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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와 人의 關係
곽노봉(한국서학연구소 소장)
Ⅰ. 머리말 Ⅱ. 書와 人의 關係에 대한 時代的 考察 1. 唐以前 2. 宋, 元 3. 明, 淸 Ⅲ. 結論 |
Ⅰ. 머리말
서예라는 것은 문자를 빌려 점과 선으로 자신의 정감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성된 서예 작품은 곧 작가의 모든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작가와 작품과의 관계 즉 書와 人의 관계를 인식하여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 고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서예가 단순한 서사적인 기능에서 벗어나 이를 예술로 인식하기 시작하고부터 더욱 이들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다. 글씨를 오늘날 서예라는 관점으로 인식할 때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하여 제일 먼저 논의한 것은 漢나라 揚雄이 말한 ‘書, 心畵’설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히 정리한 사람은 淸나라 劉熙載로 그가 말한 ‘書如其人’은 우리가 현재 書와 人의 관계를 말할 때 흔히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되었다. 이렇게 ‘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오늘날 書와 人의 관계를 규정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지만 揚雄이래 각 시대마다 비록 용어는 다르지만 이들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꾸준히 검토되고 있었다. 劉熙載가 말한 ‘書如其人’이라는 설은 서예의 풍격은 작가의 성격과 같고, 서품은 작가의 인품과 같다는 것으로 이는 다시 말하여 서예 작품에는 작가의 학식․수양․흥취․정서․사상․사람됨 등의 정신 요소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유사한 용어로 예를 들면 ‘論書及人’․‘書象其爲人’․‘字如其人’․‘心正則筆正’․‘人正則書正’․‘書心畵也’․‘寫字則寫志’․‘書卷氣’․‘字如其品’․‘類其爲人’․‘如其爲人’․‘似其爲人’ 등이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실제에 있어서 모두 書와 人의 관계를 논의한 것들이다. 글씨는 사람이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됨이 글씨에 영향을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만 각 시대마다 그들의 처한 역사적 환경과 문화적 차이가 다르기 때문에 書를 숭상하는 관점도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한 검토는 꾸준히 진행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각 시대별로 문헌상에 나타난 것에 의거하여 이들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고찰한 다음 오늘날 우리가 이를 어떠한 자세로 수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 바로 이 논문의 지닌 의의라고 할 수 있다.
Ⅱ. 書와 人의 關係에 대한 時代的 考察
1. 唐以前
書라는 것은 처음에 언어의 부호인 문자를 기록하여 뜻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한 《說文解字》를 보더라도 書는 기록한다는 의미로 쓰였다.1) 許愼은 《周易》의 이론을 계승하여 문자를 논하면서 이를 죽백에 기록하며 글씨는 그 문자가 가지고 있는 뜻과 같다고 하였다[著於竹帛謂之書, 書者如也].2) 이는 완전히 문자의 실용성인 書寫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說文解字》가 비록 字書이기 때문에 예술성에 대한 논의가 배제되고 있지만 許愼 이전에 書가 가지고 있던 뜻으로 본다면 적어도 예술의 의미는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 先秦시대에 있어서 제자백가의 저작에서도 書에 대하여 언급한 예가 없으며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오늘날의 서예라는 의미로 쓰여지지는 않았다.3) 그리고 東漢시대 이전까지의 甲骨․鐘鼎․簡牘․碑碣 등의 실물 문자를 보면 기본적으로 이를 쓴 사람의 성명이 없다. 당시 그들은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사람을 선택하여 실물에 문자의 글을 쓰게 하였지만 그들의 임무는 오로지 ‘抄寫’하는 작업 즉 일종의 비교적 좋은 글씨로 베끼는 정도였다. 이것을 보면 書라는 것은 주로 문자를 기록하는 수단 즉 書寫적인 면에 비중을 두었지 아직 이를 예술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漢나라 초에 草書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문자의 사용이 날로 광범위하게 됨에 따라 사람들은 좀더 빠르게 쓸 수 있는 글씨로 일상생활의 수요에 대처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초서의 ‘書’자는 이미 일종의 서사체를 가리키며 이것이 비록 아직은 응급수단의 실용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書’의 의미는 점차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서사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었던 書라는 관념이 변하여 예술적인 면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점차로 書에 대한 심미 의식이 증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르러 전문적인 서예 이론에 관한 저작들이 나오면서 서예 실천은 이론의 지도 아래 더욱 자각을 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이론의 지도가 없는 예술은 자위적인 예술이며, 이론의 지도가 있는 예술이어야 비로소 자유로운 예술이 되는 것이니 서예의 진정한 번영사는 마땅히 서예 이론의 지도를 받는 시기에서부터 손꼽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한나라의 대 문학가이면서 철학자인 揚雄(기원전 53-18)이다. 그는 “대저 말은 마음의 소리이고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소리는 형태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것을 보면 군자와 소인이 드러난다[夫言, 心聲也. 書, 心畵也. 聲畵形, 君子小人見矣].”4)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揚雄이 말한 ‘書, 心畵’라는 것은 매우 간단하지만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서예의 추상적인 선은 실제에 있어서 이를 쓰는 서예가의 심령이 진동되어 나온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揚雄은 ‘詩言志’라는 명제를 서예에 확충시켜 예술가의 주관적 요소의 총화인 ‘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 창작에 중요한 작용을 하면서 또한 이를 창작하는 서예가의 주관적인 사상이나 감정에 매우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고 보았다. 揚雄은 이와 같이 서예를 사람의 성격적인 특징과 대응시켜서 말하고 있으나 그것이 꼭 윤리와 도덕이라는 심미와 결부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비록 揚雄이 말한 ‘書, 心畵’라는 설이 전문적인 서예 이론 저록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이는 분명히 문헌상에 있어서 최초로 보여지는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라 하겠다.
이 시기의 서예 미학은 ‘中和’美를 이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형태 발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주로 이성이 주도를 하면서 정감과 통일을 꾀하는 조화미를 강조하고 있다. 서예에 관한 정감 표현 능력은 漢나라 때 이미 초보적인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이 시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蔡邕(133-192, 一作 132-192)이다. 한나라 서예 미학의 발전 가운데 蔡邕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중국 고대 서예 미학의 기초를 이룬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다. 蔡邕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가장 먼저 서예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서예가로 그는 한나라 말의 유명한 학자이면서 문학가로 글씨는 물론이고 이에 대한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筆論》에서 “글씨라는 것은 푸는 것이다. 글씨를 쓰려고 할 때에는 먼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풀어 뜻에 맡기고 성정을 거리낌 없이 한 뒤에 써야 한다[書者, 散也. 欲書先散懷抱, 任情恣性, 然後書之].”5)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散’이라는 것은 일종의 창작을 하는 심리 상태로 서예에 있어서 형세가 있으려면 흉중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 기개를 배양하여 붓과 먹이 이러한 기개를 따라 자유롭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글씨를 쓸 때 손과 발이 구속을 받아 심리적으로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자연스러운 운필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揚雄의 ‘心畵’설에서 진일보하여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린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결코 서예의 기본적 의의가 문자를 기록한다는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서예란 마음에 품고 있는 모든 생각을 떨치고 자기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성정에 맡겨 글씨를 쓰면 더욱 흥취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것은 창작 태도를 논술함에 있어서 서예가 서정을 본질로 삼는다는 것을 다만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서예가 정감을 나타내고 그것이 또한 사람을 감염시키는 것 등에 대한 본질적인 특징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상은 魏․晉시대에 들어와 ‘意在筆先’이라는 설로 발전하면서 중국 고대 서예 미학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魏․晉시대에는 정식으로 ‘意在筆先’이라는 설이 제출됨에 따라 이를 충분히 강조하고 또는 발전시켜 나아갔다. 衛夫人(衛鑠으로 272년-349)은 먼저 이에 대하여 말하길 “마음은 급하면서 붓잡는 것은 더디게 하는 자, 마음은 느긋하면서도 붓잡는 것은 급하게 하는 자, 붓잡는 것은 가까이한 것 같으나 긴밀하지 못한 자, 몸과 손이 가지런하지 않은 자, 뜻은 뒤로 하고 붓은 앞으로 하는 자는 망하고, 붓잡는 것을 멀리 하면서도 급하게 하는 자, 뜻이 앞에 있고 붓을 뒤로 하는 자는 승리한다[有心急而執筆緩者, 有心緩而執筆急者. 若執筆近而不能緊者, 心手不齊, 意後筆前者敗. 若執筆遠而急, 意前筆後者勝].”6)라고 하였다. 王羲之(321-379, 一作 303-361)도 이에 대하여 말하길 “무릇 서예란 침착하고 고요한 것을 귀히 여기는 바 뜻이 붓보다 먼저 있어야 하고 글자는 마음 뒤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아직 글씨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마음으로 구상한 생각이 있어야 한다[凡書貴乎沉精, 令意在筆前, 字居心後, 未作之始, 結思成矣].”7)라고 하였다. 그들은 글씨를 쓰기 전에 먼저 냉정하고 충분하게 구상을 하여 마음에 어떤 구도가 잡혀졌을 때 붓을 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의 예술적 구상은 용필․결체․장법 등의 형식적인 방면의 안배에 대한 생각을 주로 말한다. 따라서 王羲之는 “대저 글씨를 쓰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먹을 갈면서 정신을 모으고 생각을 조용히 하며 미리 자형의 크고 작음, 누운 것과 위로 향한 것, 평평하고 곧은 것, 떨치고 움직이는 것을 미리 예상하여 맥락을 서로 연결시켜 뜻이 붓의 앞에 있게 한 다음 글씨를 써야 한다[夫欲書者, 先乾硏墨, 凝神靜思, 豫想字形大小, 偃仰, 平直, 振動, 令筋脈相連, 意在筆前, 然後作字].”8)라고 하였다. 여기서 보면 王羲之는 衛夫人의 ‘意前筆後’라는 설을 이어서 ‘意在筆前’이란 설을 제출하여 사람의 마음을 서예에 전달함에 있어서 먼저 이를 이성적인 사고에 의하여 예술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書와 人의 관계를 규정하는 이론이 점차로 내재적인 神韻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서예와 사람을 연관시켜 그 사람의 형상․풍격․기질․정신 등을 서예의 심미와 관련지어 품평을 하였다. 예를 들면 袁昻(461-540)은 《古今書評》에서 “王羲之의 글씨는 謝씨 집안의 자제와 같아 설사 단정한 것을 회복하지 못하였지만 상쾌한 것이 일종에 풍류적인 기운이 있다.……衛恒의 글씨는 마치 꽃을 꽂은 미녀가 거울을 보며 춤추며 웃는 것과 같다[王右軍書, 如謝家子弟, 縱復不端正者, 爽爽有一種風氣.……衛恒書如揷花美女, 舞笑鏡臺].”9)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주로 사람의 외재적인 형태에 중점을 두고 있어 내재적인 성격과 도덕 그리고 품위를 중심으로 하는 書와 人의 관계와는 약간 거리감이 있다.
글씨에 있어서 형태와 정신의 관계를 체현하는 이론이 바로 ‘神彩論’10)이며 이러한 이론은 최초로 제기한 자는 王僧虔(426-485)이다. 그 뒤 唐나라 張懷瓘이 이를 다시 확충하자 역대의 많은 서예가들이 이를 보충하여 마침내 서예 이론의 중요한 핵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서예에서 신채라는 것은 비록 글자의 형태와 시각적인 감각을 통한 것이지만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작자의 정신을 전달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王僧虔은 《筆意贊》에서 말하길 “글씨의 묘한 이치는 신채가 으뜸이고 형질은 그 다음이다[書之妙道, 神彩位上, 形質次之].”11)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채라는 것은 정신과 풍채를 말하고 형질이라는 것은 형태와 본질을 가리킨다. 형태(形)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존재하고 있는 일종의 방식으로 이를 表象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신(神)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적인 정신으로 이는 서예에 있어서 사람의 생명 활동을 이루는 본질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형질의 필법․묵법․장법 등은 단지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정신으로 쓰고자 하는 것이 최종의 목적이 된다. 이 말은 서예에 있어서 외형적인 형태보다는 내재적인 정신을 중시하는 것으로 이는 또한 學養과 人品을 강조하면서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한 본질에 접근한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설은 唐나라의 張懷瓘(生卒未詳)에 이르러 더욱 구체적으로 강조되었다. 張懷瓘은 《書議》에서 “풍신과 골기가 있는 글씨가 위에 위치하고, 아름답고 효과 있는 글씨는 아래에 위치한다[風神骨氣者居上, 姸美功用者居下].”12)라고 하였으며, 또한 “모름지기 그 뜻이 피어나고 말미암은 바를 고찰하여 마음을 따르는 것이 위이고 눈을 따른 것이 아래이다.……깊이 글씨를 아는 자는 오직 신채만 보고 글자의 형태는 보지 않는다[須考其發意所由, 從心者爲上, 從眼者爲下.……深識書者, 唯觀神彩, 不見字形].”13)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내재적인 정감 의식이 주도하는 심미의 지위를 강조하면서 외재적인 문자의 형식에 얽매이는 것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그는 진정으로 서예에 대한 것을 깊게 이해하려면 정신을 얻고 형태를 잊으면서 오직 신채를 보고 자형은 보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書와 人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의 내재적인 정감이 서예의 외형적인 형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唐나라에서 서예 미학을 총결하면서 ‘中和’의 미를 집대성한 사람은 孫過庭(生卒未詳)이다. 그는 晉나라 서풍에 매료를 느끼면서 뜻과 기운이 화평하여야만 잘못되지 않는 글씨가 된다고 하면서 여러 방면에 걸쳐 ‘中和’의 미를 논술하였다. 그는 王羲之를 숭상하면서 말하길 “왕희지의 글씨는 말년에 묘한 맛이 많았으니 마땅히 생각이 통하고 뜻과 기운이 화평하면서도 격분하지도 않고 심하지도 않아 풍격과 법도가 스스로 심원하다[右軍之書, 末年多妙, 當緣思慮通審, 志氣和平, 不激不厲, 而風規自遠].”14)라고 하였으며, 또한 “비록 일가를 이룬 어떤 사람을 조종으로 하여 글씨를 배운다 하더라도 결국 이것은 변하여 여러 체를 이루게 된다. 그 성정이 하고 싶은 것을 따르지 않음이 없으니 문득 이것으로 자태를 만든다[雖學宗一家, 而變成多體, 莫不隨其性欲, 便以爲姿].”15)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孫過庭은 王羲之의 ‘中和’미를 이상으로 하면서도 각자의 성정에 따라 글씨의 자태가 달라진다고 함으로써 書와 人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韓愈(768-824)는 王羲之에 대한 우상을 파괴하면서 서정을 위주로 하는 표현을 밝힘으로써 직접적으로 정감을 중시하는 사조를 인도한 사람이다. 그는 唐나라 古文運動을 주도한 사람으로 시와 문장은 불평한 기운을 표현하는 것이며 이 때 진부한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글씨에 있어서도 서정을 중시하면서 이에 대한 주관적인 정감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서예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그는 사물을 형상하고 재현하는 사조에서부터 서정 표현의 경향으로 발전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送高閑上人書>에서 말하길 “지난 날 張旭은 초서를 잘 써서 다른 기술은 다스리지 않았다. 기쁨과 성남․군색함과 곤궁함․우울함과 슬픔․즐거움과 편안함․원한․사모․취함․무료함․불평 등 마음에서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초서로 이를 펴내었다. 사물을 보고는 산수와 벼랑 골짜기․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초목의 꽃과 열매․해와 달과 별자리․바람과 비와 물과 불․번개와 천둥과 벼락․노래와 춤과 싸움 등의 천지 만물의 변화를 보고는 기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것을 모두 하나로 글씨에 담았다[往時張旭善草書, 不治他技. 喜怒, 窘窮, 憂悲, 愉佚, 怨恨, 思慕, 酣醉, 無聊, 不平, 有動于心, 必于草書焉發之. 觀于物, 見山水崖谷, 鳥獸蟲魚, 草木之花實, 日月列星, 風雨水火, 雷霆霹靂, 歌舞戰鬪, 天地萬物之變, 可喜可愕, 一寓于書].”16)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韓愈가 집중적으로 강조한 것은 내재적인 정감과 서예의 서정 표현을 초서의 틀에 깃들이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書와 人의 관계가 아주 밀접한 것이라고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논의한 書와 人의 관계를 살펴보면 대체로 글씨가 그 사람의 내재적인 정감이 서예의 외형적인 형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비록 韓愈가 서정을 중시하면서 이에 대한 주관적인 정감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서예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로 보았지만, 이는 내재적인 정신의 표현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아직까지 서예 심미에 대한 본질을 탐구하고 창작의 주체가 되는 사람의 인품과 수양을 크게 강조하지는 않았다.
2. 宋․元
宋나라는 서예에서 서정 표현을 매우 강조하였던 시기로 이때부터 심미 의식의 결구는 분명한 변화를 나타내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시대이다. 따라서 宋나라의 서예는 ‘尙意’라는 평을 듣고 있으니, 이는 개인의 취향과 정감을 자유롭게 펴내는 것을 시대적인 기본 풍모로 삼았기 때문이다. ‘尙意’라는 말은 宋나라의 글씨가 唐이나 晉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董其昌이 지적한 것으로17) 馮班은 ‘新意’라는 말을 사용하였다.18) ‘尙意’에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論書及人’이다. 왜냐하면 ‘尙意’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서정이며, 정이란 것은 또한 마음에서 근본 되며, 마음은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거취에 따라 그것이 글씨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글씨를 평하는 사람은 항상 그 사람도 같이 평하곤 하였다. 이러한 것은 후에 글씨의 좋고 나쁨에는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그것을 쓴 사람의 인품과 자질에 따라 글씨의 우열이 논해지곤 하였다. 宋나라 서예가들은 이와 같이 자기의 감정과 의취를 발산하면서 서예에서 추구할 수 있는 서정 능력인 ‘意’를 최대한 발휘하여 예술 세계를 넓혀 갔다. 그리고 이러한 변혁은 서예에서의 문인주의를 야기시켜 더욱 사람의 가치와 작용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종의 새로운 서풍과 유행을 창조시키려는 배후에는 반드시 이를 충동하는 사상이 있기 마련이다. 북송 후기에 새로운 사조의 흥기가 일반화되자 대부분 문인들이 晉․唐이래로 내려온 귀족 문화를 버리고 대중적인 문화를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문학은 물론이고 회화와 서예에도 파급되었는데, 당시 덕망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歐陽脩 등이 이를 적극적으로 고무하여 조장함으로써 이러한 풍토는 신속하게 전파되어 마침내 宋나라 서단에 새로운 면모를 마련하게 되었다.19)
이와 같이 ‘尙意’의 서풍을 열어 준 歐陽脩(1007-1072)는 그의 문학 이론으로 ‘道勝文至’20)라는 것을 제출하여 내재의 충실을 중요시하면서 방법론으로는 修身을 들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문장을 후세에까지 멀리 전하기 위함이다. 歐陽脩의 이러한 정신은 곧바로 서예에서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형상적인 미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내재의 충실을 기하며 人品과 筆意를 중시하는 문인정신으로 연결되고 있다. 歐陽脩는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하여 오직 賢者의 글씨만이 오래 전한다고 하면서 이에 대한 예로 顔眞卿등을 들었는데21), 그의 이러한 관점은 그대로 蘇軾에게 이어졌다. 따라서 歐陽脩는 필의를 중시하면서 남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 즉 ‘形似’를 취하는 것을 ‘奴書’22)라 하여 이를 강하게 거부하였다.23)
宋나라 때에는 揚雄이 말한 ‘書, 心畵’설을 크게 발전시켰던 시대로 그들은 서품과 인품을 연관시켜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하여 정식으로 ‘論書及人’이라는 말을 제출하였다.
이러한 ‘論書及人’ 이론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蘇軾(1036-1101)으로 그는 <跋錢君倚書遺敎經>에서 “사람의 모양에 잘나고 못남이 있는 것처럼 군자와 소인의 자태는 숨길 수 없다. 말을 함에 있어서도 잘하는 것과 눌변이 있는 것처럼 군자와 소인의 기운은 속일 수 없다. 글씨에도 잘 쓰고 못씀이 있으니 군자와 소인의 마음은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다[人貌有好醜, 而君子小人之態, 不可掩也. 言有辯訥, 而君子小人之氣, 不可欺也. 書有工拙, 而君子小人之心, 不可亂也].”24)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蘇軾은 군자와 소인이라는 도덕적인 표준으로 서예 창작과 감상을 평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덕상에 있어서 인품을 중시하는 것은 지식과 수양에 있어서 書卷氣를 제창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글씨 밖에서의 공부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학문과 문장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학식과 수양이 없는 俗氣를 반대하였다. 蘇軾은 말하길 “글씨를 쓰는 법에 있어서 학식이 얇고 보는 것이 협소하고 배움이 부족한 세 가지가 있으면 끝내 오묘한 맛을 다할 수 없다[作字之法, 識淺, 見狹, 學不足三者, 終不能盡妙].”25)라고 하면서 “글씨를 연습하다 못쓰게 되어 버린 붓이 산같이 쌓일 정도가 되어도 아직 보배스러운 글씨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신묘함에 통한다네[退筆成山未足珍, 讀書萬卷始通神].”26)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黃庭堅은 蘇軾을 평하면서 말하길 “東坡의 간찰은 자형이 온아하고 윤택이 나서 한 점의 속기도 없다[東坡簡札, 字形溫潤, 無一點俗氣].”27)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문과 문장의 기운이 물씬거리면서 필묵 사이에 풍겨 나오니, 이는 다른 사람이 끝내 미칠 수 없는 바이다[學問文章之氣, 郁郁芊芊, 發于筆墨之間, 此所以他人終莫能及爾].”28)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이론상에 있어서 ‘書卷氣’를 제창하였고 또한 몸소 힘써 이러한 경지를 이루려고 노력함으로써 서예로 하여금 문인의 특성이 돋보이도록 발전시켜 나아갔다.
이렇게 인품과 ‘書卷氣’를 중시하는 풍토는 宋나라 서예가들의 일반적인 관점이었다. 朱長文(1039-1093)도 이에 대하여 말하길 “안진경은 그러한 것들을 글씨에 나타내었으니 강직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형체는 엄정하고 법도를 갖추었다. 이는 마치 충성스러운 신하나 의로운 선비가 얼굴을 바로 하여 조정에 서서 대절에 임하고 있어 그것을 감히 빼앗을 수 없는 것과 같다[其發于筆翰, 則剛毅雄特, 體嚴法備, 如忠臣義士正色立朝, 臨大節而不可奪也].”29)라고 하였다. 인품의 요소가 심미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함에 따라 宋나라는 더욱 서예가의 인품과 수양을 강조하게 되었다. 姜夔(1155?-1235?, 一作1163-1203)는 ‘風神’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 속에 포함된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품이 높은 것이라 하였다.30) 또한 黃庭堅(1045-1105)은 ‘書卷氣’를 주장하면서 말하길 “글씨를 배울 때는 모름지기 흉중에 도덕과 정의가 있어야 하고 또 성현과 철인의 학문으로 넓혀야만 글씨가 비로소 귀하게 된다[學書須要胸中有道義, 又廣之以聖哲之學, 書乃可貴].”31)라고 하였다. 《宣和書譜》에서도 말하길 “글씨를 잘 논하는 사람은 흉중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은 다음에 글씨를 쓰면 스스로 속기가 없다[善論書者, 以謂胸中有萬卷書, 下筆自無俗氣].”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광범위하고 깊은 지식과 수양이 있어야 서예를 창작함에 있어서 속기를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이론상에 있어서 ‘書卷氣’를 제창하는 한편 몸소 힘써 이러한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함으로써 서예로 하여금 문인의 특성이 돋보이도록 발전시켜 나아갔다.
元나라는 몽고족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한족의 대부분 지식 분자들은 상당한 굴욕을 당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학문과 벼슬길을 버렸는데 이는 마치 그들이 새장에 갇힌 새와 같이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예 미학은 주로 음유의 미를 숭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감을 숭상하고 정신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인품을 강조하는 사상이 매우 성행하였다. 郝經(1223-1275)은 서예란 인품을 근본으로 하며, 서법은 곧 마음의 법이라는 주장을 제시함으로써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논술하였다. 그는 말하길 “王羲之는 정직하고 식견이 있으며 풍격과 도량이 고원하여 은근함을 남기는 것 같다.……그 뒤 顔眞卿은 충의와 커다란 절개로 고금의 올바른 것의 극치를 이루면서 전서를 해서의 필법에 도입시켰다. 蘇軾은 웅건한 문장과 큰 글씨로 고금의 변화의 극치를 이루면서 해서에 예서의 필법을 운용하여 서예의 갖춤에 남김이 없게 하였다. 이들은 모두 인품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서법은 곧 마음의 법이다. 그러므로 柳公權은 마음이 올발라야 글씨도 올바르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비록 한 때의 풍자한 간언에 지나지 않지만 이 또한 서법의 근본이다. 진실로 그 사람의 인품이 못났으면 억지로 만들고 치우침이 있어 설사 그의 글씨가 교묘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쌓인 것은 역시 가릴 수 없다. 안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난다. 二王․顔眞卿․蘇軾과 같이 충성스럽고 정직하고 고상한 사람들은 설사 그들의 글씨가 교묘하지 않더라도 역시 속스러운 글씨는 없으리니 하물며 교묘하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羲之正直有識鑒, 風度高遠, 觀其遺殷,……其後顔魯公以忠義大節, 極古今之正, 援篆入楷. 蘇東坡以雄文大筆, 極古今之變, 以楷用隸, 于是書備極無餘蘊矣. 蓋皆以人品爲本, 書法卽心法也. 故柳公權謂心正則筆正, 雖一時諷諫, 亦書法之本也. 苟其人品凡下, 頗僻側媚, 縱其書工, 其中心蘊蓄者亦不能掩. 有諸內者必形諸外也. 若二王, 顔, 坡之忠正高古, 縱其書不工, 亦無凡下之筆矣, 況乎工乎].”32)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王羲之 등의 성격을 통하여 서예의 심미적 관계를 논술하면서 글씨에는 성정과 그들의 풍격이 그대로 들어 있어 자신의 정감을 표현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서예라는 것은 인품을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품의 높고 낮음을 표준으로 하여 그 사람들의 작품을 평가하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서예의 정감 표현이라는 특성을 인식함에 있어서 元나라는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정감과 형식의 특정적인 심미의 대응 관계를 검토하였다. 陳繹曾(約1286-1345)은 이에 대하여 말하길 “기쁘고 성나고 슬프고 즐거운 것이 각각 분수가 있다. 기쁜즉 기운이 화목하여 글씨가 편안하고, 성이 난즉 기운이 거칠어 글씨도 험악하고, 슬픈즉 기운이 우울하여 글씨가 수렴되고, 즐거운즉 기운이 화평하여 글씨가 아름답다. 정에도 무겁고 가벼운 것이 있은 즉 이에 따라 글씨도 수렴되고, 편안하고, 험악하고, 아름다움에 있어서 얕고 깊은 차이가 있어 그 변화가 무궁하다[喜怒哀樂, 各有分數. 喜則氣和而字舒, 怒則氣粗而字險, 哀卽氣郁而字斂, 樂則氣平而字麗. 情有重輕, 則字之斂舒險麗亦有淺深, 變化無窮].”33)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감의 변화에 따라 글씨도 서로 다른 경지와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특정한 서예 형식은 이것과 상응하는 정감의 의식으로부터 표현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은 書와 人의 관계에 있어서 서예의 본질과 특성을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의법론에서 법이 없는 가운데 법이 있다고 말한 鄭杓(生卒未詳)는 “이백은 법이 없는 가운데의 법을 얻었으며, 두보는 뜻으로 이를 행하였다[太白得無法之法, 子美以意行之].”34)라고 하였다. 이백과 두보가 행한 것을 서로의 문자를 통해 보면 의법이 고도로 통일된 자유로운 경지이다. 이는 郝經이 말한 “손과 마음이 서로 잊으면 설사 뜻이 가는 바대로 되었어도 글씨가 내가 되고 내가 글씨가 되는 경지만 못하다[心手相忘, 縱意所如, 不如書之爲我, 我之爲書].”35)라는 경지와 같은 것이다. 즉 이것은 주관과 객관, 정감과 형식, 의미와 법도의 결합을 거친 예술 창작의 자유로운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3. 明․淸
明나라에서 書와 人의 관계를 보는 관점은 기본적으로 宋․元 시대와 맥락을 같이하면서 項穆의 ‘心相’설과 ‘人正則書正’설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한다. 그런 다음 淸나라에 들어오면서 이에 대한 것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되고 비판되며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宋나라 이래로 주관적인 서정을 중시하면서 개성을 위주로 하는 심미의 사조가 明나라에 들어와 두 가지의 양상으로 크게 발전하였는데 하나는 집중적으로 광초가 추구하는 심미에서 실현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음유의 미를 숭상하는 사조이다. 전자는 露鋒과 方筆 또는 敗筆을 사용하여 획의 모서리가 모두 드러나고 결구도 지리멸렬하면서 포국을 산란하게 하였다. 陳獻章(1428-1500)과 같은 서예가는 심지어 띠를 모아서 붓대신 사용하면서 이를 스스로 ‘茅龍’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특징은 방자하고 미친 듯한 글씨로 개인의 내심에 있는 복잡함과 끓어오르는 격정을 펴내려고 하였는데 이에 가장 특출난 사람이 徐渭(1521-1593)이다. 그들은 특히 形似보다는 생동감 있는 氣韻을 추구하는 것을 창작과 비평의 중요한 조건으로 삼고 있다.36) 이에 반하여 후자는 음유의 미를 숭상하면서 문인 서화를 추구하였던 董其昌(1555-1636)이 그 대표자이다. 董其昌의 미학 추구는 ‘淡’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될 수 있다. 그는 말하길 “글씨를 쓰는 것은 시와 문장과 같이 동일한 관건이 있으니 대저 그것이 후세에 전하고 전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그것은 바로 평담하느냐 아니면 평담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作書與詩文同一關棙, 大抵傳與不傳, 在淡與不淡耳].”37)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한 말하길 “남긴 산과 물은 은거하며 살기에 좋으니 아, 가련한 관직의 몸을 양자강에 흘려보냈네. 간단하면서도 심원하고 높은 사람의 뜻을 누가 알겠는가? 하나하나를 붓 끝을 통하여 서권기를 나타내었네[剩山殘水好卜居, 差憐院體過江餘. 誰知簡遠高人意, 一一毫端百卷書].”38)라고 하면서 문인의 기개와 ‘書卷氣’를 강조하였다.
項穆(生卒未詳)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揚雄의 ‘書, 心畵’설과 孫過庭의 ‘隨其性欲, 便以爲姿.’라는 설을 기초로 하여 개발한 것으로 사람의 성격은 서예 창작의 풍격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또한 ‘論書及人’이라는 설을 독특하게 발전시켜 ‘心相’설을 제출하였다. 項穆은 《書法雅言》에서 말하길 “대개 들으니 덕성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맑음이 넘쳐 얼굴색으로 나타나니 마음에 얻어 손에 응하는 것이니 글씨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인품이 이미 다르니 성정도 각각 달라서 필세가 움직이는 바에 따라 사악하고 바른 것이 스스로 나타난다. 글씨의 마음은 포치를 주장하면서 형상을 생각하여 변화와 재단을 하고 뜻은 붓끝에 있으니 아직 모습이 나타나지는 않은 것이다. 글씨의 모습은 붓을 돌리고 꺾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서면서 위엄과 신채가 나타나는 것이며 붓은 뜻을 따라 펴내는 것이니 이미 마음을 나타나는 것이다[蓋聞德性根心, 睟盎生色, 得心應手, 書亦云然. 人品旣殊, 性情各異, 筆勢所運, 邪正自形. 書之心, 主張布算, 想象化裁, 意在筆端, 未形之相也. 書之相, 旋折進退, 威儀神彩, 筆隨意發, 旣形之心也].”39)라고 하였다. 이는 장차 ‘論書及人’이라는 설을 승화시켜 고도의 새로운 이론에 도달하려는 인식 아래 이것을 근거로 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論書及人’이라는 설을 발전시켜 ‘人正則書正’설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말하길 “유공권이 말하길 마음이 바른 즉 붓이 바르다고 하였는데 나는 지금 말하길 사람이 바른 즉 글씨가 바르다고 하겠다. 마음은 사람에 의하여 통솔되니 마음이 바르면 사람도 바르다. 붓은 글씨에 의하여 채워지니 붓이 바르면 일도 바르다.……예를 들면 桓溫의 사나움, 王敦의 심함, 왕안석의 성급함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제멋대로이고 괴팍한 정서는 붓과 종이의 사이에 저절로 드러난다.……저수량의 굳세고 강함, 안진경의 단정하고 중후함, 유공권의 장엄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서법이 조금 안일하여 높고 표일한 묘미가 적지만 요점은 모두가 충의롭고 정직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그 글씨를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붓을 바르게 하여야 하고 그 붓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柳公權曰, 心正則筆正, 余今曰, 人正則書正. 心爲人之帥, 心正則人正矣. 筆爲書之充, 筆正則事正矣.……弗擧如桓溫之豪悍, 王敦之揚厲, 安石之躁率, 跋扈剛愎之情, 自露于毫褚間也.……至于褚遂良之遒勁, 顔眞卿之端厚, 柳公權之莊嚴, 雖于書法少容夷俊逸之妙, 要皆忠義直亮之人也.……故欲正其書者, 先正其筆, 欲正其筆者, 先正其心].”40)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項穆은 서예를 통하여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고 인품으로 서품을 논하려는 사상을 극도로 발전시켜 ‘人正則書正’이라는 한 마디의 말로 개괄하였다. 따라서 項穆의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방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첫째로 사람의 성격은 서예에서 나타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둘째로 인품으로 서품을 논한다는 것이다.
淸나라는 고대 서예 미학을 종합적으로 총결산하는 시기이며 또한 근대 미학으로 전환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의 문화는 이 시기에 고대 문화의 전적을 정리하고 편찬하여 사람들에게 아주 상세한 문화적인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것의 도움을 받아 고대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는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한 역대의 논의를 종합하는 한편 인품으로만 서품을 논하려는 경향에 대하여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書如其人’이라는 설을 주창한 사람은 바로 劉熙載(1813-1881)이다. 우선 그는 觀物과 觀我의 통일설을 제출하면서 말하길 “글씨를 배우는 사람은 두 가지의 봄이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사물을 보는 觀物이고 두 번째는 자신을 보는 觀我이다. 사물을 보아 뜻을 같이하며 자신을 보아 덕을 통하여야 한다[學書者有二觀, 曰觀物, 曰觀我. 觀物以類情, 觀我以通德].”41)라고 하였으며, 또한 我神과 他神에 대하여 말하길 “글씨는 정신이 들어가야 하는데 정신에는 나의 정신과 다른 정신의 구별이 있다. 다른 정신이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옛것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정신을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옛것이 나로 변화되는 것이다[書貴入神, 而神有我神, 他神之別. 入他神者, 我化爲古也. 入我神者, 古化爲我也].”42)라고 하였다. 그는 여기서 ‘我神’을 중시하면서 개성과 정감을 근본으로 삼고 옛사람의 법으로 자기의 정신을 표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서예의 서정 표현에 대한 근본적 본질을 말하면서 “붓의 성질, 먹의 뜻은 모두 그것을 쓰는 사람의 성정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한즉 성정을 다스리는 것이 서예에서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筆性墨情, 皆以其人之性情爲本. 是則理性情者, 書之首務也].”43)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종합적으로 말하길 “글씨는 같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의 학문과 같고 재주와 같으며 뜻과 같으니, 이것을 종합하여 말하면 바로 그 사람과 같을 따름이다[書, 如也. 如其學, 如其才, 如其志, 總之曰, 如其人而已].”44)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는 ‘書如其人’에 대하여 비교적 전반적인 방면에서 정의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내린 정의와 논술을 보면 비교적 재주와 학문에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서예를 통하여 그 사람의 식견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사람의 학문과 수양이 서예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宋나라 사람이 숭상하였던 ‘書卷氣’의 사상을 총결하여 개괄한 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것을 기초로 하여 그는 또한 여기서 진일보하여 士氣를 제출하면서45) 말하길 “무릇 글씨의 기운은 논할 때 선비다운 기운이 제일이다. 부녀자의 기운, 병사의 기운, 시골의 기운, 저자의 기운, 장인의 기운, 썩은 기운, 천한 기운, 배우의 기운, 세속의 기운, 문객의 기운, 술과 고기의 기운, 푸성귀의 기운 등은 모두 선비가 버리는 것들이다[凡論書氣, 以士氣爲上. 若婦氣, 兵氣, 村氣, 市氣, 匠氣, 腐氣, 傖氣, 俳氣, 江湖氣, 門客氣, 酒肉氣, 蔬笋氣, 皆士之棄也].”46)라고 하였다. 이것은 문인의 심미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한 말이라 하겠다.
이외에 인품과 서품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 馮班(1602-1671)은 서예가 군자의 예술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말하길 “안진경의 글씨는 마치 바른 군자가 관을 쓰고 노리개를 차고 서 있는 것 같아 쳐다보면 위엄이 있지만 다가가면 온아하다[魯公書如正人君子, 冠佩而立, 望之儼然, 卽之也溫].”47)라고 하였다. 또한 朱和羹(生卒未詳)은 과거에 인품으로 서예를 논하는 사상을 개발하여 ‘立品’을 서예 창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고 말하길 “글씨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재주에 불과할 뿐이니 품격을 세우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이다. 품격이 높은 자는 하나의 점과 획이라도 스스로 맑고 강하고 우아하고 바른 기운이 있다. 품격이 낮은 자는 비록 글씨에 변화가 있고 붓을 누르고 꺾는 것이 위엄이 있어 볼 만하나 종횡으로 강폭함이 종이 밖으로 흘러나옴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도덕, 공덕, 문장, 풍모와 절개가 뛰어난 사람은 대대로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지 않고 세상을 논하는 자는 그 사람을 사모하여 더욱 그 사람이 쓴 글씨를 귀중히 여겨 글씨와 사람이 드디어 천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는다[書學不過一技耳, 然立品是第一關頭. 品高者, 一點一畵, 自有淸剛雅正之氣, 品下者, 雖激昻頓挫, 儼然可觀, 而縱橫剛暴, 未免流露楮外. 故以道德, 事功, 文章, 風節著者, 代不乏人, 論世者, 慕其人, 益重其書, 書人遂不朽于千古].”48)라고 하였다.
한편 淸나라 사람들은 글씨로 인품을 논하고 인품으로 글씨를 논하는 이른바 ‘書如其人’에 대한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元나라 때 鄭杓가 “어떤 사람이 말하길 李斯는 간사한 사람이었는데 글씨가 어째서 전해집니까? 이에 군자는 사람됨으로써 그 말을 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或曰, 李斯憸人也, 書奚傳. 曰君子不以人廢言].”49)라는 견해를 제출하여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하여 부정을 하였지만 淸나라에 이르러 더욱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錢泳(1759-1844)은 이에 대하여 말하길 “張丑은 趙孟頫의 글씨가 온화하고 윤택이 나면서도 한가롭고 우아하여 멀리 王羲之에 근접하고 있으나 다만 연미하고 섬세한 부드러움이 지나쳐 커다란 절개와 빼앗기지 않는 기개가 결핍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른 논의가 아니다. 褚遂良의 글씨에 대하여 옛사람은 아름다운 여자가 하도 고와서 비단 옷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비유하였는데 그 충성스러운 말과 바른 논리로 바로 唐나라 일대의 명신이 되었으니, 어찌 구구하게 붓과 먹 사이에서 그 사람의 인품을 정하겠는가[張丑云, 子昻書法, 溫潤閑雅, 遠接右軍, 第過于姸媚纖柔, 殊乏大節不奪之氣, 非正論也. 褚中令書, 昔人比之, 美女嬋娟, 不勝羅綺, 而其忠言讜論, 直爲有唐一代名臣, 豈在區區筆墨間, 以定其人品乎].”50)라고 하였다. 그는 趙孟頫와 褚遂良을 예로 들면서 서예로 인품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吳德旋(1767-1840)은 또한 다른 측면을 들어 이러한 것을 강조하였으니 “명나라 嘉靖(世宗의 연호로 1522-1566) 이후 사대부 글씨에 볼만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속된 글씨를 익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張瑞圖와 王鐸의 인품은 형편없으나 글씨를 씀에 있어서는 북송 시대 대가의 풍모가 있으니 어찌 그 사람으로 글씨를 폐할 수 있겠는가[明自嘉靖以後, 士夫書無不可觀, 以不習俗書故也. 張果亭, 王覺斯人品頹喪, 而作字居然有北宋大家之風, 豈得以其人而廢之].”51)라고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書와 人의 관계에 있어서 도덕이나 인품의 필연적인 관계를 부인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견해는 자못 합당한 이치가 들어 있다. 사실 서예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외형의 형식으로 정감 의식을 표현하는 예술이지 소설․희극․회화와 같이 도덕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성격과 수양이 서예 창작에 영향을 주는 것은 틀림없지만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품행과 서예의 우열과는 반드시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Ⅲ. 結論
지금까지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하여 시대적으로 중요한 서예 이론가들의 문헌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았다. 글씨가 서사적인 기능에서 벗어나 예술적인 면이 대두되면서부터 그것을 쓰는 사람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揚雄은 ‘書, 心畵也’라고 하여 이들의 관계에 대하여 제일 먼저 언급을 하였고, 蔡邕은 이를 발전시켜 ‘書者, 散也’라는 말을 하여 글씨가 사람의 성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뒤를 이어 魏․晉시대의 ‘意在筆先’과 ‘神彩論’ 그리고 唐나라의 張懷瓘, 孫過庭, 韓愈 등에 의하여 書와 人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의 내재적인 정감이 서예의 외형적인 형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사실들은 대부분 書와 人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주관적인 정감의 표현이 바로 서예의 근본적인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宋․元시대에 들어오면서 크게 달라진다. 즉 ‘尙意’의 서풍을 추구하였던 宋나라는 ‘書卷氣’를 강조하면서 인품과 수양으로 글씨를 논하는 이른바 ‘論書及人’으로 발전하였다. 문인주의를 추구하였던 歐陽脩가 ‘尙意’의 서풍을 열어 주었으며 그의 제자인 蘇軾은 ‘書卷氣’를 중시하면서 ‘論書及人’설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論書及人’설은 元나라의 郝經을 거쳐서 ‘心相’설과 ‘人正則筆正’설을 주장한 明나라의 項穆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淸나라의 劉熙載는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하여 서예의 풍격은 작가의 성격과 같고, 서품은 작가의 인품과 같다는 것을 종합하여 처음으로 ‘書如其人’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서예라는 것은 선으로 이루어진 외형으로 정감 의식을 표현하는 예술이지 도덕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무작정 서품으로 인품을 논하고 인품으로 서품을 결정지으려는 ‘書如其人’의 설에 대하여 강한 반발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元나라의 鄭杓와 淸나라의 錢泳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書와 人의 관계에 대한 설이 비록 비판을 받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작가의 인품과 수양을 중시하면서 문인주의 경향이 강한 색채를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지식인들이 서예를 통하여 자신의 정감과 회포를 풀면서 정신적인 안정과 쾌락을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묵향을 가까이 하면서 옛날 선비 정신을 생각하며 잠시의 정신적 쾌락을 즐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서예의 예술성보다는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書와 人의 관계를 제시한 ‘論書及人’이나 ‘書如其人’이라는 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새기면서 오늘날 정신적인 문화를 이끌어 갈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통하여 오늘날 혼탁한 현실에서 우리의 본성과 올바른 길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서예가 가장 적합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논문의 가치라고 하겠다.
參考書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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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譜》, 書譜社
․《現代書法論文選》, 華正書局
․《中國美術全集》, 上海人民美術出版社
․《中國書法全集》, 榮寶齋
․馬宗霍, 《書林藻鑒》, 臺灣商務印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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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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