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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에게, 이렇게 ‘대니’ 라고 불러보는 거 처음이네요.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를 했을 때 당신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어요. 그 목소리도 이제 희미해져요. 3년 전, 당신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솔로몬 반디는 영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실상을 공개했어요. 그는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난 아무 말 없이 용기를 북돋아주었어요. 생각하면, 어떻게 자기네 가족만 살아나올 수 있었을까 죄책감이 들겠지만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이웃들은 이제 잊으라고, 가슴이 아파도 지금 당신의 가족들, 특히 가장 아끼는 아들, 디아를 되찾은 것으로 위안하자고 말이에요. 어쩔 수가 없네요. 용감한 솔로몬은 진술을 잘 해냈고 2003년에는 드디어 킴벌리 프로세스가 체결되었어요. 분쟁지역의 다이아몬드는 유통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지금도 어둠의 다이아몬드가 거래되고 있고 여전히 사람들은 그 투명한 돌덩이에 갈채를 보내요. 결혼의 약속도 그것으로 하고 물질의 힘에 사로잡힌 남녀들이 그걸 갖기 위해 쇼윈도우를 기웃거리죠. 소비자들에게 달려있다는 말은 본질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 같아 무책임하게 들리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말이기도 해요. 우리가 누리고 먹고 입고 즐기는 것들 뒤에는 언제나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얽혀있다는 걸 알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가기만 해도 일단은 좋은 징조에요. 하루에도 몇 잔 씩 마시는 커피에는 터무니없는 이윤(소매가격의 1%정도)에 기계를 빌지 못하고 까다로운 절차로 커피열매를 따고 벗겨야하는 손들이 있고, 월드컵의 축제 뒤에는 한 땀 한 땀 축구공가죽을 깁는 파키스탄 어린 소녀의 부르튼 손이 있었어요. 그리고 혹여라도 하나쯤 끼게 될 다이아몬드 결혼반지에는 시에라리온에서 불법유출되어 인도에서 세척되어 재탄생된 다이아몬드의 씻을 수 없는 피가 스며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 해, 1999년 시에라리온에서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 준 비밀거래수첩으로 난 벨기에 거대회사 반데랍의 사악한 얼굴을 캐내고 어둠에서 거래되는 다이아몬드의 진실을 밝힐 수 있었어요. 그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맞바꾼 피의 다이아몬드였어요. 그들은 풍부한 자원을 가진 땅에 살면서 왜 그리 비참한 생을 이어갈까요. 솔로몬이 누군가의 말을 하듯 유전적 특성은 절대 아니지요. 일부 고위관직의 손에서 놀아나는 부와 군부를 지원하는 강대국들의 음모와 돈놀음으로 그들은 희망을 잃었어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내가 말했듯이 우리 미국인은 죄인이에요. 내가 한 일이 속죄를 대신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미국은 전 세계 다이아몬드 소비량의 3분의 2를 소비하는 나라이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눈독 들이는 화려한 보석에 얼마나 무서운 희생이 묻혀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요. 당신이 처음 만나 나에게 조롱조로 이야기했듯이 내가 한 일이 세상을 구하지는 못할 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끊임없이 세상의 억울한 일들에 관심을 기울여요. 우리에게 우선 중요한 건 관심이에요. 사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욕지기가 나왔어요. 당신은 다이아몬드에 눈이 멀어 아프리카인을 이용해 그것만을 삼키려는 살쾡이로 보였어요. 하지만 당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거친 손, 자유와 평화의 땅에 대한 열망을 알게 된 후 연민이 생겼어요. 그리곤 당신의 손을 잡아보았죠. 그날 밤, 당신이 어릴 때부터 마셨다는 야자수와인은 맛이 지독하던걸요. 그래요, 그곳의 실상을 알린답시고 그들의 슬픔을 이용하고 그들의 무참한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손가락만 까딱거려 노트북이나 두드리고 있었던 내가 당신의 눈에 한심하게 보였을지도 몰라요. 이해해요. 그런 것들로는 슬픈 아프리카의 사람들을 완전히 구해낼 수 없다는 것도요. 그래서 증거가 필요했어요. 진실이 묻혀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제일 치 떨리는 일은 어린 반군들의 모습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어린 소년들에게 잔인성을 심어 넣을 수 있을까요. 정부에 대한 증오와 혁명군으로서의 자부심을 이용하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약까지 투여하며 소년병을 양성하는 모습. 짐승은 결코 하지 않는 짓이에요. 어린병사들의 유용성을 알고 어린 영혼을 짓밟는, 무참한 짓을 자행하다니요. 솔로몬이 목숨 걸고 구하여 탈출한 아들, 디아는 반군 경험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정말 가슴 아프게도 그렇지 못한 어린반군들이 아프리카엔 아주 많은데 디아는 얼마나 다행이며, 대견한지요. 가족의 도움이 커요. 솔로몬이 생명과도 맞바꾼 다이아몬드는 아들을 구하기 위한 피눈물 나는 대가였지요. 하지만 아직도 아프리카엔 2백 명 정도의 소년병들이 있다고 해요. 디아는 어린 반군동료들을 기억에서 영영 지울 수 있을까요. 대니, 당신은 분명 솔로몬이 묻어둔 새알 크기 만한 핑크 다이아몬드를 탐냈어요. 솔로몬을 이용해 그걸 손에 넣고 날라버릴 생각이었을 거에요. 당신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그들의 죽음 따윈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당신을 저주하면서도 진실을 알리기 위해 나 또한 당신을 이용했어요. 당신은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그 광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자신분의 나를 이용했고요. 그래요, 우린 서로를 이용했어요. 솔로몬도 아들 디아를 구하기 위해 우리에게 곁을 둘 수밖에 없었지요.
당신이 그렇게 마음이 바뀐 건 얼른 이해되지 않아요. 당신이 함께 탈출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총상이 무척 심했나요? 도저히 비행기가 오기로 한 산정상으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이 솔로몬에게 100캐럿 정도의 다이아몬드를 건네주며 디아를 데리고 떠나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무엇을 생각했나요? 디아를 보며 어린 당신을 떠올렸는지요. 저 아이만이라도 당신의 꿈을 대신하여 저주스러운 땅을 벗어날 수 있게 하고 싶었는지요. 당신이 한 그 행동 하나로 당신의 모든 죄악들이 씻겨나갈 수 있을런지요. 그렇게라도 속죄하고 싶었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겠어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대개 거창한 명분보다 인간적인 온정이에요. 어쩌면 순간적으로 영웅적인 감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을 테죠. 전에도 말했듯이 미국은 영웅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내 생각은 변함 없어요. 당신을 비아냥거리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당신에게 냉혈한이라고 한 말은 없었던 걸로 할게요. 사람은 체온을 지니니까요. 하지만 ‘여긴 아프리카다(TIA)’라고 당신을 세뇌하던 대위의 말뜻은 무엇인지 모르겠네요. 아프리카에서의 생존법칙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던가요. 아프리카는 지구상의 대륙이 아닌 별개의 세상인가요. 36.5도의 사람이 국가나 민족이란 이름으로 뭉치면 체온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걸까요. 지금도 뜨거운 땅의 아름다운 풍경들, 해가 지며 벌겋게 타오르는 하늘과 무한대 지평선의 조우, 생태보호를 받아야하는 진귀한 식물들로 무성한 적도의 숲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죄스러워요.
당신의 고단한 삶은 그렇게 끝이 났어요. 이제는 욕망도 희망도 다 버리고 편안해졌나요. 우리의 희망과 잔잔한 일상을 지켜주지는 못하면서 파괴하기는 쉬운 건 또 무엇이던가요. 거대한 탐욕! 세상을 조종하고 있는 거대한 탐욕의 아가리! 아프리카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의 안락함 뒤에는 숨어있는 희생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아요. 그럼에도 우리들 소소한 탐욕은 다 어떡하나요. 그것들이 뭉쳐져 거대한 괴물을 낳는다는 걸 알아야 해요. 결국 당신은, 크고 작은, 탐욕의 상징이에요. 얼마 후면 난 또 다시 총탄이 빗발치는 어느 곳에서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닐 거에요. 세상이 조금이나마 달라져가고 있나요? 어떤가요? 철저한 속물, 당신이 보기에.. 대니, 내가 전화번호를 적어준 남자는 당신이 처음이란 거, 잊지 않았겠지요.
목소리가 듣고 싶은 매디가... ------------- - 매디 보웬 역을 멋지게 소화한 제니퍼 코넬리는 국제 앰네스티 인권교육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적이며 날카로운 눈매가 강렬했다. Once Upon A Time 의 그 춤추던 소녀였을 때의 예쁘장한 얼굴은 사라지고 강인하고 의지에 찬 종군기자의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 로미오 역을 할 때와 타이타닉에서의 미소년은 사라지고 얼굴이 퉁퉁해졌고 몸에도 살이 좀 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퇴역용병, 대니 아처 역으로 실감나는 액션을 보여주었다. 영화 상영 내내 어느 장면에서도 한 번도 눈을 뗄 수가 없었고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보았다. 스피디한 전개와 리얼한 묘사, 솔로몬 역을 한 아프리카 배우의 연기도 인상 깊었다. 자기 키만한 총을 든 어린반군들의 모습과 디아가 아버지를 못 알아보고 총을 겨누는 장면, 솔로몬과 디아가 뜨거운 눈물로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서서히 마음을 여는 장면, 어마어마한 난민촌의 모습 등이 가장 가슴 저린다. 극장을 나오는 순간, 여전한 일상의 생활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해도 이 영화는 실상과 진실을 알린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솔로몬 가족만 지옥에서 탈출하게 되는 결말은 영화의 특성상 상징적인 의미로 보아야 할 듯. 영화든 소설이든 세상을 재현해내는 방식으로 그 축소모형을 선택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관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작은 것은 많은 것을 말하고 부분은 전부에 근접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시에라리온의 모든 국민들을 다 구해낸다는 결말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일 것이다. 다른 대안을 영화에서나마 보여줬더라면 바람직했겠지만 문제를 알리고 제시한 것으로도 영화적 소임은 한 것으로 보인다. 비통한 장면들 앞에 경악하며 아뜩하기만 했다. - 그래도 목에 탁 걸리는 부분이 몇 있다. 대니가 반군대장을 만나 신무기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다이아몬드를 받으러 찾아가는데 입구에서 람보라는 이름의 반군이 막자, 나도 그 영화 잘 봤어, 라고 이죽거린다. 미국식 영웅을 멋대로 만들어낸 대표격 이름 람보를 반군의 한 이름으로 넣다니... 그리고 솔로몬 반디와 대니 아처가 비를 피해 잠시 앉아있을 때 솔로몬은 자신들의 땅과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생각을 남들의 이야기를 빌어 잠시 옮긴다.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느니, 그런 식이다. 물론 어부출신의 그에게서 비판적으로 날카로운 생각의 말들이 나온다면 좀 어색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런 식의 대사를 슬쩍 집어넣은 감독의 의도는 못마땅한 부분이다. 그리고 반군들의 광기어린 잔인성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정부군은 단지 이들을 진압하는 식으로만 그리는 액션장면도 그렇다. 액션장면 자체만으로는 너무나 실감나고 긴박감 있다. 실제로 시가지 촬영 장면에서는 전쟁 후유증으로 상처를 안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사전홍보를 충분히 하고 실제상황이 아니라 영화촬영이라고 알린 후 실행했다고 한다. 이런 뒷얘기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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