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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역사이야기) 시전과 장시
송기호 Ki-Ho Song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2000년대 들어와 종로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조선시대의 유적이 속속 드러났다. 특히 종로 1가 청진동 일대, 탑골 공원 옆, 종묘 광장 부근에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상점들인 시전(市廛)의 행랑과 그 뒷골목인 피맛골이 발굴되어 주목을 받았다.
제일 먼저 발굴된 청진6지구 시전 건물지를 보면,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상점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사진에는 두 개의 시전이 드러나 있는데(그림 1), 동쪽 시전을 예로 들면 정면 2칸, 측면 1.5칸으로 동서 너비 7.76m, 남북 길이 약 5.16m 정도이고,약 12.1평 크기이다.
2칸 공간은 각각 반씩 나누어 온돌방과 마루, 온돌방과 창고를 만들었다. 주인은 온돌방에 기거하면서 마루에 진열한 물건을 팔았고, 나머지 물건은 창고에 쌓아 두었을 것이다. 피맛골 쪽으로 나와 있는 반칸 공간은 부엌 등으로 사용하였다.
갓 전차가 다닐 무렵의 사진에서 종로 거리에 시전이 늘어선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종루 부근의 사진인데, 가운데의 종로 거리 오른편에 줄지어 서 있는 건물이 시전이고, 그 뒤의 좁은 골목이 피맛골이다(그림 2). 기와집 한 채가 바로 시전의 한 단위를 이룬다.
과거에는 건물 자리에 흙을 덮고 다시 그 위에 집을 다시 지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층층이 유적이 발굴되었다. 맨 아래 조선 건국기에 형성된 제6층에서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맨 위 제1층까지 있는데, 위의 유적은 제5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사용된 조선 전기 건물지에 해당한다. 탑골 공원 옆인 종로 2가 40번지에서 발굴된 시전 유적은 그대로 살려서 그 위에 건물을 지었고, 그 유적에 만든 육의전박물관이 2012년에 개관하여 화제가 되었다.
시전은 수도를 중심으로 개설된 상설시장이다. 이미 신라 때인 6, 7세기에 동시, 서시, 남시를 설치했다고 하지만, 시전이란 명칭은 고려 때부터 등장한다. 희종 4년(1208) 개성에 개축된 큰 시장은 남대문이 있는 네거리 즉 십자가에서 북쪽으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길 좌우에 기다란 행랑으로 되어 있었다.
조선 건국 후에 도시 설계의 기본인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만들었고, 전조후시(前朝後市)의 원칙에 따라 앞에 조정, 뒤에 시장을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북쪽이 협소하여 시장을 앞에 내세우게 되었다. 중국은 평지라서 전조후시가 가능하지만, 산자락에 궁궐을 앉히는 우리로서는 궁궐뒤에 시장이 들어갈 공간은 애초부터 확보하기 어려웠다.
그림 1. 시전 건물지
그림 2. 종로 거리의 시전
조선 초기에는 운종가(종로)에서 사람들이 서로 뒤섞여 장사를하다가 급기야 개경처럼 일정한 구역을 정하였다. 태종 13년(1413) 5월에 완성된 장행랑은 종루를 중심으로 동서로 경복궁에서 종묘 앞까지, 남쪽으로 남대문까지 뻗어 있었다.
군인이나 승려 등 2,641명을 동원하여 지은 1,360칸에 달하는 기다란 행랑이었다. 이듬해에는 동대문까지 확장했다.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그림 3) 간선도로 양쪽으로 T자형을 이루며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런 식으로 시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국가에서 이런 행랑을 지어 상인들에게 점포를 임대해주고 세금을 받는 관설시장이 바로 시전이었다.
종로의 시전은 세종 때만 해도 땅바닥에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수준이었고, 간판도 제대로 달려 있지 않았다.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박서생의 건의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상가의 제도는 이러합니다. 시장 상인들이 각기 처마 아래에다 널빤지로 층층의 진열대를 만들어 물건들을 그 위에 두니, 먼지가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보고 살 수 있었습니다. 또 시장의 음식물을 귀천의 구별 없이 모두 사먹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장은 물고기나 고기 등의 음식물을 습하건 마르건 간에 모두 흙바닥에 두고는 그 위에 앉기도 하고 밟기도 합니다.
비옵건대 운종가 좌우의 행랑으로부터 동쪽의 누문(樓門,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종루 남쪽으로부터 광통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처마를 덧달아 내서 그 아래에층층의 진열대를 만들고, 어느 집은 무슨 물건을 파는 곳이라고 죽 간판을 달아 놓아서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소서. (세종실록 11년<1429> 12월 3일)
하지만 근대 시기에 와서는 상점에 깃발을 내걸었던 실물이 전해진다. 저포전에 걸었던 깃발로서 위에는 걸 수 있도록 끈 다섯 개가 달려 있는데(그림 4), 1927년 유길준 등에 의해서 해외로 나간 것이라 한다. 시전은 서울 주민의 일상용품도 공급하였지만, 관청이나 궁궐, 지배층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 숫자는 17세기 전반에 30여 개였던 것이 18세기 말이 되면 120여 개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물건 하나에 가게 하나가 원칙이었던 것이 흐트러져 여러 가게에서 같은 물건을 파는 일물다전(一物多廛)으로 변하게 된다. 또 초기에는 서로 비슷한 규모였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우열이 생겨서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의무를 지는 큰 상점과 그런 의무를 갖지 않는 영세 상점으로 분화되었다.
그런 큰 상점을 대표하는 것이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육주비전 즉 육의전(六矣廛)이다. 여기에는 중국 비단을 파는 선전(線廛), 무명을 파는 면포전(綿布廛), 국내 비단을 파는 면주전(綿紬廛),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 모시와 삼베를 파는 저포전(紵布廛), 어물을 파는 어물전(魚物廛)이 있었다. 하지만 꼭 6개는 아니었고 시기에 따라 수가 늘어나기도 하였다(그림 5).
시전이 국가에 등록된 어용상점이라 한다면, 그 경계 밖에서 활동하는 무허가 상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법을 어지럽힌 상점이라 하여 난전(亂廛)이라 한다. 지금도 풍물 시장 같은 곳에 몰려든 상인들을 난전이라 부른다. 종로에 모여들던 난전의 모습은 한성부의 건의에서 볼 수 있다.
그림 3. 운전가의 시전 행랑(한양도, 1770)
그림 4. 저포전 깃발
근래에 국가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이 법을 많이 어기고있습니다. 시장의 전(廛, 점포)은 이미 정해진 곳이 있어서 어지럽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무뢰배들이 서로 모여 무리를이루면서 종루의 옛 터에 둘러 서 있는 자가 무려 1백여 명이나 됩니다.
담비가죽, 비단, 명주 및 각종 물품을 궤짝 속에 넣어서 행랑이나 집에 숨겨두고, 무명은 공공연히 주춧돌 위에 진열해 두고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억지로 사게 합니다. 또 재상이나 고위 관리가 지나가더라도 서서 흘겨보며 조금도 피하려는 뜻이 없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근래에 국가의 경비가 부족하여 불시에 쓸 일이 생기면 모두 시전 사람들에게서 거두어 마련하고 있으니, 시전 사람들의 고생이 지금 같은 때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자들은 시전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할 역(役)은 피하려 들면서 이익은 모조리 차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법을 어지럽히는 백성입니다.
어둠을 틈타 맘대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가로막고 재물을 빼앗는 자들이 아마도 이들일 것입니다. 비록 우리 부에서 여러 차례 금지시켰으나 예사롭게 매나 때리는 형벌만 내렸으니, 어찌 완악한 백성들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그들의 우두머리 몇 명을 적발하여 법을 어지럽힌 죄로 논하여 중한 쪽으로 죄를 주소서. 그리고평시서(平市署)의 관리 역시 이전처럼 그들을 방임하여 금지시키지 못하면 모두 파직시키소서(광해군일기 9년<1617> 4월 3일).
임진왜란 직후라서 종루도 터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전쟁 중인 선조 26년(1593) 11월에는 시전도 거의 폐허화되어 종루 한 곳에 모여 술, 떡, 생선, 채소를 파는 정도라고 지적했다. 평시서는 조선시대에 시장을 감독하던 관청으로서, 여기서도 난전을 금하였다. 이를 기화로 평시서의 아전들도 이 권한을 남용하였으니, 의정부에서 연산군에 아뢴 말이다.
또 평시서에서 난전을 금하는 이속을 내보내는데, 많이 잡아 바치는 사람에게 상을 주므로 난전을 금하는이속들이 모두 많이 잡는 것을 일로 삼고 있습니다. 가령 무명을 주단 가게보다 많이 가진 사람이 있으면 이속들이 금지법을 어겼다고 잡아 바치고, 평시서 관원들도 일체 형장을 치겠다고 공갈하며 위협합니다. 그 사람이 매 맞을까 겁내어 무명 2, 3필을 속바치기를 자청한 뒤에야 풀려나오니, 지극히 원통하고 억울한 일입니다. 이제부터 법을 범한 사람은 담당자가 사실을 조사하여 죄를 정하게 하소서(연산군일기 6년<1500> 3월 1일).
시전은 국가에 물품을 대는 부담 즉 국역(國役)을 졌다. 갑자기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해당 관청에서는 호조에 이를 요청하고, 호조는 시전에 조달시켰으니, 이를 공무(公貿)라 하였다. 시전은 이런 의무의 대가로서 17세기 무렵부터 난전을 단속하고 물품까지 압수할 수 있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 받았다. 난전을 금하는 권한 즉 금난전권(禁亂廛權)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권한을 남용하게 된다.
그림 5. 종로에 늘어선 시전들(수선총도)
이보다 앞서 서울에서는 시장 사람들을 위해 난전을 금하는 법을 세우고 물건을 몰수하는 법규도 시행하고 있었으므로, 시골 장사꾼들이 물건을 싣고 서울을 경유하는 경우에 한성부 종들이 이를 빙자하여 빼앗았다. 이때에 이르러 우윤 조명익이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난전을 벌이다 적발되었을 경우에는 마땅히 징치하는 데에 그쳐야 하니, 물건을 몰수하지 말게 하라”하였다(영조실록 12년<1736> 12월 7일).
강가의 거래에서도 시전의 횡포가 보인다. 한성부가 아뢴 말이다.
어선이나 상선이 경강(京江)에 와서 정박하면 내어물전과 외어물전 사람들이 염가로 강제 매입하고, 조금이라도 가격을 논하게 되면 난전하려는 것이라 하면서 협박합니다(영조실록 5년<1729> 9월 19일).
여기서 경강은 서울 부근의 한강변으로서 조선 후기에 상업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여기서 활동하던 상인을 경강상인이라 한다.
단속에도 불구하고 난전은 점차 증가하였다. 이들은 시전을 피해서 남대문 밖에 칠패시장(그림 6)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시전 지역으로 들어가 동대문 가까이 배오개 즉 이현(梨峴)시장을 이루어, 종로의 시전과 함께 3대 시장이 되었다. 다음은 이옥(1760~1815)의 글이다.
한성에 큰 시장 셋이 있으니, 동쪽에 배오개, 서쪽에 소의문, 중앙에 운종가다. 모두 좌우 양편으로 상점이 하늘의 별처럼 벌여 있다. 온갖 장인이며 장사치들이 저마다 가진 물건들을 내놓으니, 사방에서 화물이 구름처럼 몰리고 물처럼 흘러 든다. 백성들은 관대(冠帶)와 옷, 신, 음식물을 여기서 얻는다(『이옥전집』시간기市奸記).
칠패는 어영청의 일곱 번째 순찰구역을 의미하는데, 남대문에서 염천교를 지나 서소문(소의문)에 이르는 곳으로 여기에 난전이 모여든 것이다. 이 시장은 근대에 남대문 부근으로 옮겨서 남대문시장이 되었다. 배오개는 종로4가 부근에 있던 고개로서, 그 일대에 형성되었던 배오개시장은 1905년 최초의 사설 상설시장인 동대문시장이 되었다가 1960년대에는 두 개로 나뉘어 지금 광장시장, 동대문시장이 되었다.
광장은 원래 광교와 장교 사이를 복개하여 만들려고 해서 그 첫머리를 따서 지은 명칭이라 한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이 전통 시장에 기반을 두어 지금도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면, 백화점 등이 들어서 있는 명동 일대는 과거 일본인 상가가 밀집해 있던 곳이었다.
주단이나 종이, 삼베 등을 파는 큰 점포는 종로에 있어 궁궐, 관청, 사대부들이 주로 이용하였기에 낮에 거래한 반면에, 칠패시장과 배오개시장은 서민들이 주로 새벽에 이용하였다. 또 칠패시장은 어물이 많이 유통된 반면에, 배오개 시장은 근교에서 재배된 채소들이 거래되었다.
이렇게 난전이 확산되고 시전은 단속권을 빙자하여 횡포를 부리자, 결국 정조 15년(1791)에 와서 일부 시전을 제외하고는 그 권한을 폐지시켜버렸다.
내가 어렸을 때는 물건 파는 곳을 점방, 전방이라 불렀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물건을 늘어놓고 방에 앉아 팔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방은 시전과 점방을 합쳐 만든 말이다. 가게라고도 했으니, 이는 임시 건물을 의미하는 가가(假家)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 6. 1900년 초 남대문 밖 칠패시장
1880년에 찍은 남대문로를 보면(그림7) 길 양쪽으로 기와집 앞에 초가 건물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장사를 하기 위해서 임시로 지어놓은 가건물이다. 가게의 폐단에 대해서 박제가(1750~1805)는 이렇게 지적했다.
또 여염의 백성들이 점포를 열어 장사하면서‘가가’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처마 밑에 달아낸 갈대집에 불과하여 집 안으로 옮겨 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흙을 바르고 축대를 쌓아 드디어는 길을 차지하고 문 앞에 나무를 심기까지 한다. 이리하여 말 탄 사람이 서로 마주치면 길이 좁아 통행할 수 없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대개 큰 길이건 작은 길이건 모두 너비가 몇 걸음인가 하는 규격이 있고, 형률에도 도로를 점유하여 가옥을 짓는 것을 벌하는 조문이 있으니, 마땅히 이 법으로 타일러서 단속해야 할 것이다(『북학의』내편, 도로).
이런 가건물은 왕이 행차하는 등의 국가 행사가 있게 되면 철거했다가 다시 설치하곤 했다.
나침반의 네 방위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는 꽤 넓지만 노점과 주막이 도로 공간을 많이 잠식함으로써 도로 폭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임금이 궐 밖으로 행차할 때면 소유주들은 그 구조물을 치워야 한다(캐번디시책, 79~80쪽).
한편, 박제가는 상업이 발달했다고 하는 서울이지만 실은 중국의 지방만도 못하다고도 비판했다.
연경(燕京, 북경)에는 아홉 개의 문 안팎으로 수십 리에 걸쳐서, 관청 건물 앞이나 아주 작은 골을 제외하고는, 길 양편이 모두 시전을 이룬다. 시골 상점도 역시 그러하여 마치 옷 가장자리에 띠를 두른 듯 늘어서 있다. 상점마다 상호나 상품을 적어놓은 간판이 가로로 걸리고 세로로 세워 놓아 금빛 글자들이 빛을 발한다. ...지금 종각 네거리에는 죽 이어진 시전 행랑이 1리도 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내가 지나간 시골의 상점도 모두 몇 리를 뒤덮었다. 또 수송되는 화물의 번성함과 파는 품목의 다양함은 우리나라 전역을 합쳐도 미치지 못한다(『북학의』내편, 시정市井).
18세기 청나라 남방의 도시인 소주(蘇州)의 번화한 거리를 그린‘고소번화도(姑蘇繁華圖)’에서는 간판이 달린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그림 8). 그림 오른쪽의 건물 측벽에는 야간 통행금지, 불조심 등이 쓰인 벽보도 보인다.
서울이 이러한데 지방은 사정이 더 열악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대도시가 출현하여 농촌의 지주도 이곳에 머물렀으니, 이들에게농촌 생산물을 조달하는 시장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도시가 발달하지 않고 농민이나 지주나 모두 농촌에서 생활하며 자급자족하는 체제였다. 그러기에 유수원(1694~1755)의 시기에만 해도 지방에는 상설 점포가 거의 없었다.
그림 7. 남대문로의 가게들(1880년)
그림 8. 고소번화도의 한 부분
우리나라 상인들은 장사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장사하는 이치를 모른다. 무릇 장사하는 도리는 앉아서 파는 상인의 점포가 있은 뒤에야 돌아다니는 행상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 지방에는 점포가 전혀 없으니, 장사가 어찌 번창할 수 있겠는가? (『우서』총론사민總論四民)
윤국형(尹國馨, 1543~1611)이 전하는 임진왜란 때의 지방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에는 방방곡곡에 모두 점포가 있어 술과 음식, 수레와 말 등의 물품이 완비되어 있다. 비록 천리 먼 길을 가는 사람이라도 은자(銀子, 은돈) 한 주머니만 차고 있으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그 제도가 매우 편리하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모두 가난하여, 시장의 상인이나 행상 이외에는 사고파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오직 농사 지어 살아갈 뿐이다. 호남과 영남의 대로에 주점이 있기는 하지만, 행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술과 꼴, 땔나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길 떠나는 사람은 반드시 여행 물품을 실어 가는데, 멀리 가는 사람은 말 두서너 필에 실어가고, 가까워도 두 필 아래로 되지 않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다.
양경리(楊經理, 임진왜란 때 온 명나라 장수인 양호楊鎬)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중국을 모방하여 길가에 모두점포를 설치하고 그 지역 주민으로 하여금 물건을 조달하도록 했으니, 그 뜻이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습속이란고치기 어렵고 재력도 미치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았다.
수령들이 처벌을 면하기 위하여 중국장수가 지나갈 때면 관청에서 물건을 준비하여 길 왼편에 늘어놓고 거래하는 시늉을 하다가 지나간 다음에는 거두어버리니, 도리어 아이들 장난만도 못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비웃음만 샀으니, 한탄스런 일이다(『갑진만록』).
18세기 중반 이후에 지방에도 상설시장이 일부 열렸지만, 지방시장은 뭐니 해도 장시(場市)가 대표적이었다(그림 9). 장시는 시전과 같은 상설시장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마다 여는 정기시장이었다. 이런 정기시장은 성종 1년(1470) 흉년이 들었을 때에 전라도의 백성들이 서로 모여 시장을 열고 이를 장문(場門)이라 한 데서 처음 보인다. 이때 조정에서는 전에 없던 일인 데다 백성들이 본업을 버리고 이익만을 좇는다고 하여 금지시켰다. 전라도 관찰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도내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자기 고을 길거리에서 ‘장문’이라 일컬으면서 매월 두 차례씩 모여듭니다. 비록 있는 것으로 없는 것과 바꾼다고 하지만, 이것은 본업을 버리고 말업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 물가가 올라이익은 적고 해가 많습니다. 이리하여 이미 모든 고을로 하여금 금지시켰습니다(성종실록 3년<1472> 7월27일).
그러나 중종 때가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 시장 아닌 곳이 없어서 물가가 치솟는다는 지적이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금지령을 무색하게 한다. 명종 때에는 삼정승의 공동 건의를 받아들여 장시 개설을 허가했는데, 이때는 시장 개설 날짜를 정하여 일시에 장이 서게 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림 9. 평양의 시장
장시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오래 전부터 시도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빈민으로 의복을 팔아 연명하는 자가 자못 많습니다. 다만 시장을 여는 날짜가 다른 경우가 있어서 서로 옮겨 다니며 팔게 되니, 이 때문에 도적이 성행합니다. 만일 한 달에 두 번 내지 세 번씩 서는 것을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일시에 열게 한다면 그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명종실록 1년<1546> 2월 23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장시가 더욱 성행하여 사헌부가 이렇게 건의하였다.
난리 이후에 백성들이 정처 없이 장사로 생업을 삼는 것이 마침내 풍속을 이루어, 본업인 농사에 힘쓰는 사람은 적고 말업인 장사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니,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긴 지 오래됩니다. 흉년에는 으레 도적이 많으니 이 폐단 또한 미리 유념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고을마다 장시가 서는 곳이 적어도 3 4곳 이상입니다. 오늘은 이곳에 서고 내일은 이웃 고을에 서고 그 다음날에는 다른 고을에 서니, 한 달 30일 동안 장이 서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이로 인해 간사함이 성행하고 부정한 이익을 꾀하는 것이 날로 심해지니, 아주 염려스럽습니다.
해당 관청이 사목(事目, 규칙)을 마련해 내려 보내서 큰 고을은 두 곳, 작은 고을은 한 곳에서 한 달에 세 번 모두 같은 날 시장을 여는 것 이외에는 일체 금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키소서(선조실록 40년<1607> 6월 24일).
시간이 흘러 18세기 말이 되면 장시가 전국에 1천 곳에 이를 정도로 확산되었다. 또 장은 교통의 요지에 하루걸이인 30~40리의 거리를 두고 섰으며, 윗글에서 보듯이 처음에 10일이나 15일에 한 번씩 열리다가 17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5일장으로 정착되었다.
2일과 7일마다 서는 2, 7장을 중심지로 삼고, 그 주변에 1, 6장, 3, 8장, 4, 9장, 5, 10장이 포진하는 형식이니, 실제로는 일정한 권역 안에 상설시장이 있었던 셈이다. 이 가운데는 대구의 약령시, 안성의 유기시 처럼 점차 특정 품목을 거래하며 전국적인 유통망을 형성하는 전문 시장으로 발전해갔다.
장시는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디에나 상설시장이 있는가 하면 정기시장이 있게 마련이다. 16~17세기에 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대여섯 군데의 예외적인 시골 마을을 제외하고는 잉글랜드에 760군데, 웨일스에 50군데로 도합 800여 군데에서 정기시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중 300개 정도는 전문 시장에 해당하였다.또 인구로 따지면 6,7천 명에 시장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말 바이에른에서도 역시 7,300명에 시장 하나꼴이었다고 한다. 장이 설 때에는 한참 떠들썩하다가도 파장 후 다음 장까지는 ‘잠자는 숲속 미녀’가 사는 침묵의 궁전이 되어버렸다. 정기시는 소음, 소란, 노랫소리, 민중의 오락은 물론 뒤집혀진 세상, 무질서, 때로는 대소동을 의미했다.
우리도 장마당 하면 떠들썩한 모습을 우선 연상한다. 지금도 시골 장터에 가면 사람을 만나 떠드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 뻥튀기 장수나 가위질 소리 요란한 엿장수,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와 뱀장수가 있어야 제 맛이 나는 곳이다.
장시의 주인은 농민이었다. 농민은 논밭에서 거둔 것을 들고 나가 팔았고, 그것으로 필요한 물품을 사왔다. 읍내에 ‘가는 날이 장날’이란 속담처럼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남이 장 간다고 거름 지고 나선다’, ‘남이 장에 가니 저도 덩달아 장에 간다’, ‘남이 장에 간다니까 씨오쟁이 떼어 지고 간다’ 등의 속담처럼 덩달아 가는 곳이기도 하다.
씨오쟁이는 씨앗을 담아두는 바구니이니, 가져갈 것이 아닌 것을 들고 나선다는 뜻이다. 그곳에서 할 일을 다 하면 ‘볼 장 다 보다’가 된다. 내가 어렸을 적에 보니 큰집 마을 여인들은 돈이 되는 것이면 오이, 가지, 참외, 하다못해 호박잎이나 고구마 줄거리라도 따서 머리에 이고 대전 시장에 나가 팔았다. 그러기에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속 편한 처지를 빗대어 ‘여자는 제 고을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는 말도 생겨났다.
농민 외에도 장시를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행상도 있었다. 장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장돌뱅이라 하였다. 물론 집집마다 고을마다 돌아다니며 파는 방물장수도 있었다. 상설시장이 발달하면 행상은 자연히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지금도 시골에는 트럭을 몰고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는 장사가 그 틈을 메우고 있다.
유럽에서 정기시를 돌아다니며 활동한 행상(colporteur)은 ‘뒷목에 얹어 운반하는’상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은 경제적으로 후진상태에 있는 곳의 교환을 담당하였다. 비록 비천한 상인에 불과했지만 한편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선구자이기도 하였고, 시골 지역에 민중문학이나 책력 등을 보급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행상의 역사는 고대로까지 올라간다. 고구려 미천왕(300~331)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압록강에서 소금 장사를 하며 돌아다녔다.
그는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을 팔았다.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소금을 내린 다음에 강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청하므로 한 말쯤 주었고 다시 청하자 이제는 주지 않았더니, 그 노파는 원망하고 화를 내며 소금 속에 신을 몰래 넣어 두었다. 을불은 알지 못하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는데, 노파가 쫓아와 신을 찾아낸 다음 신을 숨겼다고 꾸며 압록재(鴨宰, 관리)에게 고소하였다. 압록재는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매를 때린 다음 놓아주었다(『삼국사기』고구려 미천왕).
중국에서는 소금과 철 등을 국가에서 독점하여 국가 재정의 기반으로 삼았지만, 특이하게도 우리나라는 소금을 국가에서 전매한 적이 없다. 어렸을 적에만 해도 소금 장수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됫박으로 팔았던 기억이 있다. 백제시대에 지어져 고려시대에 변용된 것으로 전해지는 ‘정읍사’도 행상을 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의 무사를 달에게 비는 간절함이 배어 있다. 후렴을 빼고 뜻이 있는 부분만 현대어로 번역한 것이다.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
시장에 가 계신가요
진 곳을 디딜세라
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
행상에는 말짐장수(馬販子)도 있고 등짐장수(背負商)도 있고 봇짐장수(褓商)도 있었다. 점차 행상이 모여서 조직을 형성하기도 했으니, 조선후기에 등장한 보부상 또는 부보상이 그것이다. 남자들은 주로 지게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며 팔았으니 이를 부상이라 하고(그림 10), 여성은 주로 머리에 봇짐을 이고 다니며 팔았으니 이를 보상이라 한다.
이들은 원래 각각 다른 조직이었지만 19세기 말에 하나로 합쳐져 보부상이 되었다. 이들 조직은 결속력이 대단하였고, 규율도 엄하기로 유명하였다. 잘못을 저지른 조직원은 멍석말이 등으로 직접 처벌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폐단도 일어났다. 고종 때 지석영의 상소문이다.
그림 10. 행상 부부(김준근)
옛날의 부상은 전적으로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늘날의 부상은 전적으로 패거리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고을의 교활한 부류와 마을의 큰 괴수들이 장(長)이니 원(員)이니 하면서, 그 고을의 수령은 안중에 두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송사를 처리하고 그들이 스스로 맹주가 됩니다.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고개를 움츠리고, 나그네와 행인들은 만나면 반드시 다리를 떱니다. 결국에 가서는 제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니, 그리하면 일이 크게 벌어져 처리하기 곤란해질 우려가 있습니다(고종실록 24년<1887> 3월 29일).
이들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나라를 위해 활약했지만, 근대화시기에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동학농민전쟁에서는 농민군 토벌에 동원되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들어와 말살 정책에 따라 소멸되었으니, 지금은 충남 예산의 보부상 유품 전시관이나 홍성의 홍주성 역사관 등에서 그 잔영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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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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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4. 저포전깃발;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2002, 81쪽
그림5. 종로에늘어선시전들(수선총도) ; 이찬,『 한국의고지도』범우사, 1991, 202~203쪽
그림6. 남대문밖칠패시장;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서양인이본근대전환기의한국·한국인2012, 68쪽
그림7. 남대문로의가게들; 최석로해설,『 민족의사진첩』I, 서문당, 1994, 46쪽
그림8. 고소번화도의한부분; 楊東勝주편,『 姑蘇繁華圖』中國書店, 2009
그림9. 평양의시장; 조풍연해설,『 사진으로보는조선시대』서문당, 1986, 13쪽
그림10. 행상부부; 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 기산김준근조선풍속도-스왈른수집본-』2008, 2
[네이버 블로그, 거머리 보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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