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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적 교회, 문명이 잃어버린 마지막 희망
입력:2026-03-26 03:26
[빌리온 소울 하비스트 운동]
몰타 섬에 세워진 바울의 성상 모습으로 사도행전 28장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던 중
배가 난파돼 상륙한 지점에 건립됐다. 황성주 이사장 제공
사흘 전 필자는 문명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말라위 릴롱궤 근교,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 지역이었다.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자리였다. 하루 한 끼가 보장되지 않는 땅이었다. 전기는 불안정했고 물은 부족했으며 삶은 항상 흔들리고 있었다. 그곳은 희망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최근 두 달간 두 배로 급성장한 말라위 릴롱궤의 목장교회에서 한 팀이 찬송을 부르는 모습. 황성주 이사장 제공
그런데 그 중심에 교회 하나가 있었고 그날 그곳에서는 찬송이 울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먼저 뛰어나왔다. 청소년들이 신나는 율동으로 뒤따랐고 부녀들이 몸을 흔들며 두 손을 들었다. 찬송가 경연대회가 끝나고 280여명이 모여 노래하고 춤추고 온몸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상하리만큼 깊은 기쁨이 있었다. 찬양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절망이 물러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생명의 기운이 살아났다. 나는 황홀경에 빠져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말라위 한 귀퉁이에서 일어난 영적 대반전의 사건이었다.
릴롱궤 목장교회의 찬송경연대회 현장으로 7개팀이 참여했다. 황성주 이사장 제공
사실상 교회 공동체의 원형은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사도적 교회였다.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출현한 적 없는 이 독특한 공동체의 역동성이 로마제국의 심장을 바꾸는 문명사의 대전환을 일으켰다. 사도적 교회, 즉 초대교회 공동체의 특징은 분명했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통해 영적, 도덕적 기준이 명확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생명력 있는 루틴인 기도와 감사와 섬김이 삶의 구조였다. 그뿐만 아니라 촘촘한 관계 그물망으로 엮어진 따뜻한 공동체가 존재했다. 그리고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는 ‘제자를 낳는 제자’의 증식 구조가 있었다. 모두가 사역자였다.
마지막으로 그 공동체는 빈곤의 세습을 막는 희년적 경제 질서를 실천하고 있었다. 이웃 사랑과 형제 사랑이 눈에 보이는 사회 구조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그들은 세상이 가지지 못한 가장 강력한 무기, 곧 하나님의 임재와 충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 라이프스타일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도성’이라는 독특한 정체성
사도(apostolos)는 ‘보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소비자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파송된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다. 그 공동체의 중심에는 ‘사도성(apostolicity)’이라는 독특한 DNA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도시로, 마침내 국경을 넘어 세계로 끝없이 침투하고 확산되었다. 신약교회의 본질인 사도적 역동성이 잠자는 영혼을 깨우고, 단기간 최대 속도로 문명의 대각성을 일으켰다. 당시 로마제국은 무너지고 있었고 새로운 윤리적 기초와 고상한 삶의 기준을 갈망하고 있었다. 바로 그 틈새를 사도적 교회가 치고 들어갔다.
성경은 공동체의 원형을 이미 보여준다. 창세기에는 가정이 있고 출애굽기에는 제사장 나라가 있다. 그러나 가정도 무너졌고 국가도 실패했다. 그때 주님은 인류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셨다. 그 이름은 교회였다. 그리고 주님은 조용하지만 우주를 뒤흔드는 선언을 하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여기서 ‘권세’는 헬라어로 퓔라이, 곧 성문이다. 고대 세계에서 성문은 도시의 권력이 집중된 자리였고 최후 방어선이었다.
성문은 공격하지 않는다. 성문은 버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명확하다. ‘교회는 방어하는 존재가 아니다. 교회는 돌파하는 존재다.’ 그리고 ‘이기지 못하리라’의 헬라어 카티스퀴오는 단순한 승패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눌러버리다’ ‘제압하다’ ‘압도하다’ 즉 버티려는 모든 어둠의 구조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생존 선언이 아니다. 돌파 선언이요 승리의 선포다. 어둠은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빛이 들어오는 순간 어둠은 저항하지 못한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왜 오늘의 교회는 이 압도적인 공격력을 사용하지 않는가. 왜 성령의 검을 들고도 휘두르지 못하는가. 왜 돌파해야 할 존재가 오히려 버티는 존재가 되어버렸는가.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사탄의 공격이 심하다” “어둠의 세력에 묶여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진실은 그 반대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어둠이 무너져야 한다. 빛은 어둠과 싸우지 않는다. 빛은 그저 비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진하는 공동체다. 침투하는 공동체다.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공동체다.
문명을 바꾸는 하나님의 방식
교회의 본질은 ‘사도성’이고 사도는 직분이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사도성은 역사를 통해 반복해서 증명된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한 달 전 방문했던 몰타라는 국가는 사도행전 28장에서 언급한 ‘멜리데’라는 지중해의 섬나라이다. 인구 60만의 가톨릭 국가로 여기에는 유명한 ‘성 바울 난파교회’가 있다.
당시 사도 바울은 자유로운 선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던 길 에 있었다. 그 여정 속에서 배는 난파되었고 그는 몰타섬에 이르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병자들이 치유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고 복음은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퍼져 나갔다. 그 열매로 인해 놀랍게도 몰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복음화된 국가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사도성이 한 지역의 영적 구조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성 패트릭은 노예로 끌려간 사람이었다. 그에게 아일랜드는 고통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땅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자유인이 된 후 놀랍게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를 아프게 했던 땅으로 말이다. 그는 복수 대신 복음을 선택했다. 그는 두려움 대신 순종을 택했고 상처 대신 사랑을 택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는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 땅은 당시 유럽을 깨우는 복음의 중심지가 되었다.
존 녹스는 한 나라를 품은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을 쏟아냈다. “주여,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그의 삶 전체가 그 기도의 연장이었다. 그는 타협하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향해 물러서지 않았다. 그 기도는 결국 한 나라를 흔들었고 스코틀랜드는 하나님 말씀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지난 4일 영국 런던에서 송기호 목사의 전도를 받아 전도자로 변화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있다. 황성주 이사장 제공
한 사람의 사역이 도시를 흔드는 대표적인 사례는 영국 런던의 송기호 목사이다. 그는 순교적 각오로 브릭스턴과 도심 거리, 그리고 교도소와 같은 거칠고 어두운 현장 속으로 들어가 20년 넘게 노숙인과 중독자, 전과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 왔다. 폭행과 위협, 사역의 제재와 같은 고난이 반복되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복음의 능력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회가 이미 포기했던 사람들이 복음을 통해 변화되어 다시 일어서고, 예배자와 증인으로 살아가는 엄청난 열매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결국 사도성은 특정 시대나 인물에 갇힌 개념이 아니라, 언제나 가장 어두운 자리로 들어가 생명을 일으키고 사람과 구조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방식임을 보여준다.
문명이 잃어버린 마지막 희망
현대 문명은 놀라운 성취와 깊은 공허가 공존하는 시대다.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현대인은 하나님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설명 가능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찰스 테일러는 이를 “내재적 틀”이라 불렀다. 그러나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가와 명상, 영성 탐구와 자기계발이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잃어버린 초월을 더듬듯 찾아 나선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 설명할 수 없지만 삶을 지탱하는 근원을 향해 인간은 끊임없이 손을 뻗는다.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사상이 아니라 사건으로 응답한다.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만들어낸 폭력의 구조와 인간 존재 깊숙이 자리한 죄성을 완전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부활을 통해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가 등장했다. 에클레시아. 이 공동체는 새로운 존재 방식이었고 새로운 관계의 질서였다. 그리고 무너진 문명의 토대를 다시 세우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낯선 이를 환대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식탁을 나누었다. 어떤 상황에도 절대 감사하며 기쁨으로 충만했다. 이 작은 공동체의 네트워크가 결국 로마 문명을 변화시켰다.
물론 교회는 인류 역사에 엄청난 공헌을 했다. 언제나 영성의 샘터였고 병원 대학 자선 인권 교육 등 그 중심에는 언제나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세속과 결탁했고 제도화되었으며, 생명보다 조직을 우선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Jesus Yes! Church No!).”
이 외침 앞에서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문제는 사도행전적 공동체인가. 아니면 본질에서 멀어진 제도적 교회인가. 현대 문명은 네트워크 문명이다. 흥미롭게도 초대교회 역시 관계 중심 확산이라는 완벽한 네트워크 구조였다. 이는 오늘날의 스타트업, 오픈소스, 디지털 커뮤니티 등 첨단 비즈니스 구조와 유사하다. 즉 사도적 교회는 현대 문명에 가장 적합한 구조다.
사실 Z세대는 종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위선적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진정성과 공동체, 의미를 갈망한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DNA였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시스템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다. 성경은 교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엡 1:23) 여기서 ‘충만(플레로마)’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역동적 생명이 사람을 통해 공동체다. 그리고 세상으로 흘러가는 살아있는 흐름이다.
교회는 단순히 충만을 받는 그릇이 아니라 그 충만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존재다. 그 충만은 빛으로 사랑으로 생명으로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AI 디지털 시대의 전환점에서 인류는 다시 공동체를 찾고 있다. 문명이 잃어버렸던 그 공동체, 보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 인류는 다시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충만의 공동체, 사도적 교회는 무너진 문명을 다시 세우는 하나님의 마지막 전략이요 히든카드다.
황성주 / 글로벌문화재단 이사장·사랑의병원 원장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74402281&code=23111111&sid1=ch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