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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단막극】
그곳에서 가면 사랑이 있다
- 서면 전포 카페 거리
김 문 홍
〔등장인물〕
김 상 민 35세. 사랑을 찾으려 떠돌다.
이 헤 영 33세. 사랑이 떠나서 아프다.
박 상 호 58세. 사랑을 잃고 방황하다. 청맹과니. 과거 회상 장면에서 이 혜영의 남편 역할을 대신함.
한 지 숙 55세. 사랑을 찾으러 헤매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 김상민의 아 내 역할을 대신함.
사 내 30세. 카페 종업원을 비롯한 여러 역할을 대신함.
〔때〕요즈음. 만추의 해질녘
〔곳〕서면 전포동 카페 거리
〔무대〕
서면 전포동 카페 거리의 몇몇 장소. 카페가 주 무대이지만 탁자와 테이블 위치 이동을 통해 식당과 베이커리 숍으로도 전환된다.
어둠 속에서 두런거리는 행인들의 소리와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아슴하게 들린다. ‘어서 오십시오’라는 목소리와 함께 무대 밝아지면 미색 바바리 코트를 걸친 중년의 사내가 카페 안으로 들어온다. 그 중년의 사내가 낯이 익은 듯 카페 종업원이 턴테이블에 테이프를 넣고 음악을 튼다.
(사이)
로드리고의 ‘아란훼즈 기타 협주곡’ 의 2악장 끝 부분이 울려 퍼지자 중년의 사내는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깜박이며 음미하듯 듣는다. (사이) 그 소절이 끝나자 종업원이 사내를 테이블로 안내하여 앉힌다.
박상호 젊은이, 방금 들은 2악장 끝 소절 말이야...그걸 들으면 어떤 느낌 이 들어?
종업원 음, 거 뭐랄까요...에메랄드빛으로 찰랑이는 바다를 옆에 낀 채 스 포츠 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랄까요?
박상호 하하, 바로 그거야! 그런데 자넨 어쩜 나하고 생각이 그리 똑 같지?
종업원 이젠 저도 하도 많이 들어 그 소절의 멜로디를 다 외웠다니까요. (사 이) 그런데 선생님, 여기 오면 꼭 이 소절만 듣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박상호 (회한이 서린 눈매로) 하, 말하면 뭐하나. 가슴만 더 아픈 걸.
종업원 선생님이 이 카페에 처음 들렸을 때였죠 아마. 밑도 끝도 없이 테이프 를 내밀며 그 소절을 들려달라고 할 때부터...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줄 알았어요.
박상호 (결심한 듯) 사랑을 잃고 난 뒤부터였지. 죽은 아내가 즐겨 듣던 곡이 었지. 그러니까 아내가 이 지상에서 마지막 들은 곡이었을 거야.
잠시 암전되었다가 불이 들어오면 박상호가 테이블 위에 모터를 올려놓은 채 수리하고 있다. (사이) 그의 아내가 가까이 다가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퉁명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일에 몰두한 채 아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있다.
아 내 여보. 공구상회들이 다 떠나고 이젠 우리만 남았어요. 사라진 그 자리에 대신 카페가 하나 둘 들어서고 있다네요.
박상호 그러니까 돈을 뇌두고 여길 떠나자 그 말이잖아?
아 내 참, 당신도...우리도 이제 돈 모을 만큼 모았잖아요. 죽을 때 그 돈 관 속에 넣어 갈 참이예요?
박상호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다고 돈이 생겨, 밥이 생겨?
아 내 아이구,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지만 앞을 못 보는 가여운 사람.
박상호 돈은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버팀목이고 힘이야. 그딴 커피 마시고 음악 듣는다고, 그래 그거 참 잘 하는 짓이라고 누가 박수나 쳐준대?
아 내 어이구, 내가 차라리 돌부처하고 말하는 게 낫지.
아내가 첵상 위에 놓인 턴테이블에 테이프를 넣고 음악을 튼다, 예의 그 ‘아란훼즈 기타 협주곡’ 2악장 마지막 소절이 흘러나온다.
박상호 아, 시끄러워! 그 음악 좀 꺼.
아 내 아, 알았어요!
아내가 턴테이블의 스위치를 누르다가 갑자기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사이) 박상호기 놀라 뛰어가 아내를 부축하며 당황해 하고 있는 사이에 무대 잠시 암전되며, 어둠 속에서 의사의 침통한 목소리가 들린다.
소 리 감암 말깁니다. 앞으로 몇 개월밖에 안 남았으니 하나씩 신변을 정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무대 밝아지면 카페 안. 박상호가 눈을 깜박이다 슬쩍 눈시울을 훔친다. (사이) 종업원이 황망한 표정으로 박상호를 바라보고 있다.
박상호 아내 말처럼 난 눈뜬장님이었지. 사랑을 잃은 죄로 눈을 뜨고도 앞을 못 보 는 청맹과니의 천벌을 받은 거야. (사이) 그런데 말이야. 정말 신기한 건 눈 을 뜨고 있을 땐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는데, 막상 눈을 잃고 나니 눈앞이 더 환해지는 거야.
종업원 사랑을 잃고 나서 더 귀한 사랑을 깨달은 것이겠지요.
박상호 그래, 맞아! 그때 내가 지금 젊은이 같은 생각을 가졌더라면......
종업원 (중년 여자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어서 오십시오.
한지숙 (자리에 앉으며) 저, 여기가 그 유명한 전포 카페 거리 맞나요?
종업원 (물잔을 내려놓으며) 네, 카페거리 맞습니다. 누구든지 여길 오면 사 랑을 하게 된답니다.
한지숙 호호호, 젊은 사란이 참 유머 감각이 있네요 아메라카노 따뜻한 걸 로 한 잔 주세요. (사이) 참, 음악 한 곡 부탁해도 될까요? 로드리 고의 ‘아란훼즈 기타 협주곡’ 있습니까?
종업원 네? (박상호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저 손님께서 맡겨놓은 테이프라 허락이 필요할 것 같네요.
한지숙 1 음악은 만국 공통어 아닌가요? 꼭 누구한테 허락을 받고 들어야 할 필요까지 있나요?
박상호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선다.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한지숙의 테이블 가까이 걸어와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이) 한지숙도 박상호를 보자 깜짝 놀라며 그의 외모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한다.
박상호 여보. 당신이 여긴 웬 일이야?
한지숙 지금 저보고 말한 건가요?
박상호 당신, 그럼 다시 살아서 돌아온 거야?
한지숙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여보라니요?
종업원 선생님. 한 번 떠난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고정하십시오.
박상호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아, 제가 잠시 실례를 저질렀나 봅니 다. 목소리가 집사람과 하도 똑 같길래.....
한지숙 (다시 박상호의 외모를 찬찬히 살피다가) 그건 피차일반인 것 같네 요. 저도 처음엔 떠난 그이가 마치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였으니까 요. (사이) 혼자시면 함께 커피라도 마시며 얘길 나눌까요?
박상호 그러시다면 저야 과분한 영광입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한지숙 제 목소리가 부인과 그렇게 닮았나요?
박상호 제 외모가 바깥양반과 그렇게 닮았습니까?
두사람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조용하게 웃는다.)
박상호 그런데 아까 바깥양반이 떠나셨다고 하던데, 어디 먼 곳엘 갔나요?
한지숙 아뇨. 그냥 느닷없이 아무 말 없이 떠나 버렸어요. 한 2년 가까이 됐 나 봐요. 이젠 기다리고 찾는데 지쳤어요.
박상호 크게 싸우신 건가요?
한지숙 직장 간다고 아침에 집을 나간 사람이 2년째 안 돌아오고 있답니다. 알만한 곳, 알만한 사람들에게 수소문 해봐도 찾을 길이 없네요. (사 이) 도대체 왜 내게서 떠났는지 그 이유라도 알면 좋을 텐데......
박상호 세상엔 우리들 마음으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많을 테니까 요. (사이) 그날 출근할 땐 아무런 낌새도 없었나요?
한지숙 조금 우울해 보였을 뿐인 걸요.
핑크 플로이드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의 엘렉트릭 기타 연주가 들려온다.
한지숙 (음악을 듣자마자) 아니, 이 음악은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노랜데?
박상호 그래요? 우연치곤 신기하네요.
한지숙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난 여자와 평소 즐겨 듣던 노래라고 하던데...
여기서 다시 들으니 새삼스럽네요.
박상호 그건 그렇고 바깥양반이 왜 사라진 걸까요?
무대 잠시 어두워지면 핑크 플로이드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의 엘렉트릭 기타 연주가 계속 들려온다. (사이) 음악이 사라지고 무대가 밝아지면 남편이 가방을 들고 나오고 아내가 그 뒤를 따라 나온다.
한지숙 여보, 오늘 어디 몸 안 좋은 데가 있어요?
남 편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안 좋은 것 같아.
한지숙 이사 승진을 앞둔 따라 스트레스 때문일 거예요.
남 편 아니야. 요즘 갑자기 내가 왜 사는 거야, 무엇 때문에 사는 거야...이런 생각 들이 머릿속을 괴롭히는 것 같아.
한지숙 당신, 그건 행복한 푸념이에요. 너무 행복하니까 쓸데 없이 엉뚱한 생각이 드는 거라구요.
남 편 당신은 그런 생각 안 들어?
한지숙 내가 왜 그따위 생각을 해요? 행복하게 사는 것도 일 분 일초가 아까워서 죽 겠는데...고리타분한 철학자 행세를 왜 해요? 어서 출근이나 해요.
남 편 아니야, 그게 아니야.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어떤 알 수 없는 빛이 자꾸 나 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아.
한지숙 여보! 행복한 생각만 하라니까요. (사이) 참,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당신 회사 근처에 있는 전포 카페거리의 그 찻집에서 만날까?
남 편 (허공을 올려다보며) 그런데 오늘 하늘은 왜 이리 맑고, 햇빛은 또 왜 이렇 게 찬란한 거야.
한지숙 당신, 직장 땡땡이 칠 생각 아니지? 오늘 일찍 올 거죠?
남 편 잘 모르겠어. 기다리지 마.
한지숙 아니야. 난 당신 기다릴 거야.
예의 그 음악(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이 들리다가 사라지고 무대 밝아진다, 한지숙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문득 눈시울을 훔친다.
박상호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요?
한지숙 글쎄 나도 그 이유를 알았으면 답답하지 않겠어요.
박상호 바깥양반 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부처의 마음을 깨달은 건 아닐까 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건 아닐 까요? (사이)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사랑을 찾아 헤매는 거네요.
한지숙 난 그게 싫어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왜 하필 그 사람이 세상의 고통과 무 게를 지려고 하느냔 말이에요.
박상호 세상엔 우리가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으니까요.
한지숙 그 사람의 사랑을 잃고 나니까 비로소 그 사람의 사랑이 새삼 느껴졌어요. (사이) 곁에 있을 때 왜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하지 못 했나 생 각하니, 그런 내가 죽도록 미웠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참 무심한 사람이었 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박상호 그러게 말입니다. 대중가요 노랫말처럼 있을 때 잘해 줘야 하는 건데......
한지숙 선생님, 그런 데도 그런 데도 그 사랑을 기다려야 할까요?
박상호 기다려 보세요. 이곳 카페거리에 오면 사랑이 보인다 하잖습디까?
한지숙 사랑이 보인다고요?
박상호 이곳 카페거리를 거니는 젊은이들을 한 번 보세요. 그들에게서 사랑 밖에 더 찾을 게 또 있나요?
한지숙 (희미하게 웃으며) 그럼 이 거리의 풍속을 한 번 믿어볼까요?
박상호 믿으면 보이고 보이면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한지숙 선생님께선 슬하에 몇 남매를 두셨어요?
박상호 외동딸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아 걱정 입니다. 내가 여길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사업을 벌이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어요. 그때 그만 그 아이도 스스로 사랑하던 남자를 떠나보내고 크게 상심했었나 봐요.
한지숙 그래요? 정말 안 됐군요. 나도 아들 하나뿐인데, 어느 날 사랑하던 여자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렸나 봐요. 지금도 그 여자를 찾아 헤매고 있는가 봐 요.(사이) 어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고, 아들은 떠난 여인을 기다리 고...우리 사람은 기다리는데 이력이 붙었나 봐요.
박상호 그러고 보니 우리 두 사람 집안은 모두 사랑을 잃은 사람들뿐이네요.
한지숙 세상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으니까요.
음악이 거의 끝나갈 무렵, 김상민이 후줄그레한 차림으로 카페로 들어선다. 그는 자리에 앉자 마자 종업원에게 “그 음악 다시 한 번 틀어주세요”하고 소리친다. (사이) 한지숙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서 그 청년을 바라본다. 청년도 한지숙을 바라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한다.
한지숙 아니, 상민아. 네가 여긴 웬 일이냐?
김상민 어머닌 여기 웬 일이세요?
한지숙 이리 와 여기 앉아. (김상민 테이블 곁으로 다가오자 박상호를 향해) 아까 얘기하던 우리 아들이에요. (상민을 보고) 인사 드려라.
김상민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며) 안녕하세요, 김상민입니다.
박상호 방금 어머니로부터 안타까운 사연 들었어요. 사랑하던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면서요?
김상민 그러게 말입니다. 왜 말없이 떠났는지 그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습 니다.
빅상호 아버지도 그러셨다면서요? 세상엔 우리가 해결하지 못 하는 불가사의 한 일이 많으니까요.
김상민 더욱 더 불가사의한 건 그 여자와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 카패거리를 찾았는데, 떠난 뒤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지숙 이곳을 찾으면 네가 더 생각날 거니까 찾지 않는 거라고 했잖니?
박상호 우리 딸아이도 그러더군요. 그렇게 자주 찾던 이곳 카페거리를 왜 찾 지 않느냐 물었더니, 여기만 오면 그 남자가 생각날 거라 그러더군요. 부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공간 구석구석엔 사랑의 흔적이 묻어 있 으니까요. 그걸 보면 상처가 덧날 게 아닙니까?
한지숙 선생님, 그런데 우린 왜 이곳을 떠나지 않은 채 떠도는 거지요?
박상호 곳곳에 묻어 있는 사랑의 냄새를 맡으면 아름다운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날 테니까요. (사이) 그래서 나도 집에 돌아가면 이곳에 자주 들 르라 말할 참입니다.
한지숙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사랑하는 사람과 즐겨 듣던 음악을 생각하면, 문득 이곳을 찾고 싶어질 테니까요.
박상호 사랑이 그렇게 쉽게 잊혀 지진 않습니다.
김상민 그렇게 생각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한지숙 상민아, 사랑을 믿어야지.
김상민 그러면 아버지도 어느 날 문득 돌아오게 될까요?
박상호 반드시 돌아오실 겁니다. 전 사랑을 믿으니까요.
한지숙 네, 그래요, 저 또한 사랑을 믿습니다.
박상호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 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김상민 전과 같지 않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박상호 사랑이 그 전보다 더 새로워지고 굳어진다는 뜻 아닐까요?
한지숙 그래요. 그동안 단련되었으니 더욱 더 단단해지겠죠.
박상호 전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한지숙 이 카페거리가 그렇다지 않습니까. 이곳에 오면 안 보이던 사랑도 보 이고, 잃었던 사랑도 되찾을 수 있으니까요.
김상민 저도 그 말을 믿겠습니다.
박상호 우리 딸아이도 사랑의 힘을 반드시 믿을 겁니다. (사이) 그런데 젊은 이, 왜 사랑이 갑자기 떠난 것일까?
김상민 한창 둘이 사랑하고 있을 그 무렵, 그 여자의 어머니가 갑자기 암으 로 돌아가시고, 아버지 사업까지 부도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 나니 까...사랑을 할만한 겨를이 없었을 게 아닐까요?
박상호 형편을 보니 우리 집안과 너무 닮은 것 같네요.
한지숙 한 가지 빠진 게 있네요. 선생님의 경우엔 눈까지 잃어 청맹과니가 되 었잖아요?
박상호 육체의 시력은 잃어지만 마음의 눈은 더 밝아진 걸요.
한지숙 그렇네요.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네요.
김상민 하나님은 공평하시니까요.
박상호 (두 모자의 손을 잡으며) 그러니까 우리, 힘냅시다. 파이팅!
모 두 (맞잡은 손을 치켜 올리며) 사랑을 위하여 파이팅!
세 사람이 파안대소하고 있는데, 카페의 문이 열리며 이혜영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들어서서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다. (사이) 이혜영을 발견한 박상호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선다. (사이) 그와 때를 같이 하여 김상호도 벌떡 일어나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이혜영을 바라본다,
박상호 혜영아, 네가 여기 웬 일이냐?
김상민 혜영아!
박상호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야?
김상민 제가 사랑하던 여잡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자입니다.
한지숙 아니, 저 아이가 선생님의 딸이에요?
박상호 네, 사랑을 떠나보내고 가슴 아파하던 제 딸아이입니다.
한지숙 세상에 백주대낮에 어찌 이런 일이......?
이혜영 아빠, 상민 씨!
이혜영이 다시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김상민이 부리나케 달려가 이혜영을 뒤에서 와락 껴안는다. (사이) 돌아서서 울음을 삼키고 있던 이혜영이 다시 돌아서서 김상민을 끌어안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사이) 한지숙이 박상호를 부축하여 두 사람 가까이 걸어간다.
(사이)
박상호 그래, 실컷 울어라. 그렇게 실컷 울고 나면 상처가 깊었던 그 자리에 다 시 사랑의 새움이 틀 거니까.
김상민 (이혜영의 어깨를 흔들며)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네가 떠나고 난 뒤에도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이곳 카페거리를 떠난 적이 없었어.
이혜영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난 네가 생각날까봐, 잊었던 사랑이 되살아 날까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떠났어.
박상호 그러고 보니 혜영이 너도 참 모질구나.
한지숙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잖아요.
김상민 (애써 웃으며) 어쩜 넌 그럴 수 있니? 그래, 왜 날 떠났던 건데?
이혜영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나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 집안이 금세 무너질 것 같았단 말이야. 그래서 널 떠났던 거야.
박상호 그랬는데 여긴 왜 다시 찾은 거야?
이혜영 문득 우리가 좋아하던 그 음악이 듣고 싶어서, 우리의 사랑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이 거리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나도 모르게 이곳으로 발길을 옮긴 거야.
한지숙 (이혜영을 끌어안아 다독이며) 그래, 잘 왔다. 네 사랑도 살리고, 우리 상민이 사랑도 살리고...그러면 된 거잖아, 응?
김상민 (애써 웃으며) 엄마! 그럼 그동안의 내 상처는요?
박상호 사랑이 오면 상처는 금방 아물게 되어 있는 거야.
이혜영 상민아, 정말 미안해. 내가 내 일만 생각하고 네 아픔은 생각 못 했어.
한지숙 그럼 된 거야. 앞으로 더 잘 하면 되는 거지 뭐.
박상호 우리, 여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두 젊은이의 사랑이 다시 만난 걸 축하하 기 위해 술잔이라도 기울여야 하지 않겠어요?
한지숙 네, 그래요. 오늘 술은 제가 사도록 할게요.
박상호 아닙니다. 떠난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기원하는 의미에서 제가 사는 게 당연합니다.
한지숙 그럼, 그러죠. 상민아, 어젯밤 꿈속에 네 아버지기 보이더라.
김상민 잘 계시던가요?
한지숙 잘 있기는 개뿔! 노숙자가 되어 글쎄 이곳 카페거리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더 구나. 네 엄마 얼굴도 몰라보더라. 무심한 사람!
박상호 꿈속에서 보였으니 현실에서도 이루어질 겁니다. 자, 가시죠?
한지숙 남편을 찾겠다는 제 꿈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아요.
감상민 아니 왜요?
한지숙 (박상호를 찬찬히 살피며) 네 아버지를 꼭 닮은 선생님을 만났잖니?
김상민 아니,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를 참 많이 닮으셨네요.
박상호 제 꿈도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 같네요.
한지숙 왜요? 돌아가신 부인께서 환생이라도 하셨나요?
박상호 (한지숙을 찬찬히 보며) 우리 아내의 목소리를 빼닮은 여기 한여사님 을 만났으니까요.
이혜영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엄마 목소리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한지숙 그럼, 선생님과 전 꿈을 반쯤은 이룬 것 같네요.
박상호 기다려 보세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김상민 이 카페거리가 꿈을 이루는 걸 도와줄 테니까요.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다. (사이) 종업원이 환한 얼굴로 그들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꾸벅 한다.
종업원 역시 이곳 카페거리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주인께서 오늘 커피 값은 선물로 쏘시겠답니다. 자주 들러 주십시 오. 늘 그 음악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박상호 그럼, 자주 들르고말고! 우리 딸아이 사랑을 이루어진 곳인데, 내가 이 거리를 잊을리 있겠나.
한지숙 총각도 여기서 꼭 사랑을 이룰 수 있게 내가 빌어드릴게요.
종업원 부인께서 빌어주시면 제게도 사랑이 생길까요?
박상호 이보게, 젊은이. 믿으면 이루어진다고 하잖나.
종업원 그럴려면 이 카페거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붙어 있어야겠네요.
한지숙 (어깨를 토닥이며) 사랑이 이루어지면 그때 다시 올게요.
종업원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그들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간다. (사이) 종업원이 텔레비전 리모콘의 스위치를 누르자 마침 뉴스가 방송되고 있다. 종업원이 텔레비전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소 리 (아나운스먼트) 다음은 부산지역 뉴스입니다. 오늘 아침 7시경 시내 전포동 카 페거리의 한 골목에서 50세 중반의 노숙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 고, 이곳을 청소하던 환경미화원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이 남자는 119 구급 차량에 의해 인근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치료를 받고 있으나 생명에는 큰 지장 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신원을 확인한 결과 이 남자는 2년 전에 탄탄한 중소기업의 이사 승진을 앞두고 갑자기 가족에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져 실종 신고가 된 상태입니다. 앞길이 창창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 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대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 무대는 서면 전포동 카페거리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인물들이 모두 등장하여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사이) 그들은 한동안 반복하여 거리를 지나다니는 마임을 하기 시작한다. (사이) 그들이 무대의 곳곳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스톱 모션으로 굳은 채 서 있다.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에 의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행인1(여자) 얘, 전포 카페거리 있잖아? 그곳에 가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도 금세 이루 어진다고 하더라..
행인2(여자) 그것뿐인 줄 아니? 떠난 사랑도 다시 돌아오는 건 어떻고.
행인3(남자) 야, 카페거리에 가면 곳곳에 사랑이 보인다며? 우리 그곳에 한 번 안 가 지 않을래?
행인4(남자) 야, 그것뿐인 줄 아니? 식었던 사랑도 다시 불타오른다고도 하더라.
행인1(여자) 얘, 정말 신기한 곳이네. 마법의 성이야, 뭐야.
행인2(여자) 어머머, 사막의 샘물이 아니라 사랑의 오아시스나 다름 없네.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사이) 핑크 플로이드의 ‘샤인 온 유 크레이지 다이아몬드“가 엘렉트릭 기타로 연주되는 가운데 무대 서서히
막.
(200자 원고지 78매)
첫댓글 서면 전포 까페거리 풍경이 떠오릅니다.
발길은 분주하나 모두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나서는 곳.
마지막 뉴스와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압권입니다.
멋진 선배님 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