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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회 숲과 문화 1박2일 지리산 산청 (2020.10.20~21.)
◎ 동양고전 숲과 문화반 1박 2일 신청 답사일정
1. 참석자 명단 총 17명 (교수님, 권영호님, 주동일님, 정권수님, 주경숙, 박건애님. 조성자님, 백영란님, 윤채영님, 신숙자님, 김덕경님, 홍화선님. 박영자님, 박귀련님, 박명희님, 박순남님, 염해송님)
2. 일시 :2020.10.20.-21(1박 2일)
3. 장소: 남명조식 기념관 및 산청 일대(겁외사, 남사예담촌, 조식기념관, 대원사, 동의보감촌, 구형왕릉, 수선사)
4. 일정 첫째날1) 출발 장소: 설화 명곡역 8시 출발2) 10:00 목화 시배지(단성면 목화로) 및 겁외사(산청군 단성면 성철로 125) 3) 11:00 남사예담촌(단성면 남사리 지리산 대로) 관람
4) 12;00 권영호 산행대장 감농원 탐방4) 12:00 점심 식사 5) 13:50 한국선비문화연구원(남명 기념관) 도착6) 14:00 남명 조식 선생님 일대기 강의(연구원장 최구식 전의원)7) 15:30 대원사 견학8) 18:00 저녁 식사9) 20:00 권영호님(산청 소개) 주동일(산청 남명 선비 문화원을 찾아서)10) 22:00 취침둘째날1) 6:30 덕천서원
2) 8:00 조식3) 9:00 동의보감촌(산청군 금서면 특리)4) 11:30 구형왕릉(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5) 13:00 점심6) 14:30 수선사(산청군 산청읍 웅석봉로)7) 15:30 출발-17:00 대구도작
84회 숲과 문화반 답사 일정 안내 지도
2020. 10. 20. 화요일 맑음 숲과문화 1박2일 산청 남명 조식선생 덕천서원
예정된 시간대로 설화명곡 지하철 1호선 도로변에 모여 8시 출발하였다. 총 참석인원은 17명 권영호, 주경숙, 주동일, 정권수님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각각 나누어 타고 산청 단성면으로 출발하였다. 전형적인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이 펼쳐진 좋은 날씨였다. 고령을 거쳐 3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지리산 휴게소 삼거리에서 20번 국도를 달려 산청군 단성면에 도착하니 단성 IC 바로 옆에 목화시배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다들 마스크를 하고 전시장에 들어가 현지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나와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어서 성철 스님을 모시고 있는 겁외사로 출발하였다.
문익점 선생은 고려 말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씨 10개를 가져와 산청에 심고 그중 한 개가 싹이 터서 목화를 널리 심게 하여 우리나라의 의복 혁명을 이룩했다. 기념관의 규모도 상당하고 목화도 재배하는 시범도 보여주고 있다. 문익점 기념관을 나와 한 5분 거리에 성철스님의 탄생지에 세워놓은 겁외사가 있다. 들어가는 마당가운데 성철스님의 동상이 서있고 왼쪽에는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다. 안쪽에는 출생 때 가옥이 그대로 남아있다. 경내에는 귀한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백송도 그렇고 황금 소나무도 쉽게 볼 수 없는 나무들이다. 겁외사는 성철스님의 따님이 주지로 있는 사찰이라고 했다.
목화시배지 단체 사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남사예담촌으로 갔다. 경북의 하회마을처럼 고택이 모여 있는 전통마을을 관광지로 꾸며 놓았다. 도로를 건너 산 위에 세워놓은 남학정에 올라 내려 다 보니 오밀조밀 잘 정리가 된 마을이다. 이곳에 오래된 회화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고 古梅로 유명한 매화나무가 있다. 최근에 새로 지은 남학정 마당 한 구석에 2019년에 쓴 대리석 시판이 놓여 있다.
訪南沙里-2020년 庚子年 暮春 素心 李外任 仙鶴翬飛南鹤亭(선학휘비남학정) 학이 나는 듯 웅장하고 아름다운 남학정과 예담촌은
國中最美掛書銘(국중최미괘서명) 온 나라에 으뜸이라 새겨있네
俯看泗水如襟帶(부간사수여금대) 사수를 굽어보니 산천 두른 요해지 같고
遙見尼山似畫屏(요견니산사화병) 니구산 바라보니 그림병풍 둘렀구나 韻致穩全神秘感(운치온전신비감) 운치는 온전히 신비로움 느껴지고
風光華麗士筇停(풍광화려사공정) 풍광도 화려하여 선비들 발걸음 머무네. 槐花幸福招來處(괴화행복초래처) 행복을 부른다는 회화나무 전설 속에
勝地名聲萬歲青(승지명성만세청) 승지의 명성이 만세토록 푸르리라
남사리의 앞산을 니구산(尼丘山)이라 하고 산 밑으로 흐르는 하천을 사수(泗水)라 하여 공자의 고향을 생각게 하였다. 내려와 동네 문을 열어놓은 고택을 돌아보았다. 고택 입구에 회화나무 두 나무가 사이좋게 꼬여 있는 것을 보고 사랑나무라 하여 이곳에서 TV드라마도 촬영 한 곳이라 한다. 회원들도 이 사랑나무 앞에서 추억을 남겼다. 350년쯤 나이가 먹었다고 한다. 마을 주변에 탐스럽게 열린 감나무 밭을지나 사수(泗水) 다리를 건너가면 산비탈에 붙어있는 이사재(尼泗齋)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여 합천으로 가는 도중 1597년 6월 1일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다는 행로 표석이 있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328호 이사재에 올랐다. 이사재(尼泗齋)는 조선 전기 토포사(討捕使, 각 진영에서 도둑을 잡는 벼슬)의 종사관으로 임꺽정 난 진압에 공을 세우고 대사헌, 호조판서를 지낸 송월당 박호원(松月堂 朴好元:1527~?) 재실이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 거유문(居由門)을 들어가면 尼泗齊 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이 보인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2m가 넘는 차나무가 하얀 꽃을 활짝 피워 차 향기를 풍기고 있다. 우리나라 남쪽 지역에서만 자생하든 차나무가 지구 온난화 때문에 지금은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 등암리 차밭에서 ‘강령은정차’가 생산되고 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북측에서 남측 방문자들에게 선물로 받아온 바 있다. 이사재에서 사수를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덕산 조식선생의 사당으로 향했다.
남학정에서 남사예담촌을 내려다 보면서 부부회화나무
선비총 입구에 앉아서 이사재
권영호 대장 감나무 밭 풍성하게 잘 달린 고종시
가는 도중에 권영호 선생의 천여 평에 이른다는 감나무밭(단성면 자양리 535-1)을 구경하였다. 고종시라는 감나무 품종으로 고종에게 진상한 감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청도 반시 못지않게 유명한 곶감을 만드는 감이라고 한다. 홍시를 찾으러 사람들이 들락거렸으나 홍시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홍시는 벌레가 먹거나 새들이 쪼아 상처가 난 감이 홍시가 되는데 홍시가 거의 없는 것은 그 만큼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증거다. 감나무 키도 낮게 잘라놓아 감도 따기 좋게 잘 재배하고 있는 감나무 밭이었다. 그래도 눈 좋은 사람들이 홍시를 두서너 개 찾아 맛을 보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점심 ‘열매랑 뿌리랑’ 식당 선비촌 특강 단체사진
덕산 한국선비문화원 옆에 있는 ‘열매랑 뿌리랑’이라는 한식 나물부페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바로 곁에 있는 한국선비문화연구원으로 갔다. 남명 조식선생에 대해 전 국회의원 최구식 원장이 직접 나와 특강을 해주었다. 산청 덕산이 자기 고향이라고 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이곳 진주에서 2선 국회의원을 하였다고 했다. 차분하게 재미있게 특강을 해주었다.
남명 조식(1501~1572) 퇴계 이황(1501~1570) 문정왕후 윤씨(1501~1565) 동갑이다.
- 조식은 述而不作 信而好古<공자> 程朱以後 不必著述<남명> -
浴川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에 쌓인 사 십년 간의 허물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남명 생존 시는 조선의 암흑기라 할 연산군-중종-명종-선조 시대다. 4대사화((무오, 갑자, 기묘, 명종 ‘등극기념’ 을사사화)로 선비들 떼죽음을 당함 시기로, 명종 어머니 문정왕후의 폭정, 윤원형과 정난정, 숱한 간신들이 횡행한 시절임.
양재역 벽서사건(1547) 『女主執政于上(녀주집정우상), 奸臣李己等弄權于下(간신리기등롱권우하), 國之將亡可立面待(국지장망가립면대), 不寒心哉(불한심재)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칼럼, 을묘사직소, 혹은 단성소(1555) :國事已非 邦本已亡(국사이비방본이망)天意已去 人心已離(천의이거인심이리)慈殿塞淵, 不過深宫之一寡婦(자전새연, 불과심궁지일과부)殿下动冲只是先王之一班詞(전하동충지시선왕지일반사). 문정황후를 일개 아녀자로 칭함.
마지막 상소(1571)
공손히 한 말씀 아뢰어 남다른 은택에 보답하려 한다.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글러 한가닥도 손댈 곳이 없다. 신이 두 번이나 글을 올려 말씀드린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전하께서 기강을 세웠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왕이 비답하기를 “초야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잊지 않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사한 물품은 보잘 것 없는 것이니 사례할 것이 뭐 있겠다. 그대는 사례하지 말지어다."(선조실록)
거인의 황혼 산천재 시대(1561~1572) 위대한 스승과 제자 덕산에서 노닐다.
천하 길지를 찾아 지리산 12번을 오르다. 환갑에 무릉도원을 찾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보니/
도화뜬 맑은 물에 상영조차 잠겼으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남명 제자중 임난 3대 의병장은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으로
지리산이 보이는 길지를 찾아 1581년 산천재를 개교 하였다.
대원사 대웅전 대원사 다리 위 영남차실
특강이 끝나고 대원사로 향했다. 대원사는 비구니 승들이 있는 사찰이다. 길고 긴 깨끗한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고 이제 막 단풍이 시작하려는 산사는 조용하고 정녕 서러웠다. 대웅전 옆에는 스님이 되기 전에 이곳에서 공부하는 한 젊은이를 보고 주지스님이 해인사로 추천하여 성철 큰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넓은 마당 계단 위에 있는 대웅전, 서산에 해가 지는 산 계곡의 그림자, 가을빛이 물든 산속의 나무 색깔, 이 모든 것들이 보는 이의 마음근심을 단숨에 날려 보냈다. 대원사에서 암자로 건너가는 계곡 위에 놓인 다리에서 찻 자리를 펴고 차를 마셨다. 영남차회원으로 같이 온 분들이 만들어준 멋진 찻자리였다. 만추의 대원사에서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다.
선비촌 숙사에서 짐을 풀고 덕천강가에 있는 ‘조은날식당’에서 맛있는 산채요리정식을 그리고 맛좋다고 이름난 덕천 막걸리도 한 잔씩 걸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작은 마을이지만 중산리 계곡에서 내려온 시천과 대원사 계곡의 덕천 합수지점에 밤 등불 빛이 아름다웠다.
대원사에서 하산 주동일 선생 특강 “남명의 시”
이제 저녁 시간 동안 우리에게 귀한 이야길 들을 시간이다. 말씀은 이번 여행을 주관하고 추진해온 이곳 산청 출신 권영호 산행대장의 산청이야기와 조식선생 시에 대한 주동일 선생의 특강이 있었다.
주동일 선생 특강
(산청 남명 선비 문화원을 찾아서)
1. 남명 조식 선생(1501~1572) : 본관 창녕 . 조선 중기 도학자. 字는 건중楗仲, 시호는 문정文貞.
2.사상:敬(內明者敬)과 의義(外斷者義)를 기반으로 실천 궁행躬行을 역설함.
(성성자 惺惺子와 경의검敬義劍 몸에 지니고 다님.)
3. 생애 : 합천 삼가에서 출생 주자 정자를 사숙했으며 평생 벼슬(과거 응시 1회, 후 유 일遺逸-조선시대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로 추대 받음) 않고,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여 오건(吳健), 김우옹(金宇顒), 정거(鄭渠), 곽재우(郭再 祐), 정인홍(鄭仁弘) 등을 배출함. 만년에 산천재 은거함. 덕천서원에 배향.
4. 문학과 시 가. 生也亦我也, 不可得而取也, 二者不可得兼, 捨生而取義者也. <孟子> 나. 日常教學者云人遊於通道大市之中 金銀珍玩靡所不設終日上下街衢而談其價 終非 自家理物只是他家事, 却不如用否一定布取一尾魚來也。今之學者 高談性理而無得 於己 何以異此。<海東綾小學>
다. 座右銘(좌우명) :
庸信庸謹(용신용근) 언행을 신의 있게 하고 삼가며, 閑邪存誠(한사존성) 사악함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라. 岳立淵沖(막립연충) 산처럼 우뚝하고 못처럼 깊으면, 燁燁春榮(엽엽춘영) 움 돋는 봄날처럼 빛나고 빛나리라
라. 욕천(浴川) 냇가에 목욕하며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에 쌓인 사 십년 간의 허물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마. <德山卜居> 덕산에 살 곳을 잡고서
春山底處无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느곳엔 들 방초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다만 하늘나라 가까운 천왕봉 사랑해서라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백수로 돌아와서 무얼 먹을 건가?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 맑은 물을 내 언제 다 마실까?
바. 偶吟(우음) - 문득 짓다.
高山如大柱(고산여대주) : 큰 기둥 같은 높은 산이
撑却一邊天(탱각일변천) : 하늘 한 쪽을 버티고 섰다.
頃刻未嘗下(경각미상하) : 잠시도 낮춘 적 없는데도
亦非不自然(역비부자연) : 자연스럽지 않음이 없도다.
사. <題德山溪亭柱> 덕산 계곡 정자 기둥에 지어 붙이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여보게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큰 힘 주어 두들지 않으면 참 소리 듣지 못하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정녕 두류산을 닮으려나,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申欽의 靑窓軟談에는 제목이 천왕봉, 轉句가 萬古天王峯으로 되어 있음.
아. 斷俗寺政堂梅(단속사정당매) - 단속사 정당매
寺破僧羸山不古(사파승리산불고): 절은 부서지고종은파리하며 산도예와 다른데
前王自是未堪家(전왕자시미감가): 전 왕은 스스로 집안 단속 잘하지 못했네.
化工正誤寒梅事(화공정오한매사): 조물주는 정녕 추위속 매화의 일 그르쳤나니
昨日開花今日花(작일개화금일화): 어제도 꽃 피우고 오늘도 꽃 피운다네
*남사마을 元正梅, 단속사지 政堂梅, 산천재 南冥梅를 산청 三梅라함.
특강이 끝나고 온돌방 2개 그리고 침대 방 하나가 배정되었다. 17명 중 4명의 남자들은 침대 방에서 그리고 여자회원들은 온돌방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2020. 10. 21. 수요일 흐림
오전 6시30분 일찍 일어나 덕천서원으로 향했다. 덕천서원 앞에 중산리에서 흘러내린 시천과 대원사 계곡에서 흘러온 덕천강이 합수하는 지점에 있다.
덕천서원 덕천서원 앞 마당에 차나무
덕천서원 은행나무 수령 435년 나무둘레 4.6m
덕천강 돌다리 선비수련원 대문 앞에서
이 두개의 강이 만나는 곳에 세심정(洗心亭)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넓은 바위 돌에 조식선생의 욕천(浴川)이라는 시가 세겨져있다. 아침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이 시판앞에 서서 이 시를 음미했다. 마지막 구절의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라는 구는 남명 선생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덕천서원은 조식선생이 돌아가신 다음 제자들이 세웠다고 한다. 험한 세월 동안 몇 차례 개보수 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서원 양쪽으로는 동제와 서재가 갖추어져 있다. 이곳을 돌아보고 나와 선비문화수련원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깔끔한 아침 식사는 입맛에 맞아 잘 먹었다.
선비문화연구원이 있는 동쪽 끝 부분에 조식선생의 원래 학생들을 가르치던 산천제가 있다, 산천재 입구에 쓰인 <題德山溪亭>라는 시가 있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여보게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큰 힘주어 두드리지 않으면 참 소리 듣지 못하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정녕 두류산을 닮으려나,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천석들이 종이 바로 지리산을 가리킨다. 그 지리산을 쳐서 울게 하겠다는 그 배포와 기상이 대단하다. 그 제자 중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그렇게 많이 나왔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고 한다. 바로 남명선생의 의지와 뜻이 같이 했다는 것이다.
산천재 남명매
한국선비문화연구소를 떠나 금서면에 있는 동의보감촌을 향해 출발하였다. 동의보감촌은 산청군에서 수천억을 투입하여 만든 관광단지라고 한다. 영남차회 정권수 이사 친구인 문화 해설사 안내를 받아 짧은 시간에 잘 둘러보았다.
동의보감촌 입구 동의전 앞에서
동의보감촌은 소설 동의보감 상하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지고 꾸며 놓은 것 같다. 유의태의 통상과 그리고 동양의 최고의 의사라는 표시판이 붙어 있다. 사실 역사적으로는 유의태와 허준이 만날 수 있는 같은 시기에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동의보감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한 작가 이은성이 지어 만든 non-fiction 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은성의 머릿속에서 나온 스승과 제자의 위상을 잘 만들어 놓은 작품으로 학교 있을 때 애들에게 많이 인용했던 작품이었다. 다니기 쉽게 에스컬레이터도 만들어 놓고 나무덱크길도 잘 만들어 놓았다. 산위에 동의전 아주 큰 건물이 있는 곳까지 가서 그 뒤에 있는 기氣바위 체험을 하러 갔다. 동의전 뒤쪽의 기바위에서 이곳의 기가 매우 강해서 여기 온 사람들이 많은 기를 받고 돌아간다고 했다. 동의보감촌 가장 높은 곳에 풍차를 설치해 놓아 전체 분위기와 매우 어울리지 않은 모양새였다.
이곳을 출발하여 구형왕릉을 찾아갔다. 가야 구형왕이 신라에 망한 것이 532년이라고 하니 신라가 통일하기 직전까지 백제 고구려뿐만 아니라 가야까지 4개국이 같이 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왕릉은 대부분이 흙으로 덮인 큰 구릉 같은 모습이지만 이 왕릉은 어찌 보면 피라미드 같이 돌을 쌓아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모양이 몇 군데 있는데 다들 사찰의 탑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곳은 구형왕릉이라고 했다. 이 왕릉 주변에 키가 아주 큰 대충 2, 3십년 생은 되어 보이는 삼나무가 2그루 자라고 있다. 왕릉과 어울리지 않은 풍광이다. 구형왕릉을 보고 돌아 나와 생초면에 있는 일신 식당에 가서 쏘가리탕을 먹었다. 쏘가리가 귀해서 가격이 비싼 음식이라고 한다.
구형왕릉앞 단체 구형왕릉 석수호상
이제 마지막 코스인 수선사를 향했다. 산청IC근처에 있는 새로 조성된 수선사는 사찰의 분위기 보다는 카페의 분위가가 어울리는 절집이다. 이곳 다락 논을 여러분들에게서 사가지고 수년에 걸쳐 이 절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주지스님을 만났다. 절 입구에는 현대식 커피 집을 지어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잘하고 있었다. 아주 특이한 것은 바로 입구에 세워놓은 건물이 화장실인데 그 안이 안방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다. 신발을 바꿔 신고 들어가서 먼지 하나 없이 반들반들 만들어 놓은 화장실이 보기에 특이했다.
수선사 대웅전 수선사 경내 커피숍
일박이일의 일정을 마치고 산청IC에 올려 2,3십분 가다가 호남(88, 광주대구)고속도로에 올려 거창 고령을 거쳐 대구로 들어왔다. 정권수 선생 자동차를 대구은행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왔다.
산청 왕산 구형왕릉(山淸 王山 山衡王陵) 국가사적 제 214호
구형왕릉은 가라국(駕洛國) 제10대 임금인 양왕(讓王)의 능(陵)이다.국내유일의 피라밋 형 석릉으로 일반 봉토 무덤과는 달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내리는 산기슭 경사면에 크고 작은 암석을 쌓아, 총 일곱단의 층을 이루며 정상부는 타원형이다.전면 중앙에서 부터 높이 1m 높이의 담이 둘러져 왕릉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면 전체의 높이가 13m로 하단 길이 25m이며, 동쪽 4단 중앙에 가로 세로 40cm, 깊이 60cm의 석문이 마련되어 있다. 구형왕릉에 대한 역사기록으로는, 동국여지승람 산청현읍지, 대동지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與勝覽) 등에 있으며, 능의 심릉 사실로는 조선시대 문신 이행(李荇)의 왕산조릉기(王山弔陵記), 승려 탄영(坦瑛)의 왕산사 목함기(木函記), 문인 홍의영(洪義泳)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 등에 그 내용이 남아 있다.
왕릉 주위에 흥무대왕 김유신장군의 ‘시능터(侍陵趾)와 ’사대비(射臺碑)‘가 있고, 주변의 암석에는 장보암(藏譜巖)을 비롯하여 구형왕릉임을 알려주는 각석들이 있으며, 왕산아래 가락국양덕양전에서는 한해 두 차례 왕과 왕후의 음덕을 기리는 춘추대제가 봉행된다.
구형왕(仇衡王 521년 ~ 532년)
가락국 제10대 국왕은 가라국시조김수로대왕(大王)의 10세손으로 가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시다. 가락국 제9대 겸지왕(鉗知王 491년~521년)의 아들로 서기 521년에 가락국 제10대 대왕으로 등극하셨다. 휘는 구형(仇衡) 이시며 존호는 양(讓)으로 계화황후(桂花王后)와 세종, 무력, 무득, 세 아들과 증손으로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과 5대 외손으로 신라 제30대 문대왕(휘:법민)을 두셨다. 서기532년(법흥왕19년) 전쟁의 피해에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신라에 나라를 선양(禪讓)하고 가락 지품천 방장산 속 ‘태왕산’으로 들어 오셨다. 나라를 내어준 까닭에 ‘돌무덤으로 장례를 치르라’ 하신 유언으로 산 아래 경좌의 언덕 석릉에 영면하시게 되었다.
목화시배지 단체 사진
첫댓글 어제 다녀 온 나들이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었네요.
코로나 19가 얼른 물러 가서 이 가을에 다시 가고 싶은 여행이었습니다.
주선하고 준비하신 박용구 교수님 주경숙 반장님 이하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소개 글만 읽어도 공부가 됩니다.
이 코스는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예전에 경북대 정모 교수님이 남명 사상을 강의하시면서 (그때도 답사였습니다.) 남명 사상을 한 글자로 축약하면 '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긴 설명이 있었습니다.
머리가 썩어서 '경 사상'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답사에 가시는 분은 '경 사상'을 질문해 주시고,
여기에 설명을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라고, 일단 이 카페에 들어오시면, '댓글로, '잘 읽었습니다.'라고 무조건 한 줄 달기 운동을 합시다.
댓글을 다신 분은 덮어놓고 동양고전 회원이 되도록 하고요.
그래서, 강의는 없더라도 동양고전을 살려 봅시다.
특히 박교수님은 어린 양들을 잘 인도하여, '잘 읽었습니다.' 운동에 동참시켜 주십시오.
짝꿍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답사기를 쓰시기에 동참한 분들에겐 복습과 추억 살리기가 되고 안 간 사람들에겐 공부가 됩니다.
敬 主一無適