞에 어른거리더군. 그것은 불길처럼, 또는 독처럼 내 혈관 속을 줄달음치는 거야. 가슴은 부푼채 가라앉을 줄 몰랐어. 무언가가 가슴의 현을 울리며, 여러 가지 욕망이 자꾸만 끓어오르는 거야‥‥ 이미 마흔이 다 된 자네의 친구는 쓸쓸한 집 안에서 고독에 잠긴 채 이런 부질없는 공상에 몸을 맡기고 있다네! 혹시 누군가가 나를 엿보았더라면 나는 어떠했을까? 아니, 그런들 나는 상관없을 걸세. 나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거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역시 젊다는 증거일 테니까. 그런데 내 자신이 늙어 간다는 것을 어디서 알아차렸는지는 알겠나? 그건 바로 이런 뜻에서지. 나는 지금 나 자신에 대해 자신의 즐거운 감정을 과장해 보이고, 슬픈 기분을 물리쳐 버리려 애쓰고 있지만, 젊을 때는 이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일세. 곧잘 ㅇ수ㅜ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고, 즐거운 감정의 폭발을 애써 꺼리곤 했으니 말이야‥‥ 그러나 나의 친구 호라시오여, 그럼에도 불구하고--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에도 불구하고--나는 이 세상에 나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 아직인가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네. 그리고 그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한 것같이 생각된단 말일세. 아, 이렇게 부질없는 말까지 쓰고 말았군 그래. 그럼, 잘 있게! 다시 소식 전하네. 자네는 지금 페테르부르그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끝으로 요리사 사벨리가 자네에게 안불ㄹ 전해 달라는군. 그도 나이를 먹었지만 그렇게 많이 변하지는 않았네. 좀 살이 쩌서 투실투실해졌을 뿐이야. 여전히 삶은 구경을 넣은 닭국이며, 가장자리에 무늬를 넣어서 만든 기름빵이며, 피그스 같은 것을 잘 만들지. 저 유명한 스테프 요리--자네의 혀를 새하얗게 만들고, 꼬박 하루 동안을 말뚝처럼 서 있게 했던 그 피그스 말일세. 그러나 군고기는 예전과 다름엇이 딱딱하게 구워서, 접시를 두드리면 소리가 날 정도지--마치 마분지같이 말이야. 자, 그럼, 오늘은 이만 안녕! 자네의 P. B 로부터
2 M마을에서, 1850년 6월 21일 사랑하는 벗이여, 오늘은 제법 중대한 소식을 전하게 되었네. 자, 내 말을 들어 보게나! 난 어제 식사를 하기 전에 잠시 산책을 하고 싶어졌어--그것도 정원을 거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거리를 통하는 큰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지. 곧고 긴 큰길을 아무 목적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간다는 것은 저알 상쾌한 기분이었어.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어서 길을 서두르는 것같이 말이야. 그런데 문득 앞을 보니, 저쪽에서 마차 한대가 오고 있더군. 혹시 내 집으로 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음 속ㅇ로 둘움을 느끼며 생각했지‥‥그러나 그건 기우에 지나지 않았어. 마차 안에는 콧수염을 기른 낯선 신사가 앉아 있었으므로 나는 적이 마음을 놓았지. 그러나 마차가 내 옆으로 왔을 때 신사는 마부에게 말을 멈추게 하고 공손히 모자를 벗어들고는, 무척 정중한 어조로 당신은 이러이러한 분이 아니냐고 내 이름을 대며 묻지 않겠나. 그래서 나도 걸음을 멈추고 신문에 응하는 피고의 용기로, "네, 그렇습니다만." 하고 대답했지. 한편 나는 양처럼 순한 눈으로 그 낯선 신사를 바라보면서 생각했어--ㅇ디에선가 본 듯한 사람인데!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이윽고 그는 마차에서 내리며 묻더군. "전혀 기억이 없는데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곧 알아봤습니다."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나는 그 신사가 프리므코프라는 것을 알았다네. 자네 생각나나? 우리하고 대학 동창이야. 그게 뭐 그렇게 중대한 소식이냐고? 프리므코프는 내가 알기로는 무척 맹랑한 친구였다고 생각해. 그야 물론, 사람은 좋고 그다지 바보도 아니었지만 하고 자네는 이 순간 생각할 테지. 그건 확실히 자네 생각대로야. 그러나 여보게, 그 다음에 있었던 우리의 대화를 좀 들어 보게나. "저는 당신이 고향 마을로, 우리들의 이웃으로 돌아오셨다는 마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하고 프리므코프가 말하는 거야. "물론 기뻐한 것은 저 혼자만이 아니었지요." "실례지만." 하고 나는 물었지. "누가 그런 호의를 가져 주신단 말씀이죠?" "제 아내올시다." "댁의 부인이?" "그렇습니다. 제 아내올시다. 당신하고는 예부터 아는 사이니까요." "실례지만 부인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베라 니콜라예브나라고 합니다. 성은 옐리초바구요." "베라 니콜라예브나라니!" 나는 엉겁결에 외쳤네. "네‥‥" 바로 이게 내가 편지 서두에서 말한 중대한 소식이라는 걸세. 그러나 이렇게 말ㅎ 자네는 무엇이 중요하다는 건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을 테지.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과거‥‥먼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부득이 자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네 그려. 우리가 함께 대학을 졸업할 때인 183X년, 나는 스물 세살이었어. 자네는 곧 관계로 들어갔고, 나는 자네도 알다시피 베를린 유학을 결심했었지. 그러나 베를린에서는 10월까지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여름철을 러시아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떠나기 앞서 시골에서 마음껏 게으름피우다가, 독일에 가서는 열심히 달라붙ㅇ 보리라는 심산에서였지. 이 마지막 계획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제 와서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그러나 어디서 이 여름을 보낼 것인가 하고 나는 자문해 보았지. 나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긴 싫었어. 그것은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게는 다정한 집안 식구도 없었거니와 고독과 권태가 두려웠던 거야‥‥그래서 나는 아저씨뻘 되는 어느 친척의 권유에 따라 T현의 영지로 가기로 한 걸세. 그는 부유하고 선량하고 결백한 사람이었으며, 귀족다운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어. 난 그 집에 머물러 있게 되었지. 아저씨 집은 아들이 둘에다 딸 다섯인 대가족이었어. 그 밖에도 집 안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들ㄱ고 쉴새없이 손님들이 밀려들곤 했지만, ㅡ래도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어. 소란스러운 속에 나날은 흘러가고, 잠시도 고독을 즐길 수가 없더군. 모두들 무슨 일이든지 협동해서 하고, 무엇으로든지 기분을 풀어 보려고 애쓰고, 무엇인가를 생각해 내려고 기를 쓰는 바람에, 하루가 끝날 때쯤에는 모두 녹초가 되곤 하는 거야. 내게는 이런 생활이 어쩐지 속된 느낌이 들었어. 나는 슬슬 떠날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그저 아저씨의 명명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데 바로이 명명일의 무도회 때 나는 베라 니콜라예브나 옐리초바를 본 걸세.--그리고는 그대로 주저앉고 만 거라네. 베라는 그 때 열여섯 살이었어. 어머니와 함께 아저씨 집에서 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자그마한 영지에서 살고 있었지. 소문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대령 계급까지 올라가ㅛ고, 앞으로도 더욱 전도가 유망했지만, 사냥을 나갔다가 친구의 유탄에 맞아 그만 젊은 나이에 객사했다는 것이었어. 이렇게 되어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갓난아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만 거지. 그녀의 어머니 역시 여느 여자와 달라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식견이 넓은 여자였어. 그녀는 남편보다 예닐곱 살 위였지만, 베라의 아버지하곤 연애 결혼을 했지. 베라의 아버지는 양친 댁에서 그녀를 살그머니 끌어 냈다는 거야. 그녀는 남편의 변사를 몹시 슬퍼하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프리므코프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딸이 결혼한 후 곧 죽었다더군--검은 상복만을 입었다더군. 나는 지금도 그녀의 얼굴을 똑독히 기억하고 있어--표정이 풍부한 거무스름한 얼굴에 숱이 많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며, 움풀 꺼진 듯한 큭 엄한 눈이며, 가느다란 콧날 등을‥‥그녀의 아버지는 라다노프라고 했고, 이탈리아에서 근 15년간을 살아 온 사람이었어. 그녀는 알리바노의 시골 여자한테서 태어났는데, 이 여자는 베라의 어머니를 낳은 이튿날, 전에 그녀의 약혼자였던 사람에게 참살당하고 말았어. 라다노프에게 애인을 빼앗긴 분풀이를 한 셈이지‥‥이 사건은 그 당시 꽤 많은 물의를 불러일으켰지. 러시아로 돌아온 후 라다노프는, 자기 집은 말할 것도 없고 서재에서조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화학이며 해부학, 신비 철학 같은 것을 연구하면서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려고 애썼어. 그리고 영혼과 관계를 맺든가, 죽은 사람은 다시 소생시킬 수 있다고까지 공상하게 됐지‥‥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마법사로 생각했을 정도라는 거야. 그는 몹시도 자기 딸을 귀여워해서 직접 자기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으나, 옐리초바와 가출한 것만은 끝까지 용서하지 안ㅎ으며, 딸도 사이도 눈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한 후, 두 사람에게 불행한 앞날을 예언학는 혼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옐리초바 부인은 과부가 되자 모든 여가를 딸의 교육에다 바치고, 거의 아무하고도 접촉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더군. 내가 베라 니콜라예브나하고 알게 되었을 때, 글쎄 생각 좀 해 보게, 그녀는 태어난 후 그 때까지 언 거리에도, 심지어 가장 가까운 군청 소재지에도 가 본 일이 없었다지 뭔가.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흔히 볼 수 있는 러시아 처녀들과는 달랐어. 그녀에게는 무엇인지 모를 독특한 인상이 깃들어 있었지. 나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놀랄 만큼 침착한 그녀의 몸짓이며 목소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네. 그녀는 무슨 일이건 마음을 쓰거나 근심하는 것같지 않았으며, 내 물음에는 솔직하게 현명한 대답을 하고, 조심스럽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어. 그녀의 얼굴 표정은 어린애와 같이 성실하고 정직했지만, 다소 싸늘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주더군. 그렇다고 사려 깊은 얼굴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어. 그녀가 쾌할해지는 것은 극히 드문 일로, 그 때마저 다른 여자의 쾌활함과는 성격이 달랐지. 다시 말해서, 쾌활하다기보다는 더욱 기쁘고 순진한 영혼의 명랑함이 그녀의 온몸을 비춰 준다고나 할까. 그녀는 그다지 키가 크지 않았으나, 아름답게 균형잡힌 몸매에 약간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얼굴 윤곽은 뚜렷하면서도 섬세했어. 반듯하고도 예쁘장한 이마, 금빛 도는 아마빛 머리카락, 어머니를 닮은 오똑한 코, 제법 도톰한 입술, 그리고 검은빛이 도는 눈은 위로 말려 올라간 속눈썹 밑에서 왜 그런지 지나치게 똑바로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주더군. 손은 크지 않았으나,그렇다고 예쁘지도 않았어. 재능있는 사람들의 손은 으레 그렇지 않는 법인데‥‥사실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별로 이렇다 할 만한 재능을 지나지는 않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일곱 살 된 계집애처럼 쨍쨍 울려 퍼지곤 했지. 나는 아저씨의 무도회에서 그녀의 어머니를 소개받고 며칠 후 처음으로 그 모녀의 집을 방문했던 걸세.
옐리초바 부인은 좀처럼 보기드문 여자로서, 성격이 뚜렷하고 고집이 세며, 한 가지 이에 열중하는 성격이었어. 나는 그 부인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녀를 존경하면서도 어느 정도 두려워하긷 했지. 부인은 모든 일을 규칙적으로 해 나가며, 자기 딸도 규칙적을 교육을 시켰지만, 딸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은 없었어. 딸은 어머니를 사랑해서,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지. 옐리초바 부인이 딸에게 책을 주며 이 페이지는 읽어선 안 된다고 하면, 그녀는 그 앞장 페이지부터 책을 덮어 버리고 읽지 말라는 페이지는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그러나 옐리초바 부인에게도 자기의 고정 관념이 있었고, 습관이 있었지. 예를 들면, 그녀는 불을 뭇워하듯이, 공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우려성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어. 그래서 그녀의 딸은 17세가 될 때까지 한 편의 소설도 읽은 적이 없었으나, 그 반면에 그녀는 지리와 역사는 물론 자연과학 분야에까지 새 학사인 나를 곧잘 골탕 먹이곤 했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졸업 성적은 그다지 나쁜 편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는 어느 날 옐리초바 부인과 그녀의 습관에 대해서 논쟁을 하려고 한 적이 있었지. 부인은 무척 과묵한 편이어서, 그녀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 때 부인은 그저 머리만 가로젓더니 마침내 다음과 같이 말하더군. "당신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유익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고 말씀하시지만‥‥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유익한 생활과 유쾌한 생활 중에서 미리부터 ㅇ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그리고 나서 영언히 결정해 버리는 겁니다. 나도 예전엔 그 양쪽을 결합시켜 보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만‥‥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리고 멸망이 아니면 그저 속악에 빠질 뿐입니다." 정말이지 그 부인은 놀랄 만한 존재였어. 일종의 광신과 미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긍지가 높고 성실한 여자였지. "나는 인생이 두려워요."하고 어느 날 부인은 나에게 말하더군. 사실 그 말 그대로 부인은 인생을 두려워했어. 생활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신비로운 힘, 때때로 뜻하지 않게 표면에 나타나는 그 이상한 힘을 두려워했던 거야. 이러한 힘이 머리 위에 떨어진 사라은 불행할 수밖에! 바로 이러한 힘이 옐리초바 부인에게는 무서울 정도로 명백히 나타났던 거지. 어머니의 죽음‥‥남편의 죽음‥‥이쯤 되면 누군들 공포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걸세. 나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그녀는 마치 자물쇠를 잠그고 그 열쇠를 물 속에 던져 버린 것과도 같았어. 그녀는 일생 동안 너무 많은 불행을 겪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행을 남에게 이야기한 적은 없었어. 모든 것을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거지. 그녀는 자기 감정을 억제하는 습성이 붙어 있어서 딸에게 애틋한 사랑을 표시하는 일까지 부끄러워할 정도였어. 그녀는 한 번도 내 앞에서 딸에게 키스한 적이 없고, 애칭으로 부르는 일도 없이 언제나 베라라고만 부르곤 했었지. 지금도 부인이 말한 어떤 이야기가 생각나네. 나는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우리 현대인은 모두 상처받은 인간이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자기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에요. 차라리 자기의 전 존재를 꺾어 버리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그대로 놔두는 거예여‥‥" 옐리초바 부인 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극히 적었어. 하지만 나는 자주 그녀를 방문했으며, 부인도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마음 속으로 느끼고 있었지. 게다가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무척 내 마음에 들었어. 우리는 곧잘 이야기도 나누고 산책하기도 했는데‥‥어머니는 별로 우리들을 방해하지 않았어. 베라 자신도 어머니하고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 역시 단둘이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으니까. 베라 니콜라예브나에게는 소리를 내어 생각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지. 밤마다 자면서 커다란 소리로 그 날 받은 강한 인상을 똑똑하게 말하는 것이었어. 어느 날 베라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면서 평상시의 자기 버릇대로 가볍게 턱을 괴고는, "B씨는 좋은 분이긴 하지만 내가 의지할 사람은 아니야." 하고 말하질 않겠나?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무척 다정하면서도 순조로웠지. 그런데 한 번은 까마득히 먼 그녀의 밝은 눈 속 어딘가에서 무언지 모를 기묘한 것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어. 그것은 감미롭고 부드러운 도취감이라고나 할까‥‥그러나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르지.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어느 새 떠날 차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꾸물거리고 있었지. 드디어 이 사랑스러운 처녀를, 이토록 내 마음을 사로잡은 처녀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하니, 그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더군‥‥베를린은 차츰 매력을 잃어 갔어. 나는 내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스스로 자인할 만한 용기도 없었고, 게다가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분명히 알 수 없었어--마치 마음 속에 안개가 낀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그러나 마침내 어느 날 아침, 모든 것이 갑자기 분명해지더군. 그 이상 무엇을 바라는 건가? 어디로 가려고 하지? 아무리 애써 봐야 진리라는 건 손에 잡히는 게 아니야. 그보다는 오히려 여기 남아서 결혼하는 편이 좋지 않은가 말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지. 그런데 이 결혼이라는 상념도 그 땐 조금도 나를 위협하지 않았다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나는 아주 기뻐했을 정도였지. 그래서 나는 바로 그 날 안으로 내 마음을 고백하고만 걸세. 자네도 상상하리라고 믿지만, 베라 니콜라예브나에게 고백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인 옐리초바 부인에게 이야기를 한 거지. 노부인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안 됩니다." 하고 말하더군. "당신은 베를린에 가서 좀더 상처를 입고 돌아오세요. 당신은 선량한 분이지만, 베라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과 같은 남편이 아닙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홍당무처럼 빨개졌지. 그리고 자넨 더욱 놀라겠지만, 나는 곧 마음 속으로 부인의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다네. 1주일 후 나는 그 곳을 떠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옐리초바 ㅂ인도 베라 니콜라예브나도 만난 적이 없네. 나는 자네가 무엇이건 '심하게' 늘어놓느ㅡ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ㅇㄹ 알기 때문에 옛날의 로맨스를 간단히 이야기했네만, 베를린에 도착한 후 나는 아무 미련 없이 곧 베라 니콜라예브나를 잊고 말았지‥‥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뜻하지 않은 그녀의 소식은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네. 베라가 이렇게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고, 며칠 안에 그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네. 땅 속에서라도 솟아오른 듯이 과거는 별안간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히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거야. 프리므코프는 옛 우정을 소생시킬 목적으로 나를 찾아가던 길이라고 하면서 가까운 시일 안에 자기 집을 찾아 주면 고맙겠다고 말하더군. 그의 이야기로는 프리므코프는 기병대에 근무하다가 중위로 퇴역을 하고, 나의 집에서 8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영지를 사 가지고 이제부턴 농촌 경영에 종사할 생각이라는 거야. 그에게는 어린애가 셋 있었지만 그 중둘은 죽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다섯 살짜리 딸뿐이라더군. "부인께서도 나를 기억하고 계실까요?"하고 내가 물었지. "암, 기억하고말고요." 그는 약간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어. "물론 그 당시 내 아내는 어린애와 다름없었겠지요. 그러나 장모께서는 언제나 당신을 칭찬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아시다시피, 내 아내는 돌아가신 장모의 말씀이라면 무엇이건 소중히 여기고 있으니까요." 이 때 나는 옐리초바 부인의 말--"베라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과 같은 남편이 아닙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나더군‥‥그렇다면 자넨 적당했던가 보군 하고, 나는 프리므코프를 곁눈질해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었지. 프리므코프는 서너 시간 가량 우리 집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무척 어질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어서, 그 겸손한 말솜씨라든가, 호인다운 인상을 주는 어진 표정이 누구라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지적 재능면에서는 우리가 그를 알고 있을 때보다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 나는 곡 그의 집을 방문할 생각이네. 어쩌면 내일 당장 갈지도 모르지. 베라 니콜라예브나의 변한 모습을 보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일 테니까. 자넨 원래 짓궂은 놈이라, 지금쯤 과장실 책상에 앉아서 나를 비웃고 있을 테지. 그러나 나는 어쨌든 그녀가 어떤 인상을 주는지 꼭 전하기로 하겠네. 그럼 이만! 다음 편지 때까지. 자네의 P. B로부터
3 M마을에서, 1850년 6월 16일 여보게, 나는 베라의 집을 방문햇 그녀를 만나보았네. 여기서 우선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군 그래. 자네가 믿고 안 믿고는 자네 마음대로지만, 그녀는 얼굴이건 모습이건 거의 조금도 변한 데라곤 없었다네. 그녀가 마중을 나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어--열일곱 살의 처녀, 정말 그 때의 모습 그대로였어! 다만, 눈만은 처녀 때와 달랐지만, 그녀의 눈은 처녀 때부터도 소녀의 눈같지는 않았지--남달리 눈이 밝았으니까. 그러나 예전과 같은 침착성, 그 명랑함, 게다가 목소리까지도 같고, 이마에는 주름살 하나 없었어. 마치 지난 10년 동안 힌 눈 속에라도 파묻혀 있다가 나온 것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그녀는 지금 스물여덟 살이고,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란 말일세‥‥정말 모를 일이야! 자네, 제발 부탁이니 내가 선입감 때문에 사실을 과장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게. 오히려 나는 그녀의 이러한 불변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한 사람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스물여덟 살의 부인이 소녀와 같을 수는 없겠지. 생활이 무의미하게 흘렀을 리는 만무하니까. 그녀는 무척 정답게 날 맞아 주더군. 그리고 프리ㅁㅍ 나를 보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더군. 이 호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애착의 대상을 만들려고 거기에만 애를 쓰고 있는 거야. 집은 무척 아늑하고 깨끗했어.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옷차림까지도 소녀 같아서, 온통 새하얀 옷에다 파란 띠ㄹㄹ 두르고, 목에는 가느다란 금목걸이를 걸고 있더군. 그녀의 딸은 엄마를 닮은 데라고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외할머니를 연상케 했어. 응접실의 긴 의자 위에는 그 괴상한 부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그게 또 여간 비슷하지가 않더군. 나는 방에 들어서자 곧 그 그림을 알아봤지. 그림 속의 부인은 준엄한 눈으로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어. 우리는 서로 자리잡고 앉아 옛날을 회상하며 잠시 이야기에 젖었지. 나는 나도 모르게 가끔 옐리초바 부인의 음울한 초상화를 올려다보곤 했어. 베라니콜라예브나는 바로 그 밑에 앉아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장소라는 거야. 그런데 여보게, 내 놀라움을 좀 상상해 보게.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아직가지 한 권의 소설도, 한 편의 시도 읽은 적이 없다는 거야! 이 고상한 지적 만족에 대한 그녀의 수수께끼 같은 무관심은 나를 격분케 했다네. 총명한 여자에게는, 더욱이 내가 판단하는 한 그토록 섬세한 감정을 지닌 부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지. "어째서입니까?" 하고 나는 물었지. "그런 책을 읽지 않겠다는 건 당신 자신이 세운 규칙입니까?" "그저 그렇게 됐어요." 그녀는 대답했어. "틈이 있어야지요." "틈이 없다니요! 놀라운 일이군요! 그럼 당신이라도." 하고 나는 프리ㅁ프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지. "부인에게 그런 취미를 붙이도록 하시지 않고‥‥" "나는 기꺼이 그러고 싶습니다만‥‥" 하고 프리므코프가 말을 꺼냈으나, 베라 니콜라예브나가 그의 말을 가로채더군. "거짓말 말아요, 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실 시는 그렇지만." 하고 프리므코프는 말하기 시작했어. "그러나 소설은, 예를 들어‥‥" "그럼,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밤마다 무엇으로 소일하고 지내십니까? 트럼프 놀이라도 하시나요?" 하고 나는 물었어. "때때로 트럼프도 합니다만." 하고 베라가 대답하더군. "그 밖에도 할 일은 많지요. 독서도 하구요. 시 외에도 좋은 책은 많으니까요." "왜 당신은 그렇게 시를 공격하십니까?"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그런 공상의 산물은 읽지 않기로 습관이 되고 말았어요. 그것이 어머니의 소원이기도 했구요. 그리고 살아가면 갈수록 저는 어머니가 하신 일이며 말씀하신 것들이 모두 진리였다는 것을 차츰 확신하게 돼요. 정말 신성한 진리였어요." "그야 물론 당신 마음대로겠지만,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인생에 있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적당한 쾌락을 일부러 잃고 계신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당신은 음악과 그림을 배척하진 않으실테죠? 그런데 왜 시를 배척하시는 겁니까?" "배척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지금까지 시를 읽지 않았을 뿐이죠.--다만 그뿐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그 일을 맡도록 하죠! 당신 어머님께서도 일생 동안 문학 작품을 읽지 말라고 금하신 것은 아닐 테니까요." "네, 제가 결혼했을 때 어머니는 모든 구속을 풀어 주셨어요. 단지 제가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저, 뭐라고 하셨더라‥‥네, 한 마디로 말해서 소설 같은 것 말이에요." 나는 의아심을 느끼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지. 나로서는 정말 예기치도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군. 새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을 때 흔히 이런 눈을 하는 법이지. "요다음엔 책을 가져오겠습니다!" 하고 나는 외쳤어(나의 머리에는 최근에 읽은 <파우스트>가 떠올랐던 걸세).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더니 "그건‥‥그건 조르즈 상드가 아닌가요?" 하고 다소 겁에 질린 어조로 묻는 거야. "아니? 그렇다면 당신도 상드의 이름을 알고 계시는군요? 뭐, 상드라 해도 별로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다른 책을 가져오겠습니다. 당신은 독일어를 잊지는 않으셨겠죠?" "네, 잊지 않았어요." "아내는 독일인과 다름없이 말한답니다." 프리므코프가 참견하더군. "그럼, 좋습니다. 가져오지요!‥‥이제 두고 보십시오, 어떤 훌륭한 책을 가져오는가를." "네, 좋아요. 두고 봅시다. 자, 이제 우리 정원으로 나가도록 해요. 나타샤는 밖에 나가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나 봐요." 그녀는 둥근 밀짚모자를 썼는데, 그것은 딸이 쓴 것과 똑같은 어린애용 모자로 그저 조금 더 넓을 뿐이었어. 이윽고 우린 모두 정원으로 나갔고, 난 베라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지. 상쾌한 공기 속에서 높다란 보리수 그늘로 응달진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사랑스러워 보이더군. 특히 모자 차양 밑으로 나를 보려고 살며시 몸을 돌리며 머리를 뒤로 젖혔을때는 말할 수 없이 귀엽게 느껴졌어. 만약, 뒤에서 걸어오는 프리므코프와 앞에서 깡충깡충 뛰고 있는 딸 나타샤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서른 다섯 살이 아니라, 스물 세 살의 청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을 걸세. 글쎄, 지금 막 베를린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더라니까. 게다가 우리가 걷고 있는 정원은 옐리초바 부인 댁의 정원과 너무나도 흡사해서 나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느낀 인상을 베라 니콜라예브나에게 말했다네. "모두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제 모습이 변하지 않는다구요." 하고 그녀는 대답하는 거야. "그리고 전, 마음도 예전 그대로예요." 우리는 조그만 중국식 정자로 다가갔지. "이런 정자는 우리 오시노프카 마을엔 없었지요."하고 베라는 말했어. "이렇게 허물어지고 색이 바랬다고 언짢게 생각하진 마세요. 그래도 안은 무척 아늑하고 서늘하답니다." 우리는 정자 안으로 들어갔어. 나는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고 그녀에게 말했지. "베라 니콜라예브나, 요다음 내가 올 때는 여기에 테이블 하나와 의자 몇 개를 갖다 놓도록 해 주십시오. 여긴 정말 멋지군요. 여기서 읽어 드리겠습니다‥‥괘테의 <파우스트>를‥‥내가 당신께 읽어 드리겠다던 책은 바로 그겁니다." "네. 여긴 파리가 없어요." 그녀는 무관심한 투로 말하더군. "언제 오시겠어요?" "모레." "좋아요." 하고 그녀는 대답했어. "그렇게 일러 놓지요." 그러나 이 때 우리하고 함께 정자로 들어온 나타샤가 별안간 비명을 지르더니 파랗게 질리면서 흠칫 뒤로 물러나질 않겠나. "왜 그러지?" 하고 베라 니콜라예브나가 묻더군. "아, 엄마." 하고 소녀는 손가락으로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하는 거야. "저것 봐, 저렇게 무서운 거미가!‥‥"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구석으로 눈을 돌렸어. 거기엔 커다란 얼룩거미가 천천히 담벽을 기어오르고 있더군. "아니, 뭐가 무섭단 말이니?" 하고 그녀는 딸에게 말했어. "거미는 물지 않는단다. 자, 봐라." 그리고 그녀는, 미처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더러운 거미를 손으로 집더니, 손바닥 위를 슬금슬금 달리게 한 후 홱 밖으로 내던지는 거야. "아니, 굉장히 용감하시군요!" 하고 나는 외쳤지. "뭐가 용감하단 말씀이세요? 이 거미는 독이 들어 있는 종류가 아닌걸요." "당신은 여전히 자연 과학에 통달하고 계신가 보군요. 난 손으로 집지도 못할 겁니다." "저런 건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하고 그녀는 되풀이했어. 나타샤는 아무 말 없이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방긋 웃더군. "저 애는 어쩌면 저렇게도 당신 어머님을 닮았습니까!" 하고 내가 말했지. "그래요."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어. "저는 그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제발 얼굴만 닮지 말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닮았으면 좋을 텐데!" 그 때 시ㅐ사 준비를 알리더군. 나는 식사를 마친 뒤 그 집을 떠났지. N.B(Nota Bene의 약자). 식사는 정말 훌륭하고 맛있었어.--이것은 식도락가인 자네를 위해 특별히 괄호의 형식으로 덧붙이네! 내일은 베라 니콜라예브나네 집으로 <파우스트>를 가지고 가려네. 나는 늙은 괴테와 함께 혹시 낙제나 하지 않을까 걱정일세. 모든 걸 자네에게 자세히 전하기로 하지. 그건 그렇고, 자넨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그녀가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으니까. 내가 흠뻑 반하지나 않았을까, 그런 일들을 생각하고 있을 테지? 부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말게나! 나는 그럴 때가 지났어. 지금까지의 바보짓만 해도 충분하니까 말이야! 내 나이에 생활을 고쳐 나간다는 건 무리지. 게다가 나는 옛날에도 그런 여자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니까‥‥그렇다면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었을까? 나는 몸부림치며 가슴을 앓노라, 수많은 나의 우상들을 부끄러워하며. 어쨋든 나는 이 이웃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네. 그리고 그 총명하며 단순하고 명랑한 부인과 이렇게 사귁 된 것을 기뻐하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은 시간이 말해 줄 테지. 자네의 P. B로부터
4 M마을에서, 1850년 6월 22일 사랑하는 벗이여, 나는 어제 낭독을 했다네. 그 때의 상황을 이제부터 차근차근 전하기로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말해 둘 것은 그것이 뜻하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걸세‥‥그러나 '성공'이란 말은 적당한 표현이 아닐지도 모르지. 하여튼 들어 보게. 나는 식사 시간에 그 곳에 도착했다네. 식탁에는 그녀를 비롯해 프리므코프와 그의 딸, 여자 가정교사--얼굴이 새하얗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여자였어--나, 그리고 짧은 갈색 플록 코트를 입은 나이 먹은 독일인, 이렇게 모두 여섯이 앉아 있었지. 그 독일인은 무척 상냥하고 정직해 보이는 얼굴에 말끔하게 면도를 한 깨끗한 노인이었는데, 그는 이가 없는 독특한 미소를 띠고 연방 꽃상추와 커피 냄새를 풍기고 있더군--나이 든 독일인은 으레 이런 냄새를 풍기게 마련이지. 나는 그 노인을 소개받았지. 그는 쉼멜이라는 사람으로, 프리므코프의 이웃집에 사는 XX공작 댁의 독일어 교사였어.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그 노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듯 그를 낭독 장소로 초대한 걸세. 우리는 천천히 식사를 하고도 한참 동안 식탁을 떠나지 않았어. 이윽고 우리 모두는 정원을 산책했지. 무척 상쾌한 날씨였어. 아침에는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지만, 저녁때가 되니 모든 것이 잠들고 말더군. 나는 베라 니콜라예브나와 함께 환히 트인 풀밭 위로 걸어 나갔지. 머리 위에는 커다란 장미빛 구름이 두둥실 높이 떠 있고, 그위를 잿빛 무늬가 몇 줄기의 연기처럼 달리고 있었으며, 그 가장자리엔 조그만 별 하나가 보일 듯 말 듯 깜박이고 있는 거야. 그리고 좀더 앞에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한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초승달이 떠 있었어. 내가 베라 니콜라예브나에게 그 구름을 가리켰더니. "그래요." 하고 그녀는 말했어. "정말 아름답군요. 그렇지만 이쪽을 좀 보세요." 나는 뒤돌아보았지. 거대한 검푸른 비구름이 저물어 가는 태양을 뒤덮으면서 뭉게뭉게 치솟고 있는 거야. 그 모습이 흡사 불을 뿜는 화산과도 같아서, 그 꼭대기는 분화구의 연기처럼 넓게 하늘에 펼쳐져 있었어. 그 가장자리에는 불길한 인상을 주는 적자색이 뚜렷한 윤곽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단 한 곳, 한가운데는 마치 작열하는 분화구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진홍빛 광선이 그 거대한 구름장을 꿰뚫고 있었어‥‥ "소나기가 한 차례 퍼붓겠군." 하고 프리므코프가 말하더군. 그건 그렇고, 나는 화제의 초점에서 빗나가고 있는 것 같군 그래. 지난번 편지에 쓰는 것을 잊었지만, 프리므코프의 집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파우스트>를 택한 것을 후회했다네. 이왕 독일 작가를 택할 바에는 맨 먼저 쉴러를 택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지. 특히 나를 불안스럽게 한 것은 그레첸과 만나기까지의 처음 몇 장면이었어. 메피스토펠레스에 대햇ㄷ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더군. 하지만 나는 그 때 <파우스트>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읽고 싶지 않았던 걸세. 우리는 완전히 어둠이 깃들기 시작해서야 중국식 정잘 향했지. 거기에는 이미 전날 밤부터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더군. 바로 문 맞은편 긴 의자 앞에 테이블 보를 씌운 둥근 탁자가 있고, 그 주위에 몇 개의 안락의자와 걸상들이 놓이고, 둥근 탁자 위에서는 등잔불이 타고 있어어. 나는 긴 의자에 앉아 책을 꺼냈지.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약간 떨어져 문에서 가까운 안락의자에 자리잡고 앉더군. 문 밖 어둠 속에서는 파란 아카시아나무 가지들이 등잔불에 반사되어 바르르 떨고 있었고, 가끔 상쾌한 밤공기가 정자 안으로 흘러들어왔어. 프리므코프는 내 옆에 앉았고, 독일인은 그 옆에 자리잡았지. 가정 교사는 나타샤와 함께 집에 남아 있었고. 나는 간단한 머리말 형식으로 파우스트 박사에 대한 옛 전설이며, 메피스토펠레스가 갖는 의미며, 괴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만약 낭독중에 모르는 대목이 있으면 낭독을 멈추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 그리고 나서 내가 기침을 한 번 하니‥‥프리므코프가 설탕물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나한테 묻더군. 그는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는데 대해 무척 만족을 느끼는 듯한 눈치였는데, 그것은 여러 점에서 알수가 있었어. 나는 사양했어. 깊은 침묵이 좌중을 휩쓸더군. 나는 눈을 들지 않고 일기 시작했지. 왜 그런지 멋적은 생각이 들며 가스이 ㄷ근거리고 목소리가 떨리는 거야. 먼저 독일인의 입에서 감탄의 함성이 터져 나오더군. 그리고 낭독을 하는 동안 그는 혼자서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었어‥‥"훌륭해! 최고야!" 하고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 이건 정말 심각하군." 하고 덧붙이기도 했지. 내가 느낀 바에 의하면, 프리므코프는 지루해 하는 것 같았어. 독일어도 잘 모르는데다 시는 애초부터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 자신 고백하긴 했지만 말이야‥‥하지만 자기가 좋아서 참석했으니 하는 수 없었지! 나는 식사 때, 그가 없어도 낭독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으나, 차마 그렇게까진 말할 수가 없어서 그만두고 말았던 걸세.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어. 나는 두 번 가량 그녀를 훔쳐보았는데, 그녀의 조심스러운 눈은 뚫어질 듯이 나를 보고 있었고,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는 것 같았어. 파우스트가 처음으로 그레첸과 만났을 때, 그녀는 안락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고 두 손을 맞잡았는데, 그자세 그대로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어. 나는 프리므코프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처음엔 마음을 졸이게 했지만, 나중엔 그런 생각들을 잊고 열심히 정열적으로 읽어 내려갔지‥‥나는 베라 한 사람만을 위해서 읽은 거야. 마음 속의 목소리는<파우스트>가 그녀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을 내게 말해 주고 있었어. 드디어 낭독을 마쳤을 때(인터메초는 생략했네. 이것은 작품으로 봐서 제2무에 속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브로켄의 밤'도 조금 생략해 버렸지)‥‥내가 낭독을 마치고 "하인리히!"라는 마지막 말이 울려 퍼지자, 독일인은 감격에 넘친 어조로 "아! 정말 훌륭했어!" 하고 외치더군. 프리므코프도 기쁜 듯이--가련한 사나이 같으니라구!--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숨을 몰아쉬며 낭독이 준 즐거움에 대해서 감사하기 시작하는 거야‥‥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어. 나는 물끄러미 베라 니콜라예브나를 바라보고 있었지‥‥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듣고 싶었던 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허한 걸음으로 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잠시 문턱위에 서 있다가 살며시 정원으로 나가 버리더군. 나는 그 뒤를 쫓아 달려갔지. 그녀는 벌써 대여섯 걸음 앞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녀의 옷이 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렸어. "왜 그러십니까?" 하고 나는 소리쳤지. "마음에 드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걸음을 멈추더군. "그 책을 남겨 두고 가실 순 없겠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어. "그 책을 드리겠습니다, 베라 니콜라예브나. 당신이 가지고 싶으시다면." "고마워요!" 그녀는 대답하고 그 자리에서 떠나 버렸어. 프리므코프와 독일인이 내 옆으로 다가오더군. "굉장히 따뜻한 날씨군요!" 프리므코프가 말했어. "무더울 정도인데요. 그런데 제 아내는 어디로 갓습니까?" "집으로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고 나는 대답했지. "곧 밤참 시간이 되겠군." 그는 그리고 잠시 사일ㄹ 두었다가, "당신은 낭독 솜씨가 대단하시던데요."하고 덧붙이더군. "베라 니콜라예브나께서도 <파우스트>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더군요." 나는 말했지. "그야 물론이죠!" 프리므코프가 말했어. "암, 그렇고말고요!"하고 쉼멜이 맞장구를 치더군.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왔지. "마님은 어디 계시냐?" 마중을 나온 하녀에게 프리므코프가 묻더군. "침실로 들어가셨어요." 프리므코프는 침실로 가 버렸어. 나는 쉼멜과 함께 타라스로 나갔어. 노인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담배를 한 번 냄새 맡고 나서 "별이 참 많기도 하지!" 하고 천천히 말하더군. "저것이 모두 저마다의 세계들이거든요." 노인은 이렇게 덧붙이더니 다시 한 번 담배 냄새를 맡았어. 나는 그 말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므로 그저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네. 신비로운 의혹이 내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지‥‥나는 별들이 심각한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더군. 5분가량 지나자, 프리므코프가 나타나서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어. 이윽고 베라 니콜라예브나도 모습을 나타냈고, 우린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지. "자, 베로치카(베라의 애칭)를 좀 보십시오." 하고 프리므코프가 내게 말했어.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지. "어떻습니까? 뭐 다른 데가 없습니까?"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확실히 어떤 변화를 발견하기는 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저 이렇게 대답했어. "아니, 뭐 별로‥‥" "눈이 빨갛지 않습니까?" 하고 프리ㅁ프가 말을 잇더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글세, 내가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사람이 울고 있질 않겠습니까. 이건 오랫동안 없었던 일입니다. 당신에게 말하지만, 이 사람이 운 것은 사샤가 죽은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당신의 그 <파우스트>가 이런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프리므코프는 미소지으며 말했네. "그렇다면 결국 베라 니콜라예브나." 하고 나는 말문을 열었지. "당신은 내 말이 옳았다는 걸 아신 셈이군요. 예전에‥‥" "저도 정말 뜻밖이었어요." 하고 그녀는 내 말을 가로채어 말했어. "그렇지만 당신 말이 옳은지는 아직도 의문이에요. 어미니께서 그런 책을 읽지 못하게 하신 것도 아마 그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입을 다물더군. "무엇을 알고 계셨단 말씀인가요?" 나는 다그쳐 물었지. "어서 말슴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해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왜 울었는지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인데요. 아무튼 나중에 다시 차근차근 얘기하도록 해요. 너무도 모르는 것이 많아서‥‥" "그럼 왜 낭독을 중지시키지 않았습니까?" "말은 하나도 모르는 게 없었어요. 그리고 그 뜻까지도 모두. 그렇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어. 이 때 별안간 폭풍이 휘몰아치더니 정원의 나뭇잎이 요란스럽게 뒤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네.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부르르 몸을 떨며 열려진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군. "내가 말했었지요, 소나기가 퍼붓겠다고!" 하고 프리므코프가 외치는 거였어. "여보, 베로치카, 왜 그렇게 몸을 떨어요?" 그녀는 말없이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어. 멀리서 희미하게 번쩍이는 번갯불이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얽ㄹ 위에 신비로운 빛을 던지고 있었지. "모든 게 <파우스트>때문이오." 프리므코프는 말을 이었어. "밤참을 마치면 곧 자야겠군요‥‥안 그렇습니까, 쉼멜 씨?" "정신적 만족이 있은 후의 육체적인 휴식은 유익하고 필요하기도 한겁니다." 선량한 독일인은 이렇게 맞장구치고 나서 보드카 잔을 비우더군. 밤참을 먹고 낫 우리는 곧 헤어졌네. 나는 베라 니콜라예브나에게 밤인사를 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지. 그 손을 얼음장같이 싸늘하더군. 나는 나에게 주어진 방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ㄹ동안 창가에 서 있었네. 프리므코프의 예상이 들어맞아서 소나기가 차츰 가까이 오더니 억수로 퍼붓기 시작했어. 나는 아우성치는 바람 소리와 억세게 퍼붓는 빈소리를 들으며 호숫가에 세워진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지. 번갯불이 번쩍일 때마다 교회는 흰 배경 위에 검게 혹은 검은 배경 위에 희게 그 모습을 불쑥 드러낸ㄴ가 하면 다시 그 어둠 속으로 삼켜져 버리기도 했어‥‥그러나 내 마음은 어딘가 먼 곳을 배회하고 있었지. 나는 베라 니콜라예브나를 생각하고 있었던 걸세. 그녀가 스스로 <파우스트>를 읽고 나면 내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그녀의 눈물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하고, 낭독을 듣고 있을 때의 그녀 모습을 회상하기도 하면서. 소나기가 지나간 지도 이미 오래여서,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빛나고, 주위의 모든 것은 고요히 잠들었어. 이름 모를 새가 갖가지 소리로 지저귀며 똑같은 음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더군. 그 낭랑하고 외로운 울음 소리는 깊은 정적 속에서 기묘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잠자리에 눕고 싶지가 않았네‥‥ 이튿날 아침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응접실로 내려가서 옐리초바 부인의 초상화 앞에 걸음을 멈추었지. 어떳습니까 하고 은근히 냉소적인 승리감을 느끼며 난 마음 속으로 부인에게 말했어. 드디어 당신의 따님에게 금단의 책을 읽어 드렸으니 말이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네‥‥자네도 아마 알고 있겠지만, ㅊ상하의 눈은 언제나 바라보는 사람 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법이지만‥‥이 때는 정말 부인께서 핀잔어린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는 듯한 생각이 들더란 말일세. 나는 욈ㄴ을 하고 창가로 다가갔지. 그러자 베라 니콜라예브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군. 그녀는 파라솔을 어깨에 걸치고, 하얀 삼각형 머플러를 가볍게 머리에 드리운 채 정원을 거닐고 있었어. 나는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지. "저는 밤새껏 한 잠도 자지 못했어요." 하고 그녀는 내게 말했네. "머리가 아파서요. 그래 바깥 공기라도 쐬면 나아질가 해서 밖으로 나온 거예요." "그럼 정말 어제의 낭독 탓인가요?" 하고 나는 물었지. "물론이죠, 전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당신의 그 책 속에는 도저히 피하려 해야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해요. 그것들이 제 머리를 불로 지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덧붙였어. "그거 참 좋은 일입니다."하고 나는 말했지. "그러나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그 불면증과 두통이 앞으로 그런 책을 읽겠다는 당신의 욕망을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이렇게 되묻고 걸음을 옮기면서 야생 재스민 가지 하나를 꺾었어. "글쎄요! 저로선 일단 이 길로 발을 들여놓은 이상 다시는 뒷걸음질칠 수 없을 듯이 생각되는데요." 그녀는 재스민 가지를 홱 옆으로 던져 버리더군. "저기 정자로 가서 앉아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어. "그리고 제발 부탁이지만,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그 책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파우스트>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 우리는 정자로 들어가서 앉았다네. "앞으로, <파우스트>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나는 말을 꺼냈어. "하지만 당신을 축하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부럽다고 말슴드리고 싶군요." "제가 부럽다구요?" "그렇습니다. 이젠 당신이 어떤 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말씀드리지만, 당신과 같이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앞으로도 수많은 향락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셰익스피어, 괴테, 쉴러,‥‥아, 그리고 우리는 푸슈킨‥‥그렇습니다. 푸슈킨은 꼭 읽으셔야 합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파라솔로 모래 위에다 글을 쓰고 있었어. 오, 나의 벗 세묜 니콜라예비치, 이 순간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자네가 볼 수만 있었다면! 거의 투명해 보이는 듯한 파리한 얼굴을 다소곳이 앞으로 숙인 그녀, 내부의 균형을 잃고 힘없이 늘어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푸른 하늘처럼 맑은 그녀! 나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나중엔 입을 다물고 말았다네--그리고는 말없이 앉아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어‥‥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여전히 파라솔 끝으로 선을 긋기도 하고. 자기가 그린 선을 지우기도 하며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빠른 어린애의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나타샤가 정자로 뛰어들지 않겠나. 베라 니콜라예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놀랍게도 이상할 만큼 격정적인 애정을 나타내며 자기 딸을 껴안는 것이었어. 이것은 좀처럼 그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이야. 이윽고 그녀의 남편이 나타나더군. 백발이 성성하면서도 정직한 어린아이와 다름없는 쉼멜은 수업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날이 새기도 전에 돌아갔다는 것이었어. 우리는 차를 마시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지. 그건 그렇고, 피곤한 걸 보니 이 편지도 끝날 때가 된 것 같군. 자네에겐 이 편지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흐리멍덩한 것으로 느껴질 테지. 나자신도 몽롱한 기분에 싸여 있으니 말일세. 마음이 들더서 좀체 가라앉지 않는군.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으니까. 여전히 벽지를 바르지 않은 조그만 방이며, 테이블 위의 램프며, 열어젖힌 문이며, 밤공기의 아늑한 향기, 그리고 문 옆에 앉아 있는 조심스러운 젊음에 찬 얼굴, 그 하늘거리는 흰 옷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죽을 지경이야‥‥내가 왜 그녀하고 결혼하려 했었는지 지금에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네. 그러니까 베를린 유학을 떠나기 전에도 나는 지금가지 내가 생각하던 것처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았던 것 같아. 정말일세, 세묜 니콜라예비치, 자네 친구는 지금 기묘한 정신 상태에 빠져 있다네. 하지만 이 기묘한 것도 곧 지나가 버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그러나 만약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면? 아니, 그래도 어쩌는 수 없는 일이지. 지나가지 않는 거지 뭐겠나. 그건 그렇고, 어쨌든 나는 지금의 나자신에게 만족을 느끼고 있네. 우선 나는 멋있는 하룻밤을 보냈으며, 그리고 둘째로는 내가 그녀에게 그런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해도 아무도 나를 나무랄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일세. 옐리초바 부인은 못에 박혀 벽에 걸려 있으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옐리초바 부인!‥‥그녀의 일생을 속속들이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아버지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것만은 나도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탈리아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닐 거야. 부인은 자기 딸을 보호하려고 했던 걸세‥‥자, 우리 한 번 두고 보도록 하세. 이만 펜을 놓겠네. 빈정대기를 좋아하는 자네라 나를 어떻게 생각할는지 그건 자네 마음대로겠지만, 편지로 나를 조롱하지는 말아 주게. 우린 오랜 친구 사이인, 서로를 용서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겠나. 그럼, 안녕! 자네의 P. B로부터
5 M마을에서, 1850년 7월 26일 친애하는 세묜 니콜라예비치,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했군. 한 달 이상이 되는 것 같네 그려. 이야깃거리는 있었으나 그만 게으름이란 놈에게 지고 말았지. 솔직히 말해 나는 지난 한 달 동안 자네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지도 않았다네. 그러나 최근에 보낸 자네의 편지로 추측하건대 자네는 나에 대해서 전혀 부당한 억측을 학 있는 것 같더군. 자네는 내가 베라에게 반해 버린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나는 그녀를 베라 니콜라예브나라고 부르는 것이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 드네.--그건 틀린 생각일세. 물론 나는 자주 그녀를 만나고 있고, 또 그녀가 무척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지‥‥그러나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네를 내 입장에 놓고 한 번 바라보고 싶어지는군. 정말 놀랄 만한 존재야! 어린애처럼 순진하면서도 순간적으로 꿰뚫어보는 직관력, 확실하면서도 건전한 판단력! 타고난 미적인 감각, 진리와 고상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 죄악과 희극적인 일가지를 포함한 모든 사물에 대한 이해--이 ㅁㄴ 것 위에 마치 날개와도 같은 아늑한 여성미가 풍기고 있으니 말일세‥‥자, 이런 형편이니 무슨 말을 더할 수 있겠나! 나와 그녀는 지난 한 달 동안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네. 그녀하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희열을 느꼈지. 마치 새로운 세계라도 발견한 듯한 느낌일세. 그녀는 무엇을 읽든 간에 환희에 젖는 일이라곤 없어. 무엇이든 소란한 것과는 인연이 머니까. 무엇인가 마음에 들 땜ㄴ 온몸이 고요한 빛으로 빛나고, 말할 수 없이 거룩하고 선량한‥‥그야말로 선량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떠올린단 말일세. 베라는 아주 어릴 때부터 거짓말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란 여자야. 그녀는 진실이 몸에 배고 진실을 호흡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시 속에서도 진실만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가 보네. 그녀는 아무 긴장도 노력도 없이 마치 낯익은 얼굴처럼 금방 진실을 알아 내는 걸세‥‥정말 위대한 장점이고 행복이지 뭐겠나! 여기에 대해선 돌아가신 그녀의 어머니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나는 베라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몇 번인가 해다네--그렇다. 괴테의 말이 옳다--'선량한 사람은 희미한 욕구 속에서도 진리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언제나 직감한다.' (<파우스트>제 1부 프롤로그) 그저 한 가지 기분 나쁜 일은 남편이 항상 우리 옆을 맴돌고 있다는 걸세(제발 어리석은 웃음으로 비웃지는 말게. 그리고 우리의 깨끗한 우정을 더럽히는 듯한 생각도 아에 하지 말게). 그가 시를 이해하는 능력은 내가 플루트를 불려고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뒤지기를 싫어한다네. 그 역시 실ㄹ 이해하력 ㄴ력하는 것 같기는 하더군. 가끔 가다 그녀 자신이 나를 참지 못하게 만들 때가 있지. 별안간 무슨 이상한 생각에 휩쓸리면 독서도 이야긷 마다하고 수를 놓든가, 나타샤나 하녀를 상대로 장난을 치든가, 느닷없이 부엌으로 달려나가든가, 때로는 팔짱을 끼고 앉아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든가, 아니면 유모하고 트럼프 놀이를 하든가‥‥이럴 때면 귀찮게 그녀를 따라다니지 말고 그ㅡ녀가 스스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걸든가, 책을 들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다는 것을 나는 알아 냈다네. 그녀는 남달리 독립심이 강해. 그리고 나는 이것을 기쁘게 생각하네. 자네도 기억하겠지--우리가 젊었을 때 조그만 소녀들이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자네의 말을 흉내 내던 일을. 그럴 때 자네는 그 메아리에 감격해서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잠시 뒤엔 그 진상을 알게 되지--즉, 그 소녀는 사람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무엇이든 맹신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라곤 없어. 권위를 가지고 위협할 수도 없네. 그녀는 논쟁도ㅗ 모르거니와, 굴복이라는 것도 모르는 여자야. 우리는 <파우스트>에 대해 여러 번 의견을 교환했지. 그런데 이상한것은, 그레첸에 대해서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말만 듣고 있을 뿐이었네. 메핏토펠레스는 악마로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어떤 것으로서' 두려워하고 있어‥‥이건 그녀 자신이한 말이야. 나는 그녀에게 '어떤 것' 이라는 것은 우리가 리플렉션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설명하려 했으나, 그녀는 독일어의 레플렉치온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하더군. 그녀는 프랑스 어의 'reflexion'밖에 몰랐으므로, 그것을 유익한 것으로 생각하는 습관이 붙어 있었던 걸세. 우리두 사람은 정말 이상한 관계에 놓여 있다네! 어떤 점에서 보면 나는 그녀에게 큰 감화를 주면서 정신적인 교육을 도모하고 있닥도 말할 수 있겠으나, 그녀는 또 그녀대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면에서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으니 말일세. 이를테면 나는 그녀 덕분에 얼마 전 훌륭하고 유명한 문예 작품들 속에 약속이라도 딘 듯한 수사학적인 요소가 얼마나 많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네. 그녀가 싸늘한 반응을 보이는 작품이라면 내 눈에도 의아스럽게 느껴지니 말일세. 확실히 나는 더 좋아지고 더 현명해졌어. 그녀하고 정답게 지내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한, 그 전대로의 인간으로 남아 있는다는 것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자네는 물을 테지. 그러나 나는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네. 나는 9월까지 여기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다가 이 곳을 떠날 작정일세. 처음 몇 달 동안은 생활이 어둡고 지루한 듯이 느껴질지도 모르지만‥‥곧 익숙해질 테지. 가령 어떤 성질의 것이든 남자와 젊은 여자의 관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하나의 감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감정으로 바뀌어진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네‥‥만약,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느꼈담ㄴ 나는 당장 여기를 떠나고 말았을 걸세. 하긴 어느 날,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약간 이상한 일이 일어난 적도 있었지. 어떻게 해서, 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둘이서 <오네긴>(푸슈킨의 대표적 운문 소설)을 읽고 있었을 때라고 기억하지만--나는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다네. 그녀는 살며시 뒤로 물러나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나는 그녀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그런 눈초리를 본 적이 없어. 거기에는 깊은 생각과 조심성과 어떤 위엄이 어려 있었지‥‥)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리더군. 그 날은 하루 종일 그녀하고 마주앉을 수가 없었네. 그녀는 나를 피하느라고 꼬박 네 시간 동안이나 남편과 유모와 가정 교사를 상대로 트럼프 놀이를 게속했으니까! 이튿날 아침 그녀는 나를 정원으로 불러 내더군. 우리가 정원을 벗어나서 호숫가까지 다다랐을 때 그녀는 나를 이면한 채 갑자기 "제발 앞으로는 결코 그런 짓을 말아 주세요!" 하고 나직이 속삭이고는 곧 다른 말을 꺼내는 거야‥‥나는 정말 무안해서 어쩔줄을 몰랐어. 솔직히 고백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잠시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네. 그래서 자네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된 것도 어쩌면 그녀의 일을 생각하고 이야기할 가능성을 얻기 위한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지금 밖에서 말굽 소리와 말 울음 소리가 들려오는군. 마차 준비를 하고 있는 걸세. 그들한테로 가려는 거지. 이젠 마부도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게 되었어. 마차에 오르기만 하면 곧장 프리므코프네 집으로 달리니 말이야. 마을로 접어들기 2킬로미터쯤 전, 가파르게 굽은 길 어귀에 이르면 그들의 저택이 자작나무 숲 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지‥‥그리고 그녀의 창문이 멀리서 반짝일 때면 언제나 내 가슴은 기쁨으로 용솟음치는걸세. 쉼멜은(무골 호인격인 이 노인은 가끔 그들의 저택을 방문학ㄴ 하지. 프리므코프 부부는--그들로서는 다행한 일이지만--지금까지 X공작네 가족들을 단 한 번 보았을 뿐이야) 베라가 살고 있는 집을 가리키면서, 그 특유의 겸손학도 정중한 어조로 "이 집은 평화의 보그자리 올시다!" 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건 물론 틀린 말이 아니야. 이 집엔 정말 평화의 천사가 살고 있으니까‥‥ 그 날개로 나를 덮어 다오. 물결치는 파도를 잠자게 해 다오-- 매혹된 이 내 가슴에는 그대의 그림자조차 기쁘거늘‥‥ 자, 오늘은 이만해 두지.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또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니까. 그럼, 다음 편지까지‥‥다음 편지엔 내가 무슨 말을 쓰게 되려는지? 그럼, 안녕! 문득 생각났는데, 그대로 '안녕'이라고만 하지 않고 언제나 '그럼 안녕'이라고 하는 것 같군. 난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든다네. 자네의 P. B로부터 덧붙임--자네에게 말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녀는 예전에 내가 구혼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네.
6 M마을에서, 1850년 8월 10일 고백하게. 자넨 나한테서 절망적인 소식 아니면 환희에 넘친 글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네. 내 편지는 흔히 볼수 있는 평범한 편지에 지나지 않을 걸세. 새로운 사건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까. 며칠 전 우리는 호수에서 보트 놀이를 했는데, 그 보트 놀이에 대해서 쓰기로 하지. 우리 일행은 베라, 쉼멜, 나,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네. 도대체 어떤 호기심에서 그토록 자주 그 노인을 초대하는지 나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네 그려. X공작네서는 노인이 수업을 게을리하기 시작한다고 기분 언짢아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어쨌든 그 날 노인은 굉장한 익살꾼이었지. 프리므코프는 머리가 아프다고 끼지 않았어. 아주 상쾌하고 기분 좋은 날씨였지. 파란 하늘에 뜬 솜 같은 크고 흰 구름들, 여기저기 넘치는 햇빛, 숲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잔잔히 밀려와 물결치는 호숫가의 파도, 그 위를 뱀처럼 넘실거리는 황금빛 물결, 그리고 상쾌한 공기와 태양! 맨 처음 나는 독일인과 함께 노를 저었지. 이윽고 돛을 달자 배는 수면 위를 미끄러져 나갔네. 뱃머리는 물 속에 잠기고, 배꼬리에선 하얀 물이 포말을 일으키며 술렁이는 거야. 그녀는 키를 잡고 방향을 조정했지. 머리는 수건으로 동여매어져 있었어. 모자를 쓰면 바람에 날릴 것 같아서였겠지. 곱슬곱ㅅㄴ 머리카락이 밑으로 삐져 나와 하늘하늘 바람에 나부끼더군. 그녀는 볕에 그을린 손으로 힘있게 키를 잡고서 때때로 얼굴에 날아드는 물방울을 맞으며 미소짓고 있었어. 나는 그녀의 발 옆 보트 밑에 몸을 굽히고 앉아 있었고, 독일인은 파이프를 꺼내 크나스테르(값싼 담배의 일종)를 피우며 노래 부리기 시작했어. 아주 멋진 베이스였네. 우선 그는 'Freu't euch des Lebens(인생을 즐겨라)'라는 옛 노래를 불렀으나, 그 다음 '마법의 퉁소' 속의 아리아로 옮기고, 이윽고 '사랑의 알파벳'이라는 로맨스를 불렀다네. 이 로맨스에서는 각각 적당한 후렴을 붙이는 것은 물론이지만, 알파벳을 모조리 말하게 되어 있어서, 먼저 A B C D --벤 이히 디히 제(그대를 만나면)ㄹ부터 시작해서, U V W X--마흐 아이넨 크닉스(인사를 해라)로 끝나는 거야. 쉼멜은 이 모든 노래를 감상어린 표정으로 불렀지만, 그 중에서도 그가 '크닉스!'라는 말에서 능글맞게 왼쪽 눈을 껌벅이는 모습은 정말 볼 만했네. 베라는 웃으면서 손가락을 세워 위협하는 시늉을 하더군. 난 노인에게 "쉼멜 ㅆ 내가 보건대, 젊었을 때엔 굉장했던 모양이군요." 하고 말하니, 노인은 "그야 물론이죠. 나도 남에게 뒤지진 않았으니까요." 하고 엄숙한 어조로 대답하는 거야. 그리고는 파이프의 재를 손바닥 위에 털어낵, 손가락을 담배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면서 아주 만족스럽게 파이프 끝을 비스듬히 옆으로 문 다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오, 호, 호!" 하고 덧붙였을 뿐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더군. 이 '오, 호, 호'라는 어조는 정말 멋있었어. 베라가 쉼멜 노인에게 학생가를 들려 달락 요청하자 그는 '노란 파이프 담배'를 불렀는데, 마지막 절에서 그 음조가 틀리고 말았어. 지나치게 허풍을 떨었기 때문이지. 그러는 사이에 바람이 강해지고, 제법 큰 파도가 일더니 보트가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었어. 우리 옆엔 제비들이 낮게 날고, 우리는 돛 위치를 바꾹 배를 조정하기 시작했지.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돌풍이 휘몰아쳐 바로잡을 사ㅇ 없이 물이 뱃전으로 쏟아져 들어왔어. 배 안에 굉장히 많은 물이 괴었지만, 이 때에도 독일인은 용감하게 일을 처리하더군. 그는 내게서 노끈을 낚아채서 돛의 위치를 바로잡고는 "쿡스하펜에선 이렇게들 한답니다!" 하고 말했지. 베라도 어지간히 놀란 듯 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평상시의 습관대로 아무 말 없이 스커트 자락을 치켜올리고 구두 끝을 보트의 가로대 위에 올려놓았어. 이 때 문득 괴테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르더군(나는 얼마 전부터 완전히 괴테에 빠지고 말았다네)‥‥자네 생각나나--'수천의 별들이 물결 위에 춤추며 반짝이노라' 하는 시를. 나는 이 시를 소리 높이 낭송해 내려갔지. 낭독이 "나의 눈이여, 어이하여 그대는 내리뜨느냐?"라는 대목에 왔을 때, 베라는 살며시 눈을 들어올리더군(나는 그녀의 발 아래쪽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녀는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걸세). 그녀는 바람 때문에 실눈을 하고 오랫동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이 때 갑자기 가볍게 빗방울이 들더니 수면 위에 물거품이 일기 시작했어. 나는 베라에게 외투를 주었지. 그녀는 그것을 어깨에 걸쳤어. 우리는 호숫가에 배를 대고--그 곳은 나루터가 아니었어--집까지 걸어서 돌아왔지. 그 때 나는 팔을 빌려 주었다네. 나는 줄 곧 무슨 말인가를 학 싶었으나 안 나오더군. 그러나 지금도 기억하네만, 단 한 가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지.--왜 당신 집에 있을 때, 마치 병아리가 어머니의 품 속에 숨어 있듯이 언제나 옐리초바 부인 초상화 밑에 앉느냐고 말이야. "당신의 비유는 정말 옳아요." 하고 그녀는 대답하더군. "저는 결코 그 날개 아래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않을 거예요." "자유로운 세계로 빠져나오고 싶지 않습니까?" 하고 나는 되물었지.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었어. 나는 왜 이 뱃놀이에 관해서 이토록 자세히 자네에게 말학 있는지나 스스로도 그 이유를 모르겠네. 굳이 설명하자면 그것은 내 과거에서 가장 즐거운 사건 중의 하나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사실 이것은 사건이라고까진 말할 수 없는 거지만‥‥나는 여기에서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아늑한 희열을 느꼈네. 그리고 눈물이, 홀가분한 행복의 눈물이 두 눈에서 마구 흘러내릴 것 같은 심정을 느낀 걸세. 정말이야! 어디 한 번 상상해 보게나, 그 이튿날 정원을 거닐면서 정자 옆을 지나치려 할 때, 갑자기 누구인지는 몰라도 'Freu't ench des Lebens'를 노래하는 명랑하고 즐거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나는 정자 안을 들여다보았지. 그랬더니 그건 베라가 아니겠나. "브라보!" 하고 나는 외쳤어. "당신이 그렇게 훌륭한 목소리를 가지고 계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노래를 멈추더군. 농담이 아니라, 그녀는 박력 있는 훌륭한 소프라노였어. 아마 그녀 자신도 자기가 그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믿네. 아직도 얼마나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재능이 그녀의 내부 속에 감처져 있을는지! 그녀 자신도 자기를 모르고 있으니 말일세. 요즈음 같은 세상에 이처럼 희귀한 여자가 살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8월 12일 어제 우리는 무척 이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네. 이야기는 우선 망령의 문제부터 시작되었는데, 글쎄, 그녀는 망령의 존재를 믿으면서 거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는 거야.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프리므코프는 지그시 눈을 감고 아내의 이야기에 맞장구ㄹ 치듯 살며시 고갤ㄹ 그덕여 보이더군. 나는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지만, 그 대화가 그녀에게 불쾌한 인상을 준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지. 그래서 우리는 상상에 대해, 상상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네. 나는 젊었을 때 수많은 행복을 공상하곤 했지만--그것은 실생활이 불운했던 사람, 혹은 현재 불운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되풀이하는 공념불에 지나지 않네.--그 중에서도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몇 개월 동안 베네치아에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학 공상하곤 했지.--나는 그때의 기분을 모두에게 들려 준 걸세. 청년 시절의 나는 늘 이런 공상에 젖어 있었으므로--특히 밤에는 더했지--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정경이 머릿속에 형성되어 언제든지 원할 때 잠시 눈만 감으면 그 정경을 눈앞에 그려 낼 수 있게까지 되었다네. 내 공상 속에 그려진 화면이란 이런 것일세.--밤, 달, 희고 부드러운 달빛, 향기‥‥자넨 레몬의 향기라고 생각할 테지만, 아닐세. 바닐라 향기, 사보텐 향기라네. 게다가 거울같이 잔잔하고 넓은 수면, 올리브가 무성한 평평한 섬, 그 섬 위 바닷가에 자그마한 대리석 집이 서 있고, 창문이 활짝 열려 있네. 어디서인지 음악이 들려오고, 집 안에는 거뭇거뭇한 잎이 달린 나무들이 늘어서 있으며, 반쯤 가려진 램프 빛이 흐르고 있지. 창문 하나에서는 금빛 술이 달린 무거운 벨벳 망토가 늘어져 있고, 그 한쪽 끝이 물위에 드리워져 있다네. 이 망토에 팔꿈치를 괸 그와 그녀는 나란히 앉아서 멀리 베네치아를 바라보고 있는 걸세. 바로 이러한 광경이 마치 눈으로 보기라도 하듯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단 말일세. 베라는 내 헛소리를 듣고 나더니, 자기도 자주 공상을 하곤 하지만 내 공상과는 전혀 종류가 다르다고 말하더군. 그녀는 어떤 여행자와 함께 아프리카 사막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든가, 북극의 바다에서 프랭클린(영국의 유명한 북극 탐험가)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자신을 공상한다는 걸세. 그리고 자기가 참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궁핍이며, 자기가 싸워 나가야 하는 모든 곤란을 생생히 마음 속에 그려 본다는 거야‥‥ "당신은 여행기를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이야." 이렇게 남편이 덧붙이더군. "그럴지도 모르죠."하고 베라는 대답했어. "그렇지만 공상을 하는 바엔 실현성이 있어야지, 실현성이 없는 것을 공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왜 그것이 안 된다는 겁니까?" 하고 나는 말을 받았지. "실현성이 없다고 해서 나쁠 게 뭡니까?" "제가 표현을 잘못했나 보군요." 하고 그녀는 말하더군. "제가 말하려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만의 행복에 대해서 공상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 것은 찾아오지도 않아요.--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걸 추구하지요? 그것은 건강과도 같은 것이어서, 자기 자신이 느끼지 않을 때엔 즉 그것이 존재한다는 증거일 수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네. 이 여자 속에는 위대한 넋이 깃들어 있어. 정말이야, 나를 믿어 주게‥‥대화는 베네치아에서 이탈리아와 이탈리아 인에게로 옮겨 갔지. 프리므코프는 밖으로 나가고 나와 베라 둘만이 남게 되었어. "당신의 혈관 속에는 이탈리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군요." 하고 나는 말했지. "그래요." 그녀가 대답하더군. "혹시 원하신다면 할머니의 초상을 보여 드릴까요?" "네, 부디‥‥" 그녀는 서재로 가더니, 잠시 후 큼직한 황금 메달리언(초상을 새긴 원형패)을 가지고 나오더군. 이 메달리언을 열었을 때, 나는 옐리초바 부인의 아버지와 알리바노 태생의 시골 여인인 그의 아내를 그린 멋진 미세화 초상을 보았다네. 베라의 조부는 옐리초바 부인하고 너무나 흡사해서 놀랄 정도였어. 흰 구름 같은 백발로 둘러싸인 그의 얼굴 윤곽은 더욱 날카로운 인상을 주지만, 조그만 황색 눈에선 어떤 음침한 고집 같은 것이 엿보였어. 그러나 이탈리아 여인의 얼굴은 어떠했을까! 윤기도는 커다란 ㄴㄴ은 약간 튀어나온 편이었으나, 진홍빛 입술은 자기 만족의 미소를 머금고, 그 얼굴은 활짝 피어난 장미꽃처럼 개방적이면서도 육감적인 데가 있지 않겠는가! 자극적인 섬세한 콧구멍은 지금 막 키스를 하고 난 뒤처럼 바르르 떨리며 벌어져 있고, 감스름한 두 볼에서는 타는 듯한 정열과, 건강과 청춘과 풍만한 여성적인 매력이 발산되고 있단 말일세‥‥나는 지금까지 그녀의 그런 이마를 상상조차 못해 봤네. 그런 이마를 창조하신 신에게 감사할 수밖에! 그녀는 고향 알리바노식의 옷차림을 하고 그려져 있었는데, 화가--아, 정말 명화가야!--는 반지르르 잿빛 윤기가 흐흐는, 흑옥같이 까만 머리에 ㅍ도가지를 꽂아 놓았더군. 그런데 이 바커스 같은 장식이 말할 수 없이 그녀의 얼굴 표정에 잘 어울리더란 말일세. 이 얼굴이 내게 누구를 연상케 했는지 자네 알겠나? 그 검은 액자 속에 끼워진 내 마농 레스코를 연상케 했다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란 일은, 이 초상화를 보면서 나는 문득 다음과 같은 것을 상기했다네.--베라의 얼굴은 자기 조모하곤 전혀 닮은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때때로 그 미소, 그 눈초리와 흡사한 어떤 것이 순간적으로 번쩍일 때가 있다는 것을‥‥ 정말이야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그녀 자신도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직까진 그녀의 내부에 숨어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거야‥‥ 덧붙여서 말해 두지만, 옐리초바 부인은 딸이 결혼하기 전에 자기의 생애며, 어머니의 횡사며, 그 밖의 모든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베라는 자기의 조부, 즉 신비적인 라다노프의 이야기를 듣고 특히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거야. 그녀가 망령을 믿는 것도 실은 이것 때문이 아닐는지? 그렇게 결백하고 빛나는 성품을 지닌 여자가 어두운 지하의 세계를 두려워하고, 게다가 그것을 믿고 있다니, 정말 모를 일이지‥‥ 그럼 이만 펜을 놓겠네. 이렇게 자질구레하게 쓴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러나 이미 다 써 버렸으니, 그대로 부치기로 하네. 자네의 P. B로부터
7 M마을에서, 1850년 8월 22일 저번 편지를 쓴 후 열흘이 지나서 다시 펜을 드네‥‥오, 나의 친구여, 나는 더 이상 감출 수가 없네 그려‥‥아, 이 괴로움!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걸세. 이 운명적인 말을 어떤 비통한 전율을 느끼며 쓰고 있는지 자네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믿네. 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년도 아닐세. 따라서, 남을 기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쉽게 자기 자신을 기만할 수 있는 그런 시기도 이미 지나간 지 오랠세. 나는 모든 것을 자각하고 모든 것을 명백히 관찰할 수 있다네. 내가 벌써 사십 고개를 바랍고 있다는 것도, 그녀가 남의 아내며, 또 그녀가 자기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네. 그리고 나를 사로잡는 이 불행한 감정에서는 남 모르는 마음의 가책과 완전한 생활력의 낭비 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네. 이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조금도 가벼워지지는 않고 있다네. 나는 이미 한 달 전부터 그녀에 대한 내 관심이 차츰 강해져 간다는 것을 느꼈던 걸세. 그것은 어느 정도 나를 당항하게 했지만, 한편으론 나를 기쁘게도 해 주었어‥‥그러나 흘러가 버린 청ㅊㄴ과 같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줄 믿었던 모든 것이 다시금 되풀이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네. 아니,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생전 처음이야! 마농 레스코, 프레틸리온--이것이 예전의 내 우상이었지. 이런 우상들을 파괴하는 것은 쉬웠지만, 이제야‥‥나는 이제야 비로소 여잘ㄹ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네.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정말 부끄러운 일이야‥‥사랑이란 뭐니뭐니해도 에고이즘이지만, 내 나이로 에고이스트가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일 테지. 서른 다섯 살이나 됐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고, 일정한 목적을 안고 이 땅에서 자기 의무와 자기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살아야 할 때니까. 그래서 나도 일에 달라붙어 보긴 했으나‥‥그게 또 회오리바람에라도 휩쓸린 듯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으니 말이야. 이제야 나는 첫번째 편지엣 자네에게 말했던 그 뜻을 이해할 것 같다네. 내 앞길에 가로놓였던 그 수많은 시련을 이제야 안 걸세. 이러한 시련이 별안간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린 거야. 나는 멍청히 서서 무의미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지만, 바로 눈앞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서 마음 속은 괴롭고 무겁기만 하다네. 나는 나 자신을 억제할 수는 없어서, 표면상으로는 다른 사람 앞에서뿐만 아니라, 그녀와 마주앉아 있을 때조차도 태연스러울 수 있지. 사실 어린애처럼 미치광이 짓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독충이 내 마음 속으로 기어들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 피를 빨고 있다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되려는 걸까? 지금가진ㄴ 그녀가 없을 때면 그녀를 그리워하고, 흥분하다가도 그녀를 보기만 하면 금방 가라앉곤 했는데‥‥지금은 그녀 앞에섣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으니 말이야.--바로 이것이 내게 두려움을 주는 걸세. 오, 사랑하는 친구여, 자기 눈물에 수치심을 느끼며 그것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된다니,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나!‥‥운다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나 허용되는 일이야. 눈물은 그들에게만 어울리는 것이니까 말일세. 나는 이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을 수는 없네. 이것은 신음 소리처럼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온 걸세. 나는 더 이상 덧붙일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ㅇ‥‥잠시 여유를 주게나. 그러면 나도 정신을 차려 본연의 마음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 땐 사나이답게 모든 것을 자네한테 이야기하겠네. 하지만 지금은 자네 가슴에 내 머리를 기대고 싶다네‥‥ 오, 메피스토펠레스여! 너도 나를 도와 주지는 못하는구나. 내가 도중에서 펜을 멈춘 것은 나대로의 심산이 있기 때문이었네. 다시 말해서 나는 일부러 나의 내면에 숨어 있는 냉소적인 혈관을 자극시켜 이런 불평과 하소연들이 1년이나 반 년쯤 지나고 나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맹랑하게 느껴질 것인가 하고 나 자신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려고 했지만‥‥말을 듣지 않는군. 메피스토펠레스도 무력해. 그의 이도 무뎌지고만 거야‥‥그럼, 안녕! 자네의 P. B로부터
8 M마을에서, 1850년 9월 8일 사랑하는 나의 친구, 세묜 니콜라예비치! 자네는 내 마지막 편지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고 있는 것 같네. 내가 언제나 감정을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나도 ㅁ르게 그렇게 되는 걸 어쩌겠니--계집아이 같은 습성이라고나할까! 물론 이것은 나이와 더불어 사라져 가겠지만,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을 탄식과 함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 그러니까 부디 안심해 주기 바라네. 베라가 내게 준 인상을 굳이 부인할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되풀이해서 말하건대 그 사실 속엔 아무것도 이상한 것이라곤 없다네. 자네가 편지에 쓴 것처럼 일부러 여기에 와 주겠다는 생각은 전혀 소용없는 짓일세. 1천 킬로미터니 되는 거리를 달려오다니, 더욱이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을 위해서--정말이지 그런 분별없는 짓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자네가 보인 우정의 새로운 증명에 대해서는 나는 진심으로 자네에게 감사하네. 그리고 믿어 주게.--나는 한평생 자네의 우정을 잊지는 않을 걸세. 게다가 나 자신도 머지않아 페테르부르그로 떠날 작정이니까, 자네가 이리 온다는 것은 더욱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일세. 자네의 소파에 앉아서 내 모든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줄 때가 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정말이지 말하고 싶지가 않다네.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네를 혼란시킬 우려성ㄷ 없지 않으니 말이야. 출발 전에 다시 한 번 쓰겠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즐겁게 건강하기를 비네. 그리고 내 운명에 대해서는 너무 상심하지 말아 주게. 자네의 충실한 벗 P. B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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