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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7주)
생각과 말 “사이”
잠1:20~33; 약3:1~12; 막8:31~38
우리는 올해 특히 유례없는 무더위 속에서 한가위 명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한가위 명절에 서리가 내렸던 기억까지 있는데, 그에 비하면, 열대야까지 있는 올해 추석 분위기는 매우 낯섭니다. 거기다 우리나라 정국은 각종 특검 이야기로 어수선하고, 정부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행정부는 난맥상을 보이고 있으며, 고물가로 체감되는 서민경제의 어려움에다, 전국적인 의료대란까지 겹쳐서, 개인적인 소감들은 다 다르겠지만, 올해 추석 명절 분위기는 전과 같지 않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명절이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가부장적인 문화가 깊이 배어 있고, 또 가정들마다 감춰있는 여러 사연들 때문에, 서로 함께 모여 명절을 맞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 이런 저런 사정으로 요즘 홀로 명절을 맞는 사람들도 꽤 있겠지요.
어제 저녁 늦게 호수공원을 잠깐 산책하다가 맑은 하늘에 떠오른 밝은 달을 보았습니다. 아직 다 차진 않았지만, 어찌나 밝고 깨끗하던지요? 말갛게 씻겨나온 달을 보면서, 어수선하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이 다 변하고 어수선해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공동기도 때 드린 기도처럼, 점점 채워져서 두루 원만해지는 달처럼, 올해 한가위를 맞는 여러분의 삶과 마음도 둥글고 꽉 차게 채워지는 한가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말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는 본문을 읽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야고보서 본문은 말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말은 사람을 특징짓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을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인간), 호모 에렉투스(직립인간),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으로 부르면서, 사람의 특징을 골라내는데, 그 중에 호모 로켄스(언어적 인간)이라는 말도 있지요. 그만큼 말은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오늘 신약 본문 야고보서에서는 말에 대한 교훈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혀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이런저런 비유를 들어 설득하고 있지요. 어찌 보면 “말의 처세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런 교훈은 구약의 지혜문헌인 잠언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면 목숨을 지키지만,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목숨을 잃는다”(잠13:3)
“다정스런 말은 꿀송이 같아 입에는 달고 몸에는 생기를 준다.”(잠16:24)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으니, 혀를 잘 쓰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잠18:21)
우리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 혹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등, 말에 관한 속담들이 많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말의 힘”이라고 하지요.
오늘 마가복음에서 베드로는 말 한번 잘못했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면서, 본전도 못 건진 얘기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순전한 고백,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으로, 큰 칭찬을 받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는 베드로(페트로스)다. 나는 이 반석(페트라) 위에다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칭찬을 듣지요) 그러나 곧 이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그 말에 항의하다가(마태: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 물론, 이 장면을 단지 드러난 베드로의 “말실수”로만 보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같은 입에서 나온 베드로의 말이 너무나도 상반된 반응을 초래한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 서신서로 우리가가 몇 주 야고보서를 읽었습니다. 야고보서는 현재 신약 서신서에 속하지만 4세기까지 정경으로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혹평을 들을 정도로 평가절하 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해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며,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악기들이 모인 오케스트라 같은 신약성경 속에서 야고보서는 주요 악기는 아닐지 몰라도 고유한 음색을 가진 나름의 독특한 악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거듭나게 한 “진리의 말씀”은 구체적인 행위를 추동하고 삶의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듣는 자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조하지요. 다시 말하면, 당신이 믿게 되었다고 하는 진리의 말씀이 당신의 삶을 이끌어 가도록 하라, 그래서 진리의 말씀이 실제 삶 속에서 힘을 갖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며 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면서, 교회 공동체 안과 밖에 있는 부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늦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진리의 말씀”이란 구체적인 행위를 추동하고 삶을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힘(Power)이어야 한다고 야고보서는 강조합니다. 이 말은 요즘말로 하면, 말씀은 “능동적 정보”라는 것입니다. “능동적 정보” 혹은 “정보의 행위”라는 말은 “정보가 어떤 행위를 한다”는 개념입니다.
가령 커다란 배가 항해를 하는데 레이더 신호로 방향을 찾아갑니다. 또 깜깜한 밤에 배가 등대가 주는 빛을 방향 삼아 항구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때 레이더 신호나 등대 불빛이 직접 배를 움직이는 직접적인 힘은 아닙니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배의 엔진이지요. 또 배를 움직이는 것은 주변 환경인 파도와 바람의 힘이 배를 움직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배는 레이더 신호의 가이드를 받아, 등대 불빛의 가이드를 받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때 레이더 신호나 등대불빛은 단지 정보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배의 진행방향을 결정하고 있는(형성하고 있는) 어떤 힘(잠재력)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능동적 정보” 혹은 “정보의 행위”라고 한답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서는, 당신들이 말씀을 혹은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당신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그 말씀으로 하여금 당신들을 이끄는 실제적인 힘이 되게 하라, 말씀의 잠재력을 받아들여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입에서 나오 말이 우리가 믿는 말씀의 힘에서 나오는 말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는 고백을 했다면, 그래서 자신의 그리스도성을 고백했다면, 이 베드로의 고백은(즉 알고 있는 정보는) 자신을 이끌고 가는, 자신을 추동하는 힘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게 된다고 했을 때, 기꺼이 그 고난에 동참하는 힘이 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선생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발언이 단지 예수님에 대한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관되는지를 밝히는 고백이라면, 그래서 자신의 그리스도성, 즉 자신 안에도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라면, 이 고백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동참하는 실제적인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야고보서를 읽을 때, 나의 믿음, 예수님과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의 “정보”가 얼마나 나를 이끌어가는 실제적인 힘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오늘 특별히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말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처음에는 말[馬]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려서, 그 커다란 말을 끌고 다니지요. 또 배의 이미지도 사용합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아주 작은 조종키로 사공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배를 끌고 갑니다. 그런데 혀도 몸의 작은 지체지만, 이 혀가 사람을(몸을)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또한,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우는 것처럼 작은 혀가 온 몸을 더럽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혀를 마치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악한 것으로 표현하면서, 극단적으로,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아마도 독한 말이나 큰 실언이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를 부각시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오늘, 같은 혀로 주님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또 같은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비유로 말하기를, 샘의 한 구멍에서 어떻게 단물과 쓴물이 나올 수 있는가? 또 무화가 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묻습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야고보서의 말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야고보서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혀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실은 혀가 문제가 아니라 이 혀를 움직이는 “능동적 정보”인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커다란 에너지인데, 이것이 우리의 혀를 통해 구체적으로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어떤 때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힘으로, 어떨 때는 오늘 야고보서가 말하듯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게헨나의 불로 쏟아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지난 주간에 보았던 말씀, “무엇보다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4:23)라는 말씀이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이란 겉으로 번지르르하게 말한다고 해서 잘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생각과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법이어서, 우리는 생각과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니까, 결국 말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뀌어야 하고 생각이 바뀌려면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결국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라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생각으로 내 안에만 남아 있는 말과, 밖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 닿는 말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여러분,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라는 책에 “결혼에 대해서”라는 아름다운 글이 있지요.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스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니, 또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 흩어 사라지게 할 때까지.”
그러나 그 다음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함께 있되 그대들 사이에 공간이 있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도록 하십시오/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십시오/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들 사이에 공간이 있게 하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생각, 마음과 마음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사이의 공간은 사람과 사람, 부부 사이에도 중요하지만, 우리 안에도 사이의 공간, 중립지대가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비무장 지대가 필요한 거지요. 우리가 혀를 길들이지 않은 불이나 독으로 사용하게 될 때는, 우리의 생각과 생각, 마음과 마음, 말과 말 사이에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여유가 없다고도 하지요. 어떤 완충 역할을 하는 중립지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만큼 우리 안에 에너지가 차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압력이 너무 쎕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는 말은 사실 서로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공간을 만드는 일, 완충지대를 만드는 일, 생각과 말 사이에 거리를 두는 일은, 우리 안에 압력이 차 있을수록 필요합니다.
사실 이 공간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 공간은 침묵이며 하나님의 공간입니다. 아니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내 삶이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교독한 시편116편의 시인은 노래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잘 대해주셨으니, 평화로운 쉼(<마노아흐>) 가운데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네 안에 주님의 공간이 있다, 어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주님이 거하시는 공간이 있다, 그러니 너도 마음 편하게 갖고 평화로운 쉼을 누려라” 하나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해주셨다는 공간이야 말로, 여러분에게 참된 쉼(마노아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아마 이번 명절에도 여러분들은 이런 저런 모임에서 이런 저런 사람과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평소 마음에 갈등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지만, 평소 그렇지 않고 마음에 에너지를 쌓아둔 사람들은 아마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불편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나지 않고 피한다고 해서 불편함을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기 바랍니다.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