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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왕의 부인들에 관한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조 2년 7월에 왕이 다물후 송양의 딸을 들이어 비를 삼았다.
3년 7월에 홀천에 이궁(離宮)을 지었다. 10월에 왕비 송씨가 돌아갔다. 왕이 다시 두 여자를 취하여 계실을 삼으니, 하나는 화희란 이로 홀천인의 딸이요, 하나는 치희란 이로 한인의 딸이었다. (중략)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도망하였다. 왕이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아니하였다.(하략)
결론: 유리명왕의 부인들은 원비 송씨와 계실 화희, 치희로 이렇게 3명이었습니다. 그 중 원비인 송씨는 1년 3개월만에 죽었고, 치희는 유리명왕 3년 10월~12월 안에 화희 때문에 떠났습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남아 있는 유리명왕의 부인은 화희입니다. *참고로 길림성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설화에는 유리명왕의 첫번째 왕비인 송씨는 1년만이 아닌 3년만에 죽습니다.
유리명왕의 자식들에 대한 기록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조 14년 정월에 (전략)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꺼려 태자 도절로 인질을 삼으려하였다.(하략)
20년 정월에 태자 도절이 죽었다.
23년 2월에 왕자 해명을 세워 태자를 삼고(하략)
24년 9월에 (전략)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란 성을 주고 왕녀王女를 취하게 하였다.
28년 3월에 (중략)이에 여진의 동원에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찔려 죽었다. 이 때 해명태자의 나이가 21세였다. 8월에 (전략) 왕자 무휼이 나이 어린 아이로(하략)
33년 정월에 왕자 무휼을 책립하여 태자를 삼고(하략)
37년 4월에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죽었다.(하략)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 대무신왕이 즉위하니 휘는 무휼이요,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중략) 유리왕 즉위 33년 갑술에 태자가 되니 그 때 나이 11세였으며,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조 민중왕의 휘는 해색주이니, 대무신왕이 아우이다.
결론: 유리명왕의 자식들은 도절, 해명, 무휼(대무신왕), 왕녀(유리명왕의 딸), 여진, 해색주로 6명입니다.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기록에는 이 6명이 전부입니다.
앞서 제가 정리한 유리명왕의 부인들 중에서 치희는 그녀가 궁에 머문 기간을 보면 일단 출산 가능성이 없으므로 유리명왕과 치희 사이의 자식들은 없습니다.
첫번째 왕비인 송씨는 1년 3개월 만에 죽었으므로 자식 한명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유리명왕과 송씨와의 자식은 첫째로 보이는 도절일 가능성이 큽니다.(조선족들 사이에 퍼져 있는 설화를 따르면 송씨는 1년만이 아닌 3년만에 죽습니다. 그러므로 송씨와의 자식은 도절 이외에 최대한 3명 도 있을 수도 있습다만, 3년 내내 임신만 했다는 것은 좀...)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무신왕조를 보면 대무신왕이 유리명왕의 셋째왕자이며 다물후 송양의 딸 사이에 난 아들이라 되있고 대무신왕이 태자로 책봉된 시기가 유리명왕 33년이며 이 때가 11살이라고 기록되있습니다.
기록대로라면 대무신왕은 유리명왕 23년에 태어났는데, 대무신왕이 태어난 시기면 다물후 송양의 딸이 죽은지 20년이 되는 시점입니다.
어쩌면 다물후 송양의 딸이 한명 더 있어서 유리명왕이 그 딸을 비로 맞이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기록이 전무합니다.
아, 대무신왕과 민중왕은 같은 어머니에서 나온 형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서는 어머니가 다를 경우 이복형제라고 기록하는데, 민중왕조에서 이복형제라는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6명 전부를 유리명왕과 화희와의 자식들로 봐야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점도 개인적으로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첫댓글 유리명왕의 비 송씨는 1년만에 죽은 것이 아니라, 3년만에 죽었다는 길림성 조선족 설화 또한 사실에 부합하는 이야기 입니다. 왜냐하면 유리명왕이 고구려로 입국한 해는 주몽이 사망한 해가 아닌, 유화부인이 죽고 난 뒤의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