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제일병원의 남성불임연구실. 6.6㎡(2평) 남짓한 구석진 방 한 가운데
세탁기 모양의 냉동 탱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희뿌연 액체 질소가 한동안 시야를 흐렸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시험관 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남성의 정자를 냉동 보관하는 정자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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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제일병원 의료연구소에서 보관 중인 냉동정자./이태경기자ecaro@chosun.com
대학생 박모(29)씨는 지난해 초 정자를 기증하기로 마음 먹었다.
불임부부에 관한 TV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본 뒤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평소 건강에 자신있던 박씨는 수소문 끝에 제일병원을 찾았다.
간단한 피 검사와 성병 검사가 끝나고 담당 의사와의 면접이 진행됐다.
최종학력이나 신장(165㎝~185㎝)은 물론 머리카락이 직모(直毛)인지 곱슬인지
, 커피는 하루에 몇 잔이나 마시는지 세밀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약 2㎖의 정액 채취가 끝난 후 교통비와 실비 개념으로 10만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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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제일병원 의료연구소에서 보관 중인 냉동정자./이태경기자ecaro@chosun.com
박씨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솔직히 기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며
“아직도 내가 좋은 일을 했는지는 감이 안온다”고 했다.
6개월 후 그의 정자는 건강 상태와 활동성이 적합하다는 판정이 나왔고 탱크에 냉동보관 됐다.
정액 1㎖당 최소 2000만 마리의 정자는 있어야 한다.
6개월의 기간을 지켜보는 이유는 에이즈(AIDS·후천성 면역 결핍증) 등 각종 질병의 잠복기를 고려해서다.
박씨의 친구인 고시생 김모(29)씨는 “얼떨결에 따라갔을 뿐”이라며
“나도 몰래 내 유전자가 퍼진다는 생각에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던 게 사실”이라고 했다.
정자은행에서는 무정자증으로 고통받는 불임부부를 위해 정자를 기증 받는다.
현재 정자은행이라고 할만한 시설을 갖춘 국내 병원은 손에 꼽을 정도다.
1990년대 초반 시험관 아기 등 인공수정이 늘어나면서 정자 보관의 필요성도 커졌지만
공공의 지원 보다는 각각의 병원들이 개별적으로 시행해 온 게 현실이다.
5년차 주부 고모(37)씨는 남편(37)이 무정자증인 것을 알고 결혼했다.
무정자증이라 하더라도 고환 조직에서 정자를 추출해내는 방법이 있어 시험관 아기는 가능하리라 봤다.
하지만 남편은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결국 2년전 부부는 고심 끝에 정자은행을 찾기로 했다.
어차피 입양을 할 바에는 모계(母系) 쪽 유전자라도 물려주고 싶었다.
고씨는 “친정은 남편의 상태를 모르지만 시댁 식구들이 문제”라며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곱게 안 보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시댁에서는 남편 형의 정자를 받으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부부의 더 큰 걱정은 따로 있었다.
“정자 기증자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보니까 아무 정자나 받는 건 아닐까 불안해요.
아이가 남편하고 닮았으면 좋겠는데….
나중에 아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될까봐 겁도 나고요.”
현행 생명윤리법상 정자를 제공받는 불임 부부들에게 기증자의 신원을 알려주는 것은 엄격히 금지돼 있다.
정자를 골라 받는 현상이 나타날 경우 상업화 가능성을 우려해서다.
불임 부부가 병원으로부터 듣는 기증자의 정보는 혈액형이 유일하다.
미래의 아이와 부모가 혈액형이 다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병원 측에 따르면 정자를 기증 받아 임신에 성공한 부부 중 99% 이상이 다른 병원에서 출산을 한다고 한다
. 단 한 명에게라도 이 사실을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해 정자은행을 통해 태어나는 아이들이 몇 명 수준인지 국가적 통계는 물론
병원측도 정확히 집계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해 9월과 10월, 두 차례의 인공 수정에 실패한 고씨는 현재 세 번째 인공 수정을 기다리고 있다.
혈액형이 O형인 고씨 남편의 경우 운이 좋은 편이었다.
국내 최대 규모 중 한 곳인 제일병원조차 정자 보유량이 수요를 못따라가
A형, AB형의 경우 시술 자체가 10개월간 중단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의학계에서는 보통 성인 남성의 1%를 무정자증으로 본다. 신혼 부부 20쌍 중 1쌍이 ‘씨 없는 수박’ 문제로 불임을 겪고 있다. 이들이 입양을 하지 않는 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정자은행이 유일하다. 제일은행의 경우 1년에 100여쌍 정도가 정자를 기증 받고 있다.
하지만 박씨와 같이 자발적으로 정자를 기증하는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정자은행장인 서주태(49) 비뇨기과 과장은 “연구원들이나 동료 교수로부터 인근 대학생을 소개 받아 알음알음 데려오는 수준”이라며 “한 달 기증 건수는 10건 미만”이라고 했다. 정자은행도 은행의 일종이지만 몇 년째 ‘예금’과 ‘대출’이 답보 상태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병원이 수 년째 모아 온 2400여명의 냉동 정자 가운데 불임 부부를 위해 쓸 수 있는 정자는 700명분 정도다.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정자를 나중에 쓰기 위해 그야말로 보관만 해 놓은 것들이다. 보통 백혈병이나 임파선암, 고환암 등에 걸린 10~30대 젊은 층에서 정자를 보관한다. 항암치료는 암세포도 죽이지만 생식세포도 죽이기 때문에 치료가 끝난 후 2세를 갖기 위한 대비책인 것이다.
그외에 아프리카 등 오지(奧地)로 떠나는 장기 출장으로 부부가 오랫동안 떨어져 있거나,
건강상의 문제로 정액 질이 나빠질 것을 우려하는 남성들이 만일을 대비해 정자를 보관해 두기도 한다.
정자 보관료는 2년에 5만원 수준이다.
서 과장은 “황우석 사태 이후 난자는 물론 정자 매매까지 규제가 엄격해졌다”며
“병원이 총대를 매면서까지 정자를 구하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했다.
현재 대부분의 경우 기증자에게 교통비 명목으로 10여만원을 주고 있지만
어느 선까지를 실비 보상으로 해야 할지 뚜렷한 규정도 없다.
“질 좋은 정자는 적극적인 대가를 주더라도 확보해야지요.
이왕 줄 거면 확실한 정자를 줘야 하는데, 수요자는 많고 공급은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은 분명 문제라고 봅니다.”
병원 측은 “면접 과정에서 건강 검진도 자연스럽게 된다”는 식으로 인근 대학 신문에 정자 기증에 대한 광고를 낼 계획도 가지고 있다.
물론 지난해 시도했던 광고 계획은 “학내 신문에 싣기 좀 그렇다”는 이유로 모두 퇴짜를 맞았다.
지난 한 해 한국의 합계 출산율은 1.22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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