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140 (4권 6. 김홍신. 펌글)
* 좀 봐 줘유 *
다혜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건강해 보였다.
항상 창백하리만큼 하얀 얼굴이어서 우리 어머니가 달갑게 여기지 않을 정도였다.
"납득이 안간다 이 말씀야. 무공 스님이 아무리 위독했다지만 얼굴하고 팔뚝 보니까,
이건 흑인이 되려다 말았거나 해수욕장에서 실컷 재미보구 왔다고밖에 볼 수 없어."
나는 차마 무공 스님한테 된 회초리를 맞았다는 것과,
유기하란 중국계 정통무술의 일인자에게 당한 사연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 너는 어째 컴컴해졌니?"
"나야 운전 배우러 다니니까 탈 수밖에 없잖아."
"운전? 히야, 그거 생명보험 회사만 손해보게 되겠구나."
"이러지마. 내일 면허시험 치는 날야.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지 알아?"
"교통 경찰관 열 명쯤 더 채용해야 되겠다. 면허 따면 뭐할래? 세발 자전거 운전하는데도 면허증이 필요하니?"
다혜는 내 팔꿈치께를 꼬집었다.
"어디 갔었는지 실토해 봐. 딴소리 말고 어서!"
"무공 스님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으셨어. 우선하셔서 그만 내려 가라고 하시기에 내려온 거야."
"또 가야 돼?"
"잠깐잠깐 다녀오면 될 거야. 많이 좋아지셨으니까."
"담에 갈 때 나도 델구 가봐. 확인해야겠어. 도대체 몇 달 동안 오리무중인 걸 보면 믿을 수가 없어.
편지 한장만 해 줬어도 이렇게 서운하진 않았을 거야."
"편지? 첩첩산중에 무슨 우표가 있니? 차에서 내려 나처럼 빠른 놈도 한나절이 넘게 걸리는 산골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래. 바꿔서 생각해 봐. 내가 어디 가서 몇 달 연락 없었어 봐. 찬인 어쨌을 것 같애?"
"그냥 안 두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이해를 하지 말자고 다짐하다가 또 말다가.... 용서하겠어."
"암튼 이번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명해 줘야겠어."
"좋다. 담에 갈 때 꼭 같이 가자. 산에 올라가며 울지나 말아."
"약속."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차 살 돈 있니?"
내가 물었다. 다혜도 실업자였다.
더구나 집에서 차 살 돈을 빼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근사한 돈벌이를 시작했거든."
"취직?"
"아니."
"아르바이트?"
"그런 셈이지."
"아르바이트 해서 차를 산다? 비밀요정에라도 나가니?"
다혜는 또 꼬집었다.
분노한 표정이었다.
"아르바이트 해서 차 산다는 게 이해할 수 없잖아."
"나 학원에 다닌 거 몰라?"
"그까짓 영어학원 다닌 게 무슨 소용 있니? 외국어 학원 선생이라도 된 거니?"
다혜가 2년 가까이 영어학원에 나간 것은 알았지만 그걸 이용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외국유학 가고 싶어했으니까 그러려니 했었다.
다혜도 구체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책 번역 맡았어. 그것도 대우가 괜찮아. 한 달에 2천 매씩 1년 동안 계속해야 돼."
"2천 매? 누굴 놀리니?"
졸업논문 몇 십 장 쓸 때도 녹아났던 기억이 새로웠다.
한 달에 2천 장이라면 손목이 고장날 것 같았다.
"외원단체에서 하는 사업인데 학원 선생이 추천해 줬어. 번역료도 매당 천 원이니까 1년간 차 굴릴 수는 있어."
"한 달에 2천 매라니? 무슨 재주로 번역한단 말이니?"
"타자기로 하니까 그런 걱정은 안 애도 돼. 이삼 일에 한 번씩 들랑거려야 되는데 차 없으면 보통 불편한 게 아냐.
학원 선생도 차 한대 사는 게 좋겠대. 중고차 사면 되잖아."
다혜의 말을 들어보니 차 한 대쯤은 있어야 될 것 같았다.
"나도 면허 따야 되는데."
"그럼 낼 시험치러 갈 때 같이 가면 되잖아. 거기서 신청서 내면 이삼 일 후에 시험보게 돼."
나는 면허 없이 차를 몰고 다니는 불안을 해소하고 싶었다.
"시집올 땐 되도록 새차로 갈아가지고 와라."
"미안하지만 빈 몸만 가겠어."
"내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고시에 패스해도 빈 몸으로 오겠니?"
"그땐 아예 안 가겠어."
"나도 고시 패스하지 않겠어."
우리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 잠재의식 속에 사법고시에 붙고 싶은 마음이 자리잡고 있는 건 숨길 수 없었다.
으스스하다는 판사나 검사가 되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친구 오빠가 1년밖에 안 탔다며 헐값으로 주기로 했어. 그것도 석 달이나 다섯 달 분할해 주겠대."
"말리진 않겠다만 조심해라. 서울서 운전할 줄 알면 세계 어딜 갖다 놔도 일류로 운전한다는 도시니까.
이건 운전하는 게 아니라 곡예야. 생명의 곡예단이 모여 어떻게 하면 엉터리로 운전하면서도 살아날 수 있는가를,
시범으로 보여 주는 곳 같다니까. 택시 운전사는 한 푼이라도 더 벌자고 황천 예행연습하고,
버스 운전사는 오줌보가 터질 정도인지 정신없이 밟아대고 자가용은 비교적 좋은 편이라고 하지만 마찬가지 실정야."
"그거야 누가 몰라?"
"좌우간 시험관이 어떻게 운전할 거냐고 물으면 요리조리 새치기를 할 거라고 대답해. 그럼 제까닥 면허증 내줄 거야."
"정말야?"
다혜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통 순경이 눈에 뜨이지 않으면 무슨 짓이고 교통법규를 많이 어겨서,
그 계통에 기록을 세우려는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것 같은 서울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면허시험장으로 나가 시험치는 다혜의 들러리 노릇을 했다.
예상문제집을 꼼꼼하게 읽는 다혜의 표정이 퍽 진지해 보였다.
시험장에 들어간 지 30분도 채 안 되어 다혜는 밝은 표정으로 나왔다.
"자신 없니?"
내가 이렇게 물었다.
"이건 겁 주는 시험야. 법규나 구조 같은 걸 공부해라 이거야."
"자신 있냐니까."
"70점 못 맞을까."
시험이 끝나고 채점결과가 컴퓨터로 즉석에서 발표되었다.
다혜는 백 점을 맞고 시험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졌다. 이런 시험까지 백 점 맞는 사람이 어디 있니? 욕심 좀 자그마치 부려라."
나는 다혜의 실력에 대해 두려움 같은 걸 느꼈다.
다른 여자라면 몰라도 다혜만은 평범한 여자이기를 바랐다.
나는 여자문제에 관한한 편하고 싶었다.
다혜처럼 너무 깔끔하면 피곤할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 실력이면 고시공부해라. 여자 판사가 되든 여자 검사가 되든 한번 폼 잡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빈정거리지 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다혜도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모른다.
시험이라면 언제나 턱걸이 밖에 못하는 내 처지에 비하면 다혜의 시험치르는 실력은 너무 월등했다.
코스 시험장에 들어선 다혜는 긴장된 표정이었다.
"맘 푹 놔라. 내가 있잖아."
"그래도 떨려."
"맘 놓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려. 떨어지면 내가 면허증 만들어다 줄게."
"그럴 수 있어?"
"내가 해 준다면 해 줘. 그러니 맘 놓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려."
"돈 든다며?"
"걱정 말고 해. 내가 면허증 내 줄테니까."
나는 쓸데 없이 큰소리를 쳤다.
다혜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항간엔 돈으로 면허를 딸 수 있다는 말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나 길을 알 수는 없었다.
불안해 하고 있는 다혜를 안심시킬 생각만 했다.
다혜가 떨어지면 그때가서 무슨 수를 찾아볼 막연한 생각이었다.
다혜가 시험관의 지시대로 차에 올라탔다.
나는 차가 움직이자 시험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시험관들이 나를 내쫓으려고 호루라기를 불며 쫓아다녔다.
다혜는 내 행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코스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시험관들과 의도적인 숨바꼭질을 하는 사이에 다혜는 무사히 합격하고 도장을 받았다.
나는 코스 시험장을 빠져나와 커피 판매대 앞에 서 있는 다혜를 만났다.
"축하한다. 나도 고생했지만."
"꽤 개구장이 청년였어. 그만하면 마누라 굶기진 않겠던데."
"사람들이 낄낄대고 웃는데 뒤통수가 뜨뜻하더라."
"주행시험 볼 때도 근사한 쇼 한 편 연출해 주시지 그래."
"그럴 작정이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주행시험장으로 나갔다.
안내 방송하는 시험관의 지시대로라면 수험번호 순서대로 주행시험을 치르는 게 아닐 용지제출 순서대로라고 했다.
나는 재빨리 용지를 들고 시험관에게 뛰어가 순서를 빠르게 조정했다.
선착순으로 주행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아수라장이었다.
다혜가 주행시험장으로 들어섰다.
시험관이 탄 차를 직접 운전하는 가장 어려운 관문이었다.
다혜가 앞좌석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나는 일부러 숨을 몰아쉬며 뛰어나갔다.
"누나! 큰일났어. 엄마가 쓰러지셨어. 빨리 가."
나는 몹시 거칠고 당황한 사람처럼 떠들었다.
"뭐라구? 엄마가!"
"고혈압이었대. 빨리!"
"잠깐만 기다려라. 금방 돌고 올게."
다혜는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고 시험관이 뭐라고 했지만 자동차는 속력 좋게 달려나갔다.
다혜 얘기는 빤했다.
오늘 면허 못 따면 다시는 못 오게 된다는 것과 외국유학 가는데 필수적으로 면허를 따가지고 가야만 편하다는 것과,
홀어머니가 보따리 장사해서 자식 공부시키다가 결국 쓰러지셨다는 식의 너스레를 떨어댈 것이었다.
조금씩의 실수나 서툰 것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얘기를 듣고 당황해서 그런 것이지,
결코 운전실력이 모자라서는 아니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이만큼이라도 해 낸 것은 너무나 연습을 많이 한 실력이라고 인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