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사 2:1-5)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성탄절 전 4주일을 대림절기로 지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는 성탄절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2천년 전에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오신 주님과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그 중간기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간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미 오신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에게 당부하신 명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보다도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오니즘’, 곧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언젠가 예루살렘, 하나님이 계시는 성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하며 어려운 시절을 견뎌낸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회복, 시오니즘은 도시나 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5년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지키려는 이스라엘과 2천 년 동안 살아오던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어린이들과 많은 시민들의 생명을 빼앗는 이 전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의 성이 예루살렘을 의미할까요?
오늘 말씀에 ‘여호와의 산, 여호와의 전’에 오르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두고 하신 말씀일까요? 하나님의 전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전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을 배우고, 따르며,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차지했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교회라는 건물과 예배 의식과 전통을 따르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회복이든, 예루살렘의 회복은 땅이 아니라 말씀의 회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도 ‘우리가 여호와의 전에 오르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기 때문’(3절)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성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행할 때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 연습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무기로 농기구를 만드는 것은 평화의 나라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때 주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다시 한번 권고합니다. ‘야곱의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주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행하자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세상의 위기와 갈등은 왜 생겨날까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믿고,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평화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무기를 쌓아 두고, 군사훈련을 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핵무기도 만들려고 하고, 엄청난 폭탄을 쌓아 두려고 합니다. 부자 나라가 되어야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평화를 위해 약하고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기도 합니다. 이런 평화는 거짓 평화입니다. 전쟁이 유보된 것이지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라는 말로 두려움을 감추고, 욕심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는 어느 개인이나 나라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 모든 나라가 평화로울 때 세상은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미움과 적개심, 증오, 두려움, 탐욕을 채워놓고 평화를 누린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민주주의를 하자면서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사회의 가치관도 바뀌어버립니다. 권력기관이나 언론, 방송에 자기 사람을 임명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이미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평화, 민주주의라는 말로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감추고 있습니다. 권력은 국민의 선택으로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권력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국민의 선택이기 때문에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위해서, 혹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했지만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람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라고 하면 세계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고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계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거스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한 백성이기에 자신이 선하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를 생각하면 의심스럽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지만 말씀에 순종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데 자신은 옳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 국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이 ‘공동선’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한다면 전쟁을 찬성할 수 없고, 자연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차별하거나 증오하거나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공동선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칭찬 받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그러자 칭찬받는 사람이 ‘내가 언제 주님을 대접했느냐’고 묻자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약하고, 보잘것없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손을 내미는 것이 공동선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말 주님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면, 주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소식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소식들뿐입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억압 당하고, 병들고, 평화를 누리지 못하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슬픔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가서 ‘예수 믿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말할까요? 예수 안 믿어서 벌 받는 것이라고 협박하고 저주할까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울고, 웃고, 아파하며 혼자가 아니라고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그들과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 다니면 말씀을 듣고, 배우는 기회가 많습니다. 오래 신앙 생활하면 말씀을 잘 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말씀에 충실합니까? 말씀에 순종하며 실천합니까?
이사야 예언자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전에 오르자’고 권고하는 것은 말씀의 회복을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말씀을 회복하여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신학이나 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죄인 된 우리가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아 기쁨을 누리고 새 삶을 살게 된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거나 영향력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일, 큰일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책망 받을 것이 분명하기에 더디 오시기를 청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주님은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불의에 맞서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이루는 일을 미루거나 멈출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라 착각하며 변명하고, 핑계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 가난으로 슬퍼하는 이들, 파괴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하는 이들, 차별과 편견 속에 신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평화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