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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분 / 국내미개봉 / 15세 관람가>
=== 프로덕션 노트 ===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실화 영화
폐결핵으로 인한 우울증과 죽음의 그림자속에 연인 패니 브론과의 아름답고도 절망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
영화제 소개글. 1818년 영국 런던, 23살의 시인 존과 패션을 공부하고 있는 옆집 소녀 페니의 비밀스러운 사랑이 싹튼다. 처음에 존은 페니를 철부지 말괄량이로만 여겼고 페니도 시를 비롯한 문학은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인연은 우연히 존의 동생으로 인해 시작된다...
<브라이트 스타 Bright Star>는 2009년 개봉한 영화로,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말년과, 그와 패니 브론(Fanny Brawne)과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배우 벤 위쇼(Ben Whishaw)가 존 키츠역을, 애비
코니쉬(Abbie Cornish)가 패니역을 맡았다. 감독은 제인 캠피온(Jane Campion)이며 앤드루 모션((Andrew Motion)이
쓴 존 키츠 전기집에서 영감을 얻어 각본을 작성했다. 앤드루 모션은 영화자문 역할을 맡았다.
<브라이트 스타>는 제62회 칸 영화제에 출품됐으며 2009년 5월 15일 첫 개봉했다. 영화 제목은 존 키츠가 패니와의 연애 중에 쓴 소네트 《빛나는 별이여 Bright Star, Would I were Steadfast as thou Art》를 참고해서 지었다.
영화 속에는 《빛나는 별 Bright Star》이외에도 《성 아그네스의 저녁 The Eve of St. Agnes》,《나이팅게일에게 Ode to a Nightingale》등의 시가 나온다. 영화감독 캠피온은 위쇼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광범위한
영화 준비를 했다. 영화 속의 많은 대사는 키츠의 시나 편지에서 직접 인용되었다.
벤 위쇼는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깃펜
사용법도 익혔다. 영화 속에서 패니가 키츠에게서 받는 편지는 위쇼가 직접 쓴 것이다.
자넷 패터슨(Janet Patterson). 캠피온과
20년 이상 함께 일한 동료로 의상 디자인과 연출을 맡았다.
햄스테드에 있는 키츠 하우스를 대신해 베드포드셔주의 하이드에 위치한 하이드
하우스와 사유지(The Hyde House and Estate)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 캠피온이 키츠 하우스(웬트워스(Wentworth
Place)로도 알려져 있다)는 너무 좁고 “좀 퀴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몇몇 장면은 엘스트리 스튜디오(Elstree
Studios)에서 촬영되었다.
벤 위쇼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이 선정한 'Hot List 2007'에 영화 <해리 포터>시리즈의 대니얼 래드
클리프와 함께 2007년 주목해야 할 배우로 선정된 벤 위쇼. 전세계 100명이 넘는 남자 배우들이 원했고 영화 <반지의 제왕>
올랜도 블룸이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역의 후보로 거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향수>의 감독 톰 튀크베어는 묘한 매력과 신선함을
갖고 있는 벤 위쇼를 선택했다. 2007년 벤 위쇼가 선보이는 '장 그르누이'는 영화사상 가장 섬뜩하면서 매혹적인 캐릭터의 탄생을
예고한다.
애비 코니쉬
15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코니쉬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력으로
차세대 할리우드 스타자리를 넘보고 있는 배우이다. 2004년 <아찔한 십대>의 하이디 역으로 호주 영화협회 최우수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찔한 십대>는 그해 칸느 국제영화제에 상영될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
<어느 멋진
순간>에서는 러셀 크로를 위협(?)하는 사촌 크리스티 역을 맡아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 인물 정보 === <2009년 2월 23일 네이버캐스트 / 시인 차창룡 글>
인물 세계사
영국의 천재 시인
존 키츠
John Keats, 1795.10.31 ~ 1821.2.23
1821.2.23 25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운명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듣노라, 아주 여러 번 / 포근한 죽음에 절반쯤 빠져 있었느니, / 아름다운 가락으로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부르네, / 내 고요한 숨결을 공기 중에 흩뿌려달라고 / 지금은 죽기에 딱 알맞은 시간 / 아, 고통도 없는 이 한밤중의 숨 멎음”
존 키츠, <나이팅게일에게 바치는 송가>에서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천재시인, 2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다
존 키츠의 죽음은 그의 명시 <나이팅게일에게 바치는 송가>의 한 구절과 딱 들어맞는다. 그는 제법 주목 받는 젊은 시인이었지만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뒤에 셰익스피어를 이을 만한 재목으로 평가 받았으며, 바이런, 셸리와 더불어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짧은 생애에 비하면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완성되지 않은 대가의 최후는 매우 쓸쓸했다. 존 에반젤리스트 월시의 논픽션 <죽기 전 100일 동안>은 키츠의 마지막을 슬프게 스케치하고 있다.
1821년 2월 23일, 로마의 피아차 디 스파냐 26번지의 작은 방. 키츠의 충실한 친구인 화가 조지프 세번은 친구의 마지막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키츠의 몸과 마음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오늘은 그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 밤 11시를 넘겼을 즈음, 키츠는 세번의 도움으로 일어나 말했다. “겁 내지 마!” 그의 목소리는 이 세상 소리가 아닌 듯 더할 수 없이 평온했다. 세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안타까움과 친구에 대한 애정으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키츠는 친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는 편안하게 죽을 거야.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 드디어 가는가 봐.”
키츠의 가슴이 고통스럽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가래 끓는 소리가 천천히 가라앉더니 잠잠해졌다. 세번은 키츠가 마침내 깊은 잠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세번은 조심스럽게 키츠의 몸을 지탱하면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키츠의 체중이 매우 묵직해졌음을 느꼈을 때 세번은 그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세번은 숨이 멎은 키츠를 몇 분 동안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안도감과 함께 슬픔이 몰려왔다. 며칠 전 키츠는 세번에게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써달라고 말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누워 있노라.” 다른 건 아무것도 쓰지 말고 오직 이 글귀만 새겨달라는 부탁이었다. 시인답게 시적인 묘비명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묘비명이란 남아 있는 사람의 몫임에 틀림없다.
시만큼이나 치명적인 사랑으로 몸과 마음을 모두 소진해버린 청년 시인
위대한 작품을 남긴 천재는 죽고 나서 더 오래 사는 것인가? 시인 랭보와 김소월과 이상이 그랬고, 화가 고흐와 모딜리아니가 그랬으며, 음악가 모차르트와 쇼팽이 그랬다. 그들은 젊은 나이에 죽은 후 신화적 존재가 되었으니, 죽고 나서 영생을 얻은 셈이다. 천재시인 키츠도 마찬가지였다. 키츠는 영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자주 인용하는 시를 남겼으며 그 작품들은 서정시의 최고봉으로 평가 받았다. 전기작가들은 다투어 키츠의 생애를 조명했다. 그들이 특별히 궁금해한 것은 키츠가 죽기 전에 끔찍이 사랑했던 연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연인이 누구였는지 조지프 세번은 알고 있었지만, 신중하고도 자비로운 세번은 그 여자의 평온한 인생을 위해 입을 다물었다. 항간에는 키츠의 연인은 젊은 키츠를 파탄으로 몰고 간 팜므 파탈의 대명사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키츠의 연인은 패니 브론이라는 이웃집 처녀였다. 1818년 10월 말, 두 사람은 만났다. 패니 브론이 키츠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키츠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브론이 특별히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다. 키츠를 사로잡은 것은 브론의 무엇이었을까? 브론은 매우 적극적인 여자였고 과감하고도 재치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그것만은 아닌 어떤 안타까움이 키츠의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댔다. 브론은 16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키의 청년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차츰 이 감수성 풍부한 청년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키츠의 동생 톰이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이 키츠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브론이 있었기 때문에 키츠는 슬픔을 이길 수 있었으나, 그가 감당하기 힘든 브론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키츠에게 또 다른 괴로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브론에 대한 키츠의 복잡한 감정으로 인해 그의 시세계가 대단히 풍부해졌음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했던 그는 브론를 만나는 동안 미묘한 사랑 속에 숨겨진 위험한 함정을 가슴 아프게 느끼게 된다.
키츠는 브론을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었으나 자유분방한 브론은 어떤 족쇄도 싫었다. 브론이 다른 남자와 농담을 주고받거나 가벼운 신체적 접촉이라도 하면 키츠의 마음은 얼어붙었다. 마음을 비워야지 하고 다짐할수록 그는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기야 그맘때에 연애하는 젊은이라면 우왕좌왕하는 심정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둘의 사랑은 불안한 가운데 급진전되어 1819년 10월 공식적으로 약혼하게 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방해한 것은 브론의 마음이 아니라 키츠의 병이었다. 1820년 2월 3일, 키츠는 각혈하여 병석에 눕게 된다. 4월에 완전히 회복된 듯이 보였지만, 다시 병세가 악화되자 9월에 조지프 세번과 함께 요양차 로마로 가게 된다. 브론도 따라가려 했지만, 키츠가 거절했다. 키츠는 어쩌면 브론과 다시는 만날 수 없었음을 예측했는지도 모른다. 친구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키츠는 당시의 불치병인 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말았다.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단 4년의 활동으로 문학사의 중심에 서다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그는 1795년 10월 31일 런던에서 마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하는 운수업체 사장의 딸이었다. 당시의 운수업체는 여러 대의 마차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운수업체를 물려받은 키츠의 부모는 넉넉한 살림을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으니,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어머니 또한 키츠가 열네 살 때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키는 작았지만 매우 맹랑하여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았던 키츠는 부모를 일찍 잃었기 때문에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년의 감수성 또한 대단히 예민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외할머니와 함께 살게 됐지만 할머니마저도 연로하여 세상을 떠나면서 리처드 애비를 키츠의 후견인으로 지목했다. 키츠는 후견인에 의해 외과의사 토마스 해먼드의 제자가 되어 의학공부를 하게 되었다. 1815년 가이스 병원으로 옮겨 의학공부를 계속했고, 이듬해 약사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키츠는 당시로서는 평범한 직업이었던 의사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 유지하지 않았다. 키츠는 학창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시의 세계에 다시 한번 파고들었다.
1816년 채프먼이 번역한 호메로스의 시를 읽고 감명받아 <채프먼이 번역한 호메로스를 처음 읽고>(1816)라는 시를 쓰게 된다. 이 시는 지금까지 쓴 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힘있는 작품이었다. “시인들이 아폴론을 모신 서방의 섬들도 / 두루 돌아보고 거기에 노닐었건만 / 소문으로 익히 들으면서도 여태껏 / 깊은 이마의 호메로스가 다스리는 나라 / 그 티 없는 맑음을 숨쉬지 못했더니 / 이제 채프먼의 우렁찬 소리로서”(김우창 역) 호메로스의 시를 알게 된 키츠는 햇살에 봄 눈 녹듯 자연스럽게 싯구가 흘러나왔다.
1817년 3월 키츠는 첫 시집 <시집 Poems>을 펴낸다. 첫 시집은 크게 주목 받지 못했지만, 출판업자 존 테일러와 제임스 헤시에게 다음 시집의 출판을 약속 받았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시가 장시 <엔디미온>이다. 키츠가 그의 대부분의 시에서 의도한 핵심적인 원리는 고뇌와 고통의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한 ‘미의 추구’이다. 이러한 주제가 가장 환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시가 바로 <엔디미온>이다. 젊은 목동 엔디미온이 달의 여신 셀레네(키츠의 시에서는 신시아)와 사랑했다는 그리스 신화를 원형으로 한 시이다. 이 시의 첫 행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라는 선언은 키츠 시의 핵심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 시가 혹독하게 비판 받게 되자 키츠는 깊은 시름에 빠진다. 혹독한 비판을 받지 않고 어찌 위대한 시인이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키츠는 분발하여 1819년에는 창작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성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 <그리스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 <우울에 대한 송가> 등 키츠의 명시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졌으니, 시련을 오히려 에너지로 삼은 결과였다. 그러나 1820년 초 결핵의 징후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젊은 시인의 행진은 사실상 멈추게 된다.
연인이 준 홍옥수를 손에 쥐고 떠난 최고의 낭만주의 시인
사랑도 꿈도 접은 1821년 2월 23일. 키츠의 손에는 붉은색이 도는 하얀 타원형 홍옥수가 쥐어져 있었다. 런던에서 로마로 떠나올 때의 일이었다. 키츠는 브론에게 “당신 없이도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선물을 하나 줘!”라고 주문했다. 로마로 출발하는 배를 타던 날 브론은 키츠에게 그 홍옥수를 주었다. 홍옥수는 주인이 죽자 정처 없었다.
키츠의 묘비명은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졌다. “이 묘에는 영국의 젊은 시인의 유해가 묻혀 있다. 죽음의 자리에서 고국 사람들의 무심함에 극도로 고뇌하던 그는 묘비에 이런 말이 새겨지기를 원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누워 있노라.’” 단 4년 동안 활동하고도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천재시인이 된 존 키츠! 만약, 키츠가 살아남아 더욱 많은 작품을 남겼다면 세계문학사는 더욱 풍성해졌겠지만, 더는 슬퍼하지 말자. 다만 키츠의 아름다운 시가 이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물들일 수 있도록 시를 읽자. 지금은 시 읽기에 가장 알맞은 시간!
들리는 멜로디는 아름답지만,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욱 아름답다
그러므로 부드러운 피리들아 계속 불어라
육체의 귀에다 불지 말고, 더욱 아름답게,
영혼의 귀에다 불어라, 소리 없는 노래를.
- 존 키츠의 시 <그리스의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에서(강선구 역)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존 키츠의 시를 부분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책은 많다. 영국 낭만주의 시를 소개하고 해설한 책들이 이에 해당한다. 키츠의 시선집으로는 김우창 교수(고려대, 영문학)가 번역한 <가을에 부쳐> 가 있다. 그러나 키츠의 장시를 비롯하여 모든 작품을 정교하게 번역한 키츠 전집이 나오지 않는 한 우리의 갈증은 계속될 것이다.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책은 존 에반젤리스트 월시의 <죽기 전 100일 동안> 이다. 요양을 위해 런던을 떠난 존 키츠는 1820년 11월 로마에 도착하게 된다. 그때부터 약 100일 동안 로마의 피아차 디 스파냐 26번지의 조그만 방에서 키츠와 그의 친구 조지프 세번은 결핵이라는 병과 필사적인 싸움을 벌인다. 이 책은 그 싸움의 과정을 세세하게 그려내면서 키츠의 지난 삶까지를 자연스럽게 반추해낸다. 특히 패니 브론과의 러브스토리는 흥미로우면서도 가슴 아프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브론이 팜므 파탈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며,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은 것은 그 몹쓸 병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필자가 이 책에서 크게 감명받은 것은 세번의 우정이다. 세번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접고 키츠의 간호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물론 당시의 불치병을 극진한 간호만으로 치료할 수는 없었다. 사후에 키츠가 유명해지면서 세번은 미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키츠의 명성과 함께 복된 일생을 보내고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후 키츠의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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