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후 2:1~11)
'이것은 죄된 본성과 진리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특별히 적용되는 것이다. 범죄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세계를 멸시한다.' (10절)
나의 죄 습성과 버무려져서
제도권 내의 교회와 마음으로 100% 연합되지 않는
내 모습에 대한 위기감이 있다.
선천적으로 유약한 심성이 없지 않아서
흔들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반면에 버팅기는 기질도 있지만......)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거론한다.
그들은 이단을 끌어들이고, 하나님을 부인한다.
호색하는 것을 따르고 진리를 비방한다.
탐심으로 지어낸 말을 가지고 이득을 삼는다.
이러한 내용에서 가장 편안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뭐라해도 제도권 내의 성도들일 것이다.
회개의 고스프레를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자신들은 구원을 얻을 가장 지근 거리에 있는 이들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비판하는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일 수도)
오늘 묵상에세이에서
현대 사회가 암흑에 빠져든 3가지 이유가
1. 인간의 삶에 자명한 진리가 없다는 분위기.
2. 인간관계에 법칙이 없다는 분위기.
3. 인간의 노력에 한계가 없다는 분위기.
단순하게 접근하면 모두 X를 긋고 끝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저렇게 이야기하는 들을 만한 논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 진리를 알면 여유(=자유)가 있다고 말하는 성도라면
'분별'의 지혜를 제발 발휘했으면 좋겠다.
저 3가지를 두고 단순하게 매우 위험하고 이단적이다 정도에서
끝난다면, 누군가 순백하게 그 타당한 중간 설명에 귀 기울이는 사람
모두가 대화의 대상, 고려의 대상에서 배척되는 비극을 맞게 된다.
물론 사악한 영은
저 3가지의 그럴듯한 논리와 접근법을 빌미로
결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게 하려는 계략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 명제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이치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진리라면 질문을 당당하게 듣고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어야 한다.
지레 겁먹고
설레발을 치거나, 다급한 표정,
배척하고 당황하는 행동은
이단과 사이비의 속성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